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8호 경주 성덕왕릉

오늘의 쉼터 2008. 2. 8. 18:25


종     목 사적  제28호
명     칭경주 성덕왕릉 (慶州 聖德王陵)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고대
수량/면적 11,174㎡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8
시     대통일신라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경주시
일반설명

경주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구릉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무덤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전문설명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 방향 동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송림<松林>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성덕왕<聖德王>의 형인 효소왕<孝昭王>의 능<陵>으로 전해지는 고분<古墳>이 있다. 이 왕릉<王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신라 최초로 완비된 왕릉제도를 갖추고 있다. 능<陵> 하부에 두른 호석<護石>은 신문왕릉<神文王陵>의 호석 구조에서 한 단계 발전한 형식으로 높이 90㎝ 정도의 판석<板石>을 면석<面石>으로 세우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렸다. 면석<面石>들 사이에는 탱주<撑柱>를 끼워 고정시켰고 탱주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받침돌을 세워 보강하였다. 이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는 원조<圓彫>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배치되었는데, 모두 방형 기단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나 심하게 파손당하였다. 호석<護石> 밖으로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회랑 밖으로 석주를 세워 돌난간을 둘렀다. 난간의 석주에는 상하 2개소에 관석<貫石>을 끼우기 위한 원공<圓孔>이 있으나 관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능<陵> 앞에서 안상문<眼象紋>이 새겨진 석상<石床>이 놓여 있고, 그 앞으로는 문인석<文人石> 2구<軀>, 무인석<武人石> 2구<軀>를 마주 대하게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파손이 심하여 무인석<武人石> 1구<軀>와 상반신<上半身>만 남은 석인<石人> 1구<軀>밖에 남지 않았다. 무인석은 방형기단<方形基壇> 위에 올려져 있으며, 의장용 갑옷인 양당개<양당鎧>를 착용하고 양손으로 칼을 짚고 있는 모습이다. 능<陵> 뒤쪽 좌우에 1구씩, 그리고 능<陵> 전면<前面> 석인<石人>들 앞 좌우에 1구씩 모두 4구<軀>의 석사자<石獅子>가 배치되었는데 자세, 안면, 체모<體毛>등이 매우 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능<陵> 전면<前面> 좌측에 능비<陵碑>가 있었으나 지금은 비신<碑身>과 이수<이首>가 없어지고, 목이 부러진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귀부<龜趺>는 비교적 웅대한 편이나 몸체가 납작하고 귀갑문<龜甲文>의 조각도 힘차지 못하다. 능비<陵碑> 주위의 조사에서 약간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으나 판독된 명문<銘文>은 '무'<武>와 '적'<跡> 두 자<字>뿐이다.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재위<在位> 701∼737)은 본명이 김륭기<金隆基>이고, 신문왕<神文王>의 아들로서 효소왕<孝昭王>의 동생이다. 당<唐>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였으며, 능<陵>의 석조물 배치양식도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덕왕<聖德王>의 재위기간은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37년 2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현재 왕릉<王陵> 북쪽에는 이거사<移車寺>로 추정되는 사지<寺址>가 있고, 넘어진 석탑<石塔>이 전하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에는 성덕대왕<聖德大王>의 명복을 빌기위해 만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 보존되어 있다.




경주 성덕왕릉 전경

경주 성덕왕릉

능 후편 석수(서쪽)

능 앞문 인석(동쪽)

능비 귀부

호석세부

12지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