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풍수지리

낙동강 (2)

오늘의 쉼터 2008. 2. 1. 12:48

 

* 풍수의 현장...낙동강 (2)

 

 

 


낙동강은 생명의 발원으로 우리의 정신이 흐르는 강이다. 太白山에 천제단(天祭壇)을 모시고 민족을 내리신 하늘님께 봉행하자 하늘의 뜻이 산천정기로 뭉쳐서 용출했던 천황(天潢)못. 이러한 천황못인 황지를 발원지로 삼아 천삼백리를 흐르는 낙동강이기에 생명의 강인 것이다.

동쪽에 황지를 발원시키던 태백산은 서쪽녘의 소백산과 맞잡고서 양백(衿白)의품안에서 민초(民草)의 생명을 넉넉하게 키웠는데, 우리는 이를 십승지(十勝地)라 일컫는다.

황지와 양백의 물줄기가 최초로 합류되는 춘양면 십리 아래의 낙동강. 한국인의 정신은 이곳 물줄기로부터 풍수발복되기 시작한다.

그곳 명당에는 학문의 명당이라는 문패를 단 문명산(文明山:894m)이 자리하는데, 이 산을 풍수 번지수로 짚어보면 영락없는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이다.

여기서 낙동강은 S자 형상의 용틀임을 치더니 결국에 조선 조정을 인물들의 홍수로 채워버렸다.

아랫녘 낙동강변에 우뚝 선 영남학파의 산실인 도산서원이 무수한 유림들과 반열들을 상운봉일(祥雲奉日)처럼 발복시켰기 때문이다.

선인은 낙동강 건너편 어느 곳에 시선을 두는데 바로 용두산(龍頭山). 용머리산 앞에는 梁山 通度寺 경내의 야산과 닮은 아담한 산 하나가 차려져 있는데,그곳과 이곳은 모두 여의주에 해당된다.

그래서 용 앞(용두산)에 놓은 여의주(퇴계 生家의 主山)라는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이 퇴계 생가의 풍수형국이 된다.

도산면 공무원의 안내로 生家 내부에 있는 태실(胎室)을 감상하니 특이한 구조가 눈길을 끌었다. 본채 앞에 따로 차려진 태실 역시도 반룡농주형이라는 닮은꼴의 가상(家相)을 이루고 있었다.

낙동강의 수룡(水龍)의 기세가 첫 용틀임치기 시작하는 이곳. 그러기에 근래에막아놓은 안동댐으로 인한 안동호의 형상이 뚜렷한 수룡의 자태를 보여준다.

수룡의 용틀임일까, 최근에 설치한 1백여m의 관창2교마저 심하게 뒤틀려져 있었다.

황지와 양백의 물줄기 합류점 윗녘은 생명의 발원지였고, 그 아랫녘은 유림 정신의 산실로서 물꼬를 트고 있던 낙동강은 백오십리 더 아랫녘을 휘돌아 감아주고 있었다. 줄잡아도 육백여년의 국반(國班) 발복의 대물림을 이어온 안동하회마을이다.

고려말 도염서령(都染暑令:염색 물들이는 직책)이라는 미관말직에 불과한 류난옥(柳蘭玉)이 문중의 발복지를 잡아달라고 풍수사에게 매달렸다.

풍수사는 어느 한 곳을 가리키더니 3대가 적선을 쌓아야지만 발복된다고 단서를 붙여준다. 길가에 초막(觀稼亭)을 짓고서 적선을 베풀던 3대째인 류종혜(柳從惠) 때 비로소 낙동강의 발복을 얻을 수 있는 이곳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하회마을에는 허씨와 안씨들이 먼저 거주하고 있었다. 그 후 낙동강은하회마을을 발복케 했는데, 이를 적절히 풍자한 풍수적 판결문이 있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반(杯盤)'이라고 전래되는 풍문이 그것이다.

김해 허씨들의 터전에 광주 안씨들이 집을 지었으나 결국에는 풍산 류씨들의풍수발복 잔치판이 되어버렸다는 풍자다.

왜 같은 터전에서 이런 현상들이 각각 다르게 터졌을까. 3대째 적선이라는 인화(人和) 역시 중요하지만, 지리(地利)의 발복은 낙동강에 있었다. 더불어 풍산 류씨들은 이곳의 풍수형국을 가장 잘 짚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거들먹거리고 있는 행주형(行舟形)이라는 떠있는 배나, 다림질하는다리미 형국은 이곳을 헛짚고 있는 격이 된다.

다리미 형국은 낙동강과는 물과 불의 관계로서 서로 상극이 되니 어긋난다. 물위의 배인 행주형은 낙동강과 어울리는 한 폭의 정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이곳도 풍수발복으로 볼 적에 빗나간다.

하회마을을 행주형이라고 가정한다면, 한배를 탄 허씨 안씨 류씨들 모두가 똑같이 발복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곳에선 류씨들만 발복하였다. 왜 그랬을까.

이는 하회마을의 형국이 낙동강 위에 떠있는 연꽃이라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기 때문이다. 연꽃은 수면과 일치선상에서 피어난다. 이 점 그림에서 보듯 류씨들은 낙동강에 접근한 임수(臨水) 입지를 선택한 것이 적중하여 풍수발복케 된 것이다.

그러나 안씨 허씨들은 낙동강을 접하지 않고서 일반적인 입지점인 배산(背山)에 치우쳐져 있으니 발복이 불발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류난옥에게 터의 입지점을 일러준 풍수사는 풍수 개안(開眼)한 인물임이분명하다.

낙동강 수면에 일치한 연꽃은 영의정 발복을 터뜨리니 그가 바로 서애(西r) 류성룡이다. 문중 최대의 영광인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6개나 뼈대있게 차려놓은 국반(國班)의 대명당. 그 중에서도 서애는 임진왜란 때 성웅 이순신과 명장권율을 천거하여 국란극복의 인사행정을 펼쳤던 위인이기도 하다.

또한 서애는 퇴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하회마을과 도산서원, 그리고 퇴계의 생가가 모두 낙동강녘에 접하고 또한 백두대간의 양백세에 잇댄다는 점이다.

백두대간의 옥돌봉(1,242m, 경북 봉화군 소재)에서 뻗어오던 산줄기가 낙동강을 수주작(水朱雀)으로 삼은 이곳에는 옛적부터 전해지던 이야기가 있다.

허씨 문중에서 풍수 이치를 터득한 인물이 임종시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한다.

버드나무를 조심하라고. 그래서 대대로 버드나무만은 심지 않았는데, 어느날버들 류(柳)씨들이 들어와서 번창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우리 역시도 낙동강의 풍수는 모르고서 그저 식수라는 맹물로서만 낙동강을 헛짚고 있음은 아닐는지....<汕客 장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