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의 무덤이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의 2번째 여왕으로 본명은 승만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과 월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신라의 마지막 성골 출신 왕이다. 7년간 왕으로 있는 동안 국력을 기르고 당나라와 적극적 외교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무덤은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이고,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였다. 둘레돌 사이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12개의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새겼다. 그 위에는 긴 돌을 한번 더 올려 놓았는데, 뒤에 보수하여 원래의 것이 아닌 것도 있다. 둘레돌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난간을 세운 듯하나 지금은 거의 다 없어져 남아있지 않다. 무덤 앞에는 이외에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최근에 만든 통로와 축대가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54년에 왕이 죽자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사량부는 현재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짐작되는데, 이 무덤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무덤 형식도 제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형식이고, 12지신상의 조각수법도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중 가장 늦은 것이다. 이런 점을 들어 이 무덤이 진덕여왕의 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전문설명 경주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중복(中腹)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4.4m. 높이가 4m이다. 봉토 밑에는 판석(板石)으로 병풍 모양의 호석(護石)을 돌렸다. 호석의 면석 사이 탱석(撑石)에는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는데 다른 왕릉(王陵)의 십이지신상과 비교해 볼 때 조각수법이 가장 뒤지고 있다. 면석 위에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된 갑석(甲石)을 올려놓았으나 뒤에 보수하여 원래의 장대석이 아닌 것도 있다. 호석(護石) 밖으로는 판석(板石)을 깔고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했으나 지금은 그 부재(部材)가 거의 다 없어졌다. 이외에는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최근에 와서 축대와 통로를 만들었다.
신라 제28대 진덕왕(眞德王)(재위(在位) 647∼654)은 본명이 김승만(金勝曼)이고,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마지막 성골(聖骨) 출신 왕(王)으로 재위기간에 당(唐)과 적극 외교를 펴고,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견제하여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54년 3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사량부는 현재의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추정되는데, 이 왕릉(王陵)의 위치와는 정반대이다.
왕릉 형식 또한 성덕왕대(聖德王代) 이후에 유행한 발달된 형식이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수법은 신라 왕릉(新羅 王陵)의 십이지신상 중에서도 가장 늦은 것이어서, 그 위치와 함께 진덕여왕(眞德女王)의 릉(陵)이라고 보기 어렵게 한다.
경주 진덕여왕릉 전경 경주 진덕여왕릉 전면 신재로교체한면석과상대갑석 호석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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