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5호 경주 부산성

오늘의 쉼터 2008. 2. 8. 18:09


종     목 사적  제25호
명     칭경주 부산성(慶州 富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762,874㎡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195
시     대통일신라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경주시
일반설명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이라고도 한다. 주사산·오봉산·오로봉산·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산성이 있는 곳은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선덕여왕 때 백제군이 이 산을 넘어 옥문곡(일명 여근곡)까지 침입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에 경주의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산성으로, 조선시대 전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성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신라의 중요한 군사기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가 죽지랑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모죽지랑가’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현재는 남문터와 군의 창고터·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터·우물터·못터, 그리고 비밀통로인 암문터 등이 남아 있다.


전문설명

 

건천에서 서쪽 약 4km의 거리에 있는 오봉산(五峯山)에 위치한 신라 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일명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경주의 서쪽에 해당되는 교통의 요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으며, 주사산(朱砂山)·오봉산(五峯山)·오로봉산(吳老峯山)·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높이 729.5m의 부산((富山) : 부산(夫山))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한 세 줄기의 골짜기를 감싸 마련된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으로서,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성 밖의 지형은 사면이 모두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를 위한 천험(天險)의 요새지(要塞地)이며, 성내는 평탄한 지형이 많고 물이 풍부하여 거주에 적합하다. 성문은 4개가 터를 남기고 있으며, 남문터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건물터가 6개소, 우물터가 4개소, 못이 2개, 암문터가 1개에 치성도 2개가 있다.

산성이 위치하는 곳은 경주에서 대구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신라 선덕여왕 때에 백제 군사가 이 산을 넘어 옥문곡((玉門谷)일명 여근곡(女根谷))까지 침입한 일이 있은 뒤, 허술한 신라 도성(都城)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663년(문무왕(文武王) 3)에 경주 남산의 장창(長倉)을 축조하면서 동시에 쌓은 것이라 여겨지는데, 축성이 3년만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축은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安山巖) 석재를 사용하여 안팎을 쌓아올리면서 내부에는 잡석으로 채우는 협축법(夾築法)으로 쌓았다. 지금은 대부분 무너진 성벽 돌이 산허리에 널려 있으며, 성내에는 남문지(南門址), 군량미를 비축하였던 군창지(軍倉址),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지(練兵場址)·주사암지(朱砂庵址) 등의 건물터와 못·암문지(暗門址)·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주사암은 신라 의상(義湘)의 창건이라고 전하는데, 이 절터 바로 북쪽에 지맥석(持麥石)이라고 불리는 큰 반석이 있다. 이 반석은 1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이며,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부산성은 효소왕(孝昭王) 때의 향가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와 관련된 곳으로 전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서는 이 성을 부산성(夫山城)이라 하고 둘레가 2,765보 3척이라하고 군창이 있었다고 하므로 조선 시대 초기에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경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부산성

경주부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