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경주·울산·밀양·양산과의 교통 중심지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옛 언양 고을의 읍성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처음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던 것을 이후 연산군 6년(1500)에 현감 이담룡이 확장하여 돌로 다시 쌓았다. 평지에 네모꼴로 만들어진 보기 드문 평지성으로, 원래는 둘레가 약 1,000m, 높이가 4m나 되었으며 성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성을 쌓았던 큰 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 축조의 일반적인 방식이 반영되었다. 큰 돌을 대충 갈아 쌓은 후 빈 공간에 잔돌을 채워 성벽을 튼튼하게 하였다.
언양읍성은 전국의 중요 읍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14∼15세기의 축조방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나타나는 축성법 변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전문설명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옛 언양 고을의 읍성이다. 평지에 네모꼴로 축조된 보기 드문 평지성으로, 현재 성벽의 일부가 잔존하고 있다.
언양읍성은 토축으로 고려말에 축조된 것이 조선 시대에 석성으로 규모를 키워서 축조되어 있는데, 토성은 삼국 시대 때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둘레가 1,498척, 높이는 8척이었다. 이후 1500년(연산군(燕山君) 6)에 현감 이담룡(李聃龍)이 돌로 개축하여 확장하였는데, 이때의 둘레는 3,064척, 높이가 13척, 성 위에 나지막하게 쌓은 첩(堞)이 834개소이고 성안에는 우물이 네 곳 있었다. 현존하는 석성은 거의 정방형을 이루고, 각각의 방향을 이룬 성벽의 중간에 문을 만들고, 문과 각을 이룬 모서리 사이마다 하나씩의 치성을 만들어, 모서리와 함께 12개를 만들었던 듯하다.
남문은 특히 옹성을 두른 흔적이 남아 있고,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축조의 일반적 방법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보통의 성벽은 무사석형(武砂石形)의 반듯한 돌 또는 산돌을 차곡차곡 쌓은 방식으로 축조하는 것이나, 이 성에서는 거대한 바위를 굴려서 면만 거칠게 다듬어 바르게 잡은 위에 역시 큰돌을 떠다 얹어 큰돌과의 사이에는 무수한 잔돌을 끼워 박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매우 견고하게 웬만한 충격에는 견디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상당한 부분이 잘 남아 있다. 성의 기단부는 중간 중간에 돌출한 부분이 적대(敵臺)를 두었던 치성이며, 문지(門址)나 치성의 배치는 방어에 상당한 경험과 군사 지식이 있는 사람의 설계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읍성과 짝을 이루는 산성은 취서산(鷲棲山)의 단조성(丹鳥城)이며 유사시에는 방어하기에 유리하도록 축조되었다. 이 성의 축조 방법과 배치는 1500년에 축조한 것으로 절대연대가 확실한 점에서 매우 중요한 성곽 축조 기술의 기준이 된다. 신라 시대이래 왜적 방어를 목적으로 한 읍성이 토축으로 있었다고 여겨지나, 규모와 위치에 대하여는 명확한 확증이 없다. 언양읍성도 경주 남산의 신성(新城)이나 문무왕 때에 축조된 부산성(富山城) 등의 석축기법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신라 이래의 지역적 축성 방법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지역은 경주·울산·밀양·양산과의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이 읍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읍성 안에는 남문과 북문의 주변에 우물 2곳이 남아 있으며, 조선 시대 후기에는 객관과 동헌을 비롯하여 많은 관청(官廳) 건물이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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