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보

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오늘의 쉼터 2008. 1. 28. 19:39


종     목 국보  제198호
명     칭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79.05.22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
시     대신라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단양군

일반설명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전문설명


단양신라적성비는 높이93㎝, 윗너비107㎝, 아랫너비53㎝이며, 삼국시대에 신라가 죽령(竹嶺)을 넘어 단양 일대의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여 국경을 넓히고 이곳의 백성들을 선무(宣撫)한 표적으로 세운 비다.

당시 진흥왕이 명하여 신라척경(新羅拓境)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赤城人) 야이차(也이次)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이와 같이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의 포고 내용이 담겨 있다.

국왕의 교시를 받은 고관 10명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이사부(異斯夫), 비차부(比次夫), 무력(武力) 등 당시의 관계로 보아 이 석비의 건립년대는 신라 진흥왕 6∼11년(545∼550)경으로 추정된다.

1978년 1월 6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 조사되었다.




단양 신라 적성비

단양 신라 적성비

단양 신라 적성비

단양 신라 적성비

단양 신라 적성비

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