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성벽을 쌓고, 나무 울타리로 목책을 세웠던 흔적도 확인되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문터와 집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고,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백제의 도성인 위례성이라는 견해와 방어용 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있는 곳이다.
전문설명
백제(百濟)가 한강(漢江)유역에서 건국(建國)·발전(發展)했던 때의 대표적(代表的)인 토성(土城)이다.
북쪽으로 강변(江邊)의 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이 평지강안(平地江岸)에 판축(版築)된 것과는 달리, 이 토성(土城)은 해발 45m내외(內外)의 자연구릉(自然丘陵)을 이용(利用)하여 축조된 것에서 경주(慶州)의 월성(月城)이나 대구(大邱)의 달성(達城)과 같은 초기(初期)의 유형을 가지고 있다. 성안은 다시 낮은 안부(鞍部)를 낀 구릉이 있어서 낮은 지역은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되며 동북쪽으로 이어진 구릉에 작은 외성(外城)이 있다고 추측되고 있다.
성(城)의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通路)는 9개가 있는데 이들이 옛부터 문(門)터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서북쪽은 북동문터로 자연적인 배수(排水)가 되고, 남문(南門)·동문(東門)도 배수(排水)가 되는 곳이다.
성밖으로는 구릉경사의 아래쪽에 외곽을 따라서 해자(垓字)가 파여지고 물이 고여있었던 요새(要塞)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북동쪽을 성내천(城內川)이 휘감아 흘러 자연적(自然的) 방어선(防禦線)을 이루고 있다.
성벽(城壁)은 구릉의 낮아진 안부(鞍部)를 판축(版築)으로 다져 올렸는데, 서북쪽과 동벽(東壁)의 외측(外側)에서는 1.8m 간격의 목책주혈(木柵柱穴)이 발견되었으므로, 성벽 위에 목책(木柵)이 시설되었을 가능성이 조사된 바 있다.
이 산성(山城)에서는 주거지(住居址)와 저장혈(貯臟穴)·분묘(墳墓) 등의 옛 유구(遺構)가 조사되었다. 많은 유물(遺物)들이 수습되었는데 백제(百濟) 한성시기(漢城時期)에 해당하는 것들로 판단되었다. 특히 중국(中國) 서진(西晋)(265∼316A.D.)의 전문도기편(錢文陶器片)이 찾아져 축조년대(築造年代)의 상한(上限)이 3세기 말경까지 소급될 수 있음도 알려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유물들은 백제(百濟) 한성기(漢城期)에 이 토성(土城)이 주요한 거성(居城)의 하나였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중심년대가 4∼5세기(世紀)였다고 판단되므로, 백제(百濟)가 고구려(高句麗)의 공격(攻擊)으로 웅진성(熊津城)으로 옮아간 서기 475년을 마지막으로 폐성(廢城)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百濟) 초기(初期)의 움집과 대형(大形)의 저장혈(貯臟穴)의 발굴은 백제사(百濟史)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많은 유형(類型)의 토기(土器)와 무구류(武具類)도 출토되었다.
이 토성(土城)은 그 위치(位置)·규모(規模)·유물상(遺物狀) 등으로 보아 한성시대(漢城時代) 백제(百濟)의 군사적(軍事的)·문화적(文化的) 중요성이 높은 성터로 판단되고 있으며, 이웃의 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과 함께 백제초기(百濟初期)의 왕도(王都)를 구성하는 여러 성터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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