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97호 양산 신기리산성

오늘의 쉼터 2008. 2. 15. 15:04


종     목 사적  제97호
명     칭양산 신기리산성(梁山 新基里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157,074㎡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양산시  신기동, 호계동, 북정동
시     대신라
소 유 자국유,사유
관 리 자양산시
일반설명

해발 232m의 산성봉 정상일대를 돌로 쌓은 성으로, 서낭산에 있어 서낭산성이라고도 불리운다.

대부분 무너졌으나 둘레 2,600m, 높이 1m 정도가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낙동강을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양산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과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고있다.

성의 남쪽에는 이 산성과 규모가 비슷한 북부동산성이 있어 쌍성의 형태를 이룬다. 서낭산에는 양산부부총으로 유명한 6세기경의 신기리 무덤들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신라시대의 중요한 곳으로 여겨진다.


전문설명


양산시의 동북방 약 1km의 거리에 있는 해발 232m의 산성봉(山城峰)에 있는 둘레 약 2,600m의 석축 산성이다. 현재 성벽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일부만 남아 있다. 성이 있는 산을 북산(北山) 또는 서낭산(城隍山)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이 산성을 성황산성(城隍山城)이라고도 한다.

정확한 축조 연대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463년(자비왕(慈悲王)6) 왜구가 삽량성(삽良城)에 침입하였다가 패퇴한 사실과, 673년(문무왕(文武王)13)과 687년(신문왕(神文王)7)에 삽량주(삽良州 : 현재의 양산)에 축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이 이 산성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지역이 남해에서 경주 등지로 통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이곳에 축성 기록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성내에는 많은 신라식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어 이미 신라때 축조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기록에는 1413년(태종(太宗)13)에 축조하였다고 하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성황산석성(城隍山石城)이 군의 치소로부터 동쪽으로 5리에 있고, 둘레가 569보이며, 안에 작은 시내가 2개, 작은 못이 4개, 우물과 샘이 4개가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다고 하고,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에서는 양산(梁山)과 기장(機張)·울산(蔚山)·언양(彦陽)·동래(東萊) 등 여러 고을의 입보처(入保處)라고 하였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성황산성(城隍山城)은 석축으로 둘레 4,368척, 높이 6척이며 성내에 우물 여섯 개와 못 두 개, 그리고 군창(軍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산성은 조선시대 입보용의 산성으로서 군창을 두고 있었다가, 양산읍성이 이룩되자 기능을 잃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은 대체로 네모난 할석을 이용하여 산꼭대기의 지형에 따라 긴 네모꼴로 둘러 쌓았는데, 현재 대부분의 석벽은 무너지고 초석에서 약 1m 내외의 높이만 남아 있다. 성안의 넓이는 4만 7,551평이며 비교적 평탄한 부분은 최근까지 농경지로 사용된 흔적이 있다.

특히, 이 산성에 남쪽으로 명곡천(明谷川)의 깊은 계곡을 끼고 건너편 동산(東山) 꼭대기에도 규모가 거의 비슷한 북부동산성(北部洞山城)이 있어 쌍성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한편, 서북쪽으로 뻗은 산의 중턱에는 양산부부총(梁山夫婦塚)으로 유명한 6세기경의 신라고분군(新羅古墳群)이 산재하고 있어 주목된다.




양산신기리산성

양산신기리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