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남쪽에 있는 고덕산과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로 불리는 봉우리를 둘러 쌓은 산성이다. 남동쪽으로는 남원·고창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중요한 곳을 지키고, 북쪽으로는 전주를 내려다 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이곳에 고덕산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조선 순조 13년(1813)에 성을 고쳐 쌓고 남고산성이라 했다. 이 성은 유래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보인다.
순조 13년에 보수공사가 있을 때 성 안에는 4군데의 연못과 25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민가 100여 채가 있었다고 한다. 성문은 동·서에 있었으며 각기 3칸, 6칸 규모의 누각형 문이 있었다. 서쪽에 비밀문이 하나 있었으며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가 설치되어 있고, 관청, 창고, 화약고, 무기고를 비롯한 각종 건물이 즐비하게 있었다. 지휘소인 장대는 남·북에 각각 설치되었으며, ‘남고사’란 절이 있다. 현재 성의 둘레는 약 5.3㎞이다.
지금은 성벽이 많이 허물어졌고 ‘남고진사적비’가 산성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전문설명
전주시(全州市) 남방(南方)의 고덕산(高德山) 서북계곡(西北溪谷)을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조선시대에 남고진(南固鎭)을 두었던 곳이다.
전해오는 말로는 후백제왕(後百濟王) 견훤(甄萱)이 쌓았던 것이라 하며, 전주(全州)의 남동방향(南東方向)으로 남원(南原)·순창(淳昌)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충을 좌우(左右)로 지키고, 북(北)으로 전주(全州)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성벽은 험준한 암벽과 천경대(千景臺)·만경대(萬景臺)·억경대(億景臺)로 불리우는 봉우리를 감돌고, 서북(西北)쪽의 서문(西門)·서소문(西小門)쪽이 계곡방향(溪谷方向)이어서 성내(城內)에 반곡천(盤谷川)이 흘러내린다. 문터는 동(東)·남(南)·북방(北方)의 안부(鞍部)에도 있으며, 여기저기에 역사(歷史)의 현장으로서 남겨진 유적(遺蹟)이 많다.
성내(城內)의 서문(西門)터 옆에 서있는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에 의하면 임진(壬辰)·정유(丁酉)의 왜란(倭亂)때에 전주읍성(全州邑城)과 더불어 의각(椅角)의 세(勢)를 이루는 천험(天險)으로 전주방어(全州防禦)의 요충(要衝)으로 이용(利用)되었다고 하였다.
1811년(순조(純祖) 11)에 이상황(李相璜)의 획책(劃策)으로 수축공사(修築工事)가 시작되어, 이듬해 박윤수(朴崙壽)의 감독으로 완축(完築)되었다. 남고진사례(南固鎭事例)에 의하면, 성안에는 방(房) 4칸과 대청(大廳) 8칸으로 된 진장(鎭將)의 아사(衙舍)를 비롯하여 각종의 군기(軍器)·화약창고(火藥倉庫)가 즐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남(南)·북(北)의 장대(將臺)와 문루(門樓), 포루(砲樓)가 있는 외(外)에도 성안에 제언(堤堰) 4곳과 우물 25처(處)가 있고 민가(民家) 113호(戶)가 거주(居住)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山城)은 동(東)으로 40리(里) 거리에 만막관(萬莫關)이라는 또다른 시설(施設)을 함께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치모양의 문에 문루(門樓)가 갖추어지고, 좌우(左右)의 관성(關城)은 길이 150보(步)이고 여장(女 )은 78좌(坐)가 있어 수문장(守門將)과 병졸(兵卒)이 배치(配置)되어 있었다.
성안의 만경대(萬景臺)에는 암벽에 정몽주(鄭夢周)의 시(詩)라는 7언(言)8구(句)의 시구(詩句)가 새겨져 있으며, 남고사(南固寺)·별장(別將)·최영우비(崔永宇碑) 등이 있다. 성벽은 많이 허물어졌으나, 군데군데 성벽의 위용(偉容)이 남아있다. 대소(大小)의 할석(割石)으로 쌓아올린 성벽은 문(門)과 그 부근은 비교적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이 사용(使用)되었다. 조선시대 이전의 성벽으로 추측되는 대부분의 체성(體城)은 산의 능선을 이용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로 외침(外侵)때마다 사용(使用)되어온 전주지역(全州地域) 주민(住民)들의 임란이거처(臨亂移居處)로서, 특히 고려말(高麗末) 왜구(倭寇)의 침략 때에도 이곳에 농성(籠城)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남고산성 남고산성 남고산성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