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1,190m의 황석산 정상에서 뻗은 산마루를 따라 골짜기를 감싸며 육십령으로 통하는 요새지에 쌓은 삼국시대 산성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고쳐 쌓았고 임진왜란 때는 큰 전투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성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으로 쌓은 부분으로 되어있고, 문은 동·서·남·북동쪽에 있다. 성 안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엔 성의 둘레가 29,240척(약 8.9㎞)이며, 성 안에는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선조 30년(1597)에 왜군이 침입하자 이원익은 왜군이 쳐들어올 것을 판단해 주민들과 성을 지켰으나 백사림이 도망가자 결국 함락당한 사연이 있는 성이다. 현재도 성 안에는 작은 계곡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기에 전략적으로 가치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전문설명
이 성은 소백산맥< 小白山脈 >을 가로지르는 육십령< 六十嶺 >으로 통하는 관방< 關防 >의 요새지< 要塞地 >에 축조된 삼국시대< 三國時代 >의 고성< 古城 >이다. 고려시대< 高麗時代 >를 거쳐 조선< 朝鮮 > 초기< 初期 >에 수축< 修築 >한 바 있었고,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일어났던 선조< 宣祖 > 때에 커다란 싸움이 있었던 유서 깊은 성터이다. 선조 30년(1597) 왜군이 다시 침입케 되자 체찰사< 體察使 > 이원익< 李元翼 >은 이 성이 호남< 湖南 >과 영남< 嶺南 >을 잇는 요새로 왜군이 반드시 노릴 것으로 판단하고, 인근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방장< 助防將 > 백사림< 白士霖 >이 성을 넘어 도망하자 왜군이 난입< 亂入 >하여 끝까지 싸우던 함양군수< 咸陽郡守 > 조종도< 趙宗道 >와 안음현감< 安陰縣監 > 곽준< 郭俊 >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지금도 당시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피바위가 남아 있다. 돌로 쌓은 성벽은 둘레가 2.5km나 되고, 높이가 3m에 이른다. 성 안에는 작은 계곡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아 전략적 가치가 큰 곳임을 알 수 있다.
황석산성 황석산성 황석산성 동문지 동문지주변석축 서남치 석축단면 황석산성 북문자주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