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현충사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주요시설로는 이순신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본전을 비롯하여 이순신이 자란 옛 집,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활터, 정문인 홍살문,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 있다.
유물관에는 국보76호 9점(난중일기 7권, 임진장초 1권, 서간첩 1권), 보물 326호 6점(장검 2병, 요대1구, 옥로1구, 도배구대1쌍), 비지정유물 26점 (영정, 교지, 사액현판, 무기류 등)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문설명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1545년(인종(仁宗) 원년(元年)) 4월(月) 28일(日)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中區) 인현동(仁峴洞) 부근(附近)에서 출생(出生)하였다. 이곳 백암리(白岩里) 방화산(芳華山) 기슭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기 전까지 사시던 성장가지(成長家址)이자 종가(宗家)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곳이다.
종가(宗家)의 앞뜰에 우물 충무정(忠武井)과 고목(古木)인 은행나무가 있는데 고목(古木)이 있는 곳은 이충무공(李忠武公)의 활터 이었다고 한다. 또한 치마장(馳馬場)이기도 하다. 충무공(忠武公)이 순국(殉國)하신지 108년이 지난 1706년(숙종(肅宗) 32년) 이곳에 충무공(忠武公)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祠堂)을 세웠으며 1707년(숙종 33년) 숙종께서 친히 《현충사(顯忠祠)》라 사액(賜額)하였다. 그 뒤 200여년간 공(公)을 추모하는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한동안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사당(祠堂)은 퇴락하였었다. 이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가 주관하여 온 겨레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1932년에 사당(祠堂)을 중건(重建)하였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매년(每年) 4월 28일에 온 국민의 뜻으로 다시 탄신제전(誕辰祭典)을 올려 공(公)을 추모하여 왔었다.
1968∼1969년에 대대적인 성역화(聖域化) 공사(工事)가 실시(實施)되어 1932년에 중건(重建)한 사당(祠堂) 후편(後便)에 지금과 같이 크게 사당(祠堂)을 신축(新築)하고, 현충사(顯忠祠)의 경역(境域)을 확대하여 성역화(聖域化)하고 전시관을 건립하여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유물(遺物)인 난중일기(亂中日記), 서간첩(書簡帖), 임진장초(壬辰狀草), 요대(腰帶), 장검(長劍), 옥로(玉鷺), 도배(桃盃) 등이 전시(展示)되어 있다.
난중일기 초고본 이면 공 묘소 이충무공 영정 이충무공 후손의 묘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 입구 전경 정려 내부 현판 정려각 충무공 고택 안채 전경1 충무공 고택 안채 전경2 충무공 고택 전경 충무공 고택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내부1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내부2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내부3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내부4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충무문 충무문에서 바라본 현충사 충의문 현충사 내부 영정 현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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