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성(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 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옛 초당은 무너져서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초당을 다시 지은 것이다. 작고 소박한 남향집으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언덕 암석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초당 왼쪽으로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앞 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 켠에는 ‘약천(藥泉)’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당시 다산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전문설명
강진(康津) 도암면(道岩面) 만덕산(萬德山)에 자리잡고 강진만(康津灣)을 한 눈으로 굽어보는 다산(茶山) 초당(草堂)은 원래(原來)는 교동(橋洞) 윤규노(尹奎魯)의 산정이었으나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이곳에서 적거하는 동안에 실학(實學)을 집성함으로써 문화재로서 빛을 더하였다. 구(舊)초당은 도괴되었으므로 1958년에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구지의 주초 위에다 현재의 초당을 중건한 것이다.
5칸도리 단층 와가로 측면 2칸은 뒤가 거실이며 앞이 마루로 된 소박한 남향집인데 처마 밑에는 역시 원판은 없어져 뒤에 완당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초당(茶山草堂)」이란 현판이 달려 있다. 그러나 초당은 이를 둘러싼 경승과 아울러서 비로소 제 값이 있고 더구나 여기 담겨진 다산의 실학을 염두에 둘 때 진가가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초당 좌우에 있던 동암(東菴)과 서암(西菴)은 이미 없어져서 흔적만 잡초에 덮여 있음은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그 경승의 중심인 정석(丁石), 다조(茶조), 약천(藥泉) 및 연지(蓮池)는 다산의 적거생활을 설명하여주고 있다. 정석은 다산이 석벽에 친히 각한 것이며 다조는 뒷담 밑 약천의 석간수(石間水)를 손수 떠다가 앞뜰에서 다를 다리던 청석이고 초당 동편 앞에는 수양을 느려뜨린 아담한 연지가 있는데 그 안에는 몇 개의 괴석(塊石)을 쌓아서 석가산(石假山)을 만들어 놓았다. 이른바 이 다산사경은 그의 고적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달래던 아취가 서린 안식처(安息處)였고 보국제세(輔國濟世)하려던 그의 실학(實學)이 구상되던 각고(刻苦)의 도장(道場)이요 산실이었다.
이 초당에 우거했던 다산의 자는 미용(美鏞) 또는 송보(頌甫), 초자(初字)는 귀농(歸農)이었고 호(號)도 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 후암(侯菴) 등이라고 하였으며 교명(敎名)은 요한(Johan)이었다. 그는 1762년(영조(英祖) 38년)에 탄생하여 1836년(헌종(憲宗) 2년)에 종생(終生)했으므로 영·정대(英·正代)의 문운발흥기(文運勃興期)에 생장하여 교안(敎案)이 점숙(漸熟)하고 척사위정(斥邪衛正)이 한참이던 정·순간(正·純間)에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 자신도 서교에 입교하므로서 유배생활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남인(南人) 진주목사(晋州牧使) 정의원(丁義遠)의 아들이며 서교입교자(西敎入敎者) 이승훈(李承薰)의 처남이었던만큼 학(學)은 가학(家學)과 성호(星湖)의 실학(實學)을 이었고 도학(道學)은 도산(陶山)을 사숙(私淑)하였으나 이벽(李蘗)의 서학(西學)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규장각(奎章閣)에서는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박지원(朴趾源) 등의 북학파(北學派)와 교유(交遊)한 끝에 다산학(茶山學)을 완성하였다. 그는 문과급제 후 병조참의까지 되었으나 주문모(周文謨)사건에 연루된 바 있었고 1801년(순조(純祖) 2년)의 신유사옥(辛酉邪獄)때에는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유배년에 강진에 도착한 그는 고성사(高聲寺)의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여장(旅裝)을 풀었다가 이듬해에는 동면석교리(東面石橋里)의 이학래(李鶴來)가(家)로 옮겼으며 다시 익(翌) 12년에는 이 다산초당으로 옮겨 적거(適居) 18년중 11년간을 여기서 살았던 것이다.
그는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비롯한 경세서(經世書)와 『상서고훈(尙書古訓)』, 『주역심전(周易心箋)』, 『대학공의(大學公議)』 등의 경학서 및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대동수경(大東水經)』을 비롯한 지리서(地理書) 등 현재의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와 동 『보유(補遺)』에 보이는 광폭한 실학체계를 성취하였거니와 그 대부분의 구상과 집필이 강진에서 되었고 그 산실(産室)이 바로 이 다산초당과 동·서암이었으며 이를 둘러싼 초당경승이 제세를 위한 그의 애정을 불태우게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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