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1907년 인왕산에 일본인이 설계한 근대적인 감옥이다.
약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560여 평의 목조건물을 짓고 ‘경성감옥’이라 불렀다. 종로의 감옥에서 500여 명을 데려와 수용하고 광복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과 박해를 하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은 곳이다. 애국인사들이 늘어나자 1912년 일제는 마포구 공덕동에 감옥을 또 지었으며 이곳을 경성감옥이라 하고, 원래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이라 불렀다. 1923년 서대문감옥은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고 1944년에는 2,890명이 수용되었다. 18세 미만의 소녀들과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자, 그리고 무기수까지 수용하였으며, 유관순 열사도 이 곳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1946년 광복 직후에는 경성형무소·서울형무소로 바뀌고,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들이 수용되었다.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1967년에는 서울구치소로 바뀌었고,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와 같은 정치적 변동으로 인해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옮겼고, 88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김구선생·강우규·유관순 열사 등이 이곳에 수감되었었다.
일제시대엔 민족독립의 역사를 지니며 그후로는 민주화와 정치적 변화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서 후손들에게 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일깨워주는 산 교육장으로 매우 뜻깊은 곳이다.
전문설명
구< 舊 >서울구치소< 拘置所 >는 일본강점기< 日本强占期 > 때의 민족독립운동역사< 民族獨立運動歷史 > 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民主化運動 >, 정치적격변< 政治的激變 > 등 우리나라 광복< 光復 > 40여년의 사회사< 社會史 >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국권< 國權 >을 강탈한 일본제국주의< 日本帝國主義 >는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하여 융희< 隆熙 >원년(1907), 인왕산< 仁旺山 > 기슭 이곳에 '근대적< 近代的 > 감옥< 監獄 >'을 건축하였다. 일본인< 日本人 >에게 설계를 맡겨 500여명의 기결수< 旣決囚 >를 수용할 수 있는 560여평< 坪 >의 목조건물< 木造建物 >을 짓고, 경성감옥< 京城監獄 >이라 칭했다. 이에 따라 500년간 종로< 鐘路 >의 전옥서< 典獄署 > 감옥에 수감< 收監 >되어 있던 기결수< 旣決囚 >를 옮겨 왔다. 이로부터 1945년 광복< 光復 >을 맞을 때까지 이 감옥< 監獄 >은 일본제국주의< 日本帝國主義 >가 항일애국인사< 抗日愛國人士 >들을 감금< 監禁 >하고, 모진 고문< 拷問 >과 박해< 迫害 >를 가< 加 >한 외에 처형< 處刑 >을 일삼은 식민통치< 植民統治 >의 상징이었다. 한일합방< 韓日合邦 >을 강제로 체결한 일본제국주의< 日本帝國主義 >는 늘어나는 항일애국인사< 抗日愛國人士 >들을 모두 수감< 收監 >하기 어렵게 되자, 1912년에 일본< 日本 >의 감옥법< 監獄法 >을 도입하는 한편 현재 마포구 공덕동에 감옥< 監獄 >을 새로 지어놓고 경성감옥< 京城監獄 >이라 칭함으로써 이곳을 서대문감옥< 西大門監獄 >이라고 고쳤다. 서대문감옥< 西大門監獄 >은 1918년부터 형무관< 刑務官 >을 양성하는 곳도 겸하게 되었으며 1923년 5월에는 서대문형무소< 西大門刑務所 >로 바뀌었다. 서대문형무소< 西大門刑務所 >는 1935년에 미결수< 未決囚 >를 구금< 拘禁 >하는 구치감< 拘置監 >시설을 갖춤으로써 광복 직전인 1944년에는 2,890명이 수용< 收容 >되어 있었다. 일제< 日帝 >때 이 곳은 여느 감옥< 監獄 >과는 달리 우리나라 18세 미만의 소녀수< 少女囚 >가 모두 수감< 收監 >되어 있었으므로 3·1운동< 運動 >때 유관순열사< 柳寬順烈士 >도 구금< 拘禁 >되어 악형< 惡刑 >에 시달린 끝에 순국< 殉國 >하였고, 전국이 10년 이상이나 무기형< 無期刑 >을 언도< 言渡 >받은 기결수< 旣決囚 >가 수감< 收監 >되어 있었던 것이 특색이었다. 특히 1919년 3·1운동< 運動 > 때에는 33인의 민족대표< 民族代表 >를 위시하여 수많은 애국시민< 愛國市民 >, 학생< 學生 >들을 투옥함에 따라 수용시설< 收容施設 >을 초과해서 수감< 收監 >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 1946년에는 서대문형무소< 西大門刑務所 >가 경성형무소< 京城刑務所 >, 서울형무소< 刑務所 >로 바뀌었는데 이 시기에는 반민족행위자< 反民族行爲者 >와 친일세력< 親日勢力 >들이 대거 수용< 收容 >되었다.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 矯導所 >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에 7월에 서울구치소< 拘置所 >로 되었다. 이 당시에는 4·19, 5·16 등 정치적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시국사범< 時局事犯 >들이 수감< 收監 >되기도 했다. 한편 도시< 都市 >의 발달에 따라 서울구치소< 拘置所 >의 위치가 부적합< 不適合 >하여 1986년에 이전 계획을 수립하고 1987년 11월 15일에 경기도< 京畿道 > 의왕시< 儀旺市 >로 옮겼다. 이어서 1988년에 이곳이 사적지< 史蹟地 >로 지정되면서 김구선생< 金九先生 >, 강우규< 姜宇奎 >·유관순열사< 柳寬順烈士 > 등이 옥고< 獄苦 >를 치른 제10, 11, 12사< 第10, 11, 12舍 >의 감옥< 監獄 >건물과 사형장< 死刑場 > 등을 보존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후손< 後孫 >들에게 민족< 民族 >의 자존< 自尊 >과 자주정신< 自主精神 >을 일깨워주는 산 교육장< 敎育長 >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문화재청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문화재청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문화재청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시구문)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격벽장 담장과 사형장 망루 망루와 담장1 망루와 담장2 망루와 입구
보안과 청사 사형장 통곡의 미루나무 사형장 여옥사 내부1 여옥사 내부2 여옥사 부지 창고부지 내 유물발굴 여옥사 측면 여옥사 옥사 2층 강당 옥사 2층 옥사 계단 옥사 내부1 옥사 내부2 옥사 내부3 유관순 열사 전경 제5사상 제5사하 중앙사 내부1 중앙사 내부2 중앙사 전경 중앙사 출입문 추모비 한센병사 전경 한센병사 출입구 한센병사동 형무소 건축물 부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