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20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괘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경주 원성왕릉 전경 보호석 경주 원성왕릉 전경 경주 원성왕릉 전경 경주 원성왕릉 전면 능 입구 좌측의문, 무인상 및 석물 호석세부
전문설명
괘릉(掛陵)은 낮은 구릉의 남면(南面) 송림 사이에 있다. 왕릉이 조성되기 전에 원래 작은 연못이 있어 연못의 원형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유해를 수면 상(水面 上)에 걸어 안장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비록 능묘제도(陵墓制度)는 당(唐)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세부수법은 신라인의 독자적인 것으로 통일신라(統一新羅)의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陵墓制度)를 보여주고 있다.
이 능(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봉분 밑의 호석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길이 120㎝ 크기의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面石)을 올렸다. 면석의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있는 탱석(撑石)을 배치하였는데, 탱석(撑石)의 전면(前面)은 면석(面石)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서 하나씩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으며, 그 조각수법은 자유롭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품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힌다. 호석의 밖으로는 길이 110㎝, 너비 40㎝의 부채꼴 판석(板石)을 정연하게 깔아 회랑(廻廊)으로 조성하고 회랑 둘레에는 높이 1.7m의 네모진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현재 석주(石柱)는 25개가 모두 남아 있으나, 석주 사이에 상하 2단으로 원공(圓孔)을 뚫어 끼웠던 관석(貫石)은 거의 유실되었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 석상(石床)이 놓였고,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석사자(石獅子) 두쌍, 문인석(文人石) 한쌍, 무인석(武人石) 한쌍과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차례로 늘어서 있다. 또한 현재는 없지만 최치원(崔致遠)이 비문(碑文)을 쓴 석비(石碑)가 있었다 한다. 석사자(石獅子)는 각각 자세와 표정이 달라 능숙한 석조기술을 보여주고 있고, 감정표현이 매우 풍부하고 세련되었다. 문인석(文人石)은 각선(刻線)이 분명하고, 관복(冠服)이나 근엄한 안면 처리가 매우 우수하다. 무인석(武人石)은 의복이나 안면의 모습이 신라인이 아니다. 깊은 눈, 넓은 코, 숱이 많은 수염 등 서역인(西域人)의 얼굴을 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페르시아 무인상(武人像)이라는 주장도 있다.
피장자에 대해서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재위(在位) 785∼798)으로 보고 있다. 원성왕은 본명이 김경신(金敬信)이고, 내물왕(奈勿王)의 20세손이며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의 아들이다. 재위기간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신설하고 벽골제(碧骨堤)를 증축(增築)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98년 12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火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원성 왕릉(元聖 王陵)이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한다고 전하는데, 지금 괘릉(掛陵) 인근에 숭복사지(崇福寺地)가 있어 괘릉(掛陵)이 원성왕릉(元聖王陵)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