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풍수지리

솥바위 발복 <하>

오늘의 쉼터 2008. 2. 1. 21:42

 

* 솥바위 발복 <하>

 

사주(四柱)는 사람의 탄생 연월일시를 갖고 풀이하는

동양철학의 일종으로 탄생 천시(天時)가 평생을 좌우한다는 운명론이다.

풍수 역시 한 인간이 태어난생가(生家)의 지리(地利)작용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운명론이라 할 수있다.

출생시는 어쩔 수 없으나 출생장소는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으니 생가풍수는 운명개조론이 될 수 있다.

이 땅의 재벌풍수를 이루는 지역은 중서부 경남인데, 그것도 宜寧의 솥바위를 중심으로 20리 지점 들에서

탄생한 생가 풍수의 공통점이 있다.

이 솥바위 발복 중의 하나가 연암(蓮庵) 구인회씨다.

그는 晋州에서 어릴 때 이름인 정득(丁得)과도 같이 丁丑년에 수십억의 첫 이익을 얻었다.

晋州의 진산은 飛鳳山이다.

승산의 생가에서 봉황 발복세를 탄 연암에게 晋州의 비봉은 날아가라는 번짓수를 달고 있는 격이다.

어느 번짓수로 날아갈 것인가를 잡아준 것은 솥바위풍수였다.

가마솥 부(釜), 부산이 바로 연암이 연타석홈런을 칠 텃자리이다.

이윽고 10년 후 丁亥년(1947년) 그는 부산 대신동에서 럭키라는 상호와 함께 크림을 생산하여 재벌의 수순을

걷게 된다.

솥바위 발복이 굽이쳐 흐르는 남강의 물줄기는 사진처럼 한폭의 금반형(金盤形:재물이 차려진 상)인데

솥바위는 동남방 20리에 재벌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해 주었다.

咸安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마을에 생가를 둔 효성그룹 창업자 만우(晩愚) 조창제씨(1906-1984)이다.

만우의 생가를 찾던 날 재벌풍수의 공통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가 주위에는 꼭꼭 풍수 지령(地靈)을 넣어주는 산이 있다는 점이다.

호암에게는 숫골산이, 연암에겐 방어산의 대봉이, 그리고 이곳 만우의 생가에는 伯夷山이 있었다.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충절이 서린 백이산 명칭은 유교적 전래지만, 이를 풍수로 관산할 때는

기세좋은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복호형(伏虎形)이다.

엎드린호랑이는 결국 일어서야 한다.

일어 설 때 내뿜는 힘이 바로 발복의 힘인데, 엎드린 호랑이를 깨우려면 개짖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야 한다는 풍수 조건이 붙는다.

호랑이들이 개짖는 소리에 눈을 뜬다고 모두 일어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눈을 뜬 호랑이 앞에 사냥감이 있어야 비로소 일어나는 동작을 취하게 되는데 사냥감의 최고는 노루이다.

바람과 노루, 이것이 만우의 생가풍수가 터뜨린 재벌 발복의 비밀이다.

만우의 6촌 조두제씨(74)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생가를 재현했을 때 문제는 터져나왔다.

생가 구조는 특이하게 대문이 두개였다.

풍수 가상학(家相學)에서대문이 두개면 전형적인 흉택(凶宅)에 속한다.

바람이 두군데서 들어오니 주인이 둘이 되어 갈등이 심해진다는 풍수풀이가 그러하다.

실제 만우의 생애가 그러했다.

호암과 만우는 삼성 운영에 있어 한때 공동지분 때문에 갈등이 심했는데, 그때 마다 바람 맞은 것은 만우였다.

이는 주인이 둘이라는 생가풍수의 두 대문에서 연루되는데 만우는 호암을 대신하여 5.16군사정권 때 34일의

옥고를 치르기 까지 하였다.

생가 대문이 둘이 아니고 하나 였다면 만우는 그렇게 까지 시련과 갈등을 겪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일어선 만우라는 거목에게서 오늘날 우리는 지리(地利) 보다는 인화(人和)가 더욱

중요 하다는 지적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기에 사주풀이 뒤에는 꼭꼭 이러한 단서가 붙는다. ...그러나 노력하면 길하다고.

이와 같은 갈등과 시련의 바람속에서도 백이산의 복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낮으막한 야산들이 노루 모양세로 차려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점 풍수특유의 지명풀이로서도 연결되어진다.

백이산 앞녘의 산들이 노루의 형과도 같지만 노루 장(獐)을 연상케하는 오장골 장전골 장고개 등의

지명들이 눈에 들어 왔다.

바람을 맞은 시련속에서 60줄을 바라보는 나이에 만우는 첫 출발을 다시 하게 된다.

만우의 나이 56세, 뭇세인들의 경우 정년 퇴임후 경로당을 생각케 되는데 그는 경로당 대신 효성물산을 설립한다.

효성의 앞길은 생가풍수가 보장하고있는 재벌 발복이기도 했다.

눈뜬 호랑이 앞에 노루라는 먹이가 있었기에. 즉 효성그룹은 만우에게 차려진 노루의 식탁 발복의 전리품인 셈이 었다.

이곳에서 입으로 전해들은 말들이 있다.

재벌은 생가가 있는 고향에서 인심을 잃기 마련인데, 만우의 칭송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군북국민학교의 규모가 그러했고, 75년 효성그룹과 자매결연한 마을의 사실이 그러했다.

이제 솥바위 인걸들은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러나 솥바위는 아직 까지 의구한채 정암교 다리 아래 남아 있다. .

<汕客 장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