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풍수지리

◆ 왕조말살

오늘의 쉼터 2008. 2. 1. 21:50

왕조말살


우리 산은 거기 산이 있기에 오른다는 산이 아니다
우리 어미의 어미 우리네할배의 할매가 고추 하나 매달라고
병마는 끊으려고 밤새웠던 산
산은 마음을열고 우리네 가슴엔 그런 산이 있었다
그런 가슴에다 왜놈들은 죽어라고 못질을 했다.
 

 '졸시, `쇠말뚝 풍수'
 

현재 우리 산 스무 곳에서 쇠말뚝들이 발견되어 제거됐다.
이러한 쇠말뚝 지점들중 몇몇 곳은 조선왕조 말살에 직접적인 치명타를 가한
일제의 만행으로 드러난다.
조선왕조는 전주이씨의 왕기발복에 의한 이씨왕조였고,
조선 역시 대명당 한양발복에서 개국되었다는 것이 풍수의 자리매김질이다.
일제는 바로 이 점을 겨냥했던 것이다. 대저 이씨왕기의 씨앗은 신라말엽에 뿌려졌다.

완산(전주)의 인지산(麟趾山)녘에 선산을 잡았을 때 부터다.
고려 명종 때 전주이씨 선산이 군왕지지(君王之地) 발복설로 문제시 된다.

지관 기대극은 여러 마리의 용들이 여의주를 다툰다는 구룡쟁주형(九龍爭珠形)으로
판단하고서, 그중 물과 조화를 이루니 완산의 선산은 왕기발복한다고 극간을 했다.
개산 이후 400년이 지나자 왕기의 싹은 발복의 뿌리를 내린다.
강원도 삼척군미로면 준경묘(慶墓).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의 유택인 준경묘는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진 군왕지지의 대표격이다.
이씨왕기의 씨앗밭인 완산의 선산, 그리고 발복의 뿌리인 미로면의 준경묘.
일제는 이 두곳에 쇠말뚝을 박아놓았다.
완주군(완산) 서방산의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의 목덜미에서 쇠말뚝 2개가 발견되었다.
준경묘의 산줄기인 미로면 장할봉 정상바위에서 쇠말뚝 1개가 제거된다.
왕기의 싹과 뿌리를 음해했던 일제는 왕조마저 압살시키려고
한양의 목을 조르기시작한다. 한양은 삼각산(북한산)을 진산으로 삼고 있다.
세종 15년, 왕의 신병이 경복궁터와 관계있다 하여 영의정 황희가 직접 정승들과
올라 산줄기 맥을 살폈다는 삼각산. 삼각(三角)이란 산명은 백운 국망 인수봉이
쇠뿔처럼 솟아있음에서 연유된 것인데, 쇠뿔 아래 소의 귀가 있듯이 삼각산 아랫녘에는 우이동(牛耳洞)마저 있다.
이러한 삼각 중 국망봉(國望峰)은 태조와 무학이 국도(國都) 한양터를 풍수관망함에
붙여진 봉우리이나, 그 중에서도 백운대는 단연 풍수개국의 일등공신이다.
백운대는 삼각의 주봉으로서 고려왕조의 송도를 규봉(規峰;엿보다 빼앗는 봉우리)으로
넘보다가 조선왕조 개국시 풍수 쿠데타 선봉으로 등장한다.
이씨들의 군왕지지 발복과 함께 국운이 무르익자 송도의 지기(地氣)를 훔쳐와 한양
뿌려준 진산 삼각산의 주봉이 백운대이다.
삼각산의 정상 백운대에서쇠말뚝 22개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또한 백운대의 명치에 해당되는 백운산장 부근에서도 5개의 쇠말뚝이 꽂혀 있었다.
이러한 풍수만행은 조선왕조의 터에 힘을 넣어주는 백운대를 압살하려는 일제의
음해로서 1930년경에 이를 목격한 증인도 있다.
600년 전 한양은 하륜의 풍수이론, 실무풍수의 윤신달, 불교풍수의 무학, 유교
풍수의 정도전 등의 기라성같은 인물들의 풍수논쟁을 거쳐 선정된 대명당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주범인 이등박문마저도 한양풍수에 놀라
이 땅을 지배하기가 어렵다고 실토한 것으로 전해오기도 한다.
1907년 데라우치 통감에게 통감부 관리의 제안이 있었다.
순종이 거처하는 창덕궁은 손댈 수 없으나 창경궁에 동물원을 설치하면
 왕조의 생명은 끝난다.
동식물원으로 강등한 창경원을 일반 백성에게 공개하면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조선은 영원한 식민지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창경궁(昌慶宮). 흔히들 조선조 5대 궁궐 중의 하나로 보지만,
왕기의 강세로 치면 첫째라는 것이 풍수의 자리매김이다.
임금의 왕기마저 꺾을 수 있었던 텃자리가 바로 창경궁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임금의 상왕(上王) 태종이 창경궁에 거처했고, 임금의 지위에 있던 사도
세자를 뒤주 속에 넣어서 죽이기까지 했던 영조의 불호령이 터진 이곳이다.
조선왕조의 임금을 직접 해코지 못한 일제는 창경궁으로써 음해를 자행했다.
1907년 창경궁은 허물어지고 왕조의 왕기는 개 돼지라는 동물들이 빼앗아
가는국치의 수모를 당했다.
 
이어 3년 후 조선의 강토는 국치합방으로 식민지로 전락되고
500년의 왕조는 하루 아침에 몰락되었다.
1911년 4월, 창경원으로 강등당한 이곳에는 벚꽃나무가 도열했고, 일인들의
사쿠라 만세소리와 함께 이 땅의 백성들은 사쿠라풍수의 독향기에 취해갔다.
광해군 9년 6월에 국풍 김일손은 인왕산에 왕기가 서렸다고 간언을 했다.
왕은 인왕산 왕기를 누를 수 있는 곳에다 경덕궁(경희궁)을 지었다.
본래 조선임금의 왕기는 삼각산 북악산 경복궁이라는 풍수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오늘날의 대통령 집무실 역시 마찬가지의 입지이다.
왕기의 뿌리와 왕조의 혈맥을 음해했던 일제는 또다시 왕조를
부관참시 압살하듯 경복궁 터를 돌덩어리로 꽉꽉 짓눌러버렸다.
조선총독부라는 건물이 그것이다.
大자 형상의 북악산 앞에다 日자 모양의 총독부 건물, 그리고 시청 건물이本자임은
그렇다 치더라도.`大日本'이라는 이 땅의 민족정기 말살의 흉물이 정치권력의
중앙청으로, 박물관으로 변신하여 광복 50주년인 오늘날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어인 일인가.
혹자는 동양의 르네상스 돌덩어리라고 들먹이며 철거반대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의 가슴에는 아직까지 쇠말뚝의 녹이 중독되어 있나보다.
민족의 가슴을 젊은날 未堂은 노래했다.
`북악과 삼각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큰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누이처럼 서있는 것을 보고...(중략)...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서는/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명시, `광화문'그래,

이러한 가슴으로 우리민족의 내일을 풍수에게....<汕客 장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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