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 떨어진 바다 밑에 고려청자가 묻혀 있는 곳이다.
1987년 수중고고학 발굴 작업을 통해 상감청자 32점을 비롯해 많은 유물을 건졌다. 이곳에서 나온 청자류들은 약 100여 점에 이르며, 불법으로 흘러 들어간 것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 중 ‘기사(己巳)’라는 글씨가 새겨진 것이 있어 청자의 연대를 밝히는데 큰 도움을 주는데, 기사년을 1269년으로 보는 설과 1329년으로 보는 설이 있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이나 전북 부안군 보안면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배로 운반하던 도중 이 부근에서 배가 난파된 것으로 보인다.
전문설명
충남(忠南) 대천(大川)앞바다에서는 지난 83년경(年頃)부터 고려청자(高麗靑磁) 등 도자기(陶磁器)를 불법인양(不法引揚)하는 도굴사건(盜掘事件)이 잇따라 일어났다. 문화재관리국(文化財管理局)에서는 84,85년도(年度)에 이 해역(海域)에 대하여 응급적(應急的)인 탐색작업(探索作業)을 착수한 바 있었으나 87년 6월에는 해군5150부대(海軍5150部隊) 소속 해난구조대(海難救助隊)의 지원(支援)을 얻어 추정 매장해역(埋葬海域)에 대하여 집중탐색(集中探索)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고려(高麗)시대의 청자상감기사명(靑磁象嵌己巳銘)대접 등 청자(靑磁) 32점과 기타 2점이 인양되었고 매장해역(埋葬海域)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정부(政府)에서는 이 해역에 대한 보호를 위하여 그해 9월에 사적(史蹟) 제321호(第321號)로 '죽도(竹島)앞바다 고려청자매장해역(高麗靑磁埋葬海域)'으로 지정하여 공고하였다. 문화재보호법(文化財保護法)에 의하여 유물매장해역(遺物埋葬海域)이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것은 81년에 신안(新安)앞바다의 '송원대유물매장해역(宋元代遺物埋葬海域)'이 지정된 후로 두번째로 실현된 것이다.
죽도(竹島)는 충남(忠南) 보령군(保寧郡) 주포면(周浦面) 송학리(松鶴里)의 해안(海岸)에 위치한 작은 섬인데 이 섬에서 서서남(西西南)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이 지정해역(指定海域)의 중심부(中心部)가 된다. 즉 북위(北緯) 36° 21′ 43″, 동경(東徑) 126° 29′ 40″을 중심으로 하여 반경(半徑) 1.5km 이내의 해역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그 범위는 약 7.07k㎡에 달하고 있다.
이 일대의 해저상태(海底狀態)는 진흙펄이 아닌 모래, 패각류(貝殼類), 자갈이 혼합된 퇴적층(堆積層)이기 때문에 침몰(沈沒)된 선체(船體)는 해저(海底) 니토층(泥土層) 속으로 침하매몰(沈下埋沒)될 수 없었으며 완전히 부식되어 소멸되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곳에서 인양된 청자류(靑磁類)는 84∼85년에 이미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과 공주·부여박물관(公州·扶餘博物館)에 보관전시중(保管展示中)인 100여(餘)점이 따로 있는데 그 동안에 도굴된 유물을 합하면 그 수량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作品)들에게는 대개가 '기사(己巳)'년의 간지(干支)가 상감(象嵌)되고 있는데 그 제작연대(製作年代)에 대해서는 1269년(문종10년(文宗10年) 기사(己巳))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중요한 유물로서는 청자상감 포유수금문 '기사'명(靑磁象嵌 蒲柳水禽文 '己巳'銘) 대접, 상감국화문 '기사'명 화형(象嵌菊花文 '己巳'銘 花形)전접시, 상감국화당초문 '기사'명(象嵌菊花唐草文 '己巳'銘) 접시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품(上品)에 속하는 상감청자(象嵌靑磁) 이외에 문양(紋樣)이 없는 소문청자(素文靑磁) 대접 등도 발견되었다. 이상과 같은 도자기(陶磁器)들은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또는 전북(全北)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의 고려청자요(高麗靑磁窯) 소재지(所在地)에서 제작되어 선박(船舶)으로 해상운반(海上運搬)하는 도중에 이곳에서 난파(難破)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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