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선친 묘 이장

오늘의 쉼터 2008. 1. 30. 13:14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선친 묘 이장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부친 남연군(南延君) 묘소는 처음에 안성 청룡산(安城靑龍山)에 있었다.

조선 헌종(憲宗) 15년(1849) 어느 날, 흥선은 성묘를 하기 위해 선친 묘소가 있는 청룡산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산 입구에 이르니, 남루한 납의(衲衣)를 걸친 한 스님이 길을 가로질러 막고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곧 흥선을 모시고 가는 종들이 달려가서 꾸짖기를,

"어떤 놈이 감히 대감 행차에 거만하게 길을 막고 누워 있느냐?

속히 일어나 피하지 않으면 매를 치고 끌어내겠다."라고 소리쳤지만,

스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누워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곧 종들이 달려들어 끌어내려 하는데, 흥선이 말 위에서 내려다보니 보통 스님과는 다른,

특이한 이승(異僧) 같았다.
"여봐라, 그 스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말고 물러서라." 흥선은 이렇게 말하고,

 말에서 내려 스님의 손을 끌어 일어나게 하고는 예를 표현했다.

그리고 스님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주막으로 들어갔다.
흥선은 식사를 시켜 함께 먹으면서 이야기를 해보니, 생각했던 바와 같이 보통 스님이 아니었다.

 흥선은 이 날밤 그 스님과 함께 자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해보니,

 스님은 산천의 풍수지리에 매우 밝은 분이었다

.밤이 깊은 뒤에 흥선은 스님에게 조용히 자신의 뜻을 밝혔다.
"내 마침 선친 묘소에 성묘하러 가는 길인데,

선친 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발복(發福)할 수 있는 장소로 이장을 하고자 합니다.

스님이 좋은 묏자리를 보아둔 곳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뒤에 일이 잘 풀리면 후사(厚謝)하겠습니다."


이렇게 해 이튿날 아침에 흥선은 스님과 함께 선친 남연군의 묘소가 있는 청룡산으로 올라갔다.
스님이 남연군의 묘역 주위 산세(山勢)를 살피더니,

 "이 자리는 크게 형통할 자리가 못 됩니다.

 내 일찍이 한 곳을 보아둔 곳이 있는데, 그 곳은 후손에 임금이 날 자리입니다." 라고 말하고,

 스님은 흥선을 데리고 보아둔 묏자리가 있다는 산으로 갔다.

가보니 그곳은 덕산(德山) 고을 가야동(伽倻洞)이었다.
골짜기에 이르니 오래되어 버려진 절이 하나 있었고,

그 절 법당 뒤 한 지점에 이르러, 스님은 사방을 둘러보고 말했다."이 자리입니다.

그리고 바로 며칠 뒤 어느 날이 좋으니,

그 날 선친 묘를 이장하도록 준비를 하십시오.

그 안에 나도 필요한 처치를 해놓겠습니다." 이렇게 약속하고,

 스님은 급히 산을 내려가 사라졌다.
약속한 날, 흥선이 선친의 관을 운반해 그 곳으로 가니,

스님은 미리 와서 거기에 있던 낡은 절 법당에 불을 질러 태우고 있었다.

법당이 타고나니, 오직 구리부처 하나만 타지 않고 남기에,

스님은 쇠망치로 그 구리부처를 부셔 골짜기에 땅을 파고 묻었다.

그런 다음에 지정한 자리에 묘를 써서 봉분을 만들었다.
이때, 여기 가야동에 오래 전부터 대대로 살고 있던 윤식(尹 )이 흥선의 묘

이장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찾아 왔다.
"대감은 '왕기(王氣)'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 이 가야산에 선친의 묘를 이장할 수가 있습니까?

무슨 불순한 동기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신성한 산에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항의하니,

스님이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설득했다.
"여기 지금 이장한 남연군도 영조 임금의 증손자이니,

역시 왕자왕손이므로 왕기가 있는 이 산에 묻힐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진정하십시오." 하면서 무마하니,

 윤식은 더 이상 우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렇게 하여 3년 후 임자(壬子: 1852)해에, 흥선은 둘째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뒤 계해(癸亥: 1863)해에 철종(哲宗)이 아들 없이 사망하니,

흥선의 둘째 아들은 12세에 왕위에 올랐고, 이가 곧 고종(高宗) 임금이다.

 이에 흥선은 대원군의 자리에 올라 섭정(攝政)을 하면서, 마침내 큰 세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후로 그 스님은 흥선과 밀접한 사이가 되었으며, 스님의 주관으로 남연군의 산소는

다시 묘역이 넓혀지고 봉분을 크게 단장했으며, 각종 석물(石物)을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근처에 새로 절을 지어 보덕사(報德寺)라 하고 사치스럽게 절 안을 꾸몄다.

이렇게 되니 오랫동안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윤식은 흥선의 세력에 밀려 견디지 못하고,

이 가야동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흥선이 국권(國權)을 잡고 세력을 행사하니,

스님은 흥선의 곁에서 제반 대소사의 자문에 응했다.

이 스님의 이름이 정만인(鄭萬人)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일본에서 온 왜승(倭僧)이라는 설과 또 서양에서 건너온 양승(洋僧)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이 이야기의 전반부는 위와 같이, 스님의 말을 듣고 흥선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왕기가 있는

덕산 가야동으로 이장하여 아들을 낳아 임금이 되었다는 이야기이지만, 후반부는 그 스님의 욕심을

나타낸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간교한 꾀를 부린 내용이 이어져 있다.
흥선대원군이 세력을 얻은 후에 하루는 스님에게 이르기를,

 "스님이 나를 도와 아들을 임금이 되게 했으니

이제 내가 스님에게 보답할 차례입니다.

스님의 소원을 말해보시오." 라고,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을 밝히니,

이때 스님은 말했다.

"내 소원은 무슨 물자가 아니고,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인판(印版)해 출간(出刊)하는 일입니다.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경판(經板)을 모두 밖으로 들어내어

책으로 찍어내는 작업을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흥선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곧 명령을 내려 팔만대장경 경판을 모두 건물 밖으로 가지고

 나와 먹물을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작업을 하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되니 경판을 쌓아 놓았던 판각(板閣) 건물에서 경판을 모두 끌어내게 되니,

결국 경판을 쌓았던 건물은 그 바닥이 드러났다.
스님은 경판의 인판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경판을 쌓아놓은 건물 중 가장 중심건물의 바닥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경판이 모두 밖으로 나오고 나니, 스님은 중심 건물에 들어가서, 그 경판이 놓였던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해인사에 처음 경판을 보관할 당시, 가장 중심 건물의 바닥에 '해인(海印)'이라는 보물을 묻어놓았었는데,

스님은 그 보물을 파내기 위한 술책으로 흥선대원군에게 경판의 인쇄를 제의했었다.

 그래서 경판이 모두 밖으로 나오고 나니, 스님은 바닥을 파서 보물인 해인을 꺼낸 다음,

훔쳐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앞서 이 스님은 오래 전에 해인사의 경판 쌓아놓은 아래 바닥에 묻힌 보물, 곧 '해인'을 훔치려고

계획했었는데, 경판들이 가득 쌓여 있어서 바닥을 팔 수가 없었다.

 그래서 흥선의 선친 묘를 왕이 태어날 자리로 옮기게 하고, 그 결과 흥선으로 하여금 대원군이 되게 한 다음,

그 세력을 이용해 팔만대장경 인판을 핑계로 경판을 다 들어내어, 바닥에 묻힌 '해인'을 파내려고 치밀한

계획을 수립한 것이었다.
이 '해인'은 그것을 가지게 되면 신통조화(神通造化)를 부릴 수 있는 보배였는데, 이것이 언제 해인사에 들어와 묻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판은 신라 지장왕(智藏王) 때 바다를 건너 들어왔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전설에는, '해인'이 묻혀 있었을 당시에는 판각 건물에 새가 배설물로 더럽히는 일도 없었고 거미가 줄을 치지도 않았는데, 그 스님이 '해인'을 훔쳐간 이후로 새가 오물로 더럽히고 거미가 줄을 쳐서 어지럽혔다고 말하고 있다.
충청도 덕산현의 가야산은 호중(湖中) 명산인데, 흥선이 이장(移葬)할 때와 고종이 탄생할 때,

그리고 고종 임금이 등극할 때, 모두 산이 크게 울음소리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무진(戊辰: 1868) 해 4월에 서양(西洋) 사람들이 배를 타고 구만포(九萬浦)로 들어와서,

 여기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했는데 그 때에도 역시 이 산은 울었다고 한다.
이때 무덤이 도굴 당하고, 다시 무덤을 만들 때, 관(棺)이 어디로 가고 없었는데, 일하는 사람들이

관 없이 그냥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부에 보고할 때에는 관의 훼손이 없었다는 허위보고를 했다고 전하고 있다.

뒤에, 관이 없었다는 소문이 퍼지니, 흥인군 이재원(興寅君李載元)을 파견해 상황을 살펴보라고 했는데,

와서 살펴보고서도 역시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알고 돌아갔다고 하니 한심한 일이라고 말하며 한탄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도굴 사고가 있게 된 것은, 앞서 이장을 할 때 스님이 구리 부처를 부셔버린 일 때문에

당한 재화(災禍)가 아닌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