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동안 황골 보존시킨 명당 地氣실감”
장흥지역 음·양택 명당 (억불산 아래 장군출진형)
|
장흥지역에서 호남 56대 명혈대지의 반열에 오른 음택명당은 단 1곳이다.
관산읍 학산아래 군신봉조형(신하들이 임금을 받들어 조배하는 모습)이 그 주인공이다.
호남대지 제3품 1위에 드는 수혈(秀穴)이다.
산세가 강하고 생기에 차 전국 대지에 비견되는 명혈인데다 호남대지의 계열로도 손색없는
가혈 대지들이 매우 많기로 소문난 곳이 장흥땅의 특징이다.
특히 장흥읍에서 50리 거리의 사자봉을 진산으로 삼아 깊이 몸을 숨기고 있는 보림사 앞쪽의
군왕대좌형은 옛부터 수 많은 풍수연구가들의 발길을 유혹했던 명혈로 소문나 있다.<산도참고>
하지만 임금 군(君)자가 혈명에 들어 있다고 반드시 군왕지지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혈을 맺기 위한 용맥의 교도가 어떠한지가 더욱 중요하다.
장흥에서 가장 많은 수혈을 포섭하고 있는 산이 바로 봉미산이다.
봉미산을 진산으로 삼아 그 주룡맥의 여기저기에 믿기 어려울 만큼의 명혈대지를 결작하고 있다.
‘날던 봉황새가 둥지에 들어 알을 품는다’는 비봉포란형을 비롯, 금구몰미형, 연소형 등 무려 11개소에
달하는 수혈대지의 음택명당이 봉미산 아래에 깃들어 있으니,
농한기만 되면 전국 도처로 부터 풍수연구가들의 다리품을 끌어 들일 수 밖에 없다.
이밖에 장평면 용문리에 소재하는 사룡희주형(四龍戱珠形), 월천시장상의 숙호형(宿虎形),
장흥 20리 사미동 인근에 자리잡고 주인을 기다린다는 보검출갑형과 장군대좌형, 북 20리거리의
지동리에 소재한 노승예불형 등 음택명당의 수가 13개혈에 이른다.
모두 24개의 승지가 되는 셈이다.
필자는 시간과 활동영역의 제한성 탓에 위에 열거한 대지명혈들을 일일이 답산하지 못하고
주마간산격으로 먼 발치에서 작혈처를 예측하거나 선사들의 결록을 통해 그 윤곽만 헤아려 보는데 그쳤다.
그래서 두번의 정확한 간산을 통해 독자나 풍수지리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학문적 동지들과 함께
간산기를 재음미하고 싶은 음택명당을 소개하려고 한다.
소개하려는 명혈은 장흥읍에서 서남쪽으로 10㎞쯤 떨어진 용산면 계산리 차동마을 뒷쪽 수리골에
소재하고 있다.
이 수혈은 이미 400~500년전 백씨 입향조와 그 증손자 및 7대손의 산소가 쓰여진 명당이다.
<산도>에서 보듯 억불산에서 발조돼 이위, 기복, 낙맥, 결인, 과협의 윤서를 뚜렷하게 밟아 금성체의
현무봉을 앉히고, 그 아래의 정(靜)한 자리에 혈을 맺어 행룡의 형상으로는 마치 장군이 적군을 향해
출진하는 ‘장군출진형’으로 보이기도 하고, 혈 주위의 사격이나 산세의 형상으로 보면 마치 모란꽃이
반쯤 피어나는 ‘모란반개형’같기도 하지만 혈전의 안·조산이 군막의 형세를 하고 있는데다 억불산의
성신과 거기서 현무봉까지 내룡한 용맥의 기세로 봐서 정녕 ‘장군출진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형국론적 해석이 가능했다.
또 혈을 맺기 위한 마무리 성신이 목성체로 두원단정(頭圓端正)하니, 인물형상으로 분류할 수 있고,
혈을 맺기 위한 마무리 용맥의 교구가 간, 건, 감괘의 교도로 형성되니 장군형상에 가장 많은
통맥교구인 까닭에 더욱 장군출진형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혈상의 물형론은 중요한게 아니다.
왜 그 많은 음택명당의 계열중에서 유독 이 묘소의 터를 소개하게 됐는가가 더욱 의미를 더해 준다.
당초 계획은 봉미산하의 비봉포란형이나 보림사 인근 사자산아래의 군왕대좌형, 제암산하의
옥녀직금형 등 3개 혈을 직접 답산하고 심룡, 심혈과정을 거쳐 나름대로 그 대소경중을 가려 하나의
명혈을 선정, 자세히 소개하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의 중요한 정보가 들어와 간산 대상으로 살펴 주기에 이르렀다.
그 정보는 수원백씨 입향조인 참판공 회의 산소와 그 증손자의 산소 및 7대손의 산소가 상중하의
종대로 돼 있었는데 입향조 회의 산소가 가운데 자리잡고 그의 7대 손자가 상단에, 그리고 증손자의
산소는 하단에 위치해 선후대에 근거한 상하의 위계질서가 지켜지지 않아 문중에서 논의한 끝에
중앙에 자리잡은 입향조의 산소만 그대로 두고 상하의 산소는 안양면의 족장지로 순위를 지켜
이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장하려고 파묘해보니
430년이 지난 증손자의 체백과 360년전에 안장했던 7대손의 체백 모두 윤색이 감도는 황골 그대로인
상태였다고 한다.
마침 장흥 토박이 김희준 전 장흥고등학교장과 이창호 전 경찰관서장으로 부터 이런 정보를 제보받고,
수원백씨 종친회 총무를 맡고 있는 백진수(장흥읍 부면장 역임)씨의 생생한 증언을 들은 후 곧바로
현지로 달려갔다.
우선 지면을 통해 이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용산면으로 들어서 10여분 차로 달리다 보니 버스정류소에 차동이라 쓰여진 안내판이 보였다.
그 지점에서 우회전해 차동마을을 왼쪽에 두고 산골길로 향하는 포장된 농로를 따라 수리골로 진입했다.
임도를 따라 500m 산길을 오르다 보니 마침내 망주석과 비석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소터에 오르니
꽤 높은 지대의 고혈에 속한데도 세찬 눈보라도 다소곳한 내림으로 바꾸어 주고 포근함을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내친김에 현무정에 오르니 손에 잡힐 듯이 또 하늘을 찌를 듯이 수고한 발조의 성신 억불산이 솟아 있고,
거기에서 뻗어내린 용맥과 높고 낮은 성신의 반복된 행도는 천하대지를 결작하고도 남을 만한 기상이었다.
현무정의 아래쪽까지 꿈틀거리며 용트림치던 내룡맥은 어느새 잘록한 속기처를 만들어 살기를 털어내고 여과되고 정제된 청기를 비룡맥에 실어 현무정에 이른다.
강세룡에 실려온 땅 기운은 현무정에 탄탄하게 응결돼 혈을 맺으려는 행룡의 교도를 시작한 것이다.
그 지점에서 용맥의 박환 상태와 용맥의 꺾여 나아가는 상태가 혈작의 여부를 가리는 결정적 변수다.
자세히 살펴보면 용맥의 교도는 축간맥(동북북맥)에서 우선으로 90도를 틀어 건술맥(서서북맥)으로
박환한가 싶더니,
어느새 45도를 좌선으로 박환해 혈장으로 살며시 내려 사뿐히 당판을 형성하고 혈장의 턱이라 할
전·순을 매듭짓고, 혈장 아래로 가만히 내려선다.
영락없는 태교의 대지다. 좌우의 청룡과 백호는 혈을 다정하게 감싸고 안쪽에 이르러 서로 교쇄되니,
그 너머의 바닷물은 수조를 이루고 그 건너 산들은 혈을 향해 조응하고 있다.
또 두개의 금성체 산으로 단정히 수문을 지키듯 놓여 있는 안산은 화표사로서 손색이 없다.
마치 적군의 군막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만한 수혈에 감도는 서기어린 지기가 있었기 때문에
430년과 360년 동안 체백을 황골로 오롯이 존속하게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만한 음택대지의 후손이 양택명당의 기운을 동시에 받아 태어나면 국가적인 동량이 배출되기 마련이다.
장흥군지에 오른 인물편을 분석한 결과, 장군출진형의 산소기운으로 태어난 인물이 수없이 많았다.
조선조 문과에 장원급제해 평안도 평사를 지내고 관서별곡을 쓴 광홍을 비롯 진사 이상의 벼슬길에 오른
후손이 20여명에 이르며 대제학 및 통정대부를 지낸 후손도 10명에 달한다.
특히 입향조 회의 증손자 정해군 수장은 1507년 2월 중조반정의 충신으로 청국 3등 공신에 올랐다.
현대의 인물 또한 많이 배출돼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서울대 백삼균 교수, 인천지법 백현사 판사, 육군 준장과 영관급에 오른 군인, 이사관 및 서기관급 등으로
관계에 입신한 인물도 15명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음택대지의 명혈에 든 선대의 후손들이 양택 가운을 동시에 입고 태어났다면
더 많은 인물이 더 큰 몫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간산을 통해 이 세상에는 명당터가 분명히 따로 존재함을 검증할 수 있었다.
석물만 설치하지 않으면 길지의 땅을 찾아 위선에 힘써도 된다는 믿음을 다시금 간직하게 됐다.
(펌글)
'풍수지리 > 풍수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진’에 비해‘혈적’ (0) | 2008.01.31 |
---|---|
사람도 땅도 인연따라 만나 (0) | 2008.01.31 |
금낭경(錦囊經) 하권(下卷) 원문과 해석 (0) | 2008.01.31 |
금낭경(錦囊經) 상권(上卷) 원문과 해석 (0) | 2008.01.31 |
청오경(靑烏經) 원문과 해석 (0) | 2008.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