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좌도의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성으로, 조선 태종 17년(1417)에 쌓은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을 이용해 골짜기를 두른 타원형의 성이다.
초기에는, 성벽 위에서 담처럼 생겨 몸을 숨긴 채 총이나 활을 쏘는 시설인 여장을 비롯한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었다. 그 후 세종 때에 이르러 국방력 강화를 위해 성을 보호하고 공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옹성·적대·해자 등 여러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당시 성의 둘레는 3,723척(약 1.2㎞)이고, 높이는 12척(약 3.7m)이며, 성 안에는 우물·도랑·창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영성(營城)이며, 조선시대 성곽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울산병영성 → 울산 경상좌도병영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전문설명
이 성(城)은 조선전기(朝鮮前期)에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慶尙左道兵馬都節制使營)이 자리하였던 곳이다. 동남해안방어(東南海岸防禦)와 밀접히 관련된 곳으로 1397년 태조(太祖) 6년에 진(鎭)이 설치되고 1417년 태종(太宗) 17년에 새로이 성을 쌓고 울산군(蔚山郡)의 치소(治所)도 이곳에 두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의하면 둘레가 3,732척(尺)이고, 성벽 높이는 9척(尺)이었으며, 우물 7군데와 소거(小渠) 2개가 있어 사철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丘陵)을 이용하여 팔자(八字)모양으로 뻗은 곡구(谷口)를 에워싸고 있어 전체의 평면모양이 타원형을 이룬다. 그 후 세종(世宗)·문종대(文宗代)에 이르러 성벽의 방어력을 대대적으로 증강시키는 연해지역(沿海地域)의 방어시설(防禦施設) 정비계획(整備計劃)에 의해 적대(敵臺)·옹성(甕城)·해자(垓字)·여장(女墻)의 시설이 보완되기에 이르렀는데, 15세기 중엽의 상태는 성벽높이는 8척(尺)이고 여장(女墻)높이가 3척(尺)이었다.
적대(敵臺 : 치성(雉城))는 모두 21개(個)가 계획되었으나 18개가 마련되었었다. 이 적대(敵臺)는 최근의 발굴조사에 의하여 길이와 너비가 8m씩의 네모꼴임이 밝혀졌다. 4개의 문(門)에는 모두 옹성(擁城)이 만들어졌으며, 여장(女墻)은 908개였다.
성안에는 우물 11개와 샘 3개가 있었고, 성벽을 따라 돌아가면서 밖으로 해자(垓字)가 파여지고 있었다. 해자(垓字)는 성벽에서 바깥으로 10m쯤 간격을 두고 마련되었으며 폭 8m, 깊이 2m의 규모였다.
이 성터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왜군(倭軍)이 부근에 주둔하면서 왜성(倭城)을 쌓을 때에, 성석(城石)을 거의 이곳에서 가져다가 쌓았으므로 폐허화 되었다. 성의 안팎에 민가(民家)가 조밀하게 들어서면서 성의 남문터는 옹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나, 북문(北門)·동문(東門)·서문(西門)의 옛터는 옹성(擁城)의 흔적을 조금씩이나마 남기고 있다. 군데군데에는 적대(敵臺)의 흔적이 기단부(基壇部)만 남아있고, 해자(垓字)는 메워져서 거의 경작지로 변하였다.
성벽은 바깥에서는 커다란 할석(割石)으로 안쪽으로 경사를 이루며 쌓아 올리고, 성벽 속은 불규칙한 돌덩이를 채우고 있다. 바깥쪽으로는 성벽 아래에 좀더 내밀어서 기단을 마련하여 성벽이 경사로 말미암아 밀려남을 예방하듯 축조하였다. 성벽의 안쪽 경계선도 비교적 커다란 할석으로 마무리하여 내외협축(內外夾築)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조선시대 특유한 읍성축조방식과 동일(同一)한 축조방법에 속한다. 성벽의 폭은 7m이고 안팎의 벽면 사이는 적심석을 채우되 가장자리는 열(列)을 이루어 바깥의 성벽이 무너져도 적심(積心)은 손상되지 않도록 고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전상태(동문지주변) 노출된성벽하부모습(동문지주변,'85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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