문화재/사적

사적 제330호 서울 효창공원

오늘의 쉼터 2008. 2. 22. 12:15



종     목 사적  제330호
명     칭서울 효창공원 (서울 孝昌公園)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근대인물/ 광복운동
수량/면적 123,307㎡
지 정 일 1989.06.08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효창동,청파동2가및마포구신공덕동,공덕동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용산구

일반설명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이다.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 아들인 문효세자·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숙의 박씨의 자녀인 영온공주의 무덤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면서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김구·이동녕·차이석·이봉창·윤봉길·조성환·안중근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무덤를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이 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지역이 넓고 소나무숲이 울창하며, 무덤 주위로 산책로가 있다.


※(효창공원 → 서울 효창공원)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전문설명


효창공원(孝昌公園)은 본래 조선조 (朝鮮朝)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장자(長子)로 5세에 작고(作故)한 문효세자(文孝世子)(정조6, 1782. 9 ∼동왕(同王)10, 1786. 5, 동년(同年) 윤(閏) 7월장(月葬) )의 묘소(墓所) 즉 효창원 자리인데 그 후(後)이 경내(境內)에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생모(生母)인 의빈성씨(宜嬪成氏)(정조(正祖)10, 1786. 9월장(月葬))와 순조(純祖)의 후궁(後宮)인 숙의박씨(淑儀朴氏)(철종(哲宗)5, 1854. 7월장(月葬)) 및 숙의박씨의 소생(所生) 영온옹주(永溫翁主)(순조(純祖)29, 1829. 5월장(月葬))를 안장(安葬)한 곳이다.

원래 고양군(高陽郡)율목동(栗木洞)이었던 효창원의 경역(境域)은 지금 효창동과 청파동(靑坡洞)일대에 걸치어 심히 넓고 소나무 밤나무 등 수림(樹林)이 울창(鬱蒼)하여 매우 유수(幽邃)한 곳이었는데, 고종(高宗)31년(갑오(甲午)1984) 청일전쟁(靑日戰爭)발발(勃發)직전(直前) 우리나라에 불법(不法)으로 침공(侵攻)한 일군(日軍)의 주력부대(主力部隊)(대도혼성여단 (大島混成旅團))가 지금 효창운동장(孝昌運動場)남단(南端)의 솔밭에 주둔(駐屯)(야영(野營))함으로부터(5월) 그 좋은 경관(景觀)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어 일제(日帝)가 1924년 6월에 효창원(孝昌園)의 일부(一部)를 떼어서 효창공원을 개발(開發)하고, 패망직전(敗亡直前)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이하(文孝世子以下)의 상기(上記) 묘소(墓所)를 모두 서삼릉(西三稜)(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원당읍(元堂邑) 원당리(元堂里)) 경내로 천장(遷葬)함으로써 효창원은 사실상(事實上)종말(終末)을 고(告)하였다.

대망(待望)의 조국광복(祖國光復)과 더불어 환국(還國)한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大韓民國臨時政府主席) 김구(金九)선생(先生)은 그 주도하(主導下)에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봉창(李奉昌)(광무(光武)4, 1900∼1932), 윤봉길(尹奉吉)(융희(隆熙)2, 1908∼1932), 백정기(白貞基)(건양(建陽)1, 1896∼1936)의사(義士)의 유해(遺骸)를 고국(古國)땅으로 모시어 1946년 7월 효창공원의 중심지(中心地)(옛 문효세자 묘터)에 국민장(國民葬)으로 안장(安葬)함과 아울러 안중근(安重根)(고종(高宗)16, 1879∼융희(隆熙)4, 1910)의사의 허(虛)(가(假))묘(墓)를 나란히 모셨다. 이어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殉國)하신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장(議長) 및 주석(主席) 이동녕(李東寧)(고종 6, 1869∼1940)선생과 국무원비서장(國務院秘書長) 차이석(車利錫)(고종 18, 1881∼1945)선생의 유해(遺骸)와 군무부장(軍務部長)을 역임(歷任)하고 환국후(還國後) 서거(逝去)하신 조성환(曺成煥)(고종12, 1875∼1945)선생을 공원 동남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1949년 6월에는 임시정부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고종 13, 1876∼1949)선생이 민족통일의 한(恨)을 품고 흉탄(兇彈)에 쓰러지자 국민장(國民葬)으로 공원 서북쪽 언덕에 모시어 일대(一帶)가 선열묘역(先烈墓域)으로 화(化)하였다. 그러나 특히 김구선생의 묘소(墓所)가 이곳(서울시내)에 위치하고 있음을, 그간 민족통일의 방책(方策)등에서 이견(異見)을 보이던 이승만영도하(李承晩領導下)의 당시 집권세력(執權勢力)에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었고, 그리하여 선열묘소(先烈墓所)를 교외(郊外)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부단(不斷)하였는데, 그 일단(一端)으로 1959년, 봄부터 제 2회 아세아축구대회유치(蹴球大會誘致)를 구실(口實)로 묘소(墓所)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 개설(開設)을 추진(推進)하였다.

이에 독립투사(獨立鬪士) 심산(心山) 김창숙옹(金昌淑翁)등이 중심이 되어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孝昌公園先烈墓所保存會)」가 결성(結成)되고 언론사(言論社)를 비롯한 각계(各界)의 여론(輿論)이 비등(沸騰)하여 묘소이전(墓所移轉)은 보류(保留)되었지만, 효창운동장은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속의 연못 및 섬까지 희생(犧牲)시키고 끝내 1960년에 개설(開設)되었다. 이러는 동안 6·25동란(動亂)으로 인(因)한 자연파손(自然破損)도 있고하여 효창공원, 특히 선열묘소(先烈墓所)일대(一帶)의 훼손(毁損)은 극(極)에 달(達)한 형편이었는데, 5·16혁명이후(革命以後) 또다시 선열묘소의 서오릉(西五陵)(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신도읍(神道邑) 용두리(龍頭里))부근(附近) 이전(移轉)이 추진(推進)되었으나 역시 유족(遺族)과 사회각층(社會各層)의 반대로 보류(保留)되었다.

이같은 경로(經路)를 거쳐 1972년 서울시에서 효창공원 조경사업(造景事業)(묘지진입로 (墓地進入路) 및 석계단설치(石階段設置), 외곽주변정비(外廓周邊整備), 수림조성(樹林造成)등)을 10개년(十個年) 계획(計劃)으로 개시(開始)하는 동시(同時)에 일반인 (一般人)의 공원출입이 금지(禁止)되었으며(이는 1981년 6월 유료개방(有料開放) 때까지 계속), 1977년 7월에는 건설부(建設部)에서 효창공원으로 고시(告示)하였다.

1978년 3월에 이르러 효창공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 (孝昌公園殉國先烈追慕委員會)(발기(發起) 한국전통문화사상연구소장(韓國傳統文化思想硏究所長) 김재홍(金在鴻), 회장 곽상훈(郭尙勳))가 창립되고, 이회 (會)의 주관으로 다음해부터 임시정부수립일(臨時政府樹立日)인 4월 13일을 기(期)해 7위선열합동추모제(7位先烈合同追慕祭)가 매년 거행되게 되었다. 1984년 12월에는 서울시의 협조(協助)로 각 묘소 앞의 묘표석(墓表石)을 신비(新碑)로 개수(改竪)하였다.

1988년 12월부터는 그간 사당건립(祠堂建立)등을 꾸준히 청원(請援)한 효창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孝昌園殉國先烈追慕委員會)의 활동과 이를 적극(積極) 수용(收容)한 국가 최고영도층(最高領導層)의 지원(支援)으로 효창공원정비공사(孝昌公園整備工事)가 정부주도하(政府主導下)에 본격적으로 추진(推進)되어 의열사(義烈祠)(사당(祠堂), 1989년 11월) 및 창열문 (彰烈門)(정문)이 건립되고 묘역확장(墓域擴張)과 정비(整備)가 대충 마무리되게 되었으며 1989년 6월에는 사적(史蹟) 제 330호로 지정되었다. 앞으로 1991년 6월 기한으로 묘역원장개수(墓域垣檣改修), 의열광장조성 (義烈廣場造成)(의열사 (義烈祠) 앞 ) 기념관건립(白凡先生墓所 남쪽)등을 완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선열묘소 외 공원관리소 , 어린이놀이터, 정구장(庭球場)등 편의시설과 북한반공투쟁사위령탑(北韓反共鬪爭士慰靈塔), 원효대사동상(元曉大師銅像), 대한노인회중앙복지회관(大韓老人會中央福祉會館)등이 자리잡고 있다.




효창공원

효창공원

효창공원

효창공원

삼의사묘역(좌-우 안중근의사가묘,이봉창,윤봉길,백정기)

임정요인묘역(좌-우 조성환,이동녕,차이석)

백범 김구 선생 묘 전경

삼의사의 묘

안중근의사 가묘

열사 이봉창 묘

원효대사 상

의사 백정기 묘

의사 윤봉길 묘

이봉창 의사 상 전경

이봉창 의사 상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