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흥 오무산 아래 화산의 花心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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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지역 음·양택 명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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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의 음택명당을 소개할 차례다.
필자가 명당대지로 이름난 전국의 명혈들을 찾아다녀본 경험에 비춰 종합된 소견을 정리해 보면
바다를 낀 반도나 도수과협을 거쳐 섬지역으로 이어진 용맥에는 대지명혈에 드는 수혈들이 다수
깃들어 있는데, 고흥땅 역시 그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그런데 고흥땅에는 호남대지 56대혈에 끼는 음택명당이 한 곳도 없다.
그래서 호남대지 56대명당의 목록을 놓고 필자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 처음 그 명혈을 찾아내
1품부터 7품까지 각 8대 대지를 설정한 사람들이 주로 이름난 고승중, 특히 풍수지리학에 조예가 깊은
선사들이었고, 그 고승들이 큰 사찰과 명찰사이를 오가면서 그들의 눈에 띄어 찾아낸 대지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호남 56대혈은 보편성과 객관성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호남대지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을 만한 명혈들이 세상에 알져지지 못하고 아직도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형안의 명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논리가 더 큰 설득력을 갖고 있다 하겠다.
고흥반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 지세나 수많은 준봉의 성신으로 봐서 호남대지를 웃도는 명혈이 있고도 남을법 한데 한 곳도
기록에 남겨져 있지 않은 것은 분명히 명사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해 세상에 소개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풍겨지는 향기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그 향이 널리 퍼져 진가를 알아 차릴 수 있듯이
한국의 전통 풍수지리의 저명인사로 꼽히는 일지스님을 비롯 일이스님과 두사충의 혜안은
고흥땅에 깊히 감추고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음택의 대혈들을 또 다른 진산진수의 결록에 실어
후세에 전해 줬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구전과 문헌으로 남아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다.
그 결록에는 지금의 고흥을 흥양이라 불렀다.
물론 필자의 정보가 한정돼 모두 소개할 수 없지만 조사된 대로 명혈대지의 목록과 옛 산도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거리단위는 10리를 4㎞로 셈한 것임)
고흥읍을 기준삼아 동쪽으로 5리의 거리에 기룡형(騎龍形), 축도의 앞쪽에 황우도강형(黃牛渡江形),
서남쪽 록도의 우측에 파상비룡형(波上飛龍形), 관안산 아래의 단군형(團軍形), 남쪽 40리 석봉 아래의
주마격고형, 서쪽 40리의 사민이사형, 동쪽 40리의 일월명당형(日月明堂形), 고흥읍 동북방 운산의
누선출협형, 동쪽 40리의 지주결망형, 북쪽 50리의 군왕대좌형, 포두면 운람산(운암산)하의 군신봉조형,
팔영산 8봉중 제4봉하의 운중선좌형, 고흥읍 서남쪽 오무산하의 화심형(花心形), 과역면 과역리
복호산하의 복호형, 고흥읍 남계리 주월산하의 금반형, 두원면 수덕산하 대전리 부근의
비룡망해형(飛龍望海形) 등 .....
대지명혈의 계열에 드는 음택명당이 수없이 많다.
그 많은 음택명당에 대한 간산기를 쓰기도 어렵거니와 필자가 직접 답산해
그 결과를 종합 정리하기에는 시간 등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고흥읍 인근에 자리잡은 오무산하의
화산을 주산으로 삼아 결혈된 화심혈(花心穴) 하나를 골라 답산기를 쓰기로 한다.
오무산은 큰자라오자와 춤출무자로 이름지어진 산으로 그 후중함과 특립특출한 기상은 누가 봐도
그 주룡이 매조지되는 지점에 큰 명당을 결작하리라는 예측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다 그 화심혈에 얽힌 구전설화는 그것을 뒷받침하고도 남는다.
옛날 왕조시대에 풍수지리를 신앙처럼 여겼던 그때 중국의 명문가에서 조선땅 고흥반도 화산아래에
자리잡은 화심혈에 그들의 선조 묘를 쓰려고 이역만리 고흥까지 찾아와 고흥읍 인근 화산아래
어느 마을을 방문, 화산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근방의 산봉중에는 화산이란 산은 없고 꽃봉만있다”라고 대답하자
자기들이 잘못 찾아온 것이라 판단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고 한다.
풍수지리와 관련돼 전해지는 설화속에는 가끔 우리나라의 유명한 음택명당을 찾아 중국 사람들이
다녀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광주시 무등산의 장군대좌형의 대지명혈도 그와 유사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유택이 바로 그 이야기의 소재에 해당된다.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느끼고 있는 점이지만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비교해 보면
중국의 산세보다 우리나라의 산세가 더욱 빼어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관점은 그 당시 중국인들의 눈에도 들어왔을 것이고,
그중 고흥 오무산하의 화산이 대상이 됐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화산은 멀리서 봐도 특출하게 보이는 수봉중의 수봉이다.
그 뒤를 받쳐주고 있는 또 하나의 탐랑성의 준봉과 그 배경의 근조산이 되는
오무산은 후중함이 두드러진다.
큰 자라가 헤엄 치며 춤을 추었던 바다가 융기해서 그토록 중후한 산봉을 세웠다는 전설도 있다.
또 그 물형이 마치 큰 자라가 춤을 추는 듯한 형상을 가져 붙여진 산명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산도>에서 보듯 고흥반도의 태조산이라 할 봉두산에서 발조돼 삼봉, 천봉산을 타고 행룡한 용맥은
당재를 기점으로 점암면쪽으로 한가닥이 크게 좌선회룡해 운암산을 세우고 다시 이위, 기복, 과협을
거쳐 309m의 수덕산을 앉히고는 낙맥, 결인, 비룡한 다음 오무산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우선으로 화룡, 낙맥, 결인, 비룡을 거듭하다 목성체의 수봉 화산을 세우고는
그 아래 어딘가에 화심형의 가혈(佳穴)을 짓고는 그 멀고먼 행룡에 마침표를 찍는다.
필자는 화산 바로 직전의 짤록한 벌허리처럼 마디를 지은 결인처에서 부터 용맥의 행도상태를
엄밀하게 측정했다.
이른바 교구통맥법에 의해 용진혈적을 확인하고 진혈처를 찾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산도>에서 보듯 결인처에서 비룡하는 용의 행도 또한 비범했다.
모든 용맥의 흐름이 우선룡의 요인을 벗어나지 않았고, 신유룡(서서북맥)에서 미곤룡(서서남맥),
술건(서북맥)의 교도를 반복해 기룡하다가 마침내 서북맥에서 신유맥으로 박환한 뒤 우선으로
60도를 틀어 미곤맥으로 회미한 연후에 급낙맥으로 내려오다가 살며시 내려 앉듯이 완만한 지점에
작뇌 입혈하고 혈을 지으니 거기가 바로 화심혈이라는 믿음이 갔다.
전면에 정답게 조응하는 봉안산이 놓이고 그 뒤로 4~5겹의 조산이 중중하며 안골 깊은 곳에서
4철 흐르는 물은 혈처를 휘돌아 감돌며 좌선수로 빠져나가 수구를 이룬다.
또 평평하면서도 드넓은 내명당이 혈전에 정(靜)하게 펼쳐져 혈을 떠 받드니 볼수록 화려하고
참된 음택명당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어느 적덕이 두터운 사람이 그 화심혈에 선영을 안치했으니 축복받은 위선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장흥땅으로 발길을 재촉한다.(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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