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풍수지리

# 親日흉당

오늘의 쉼터 2008. 2. 1. 21:45

 

 

 

* 親日흉당

"이집 저집 잡아봐도 계집이 제일이요, 이방 저방 살펴봐도 서방이 최고더라"는 걸쭉한 우리 속담 풍자. 이에 걸맞는 風水 격언이 있다."이땅 저땅 잡아봐도 명당은 따로 있고, 이쇠저쇠 놓아봐도 주인은 정해졌더라"이렇듯 명당주인 흉당주인이 정해져 있다는 풍수논리가 바로 소주길흉론(所主吉凶論)이다. 아울러 소주길흉론은 설령 천하의 명당을 잡았더라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와 친일파에게는 흉당발복을 시킨다는 산천초목의 처단논리이기도 하다.

매국노 이완용과 친일파 박영효는 생전에 총독부의 권력과 이왕실의 국풍들을대거 동원하여 조선팔도에서 최고가는 대명당을 그들의 유택지로 잡아두었다.

전북 익산군 소재 3만평에 달하는 유택지와 부산 사하구 다대동이 그곳이다.

하나 명당발복은 커녕 둘다 후손에게 폐묘당하는 최악의 불상사마저 불러오게된다. 오늘날 부산의 다대동에서도 제일 번화한 곳에 가보면 을씨년스럽게 남겨진 수백평의 박영효 흉당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친일의 흉당 중에서도 괴기한 발복설로 풍수계의 관심마저 붙잡는 현장이 있다. 충북 공주군 계룡면의 구왕리와 중장리를 넘는 고갯길 조금 아랫녘에있는 김갑순 선친묘(先親墓)가 바로 그곳이다.몇해 전 인기리에 방영된 TV드라마에서 `도로보(도둑놈)'라는 유행어까지 남겼던 친일 탐관오리 공주 갑부 김갑순이 그 장본인이다.

1872년 주막집 주모에게서 태어난 빈천한 신분에 교육도 못받은 김갑순이 31세때 부여군수로 귀(貴)발복을 한다. 노성, 임천을 거쳐 공주군수로 금의환향했던 그가 한일합방 때 총독부의 법망을 이용해 막대한 부(富)를 축재하기에 이른다. 49세 때는 공주와 대전지방의 최고 갑부로 치솟았던 김갑순이다. 한때대전지방의 토지 38%가 그의 것이었다고 하니 어림잡아 수천만평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수치일 것이다.

한데 김갑순의 부귀는 해방되자 하루 아침에 곤두박질쳐졌고 몹쓸 정신병에 시달리다가 후손과 함께 유산마저 남기지 못하고 풍비박산이 되어버렸다. 이런괴기한 인생행로를 풍수계에서는 김갑순의 선친묘에서 비롯된 발복으로 보고있는 것이 정설이다.

더불어 풍수들은 이곳 현장을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판정하고 있다. 여기서 알(卵)이란 무덤을, 품는다는 포(抱)는 무덤 주변의 산줄기의 품음새를 뜻한다.

금계(金鷄)란 이곳 현장의 태조산이 계룡산(鷄龍山)이며 무덤이 기댄 주산(主山)이 오행중의 금성(金星:솥단지 엎어놓은 형상)임에 금계(金鷄)가 되는 것이다. 풍수형국을 이런 방법으로 잡으면 먹통풍수는 면할 수가 있다.

이러한 금계포란형의 발복은 다음과 같이 풀면 된다. 닭의 특징은 벼슬에 있고이는 인간사중에서 감투로 잇댔는다. 더불어 금계(金鷄)가 되니 금의환향할 감투다.

김갑순 그는 고향인 공주군수로 금의환향했다. 또한 닭은 여러개의 알을 부화시키기도 하지만, 종산(宗山)이 수정봉(水晶峰)이니 이는 부(富)와 후손발복의번창의 길지(吉地)이다. 그는 부귀발복과 후손까지 득남했다.

그런데 그러한 발복이 지속되지 않고 모든 것이 어떤 풍수적 연유에서 그처럼풍비박산이 되어 깨져버린 것일까. 이 점이 이 `風水의 현장'에서 밝혀줄 대목이 된다.

거의 대부분의 풍수들은 그 해답을 안대(案對:무덤 앞에 펼쳐진 산과 물의 길흉관계)에서 찾고 있었다. 하나 이곳 풍수의 현장에서 하나씩 검증해 보면 이는 귀걸이 코걸이 식의 두루뭉수리한 역(易)이론에 불과했다. 역을 구사하기전 머리부터 깨칠 것이지, 기껏 손가락 돌리는 삼합오행이 풍수의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필자가 지도하고 있는 회원들을 데리고 이곳의 현장을 두번씩이나 답사했던 첫째날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시해주었다. 금계포란형이 확실한 김갑순의 선친묘에서 괴기한 발복현상을 탁상공론적인 이론을 버리고서 발로 걸으면서 찾아보라고.

두어시간 후 숲속을 빠져나온 이지을(李址乙)회원이 괴기한 발복의 풍수소식을잡고 있었다.

사진과 그림을 비교하여 보자. 금계가 품어주는 품은새 안은 알(무덤)이 놓여있는 둥지라는 차림새이다. 그 둥지 안쪽의 차림새가 묘한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형이 사진에서 보아도 언뜻 식별되나 실제 그곳을 답사해보면 뱀이 알을칭칭 감고서 둥지 안을 빠져나가려는 동작이 드러난다.

이제 금계포란형과 구렁이 담 넘어가는 동작을 맞물려 비교하면 이곳 현장의괴기한 김갑순의 발복은 시원스럽게 풀린다. 금계가 품고있는 둥지에 뱀이 들어와 알(무덤)을 칭칭 감아버리자 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김갑순은 당대발복을 엄청나게 했던 것이다.

마치 핵에너지가 원자력 발전처럼 서서히 분열을 일으켜야 오래 지속될 수가있다. 그러나 이곳은 당대발복으로서만 핵폭발해버린 것이다. 이윽고 알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자 김갑순의 발복 역시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버렸던것.

둘째날 우리는 이곳 풍수의 현장에서 첫째날보다 더 큰 의미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이 부른 재앙의 발복이라는 점이다. 무덤보다 더 큰 뒷전 입수처의 형상도 그렇지만 선친의 묘 앞전에다 김갑순은 신사참배하듯 드높은 계단을 장엄하게 쌓아놓았다.

해방 후 우리 민족은 신사들을 철거시켰다. 그러나 李承晩정권은 친일파들을단죄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정기는 친일파의 발복을 그렇게 풍비박산 내주었다.

땅은 거짓이 없고 민족을 수탈한 행위를 절대 용서치 않는다. 정권과 탐욕은일시적 시한을 가졌지만, 이 땅은 우리 민족에게 하늘이 내려준 영원한 터전이되기 때문이다.
 
<汕客 장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