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328호 경주 용강동 고분

오늘의 쉼터 2008. 2. 22. 11:43



종     목 사적  제328호
명     칭경주용강동고분(慶州龍江洞古墳)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봉토묘
수량/면적 1,808㎡
지 정 일 1989.01.14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용강동 1130-2외
시     대통일신라
소 유 자경주시
관 리 자경주시

일반설명

경주 용강동 밭 가운데에 있는 고분으로, 198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발굴하여 무덤의 성격을 파악하였다.

내부는 돌방(석실)을 갖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도굴에 의해 피해는 입었지만 각종 토기류와 토용, 청동제십이지상이 발견되었다. 길이 12∼21㎝의 토용은 홀(笏:신하가 아침에 임금에게 문안을 올릴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두 손에 모아쥐던 패)을 가진 문인상과 무인상 및 여인상이 있으며 일부는 붉은색 물감으로 채색되었다.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을 통해 당시 신라의 복식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토용의 출토는 순장제도가 금지된 후 토용을 이용해 무덤에 넣은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청동제 십이지상은 각 상들이 방위에 맞게 배치되어 있는데 당나라 무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무덤 주인과 시대를 확인할 수 없으나, 발견된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신라 진골귀족의 무덤으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내부에서 토용과 청동제 십이지상의 출토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어 신라 무덤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또한 신라와 당나라의 문물 교류 관계와 통일신라 복식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전문설명


[위치(位置)·분포(分布)] 고분(古墳)은 행정구역 상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용강동(龍江洞) 1130-2번지(番地)에 위치(位置)하고 평지(平地) 밭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부분(大部分)의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고분(古墳)이 경주평야(慶州平野)를 둘러싸고 있는 산악(山岳), 즉 남산(南山)·소금강산(小金剛山)·선도산록(仙桃山麓) 등 고지대(高地帶)에 분포(分布)하고 있는 것과 그 위치선정(位置選定)이 대조적(對照的)이다.

[구조형식(構造形式)] 분구(墳丘)는 파괴가 심하여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분구 기저부 서남쪽과 동쪽에서 노출된 외호석(外護石)의 지대석(地臺石)을 기준으로 하여 복원해 본 결과 기저부경 16m, 둘레 약 50m, 높이 3m 이상으로 추정되고 호석은 안팎 2중으로 돌렸다. 안쪽 호석은 큰 포갠돌과 작은 냇돌을 섞어 1∼2단으로 비교적 가지런히 쌓았는데 연도입구(羨道入口) 부분(部分)에서 약 2.8m 너비로 석열(石列)이 끊겼으며 높이는 70cm 안팎, 직경 약 9m이다. 바깥 호석은 안쪽 호석과 3m 사이를 두고 나란히 돌려있는데 분구 기저부 서북쪽 부분은 결실되었고 2/3 정도만 남아있다. 그리고 주변 민가에 산재해 있는 석재들로 미루어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을 갖춘 형태일 것으로 추정된다. 분구(墳丘)의 축성(築成)은 서남부의 동벽에 나타난 토층상태를 보면 모래층 지반 위로 냇돌과 진흙을 섞어 석실외벽(石室外壁)과 외호석(外護石) 사이를 채우고 그 위에 암갈색점토(暗褐色粘土)를 두껍게 덮었으며 이 위부터 점토(粘土)와 사질토(砂質土)를 쌓아 분구(墳丘)를 축성(築成)하였는데 외호석(外護石)과 내호석(內護石) 사이에는 조밀하게 냇돌을 깔았다.

석실(石室)의 구조(構造)는 현실(玄室)과 연도(羨道)로 이루어졌고 현실(玄室)의 평면(平面)은 장방형(長方形)에 가까우며 현실남벽(玄室南壁) 중앙(中央)에 연도(羨道)를 마련한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이다. 현실(玄室)의 크기는 길이(동서) 2.6m, 너비(남북) 2.5m, 높이 2.8m이고 연도(羨道)는 길이 1.5m, 너비 1m, 높이 1.2m이다. 묘실(墓室)은 분구(墳丘)의 중심부(中心部)에 위치(位置)하고 장축(長軸)은 서남향(西南向)이다. 현실(玄室)의 네 벽(壁)은 장방형의 포갠돌을 고르게 이를 맞추어 쌓고 틈 사이에 회를 발라 메웠는데 시상대 높이에서부터 점차 네 벽면(壁面)을 좁혀 궁륭형에 가까운 천장(天障)을 이루게 하고서 판석(板石) 2매(枚)를 덮었다. 현실 바닥에 마련된 장축 동서방향인 장방형 (長方形) 시상대(屍床臺)는 현실 남벽에서 80cm, 동벽에서 35cm 간격을 두고 서벽과 북벽에 붙어 있는데 원래에는 동벽 뿐만 아니라 서벽과도 같은 간격을 두고 축조한 뒤에 서쪽 부분에 냇돌을 채우고 남쪽 측면에 회를 발랐다. 그 구조는 북면을 제외한 면은 바깥 둘레를 편평한 포갠돌로 면을 맞추어 쌓고 그 안에 크고 작은 냇돌을 채워 넣고서 윗면과 측면에 진흙을 두텁게 발라 면을 고른 다음 그 위에 회칠을 하였다. 현실(玄室) 바닥은 모래층 지반 위에 진흙을 덮고 촘촘히 흑색의 자갈을 깔았는데 간간이 조개편들이 섞여 있는 것도 보이며 바닷돌을 깐 것 같다.

연도(羨道)는 포갠돌을 고르게 쌓고 틈 사이에 회를 발라 좌우측 벽을 구축하고 천장(天障)에는 장방형판석(長方形板石) 3매(枚)를 덮었으며 바닥은 진흙과 회를 섞어 단단하게 다졌다. 그리고 연도의 폐쇄는 연도미석(羨道楣石) 앞을 판석(板石) 1매(枚)로 막고 틈 사이에는 작은 돌을 채우고 회를 두껍게 발라 밀폐케 한 다음에 연도입구까지 냇돌과 포갠돌을 차곡차곡 쌓았으며 외부는 작은 자갈에 진흙과 회를 섞어 단단히 다져 막았다.

[출토유물(出土遺物)] 현실내부(玄室內部)에서 호(壺)·고배(高杯)·합(盒)·완 등 각종 토기류(土器類) 13점(點), 토용(土俑)(문인상(門人像)·무인상(武人像)·여인상(女人像) 등) 28점(點), 토마(土馬) 4점(點), 청동제십이지상(靑桐製十二支像) 7점(點), 석제두침(石製頭枕), 족좌(足座), 견좌(肩座) 등과 피장자(被葬者)의 것으로 추정(推定)되는 치아편과 구슬 등 모두 64점(點)이다. 이러한 출토유물(出土遺物)중 토용(土俑)은 우리나라 복식사연구(服飾史硏究)에 더 없이 귀중한 유물(遺物)이다.

[추정년대(推定年代)] 고분(古墳)의 축조년대(築造年代)는 묘지석(墓誌石)이나 이를 밝힐 수 있는 기록(記錄)이 없어 정확한 년대(年代)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십이지(新羅十二支)의 발생(發生), 인물토용(人物土俑)의 복식(服飾) 등으로 미루어 7세기(世紀)에서 8세기초(世紀初)에 이르는 시기(時期)로 보고 있다.




경주용강동고분

경주용강동고분

경주용강동고분

경주용강동고분

고분근경

토용,토기등출토상태

토마(시상서남편출토)

토용(시상서남편출토)

청동제십이지상

전경

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