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문루,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전문설명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기리기 위하여 지방 유림(儒林)과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제민(李薺閔) 등이 뜻을 모아 선조 5년(1572) 그의 유허지(遺墟址)에 사당을 건립하고 동·서재와 강당 및 누각(樓閣)을 세웠다. 그후 선조 7년(1574)에 경주 향현사(鄕賢祠)에 있던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와 체인묘(體仁廟)에 모셨으며, 이해에 '옥산「(玉山)」'이라는 사액(賜額)과 전적(典籍)을 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조선말 대원군의 서원철폐시에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중의 하나로서, 매년 2월 중정(中丁)(두번? 정일(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享祀)를 지내며 제품(祭品)은 7변(변) 7두(豆)이다.
주향자(主享者)인 이언적(1491∼1553)은 사화(士禍)가 거듭되던 시련기에 살았던 조선 중기의 특출한 성리학자이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에 나갔으나 중종 25년(1530)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다시 벼슬길에 오른 후 1545년에는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나 무고하게 연루된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 63세로 사망하였다. 유배생활동안 『구인록(求仁錄)』,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광해군 2년(1610)에 문묘 (文廟)에 종사되었으며 옥산서원 외에도 여러 서원에 배향(配享)되고 있다. 그는 조선 유학 정립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리론(主理論)을 정통화하는 것이었다.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론변(無極太極論辨)에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은 퇴계 이황(李滉)에게로 이어져 영남학파의 성리설(性理說)에 선구가 된다.
옥산서원의 전체적인 배치는 계류(溪流)를 끼고 서남향(西南向)을 하였는데, 전면에 강학공간(講學空間)과 후측에 사당(祠堂)을 둔 소위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를 하고 있다. 건물배치를 요약하면, 문과 누각, 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정연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강당 앞에 동·서재격(東·西齋格)인 좌·우·양 재실(齋室)이 마주보고 있다.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루문(樓門)인 무변루(無邊樓)가 있고, 무변루 밑으로 난 문을 오르면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에 이른다. 구인당 좌우로는 민구재(敏求齋)와 암수재(闇修齋)가 자리잡고 구인당 뒤쪽에는 내삼문(內三門)인 체인문(體仁門)이 있고 이 안에 체인묘(體仁廟)와 제기실(祭器室)이 있다. 또 구인당의 우측편에는 고직사(庫直舍)·판각(版閣) 등 부대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체인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식(初翼工式) 맞배집으로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구인당은 서원의 여러 행사와 유림들의 학문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인데 헌종 5년 (1839)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된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초익공식 팔작지붕집으로, 가운데에는 마루를 두고 좌우에는 각각 해입재(楷立齋)와 양진재(兩進齋)란 편액이 달린 온돌방을 두었다. 처마밑에 추사 김정희가 쓴 '옥산서원(玉山書院)'이란 편액이 달려 있다. 구인당 전면 양측에 있는 민구재와 암수재는 유생들이 수학하며 거처하는 재실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을 한 민도리집이다. 구인당 앞에 놓인 무변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 초익공식(初翼工式) 중층(重層) 맞배집이다. 1층에는 가운데 3칸에 출입문을 설치하고 양측에 구둘 아궁이를 두어 상층이 온돌을 덥히도록 하고, 2층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양측 한칸씩을 온돌방으로 하였다. 여기에는 한호(韓護)가 쓴 '무변루(無邊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구인당 동편 즉 체인묘역의 좌측에는 경각(經閣)인 어서각(御書閣)이 있는데, 여기에는 어서(御書), 어필(御筆), 내사본(內賜本), 퇴계수필(退溪手筆), 각종 전적(典籍) 등을 봉안하던 곳이며, 구인당 북측 즉 묘역의 우측에는 선조 10년(1577)에 세워진 이언적 신도비의 비각이 있다.
또 서원의 동남편 외진 곳에 1972년에 후손들이 세운 유물전시관인 청분각(淸芬閣)이 있는데, 여기에는 보물 제586호로 지정된 이언적 『수필고본(手筆槁本)』과, 보물 제525호로 지정된 김부식 원저 『삼국사기』 완본 9책 등 수 많은 전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보물 제413호로 지정된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독락당은 이언적이 1532년 벼슬에서 물러난 후 만든 서재로 이곳에서 6년간 학문에 전념하던 곳이다. 경내에는 사묘(祠廟), 어서각(御書閣), 양진암(養眞菴) 등이 있으며 계정(溪亭)은 그가 기거하던 사저(私邸)이다.
옥산서원 옥산서원 역락문 경주 옥산서원 전경 옥산서원북쪽에서본전경 옥산서원 역락문 강당 정면 강당 측면 동재 무변루 사당과 전사청 서재 외삼문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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