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52호 함양 사근산성

오늘의 쉼터 2008. 2. 18. 19:38


종    목 사적  제152호
명     칭함양사근산성(咸陽沙斤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116,908㎡
지 정 일 1966.09.08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산60
시     대삼국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함양군

일반설명

경상남도 함양군 하산리 사근장터 뒤 연화산에 있는 돌로 쌓아진 산성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경상도 지방 14개의 역길을 총괄하던 중심역인 사근역이 있던 곳이다. 성을 쌓은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산성의 규모와 이곳이 신라와 백제 사이의 분쟁지역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삼국시대에 세워졌다는 것이 추측된다. 성은 부분적으로 무너졌으나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둘레는 약 1,218m이고, 연화산의 지형에 따라 쌓은 ‘ㅏ ’자형의 산성이다. 성벽은 네모난 가공석과 자연석을 약 5m 높이로 정연하게 어긋쌓기를 하였는데 밑바닥의 넓이가 5m나 된다.

이 산성은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지형상으로도 세방향이 남강을 끼고 절벽을 이룬 전략지로써 호남지방의 곡창지대를 노리는 왜구의 침입을 차단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던 곳이다.


전문설명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의 사근장터 뒤의 연화산< 蓮花山 >에 있다. 이곳은 옛 사근도< 沙斤道 >의 역로< 驛路 >에 속한 14개 역을 총괄하던 사근도 찰방의 뒤에 해당된다. 석축의 산성으로 둘레는 약 1,218m인데, 연화산< 蓮花山 >을 지형에 따라 'ㅏ'자형으로 둘러쌓은 테뫼형 산성으로 거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은 예전에 사근역< 沙斤驛 >이 있었기 때문에 사근산성이라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에 의하면, 사근산성은 군의 동쪽 17리 사근역 뒷쪽에 있으며, 둘레가 2,796척, 높이가 9척이고 성안에 못이 세군데 있다고 하였다. 성벽은 네모난 가공석과 자연석을 약 5m의 높이로 정연하게 어긋쌓기를 하였는데, 밑바닥의 넓이가 5m나 되어 매우 견고하게 축성하였다. 지금은 성벽이 거의 무너져서 돌무더기로 쌓여 있거나 1m 안팎의 밑부분이 남아 있을 뿐이나, 동북부의 골짜기와 남쪽 일부에 완전한 곳이 있어서 원래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이 산성은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충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형상으로도 동·남·서 세방향이 남강< 南江 >을 끼고 절벽을 이룬 천연의 요해처< 要害處 >로서, 남해에서 호남 지방의 곡창 지대를 노리는 왜구의 침입로를 차단하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1380년(우왕< 禑王 >6) 영남 지방을 휩쓴 왜구는 삼도 원수< 三道元帥 > 배극렴< 裵克廉 >과의 혈전 끝에 이 성을 빼앗고, 함양을 거쳐 단숨에 호남 지방으로 침입하였다가 남원 인월역에서 이성계< 李成桂 >에게 격파 당하였다. 이시기에 함양의 감무< 監務 > 장군철< 張君哲 >은 백성을 이끌고 이 산성에서 농성하고, 원수< 元帥 > 박수경< 朴修敬 >·배언< 裵彦 > 두 장수와 이 산성에서 왜구와 싸웠으나, 사졸 500여명이 전사하여 냇물을 온통 피로 물들였다고 하여 싸운 곳을 혈계< 血溪 >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성의 내력에 대하여는 이보다 더 오래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산성의 규모나, 이곳이 신라와 백제 사이의 분쟁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초창연대는 삼국 시대까지 올라갈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의 성벽은 조선 성종 대의 수축과 이후의 간헐적 보수< 補修 >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근산성근경

사근산성

사근산성

사근산성의 봉수대

사근산성의 우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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