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111)의 무덤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1764)에 공인되었다. 윤관 장군묘 주변에는 후대에 세워진 비석과 석등이 있다.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되었다.
※(윤관장군묘 → 파주 윤관장군묘)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전문설명
이곳은 고려중기(高麗中期)의 명신(名臣)이며 한때 구성(九城)을 축조(築造)한 윤관장군(尹瓘將軍)의 묘역(墓域)이다.
윤관장군(尹瓘將軍)( ?∼예종(睿宗) 6, 1111년(年))의 자(字)는 동현(同玄)이며, 본관(本貫)은 파평(坡平)으로 시조(始祖) 신달(莘達)(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의 4대손(代孫)이다. 문종(文宗) 때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어사대부(御使大夫), 지추밀원사겸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 등에 이르렀고 요(遼)와 송(宋)나라에 사행(使行)하기도 하였다. 숙종(肅宗) 9년(年)(1104) 2월(月)에 이르러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으로 임명(任命)되어 여진(女眞)을 정벌(征伐)하였는데 소기(所期)의 성과(成果)를 달성(達成)하지 못하고 돌아와 별무반(別武班)(신기(神騎) 신보(神步) 경궁(梗弓) 발화(發火) 등 11개(個)의 특수부대(特殊部隊))을 조직(組織)하여 후일(後日)의 여진정벌(女眞征伐)에 대비(對備)하였다.
일찍이 문종대(文宗代)부터 동여진(東女眞)(완안부족(完顔部族))이 세력(勢力)을 증대(增大), 내침(來侵)하였으므로, 거듭 정벌(征伐)하였지만 이 무렵에도 동북방(東北方)에 자주 내침(來侵)하므로 예종(睿宗) 2년(年)(1107) 10월(月)에는 윤관(尹瓘)을 원수(元帥), 오근총(吳近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任命)하여 크게 여진정벌(女眞征伐)을 행(行)하였다. 장군(將軍)은 17만(萬)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4군(軍)으로 편성(編成), 수륙양면(水陸兩面)에서 일대공격(一大攻擊)을 감행(敢行)하여 함흥평야이북(咸興平野以北)의 여진(女眞)의 근거지(根據地) 135개(個) 촌락(村落)을 점령(占領)하고 선춘령(先春嶺)에 이르러 경계(境界)를 삼았다. 각지(各地)에 장수(將帥)를 두어 성(城)을 쌓아 방비(防備)를 엄(嚴)히 하는 한편, 남방(南方)으로부터 백성(百姓)을 대거(大擧) 이주(移住)시켜 다음해 봄에 이르는 동안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 鎭)의 6성(城)과 통태(通泰) 숭녕(崇寧) 진양(眞陽)의 3성(城)을 구축(構築)하고, 4월(月)에 개선(凱旋)하여 추충좌리평융탁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봉(封)해졌다.
그러나 여진(女眞)은 물러서지 않고 곧 9성(城)에 대한 반격(反擊)을 강화(强化)하였으므로 윤관(尹瓘)은 그 해(예종(睿宗) 3, 1108) 7월(月)에 다시 출정(出征)하였지만 익년(翌年)에 걸친 공방(攻防)의 결과(結果)는 여의(如意)치 않았다. 이 같은 정세(情勢)(여건(與件))하(下)에서 여진(女眞)은 다시 북반(北叛)하지 않겠다는 조건(條件)아래 9성(城)의 환부(還附)를 강력(强力)히 요구(要求)하였으므로 고려(高麗)에서는 예종(睿宗) 4년(年)(1109) 7월(月)에 이를 받아들여 9성(城)은 2년만에 되돌아갔다.
회군(回軍)하게된 윤관장군(尹瓘將軍)은 모함(謀陷)하는 자(者)도 있고 하여 패전(敗戰)의 책임(責任)을 지고 공신호(功臣號)와 관작(官爵)을 삭탈(削奪)당하였으나 곧 예종(睿宗)의 배려(配慮)로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의 벼슬이 내려졌다.(예종(睿宗) 5년(年) 12월(月)) 예종(睿宗) 6년(年)(1111년(年)) 5월(月)에 졸(卒)하니 이곳에 안장(安葬)하였고, 처음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나 후일(後日) 문숙(文肅)으로 고쳤으며, 인종(仁宗) 8년(年)(1130)에 예종(睿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고려태조(高麗太祖)를 모시는 숭의전(崇義殿)에 배향(配享)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평생(平生) 책(冊)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장상(將相)이 되어 비록 진중(陣中)에 있으면서도 경서(經書)를 갖고 다녔으니 '호현요선(好賢樂善)'함이 당대(當代)에서 제일(第一)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이곳 윤관묘(尹瓘墓)는 장후(葬後) 약(約) 500년(年)인 임진왜란(壬辰倭亂)(선조(宣祖) 25, 1592∼동왕(同王) 31, 1598) 전후(前後)에는 후손(後孫)들에게도 그 소재(所在)가 확인(確認)되지 않고 봉분(封墳)과 묘역(墓域)이 제대로 유지(維持)되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인조조(仁祖朝)에 영상(領相)을 지낸 심지원가(沈之源家)의 묘소(墓所)가 광해군대(光海君代)부터 지금의 장군산소(將軍山所) 후강(後崗)에 들어서게 되고, 현종(顯宗) 13년(年)(임자(壬子), 1672)에는 심지원(沈之源)의 묘(墓)가 현(現) 묘역(墓域)(곡장(曲墻))의 바로 뒤에 자리잡게 되었다.
약(約) 백년(百年)을 지난 영조(英祖) 23년(年)(정묘(丁卯), 1747)부터 윤장군(尹將軍)의 후손(後孫)들이 현위치(現位置)가 장군(將軍)의 묘소(墓所)임을 주장(主張)하게되고 동왕(同王) 39년(年)(계미(癸未), 1763)에는 윤씨(尹氏)와 심씨(沈氏) 사이에 분쟁(分爭)이 크게 벌어졌다. 익년(翌年)(40년(年) 갑신(甲申), 1764) 5월(月)에 이르러 영조(英祖)는 부근(附近)에서 윤장군구비(尹將軍舊碑)의 잔편(殘片)이 발견(發見)되었다는 보고(報告)를 받고 봉분(封墳)을 새로히 조성(造成)케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함으로써 이후(以後) 윤관묘소(尹瓘墓所)임이 공인(公認)되게 되었다. 2년후(年後)(영조(英祖) 42, 1766)에는 묘전(墓前) 좌측(左側)에 현존(現存)하는 묘비(墓碑)를 세워 산소(山所)를 찾게된 경위(經緯)를 새겨 넣었다.
8·15광복이후(光復以後) 1966년(年)에 신도비(神道碑)(이은상(李殷相) 찬(撰))를 세우고 1969년(年)에는 심씨(沈氏)와 합의하(合意下)에 묘소(墓所) 뒤편에 곡장(曲墻)을 설치(設置)하고 (현재(現在)의 곡장(曲墻)은 1978년에 개축(改築)한 것임) 문관석(文官石) 망두석(望頭石) 양마석(羊馬石) 동자석(童子石) 장명등(長明燈)을 새로이 설치(設置)하여 (상석(床石)은 교체(交替)) 묘역(墓域)의 풍모(風貌)를 일신(一新)케 하였다.
1973년(年) 7월(月)에 경기도(京畿道)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제(第)12호(號)로 지정(指定)되고 1979년(年)에는 사우(祠宇) 여충사(麗忠祠)(장군(將軍)의 영당(影堂))를 묘역(墓域) 좌측(左側)에 신축(新築)하는 한편, 신도비(神道碑)를 현(現) 위치(位置)로 옮기고 주위(周圍) 민가(民家)를 철거(撤去), 묘역(墓域)을 확장(擴張)하여 금일(今日)의 면모(面貌)를 갖추었으며, 1988년(年) 2월(月)에 사적(史蹟) 제(第)323호(號)로 지정(指定)되었다.
이상(以上)과 같으므로 현재(現在) 윤관묘(尹瓘墓)에 설치(設置)된 대부분(大部分)의 시설(施設)은 8·15광복이후(光復以後)의 것이며 봉분(封墳)(고(高)1.5m, 직경(直徑)5.5m)도 영조(英祖) 40년(年)(1764) 이후(以後)에 조성(造成)한 것이다. 다만 묘전(墓前) 좌측(左側)의 묘비(墓碑)가 영조(英祖) 42년(年)(1766) 건립(建立)이고, 묘역우측하단(墓域右側下端)에 있는 교자총비(轎子塚碑)가 철종(哲宗) 12년(年)(1861) 건립(建立)인 바 교자총(轎子塚)은 출정시(出征時)에 윤관장군(尹瓘將軍)이 하사(下賜)받은 교자(轎子)를 사후(死後) 이곳에 부장(附葬)한 것이라 한다.
묘소(墓所)의 좌측(左側) 곡장(曲墻)밖에 있는 큰 비(碑)는 심지원(沈之源)의 신도비(神道碑)이다. 따라서 윤관묘(尹瓘墓) 사적지정(史蹟指定)의 의의(意義)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분묘(墳墓)라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측면(側面)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뛰어난 명신(名臣)이며 명장(名將)인 윤관장군(尹瓘將軍), 그 중에서도 특히 그가 견지(堅持)하고 실행(實行)하였던 북방강토(北方彊土) 수호(守護) 내지 개척(開拓)의 위대(偉大)한 사실(史實)을 오늘날에 되새겨 높이 천양(闡揚) 계승(繼承)하고져 하는데서 추구(追求)되어야 한다.
윤관장군묘 묘근경
신도비 신도비 사당(여충사) 교자총 분수재 윤관장군묘 윤관장군묘 윤관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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