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격전지이다.
동학농민군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일어나, 다음 해인 1894년 1월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으나, 정부에서 사태 해결을 위해 파견된 관리가 잘못을 농민군에게 돌려 탄압하자, 이에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다시 일어나게 된다.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주변의 곡창지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백산으로 진출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전주감사는 관군을 보내 이를 막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관군과 농민군은 정읍의 황토현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밤을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농민군은 관군을 크게 물리치게 되었다.
황토현전투의 승리로 인해 기세가 높아진 농민군은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나아가 전주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죄없이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무기도 탈취했으며, 무장으로 진격하여 교도 40여 명을 구출하였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동학운동의 의의를 나타내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황토현 싸움에서의 승리는 동학농민운동을 크게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여 동학농민운동의 막이 내려지지만, 이 운동에서 보여준 개혁정신과 민족자주정신은 민족독립운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문설명
1894년(고종(高宗) 31) 5월에 동학혁명군(東學革命軍)이 관군(官軍)을 크게 이긴 곳이다.
동학군(東學軍)은 1893년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못 이겨 봉기(蜂起)하여 이듬해 정월에는 고부군아(古阜軍衙)를 습격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의 지휘 아래 무기고(武器庫)를 파괴하고 무기를 빼앗았고, 수세곡(水稅穀)을 창고에서 꺼내어 원래(原來)의 주인(主人)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萬石洑)를 파괴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은 마항(馬項)장터에 장막(帳幕)을 치고 사태를 엿보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정부(政府)는 조병갑(趙秉甲)을 체포하고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 使)로 삼아 사태를 조사케 하였다. 그러나 이용태(李容泰)는 일체의 잘못을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에게 전가하고 탄압하니 전봉준(全琫準)을 중심한 동학군(東學軍)은 격분하여 인근의 접주(接主)들에게 통문(通文)을 보내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선언하였다.
처음에는 고부읍(古阜邑) 북쪽의 백산(白山)을 점령하였는데. 이때 수만인(數萬人)이 모여 전봉준(全琫準)을 대장(大將)으로 추대하니, 그는 강령(綱領)을 선포하고 격문(檄文)을 사방에 띄워 호응을 얻었다. 이어 전봉준(全琫準)은 부안군아(扶安軍衙)를 점령하고 다시 돌아와 도교산(道橋山)에 유진(留陣)하였다. 전라감사(全羅監司) 김문현(金文鉉)은 부안(扶安)이 점거 당했다는 소식에 급히 별초군(別抄軍) 250명과 많은 보부상(褓負商)을 이끌고 동학군(東學軍)을 토벌하러 나섰다.
동학군(東學軍)에서는 4월 6일(5월 10일) 어둠을 틈타 보부상을 가장하여 황토현(黃土峴)에 유진(留陣)한 관군을 살피고, 관군이 깊은 잠에 빠진 이튿날 이른 새벽에 군대를 이대(二隊)로 나누어 편성한 후, 일대는 서쪽과 남쪽의 정면에서 들이치고, 또 하나의 대오는 동북쪽의 뒤쪽에서 기습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수백명의 관군(官軍)은 목숨을 잃고, 많은 무기와 곡식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반면에 동학혁명군(東學革命軍)은 이 황토현(黃土峴)의 승리로 사기(士氣)가 하늘에 닿을 듯 높아져, 그날로 정읍(井邑)을 점령하고 죄 없이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무기도 탈취하였다. 5월 12일에는 흥덕(興德)과 고창(高敞)울 석권하고, 다음날에는 무장(茂長)으로 진격하여 교도(敎徒) 40여명을 구출하고 성외(城外)에 있는 고산봉(孤山峰)에 유진(留陣)하게 되었다. 대장(大將) 전봉준(全琫準)은 이곳에서 동학창의(東學倡義)의 취지를 재천명하는 포고문(布告文)을 발표하였다.
황토현전적지 황토현전적지 황토현전적지 제민당 갑오동학혁명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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