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읍의 여러 무덤들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무덤들로, 북부동산성(사적 제98호)이 자리잡은 동산 일대에 있다. 분포 형태는 산등성이를 따라 큰 무덤들이 줄을 지어 있고, 그 주위에는 작은 규모의 무덤들이 모여있다.
현재 유적이 입지한 구릉 일대는 소나무숲이 형성되어 있고 유적 중간 부위에는 체육시설과 산책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무덤이 파괴되었다. 그 주변에서 단경호, 유개고배 등 약간의 토기류가 채집되었다. 체육시설 근처에는 무덤 1기가 파괴되어 무덤 안의 일부가 밖으로 드러나 있다. 또한 무덤의 대부분은 일제시대에 도굴·파괴되었으며, 학술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무덤들의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파괴되어 있는 모습으로 볼 때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과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으로 5∼6세기경에 만들어졌으리라 추정된다.
전문설명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양산은 동쪽으로는 기장현과 동래현, 남쪽으로는 동래현, 서쪽으로는 밀양부와 김해부, 북쪽으로는 언양현에 둘러싸였다고 한다. 이러한 양산의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수도가 경주에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서남쪽 입구로서 대외·가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옛날 육로가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는 남해안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양산천을 이용하는 수로가 이용되었을 것인데 특히 서부 경남지역인 가야나 백제에서 신라로 통할 때에는 양산천의 구실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은 중부동 고분군을 비롯한 주변의 양산 고분군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요소들이다.
동산성(북부동 산성 : 사적 98호)이 입지한 동산(해발 276.8m)의 서사면 일대에 대형의 봉토분들이 연주상으로 분포하고 있다. 분포상의 특징은 능선의 줄기를 따라 대형분이 열을 지어 있고 그 사면으로는 다소 규모가 작은 봉토분과 석곽들이 밀집해 있다. 현재 유적이 입지한 구릉 일대는 소나무숲이 형성되어 있고 고분군의 중간부위에는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다. 유적내에 체육시설과 산책로가 조성되면서 다수의 유구가 피해를 입었고 체육시설 부근의 단애상에도 석실묘 1기가 파괴되어 시상석이 노출되어 있다. 고분군의 분포범위는 구릉의 중간지점에서부터 정상부의 성벽 가까이에까지 걸쳐 있으며 고분군 내에 분포하는 유구의 대부분은 일제시대 이후 계속된 도굴의 피해를 입어 봉분은 거의 파괴되었다. 유물은 산책로 주변에서 약간의 토기편이 채집되었는데 파상문이 시문된 기대편·유대장경호·유개고배·대옹·대호·단경호 등이다.
중부동 고분군은 정상부에 위치한 주변의 북부동 산성 및 북쪽의 북정리·신기리 고분군과 상호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고 유구의 구조는 횡구식 석실분이 주류를 이루고 수혈식 석곽분이 혼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북정리지역의 고분들이 낮은 지대에서 점차 구릉 정상부로 이동하여 축조되다가 다시 낮은 지대로 내려와서 축조되기 때문에 이들 유구의 상호관계를 살피는데 도움이 되며 그 축조시기는 이웃한 북정리·신기리 고분군과 비슷한 5∼6세기대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중부동 고분군은 이 부근의 다른 고분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거의 도굴되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고분의 형상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현재 일부는 개간으로 인해, 그밖의 다른 지역은 잡목과 잡초가 무성하여 외관상 고분군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주변의 유적으로는 양산읍 다방동과 남부동에는 철기시대의 패총이 있고, 하북면 순지리, 양산읍 신기리와 북부동에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 있으며, 신기리와 북정리 외에도 상북면 소토리, 하북면 초산리 등지에 삼국시대에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보다 시기가 떨어지는 유적으로는 동면 호포리와 물금면 물금리에 위치한 조선시대에 축성한 왜성이 있다.
양산중부동고분군 양산중부동고분군 양산중부동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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