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08호 산청 목면시배 유지

오늘의 쉼터 2008. 2. 17. 22:23


종     목 사적  제108호
명     칭산청 목면시배 유지 (山淸 木棉始培 遺址)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면적 1,131㎡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
시     대고려시대
소 유 자국유,사유
관 리 자산청군

일반설명

고려 후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공민왕 12년(1363) 문익점은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밭을 지키던 노인이 말리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씨앗을 붓통에 넣어가지고 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재배를 널리 퍼지게 하였다.

문익점이 태어난 곳인 배양마을은 지금까지도 목화재배의 역사를 간직해오고 있으며,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가 오른쪽에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싼 백여 평의 밭이 있다. 밭 옆에는 기와지붕을 한 비각 안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지’라는 제목의 비석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옛터에 밭을 일구어 해마다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전문설명


단성현(丹城縣) 원당면(元堂面) 배양촌(培養村) 앞에 홍무(洪武) 16년(계해(癸亥) 1383)에 문익점(文益漸)의 비(碑)를 세운다. 1563년에는 비각(碑閣)을 세운다. 1623년에 비석(碑石)을 중건(重建)하고 효자리(孝子里)라는 석자를 새기고 따로 (전중현대부지(前中顯大夫知) 청도군사문익점위모려묘삼(淸道郡事文益漸爲母廬墓三) 년시방해구집심불역(年時方海寇執心不易) 홍무십육년계해이월일정표안염사봉상대부고성군(洪武十六年癸亥二月日旌表按廉使奉常大夫固城郡) 사최복인육십육자(事崔卜麟六十六字))를 썼다고 읍지(邑誌)는 기록하고 있다.

문익점(文益漸)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급제하여 정언(正言)이란 벼슬에 오른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사신을 수행하여 원(元)나라에 가게 되었다. 마침 목면(木棉) 종자를 얻게 되었다. 그것을 몰래 숨기고 귀국한다. 장인이 되는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단성(丹城)땅에서 재배하도록 한다. 삼년만에 비로소 크게 번지게 되었다. 목면(木棉)심기에 성공한 것이다. 목화를 따서 씨아에 넣고 물레에 틀어 실을 자아내게 되었다. 이는 모두 정천익(鄭天益)의 창의(創意)에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목화를 심고 실을 짜는 일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이럴즈음 문익점(文益漸)은 어머니를 잃는다. 그때가 고려말엽이었다. 이때는 왜구(倭寇)가 극성스럽게 침입하여 여기저기에서 피해를 받고 있었다. 단성(丹城)에도 왜구가 침입하여 난리가 났다. 그러나 문익점(文益漸)은 꼼짝않고 어머니 묘를 지켜 3년을 보냈다. 조선조의 태종(太宗)은 그의 이런 효성과 목화수입의 공로를 인정하여 (증참지의정부사강성군(贈參知議政府事江城君))에 봉하였고 그를 사모하는 후예들은 도천서원(道川書院)을 짓고 배향(配享)하였다. 이 서원(書院)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불탔던 것이 광해군(光海君)4년(1612)에 중건(重建)되었다.

지금 시배(始培)의 터전으로 알려진 곳에는 사적비가 서 있다. 산청(山淸)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




효자비와 비각

목면시배유지

목화

목면시배유지전경

비석및전시관

목면시배유지

목화

비각

비석

전시관

효자비

목면시배유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