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금강가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이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돌을 깨뜨려 도구로 사용하고 사냥이나 물고기잡이, 식물채집을 통해 생활한 문화단계를 말하는데, 인류가 태어나 1만년 전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찍개·긁개·주먹도끼·새기개 등의 석기류가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후기 구석기층의 집자리에서는 숯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연대측정을 한 결과 약 2만 5천년에서 3만년전의 집터임이 확인되어, 당시에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음을 알았고 전후 시기에도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꽃가루를 조사한 결과 이 일대에 소나무·전나무·목련·백합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처음으로 알게해 준 중요한 유적이다.
※(공주석장리구석기유적 → 공주 석장리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전문설명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장암리(북위 37°20′, 동경 127°21′) 금강의 북쪽 강둑에 자리하고 있다. 1964년 5월 14일과 21일, 두 차례에 걸쳐 구석기유물을 찾음으로써 알려지게 된 이 유적은 앞서 1963년에 찾아진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구석기유적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자취를 처음으로 알려준 중요한 유적이다.
1964년 11월부터 1974년까지 10차에 걸쳐 해마다 발굴을 하였고 1990년 3월에 유적 범위확인을 위해 11차 발굴을 하였다. 바닥 암반에 이르기까지 자연층위와 문화층의 관계를 뚜렷이 밝힐 수 있게 되었고, 1990년 10월 31일 사적 제334호로 지정되었다. 11차에 걸친 그 동안의 발굴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유적의 층위는 모두 27∼29층의 자연층위로 나뉘어지는데, 크게는 3개의 큰 묶음으로 이루어져 아래로부터 Ⅰ묶음(깊이 720∼850cm)층은 제3빙하기(12∼30만년사이), Ⅱ묶음(깊이 450∼720cm)층은 제3간빙기(7∼12만년사이), Ⅲ묶음(깊이 40∼450cm)층은 제4빙하기(1∼7만년사이)에 각각 쌓인 것으로 나타났다. Ⅲ묶음의 쌓임층에서는 17,800년, 20,000∼25,000년쯤에 있던 매우 추운 기후아래서 생긴 서릿발 갈림(Ice wedge)이 나타난다. 자연층위의 묶음 지층은 각기 Ⅰ묶음이 전기구석기, Ⅱ묶음이 중기구석기, Ⅲ묶음이 후기구석기 문화에 해당하며, Ⅲ묶음 위층에서는 좀석기를 주로 하는 중석기 문화층이 드러났다.
Ⅰ묶음층에서는 찍개, 주먹대패. 긁개 등 차돌 석기들이 나왔다. Ⅱ묶음층에서는 주먹대패, 긁개, 찍개, 자르개, 주먹도끼, 팔매돌의 석기와 석기 만들던 공방터가 드러났고, 여러 작은층으로 나뉘어져 석기수법의 발달을 보여준다. Ⅲ묶음층에서는 한데 집터가 찾아졌고 사람머리털, 새겨진 돌이 나와 후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살림과 생활모습을 여러 가지로 보여주며 석기는 차돌, 반암, 규장암, 수정, 흑요석 등으로 만든 돌날, 돌날 몸돌, 밀개, 새기개, 찌르개 들의 석기가 나와 각 시기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적이다.
공주석장리구석기유적 석기출토상태 공주석장리구석기유적 공주석장구석기유적 석장리 유적 막집 모형1호 석장리 유적 전경 석장리유적 발굴 유물들1 석장리유적 발굴 유물들2 석장리유적 발굴 유물들3 석장리유적 첫 발굴지 기념비 석장리유적 첫 발굴지 석장리유적지 전경 움집 복원모형 유적 입구 전시관 내부1 전시관 내부2 전시관 내부3 전시관 내부4 전시관 입구 유물모형 전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