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그후 4월 5일에 발안장날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교회 청년들과 시장에 모인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져 경찰부장을 죽였다.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했다. 또 교회당 밖으로 시체를 끌어다 모아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이 사건은 죄없는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일본이 저지른 잔악행위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1982년 제암리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의 증언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들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불탄 예배당터에는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계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국민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문설명
3·1운동< 運動 > 때 일제< 日帝 >가 우리의 독립운동< 獨立運動 >을 가장 잔인< 殘忍 >한 방법< 方法 >으로 탄압한 대표적< 代表的 >인 학살사건현장< 虐殺事件現場 >이다. 이곳에서의 3·1운동은 3월 10일경에 안종린< 安鍾璘 >·안정옥< 安政玉 >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던 것을 시작으로 하였다. 4월 5일에는 발안< 發安 >의 장날이어서, 이날 향남면과 팔탄면< 八灘面 >의 주민 천여명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지를 행진하였는데, 일제의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하므로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투석전을 벌여 경찰부장이 돌에 맞아서 죽었다. 일제< 日帝 >는 수원에 주둔한 경찰과 헌병대를 동원하여 보복에 나섰는데, 4월 15일 오후에는 각처에서 보복행위를 하던 발길을 제암리로 돌리었다. 일본군 20사단 39여단 78연대소속 유전준부< 有田俊夫 > 중위가 이끄는 1개소대의 병력은 제암리를 완전 포위하여 한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는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하였다. 초가집으로 된 교회당에 주민이 모이자 일본군은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하여 살육하기 시작했다. 교회당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고 아무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일본군은 교회당 밖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시체까지 끌어다 모아놓고,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으므로 누구의 시체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을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부락을 다니며 민가에 방화< 放火 >를 했는데 33동< 棟 >의 민가< 民家 > 가운데 외딴집 2채를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 또 이웃한 고주리< 高舟里 >로 달려간 일군< 日軍 >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계속하였다. 이때 피살된 사람들은 안정옥< 安政玉 >·안정린< 安正璘 >·안종락< 安鍾樂 >·안종엽< 安鍾燁 >·안종환< 安鍾煥 >·안종후< 安鍾厚 >·안유순< 安有淳 >·안무순< 安武淳 >·안진순< 安珍淳 >·안봉순< 安鳳淳 >·안경순< 安慶淳 >·안필순< 安弼淳 >·안명순< 安命淳 >·안관순< 安寬淳 >·안상용< 安相鎔 >·조경칠< 趙敬七 >·조태성< 趙泰成 >과 그의 부인 김씨< 金氏 >·홍원식< 洪元植 >과 그의 부인 김씨< 金氏 >·홍순진< 洪淳晉 >·김정헌< 金正憲 >·김덕용< 金德用 > 등이었는데, 부인들은 남편의 죽음을 보고 통곡하다가 잔인한 일본군에게 총검으로 살해된 것이었다. 이웃 고주리< 高舟里 >에서도 김흥렬< 金興烈 >·김성렬< 金聖烈 >·김세열< 金世烈 >·김주업< 金周業 >·김주남< 金周南 >·김흥복< 金興福 > 등이 칼에 찔려 살해되고 불태워졌다. 1982년에 이르러 유해< 遺骸 >의 발굴이 도의리 산< 山 > 31-1번지에서 이루어져, 그곳에 표석< 標石 >을 세우고, 새로이 제암리< 堤岩里 >의 교회당 뒷산에 23위< 位 >를 합장< 合葬 >하였다. 또 1959년에 세워진 기념탑< 記念塔 >을 정비하고, 1983년에는 제암리사건< 堤岩里事件 >의 전시시설< 展示施設 >을 만들어 국민교육의 현장으로 활용케 되었다
제암리3·1운동순국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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