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성재산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주위가 약 900m이나 대부분 붕괴되고, 북동쪽에는 안팎으로 겹쳐 쌓은 부분의 안쪽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성의 남서쪽, 남쪽, 동남쪽의 3곳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벽의 절단부가 있다. 북쪽은 남한강과 가파른 절벽의 자연적인 지리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1978년 성내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 변동을 알 수 있다. 비석외에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도 있어 대략 고려 후기까지 오늘날의 단양지방을 다스리는 읍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있어,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전문설명
죽령천(竹嶺川)이 북류(北流)하여 남한강(南漢江)에 흘러드는 서쪽 어귀에 있는 성산(城山)(성재산)의 정상부를 반달모양으로에워싼 석축(石築)의 테뫼식 산성(山城)이다.
남한강에 임(임(臨)한 남안(南岸)의 해발 323m인 성산은 동(東)·서(西)에 천류(川流)를 끼고 북(北)에 강류(江流)가 있는 자연적(自然的)인 요새(要塞)처럼 되어있고, 오직 남(南)으로 낮게 구릉을 지나 험준한 소백산맥에 연결되고 있다. 이곳은 죽령(竹嶺)과 그 서쪽의 벌령(伐嶺)을 통하여 영남(嶺南)과 이어지는 교통로상(交通路上)의 요충(要衝)에 해당된다.
성(城)의 이름은 지리지(地理誌)들에서 성산성(城山城)으로 기록되고,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미 고성(古城)으로 파악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둘레 1,768尺이고 성안에 대정(大井)이 있다고 하였다. 적성(赤城)이란 이름은 단양(丹陽)의 삼국시대(三國時代)이름일 뿐만 아니라 1978넌에 이곳 성안에서 신라적성비(新羅赤城碑)가 발견되었으므로 이 성터의 성격을 어느정도 알게됨에서 새로이 붙여진 이름이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지고 서단(西端)과 동단부(東端部)가 일부 자취가 완연하다. 성벽의 평면형태는 남서쪽의 가장 높은 곳에서 북동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외향서면(外向斜面)을 평평히한 북벽(北壁)이 거의 직선을 이루고, 남향서면(南向徐面)을 궁형(弓形)으로 에워싸고 있어서 넓은 성내대지(城內臺地)를 이룬다. 석회암(石灰巖)과 화강암(花崗巖) 등 여러종류의 석재(石材)를 납작하게 깨어낸 성석(城石)은 상하(上下)의 크기가 고르고, 성벽 위에는 인두대(人頭大)의 냇자갈을 올려놓았던 양상(樣相)이 엿보인다.
서단(西端)에 있어서는 곡치(曲雉)의 형태가 남아있고, 성벽 밖으로 기단(基壇)을 2단(段)으로 축조(築造)한 성벽이 있다. 동단부(東端部)는 내외면(內外面)이 남아 있는데, 내면(內面)의 하단(下端)에 기석(基石)이 있고 벽은 바깥을 향하여 단(段)을 형성하면서 66。기울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성벽의 두께는 5∼7m 이다. 내외협축(內外夾築)된 성벽의 내면고(內面高)는 2m 이고, 외면(外面)은 기단외(基壇外)의 보축(補築)까지 10m이상의 높이를 가진 웅장한 규모의 성벽이다. 지형으로 보아 남(南)쪽에 수구(水口)가 있었을 것이나 수구(水口)의 남은 유구(遺構)는 보이지 않고, 그로부터 서(西)로 20m 떨어져 통행로(通行路)가 있는데, 이곳 주변이 남문(南門)터로 생각되고 있다.
전체적인 성안의 모습이 마안형(馬鞍形)을 이루며 성벽의 구조가 내외협축(內外夾築)이고, 성벽을 쌓은 석재(石材)의 크기가 고르고, 성벽 밖으로 하단외측(下端外側)에 45°기울기의 단(段)을 이룬 보강호석(補强護石)의 축조가 있는 점은 6세기 중엽 신라(新羅)의 진흥왕대(眞興王代)로 추정되는 신라계(新羅系) 석축산성(石築山城)의 특징(特徵)으로 간주되고 있다.
성안에는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경작지로 변하여 매몰(埋沒)되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토기편(土器片)이 많이 발견된다. 성내(城內)에는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국보(國寶) 198호(號))가 비각(碑閣)안에 보존되고 있다.
단양적성 단양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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