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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84호) 미타사 정수암 소조여래좌상

오늘의 쉼터 2023. 5. 4. 15:20

 

종    목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84호)
명    칭 미타사 정수암 소조여래좌상 (彌陀寺 淨水庵 塑造如來坐像)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 소조 / 불상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2021.11.04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시    대 일제시대(1930)
소 유 자 미타사 정수암
관 리 자 미타사 정수암

일반설명

○ 미타사 정수암의 소조여래좌상은 복장물이 처음 조성 당시 그대로 잘 남아있다. 특히 제작 시기와 조각승을 알려주는 조성발원문이 발견되어 이 상의 내력을 분명히 알려준다. 가장 중요한 조성발원문은 크기가 세로×가로 20×35cm이며 비단 위에 주서(朱書)한 것이다. 이 발원문을 통해 미타사 정수암의 소조여래좌상의 제작 시기와 조각승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발원문에는 이 불상을 위한 증명법사는 동고봉근(東杲奉根)이며, 금어는 춘담성한(春潭盛漢)이라고 적었다. 제작시기는 ‘世尊應化二千九百五十六年 庚午三月初二日神供十日点安 奉安于 普陀殿’라 적었다. ‘세존응화이천구백오십육년’은 1929년이며, 경오(庚午)는 1930년이다. 통상 이처럼 불기(佛紀)와 간지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 간지를 기준으로 하는데, 이에 따라 이 소조여래좌상의 제작시기는 1930년이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이 불상이 정수암 보타전의 주불이었음도 확인되는데, 보타전은 지금은 소실되어 없지만, 20세기 전반 노스님 생존시에 존재했던 법당으로 추정한다. 50여년전 보타전 소실 이후 법성스님이 새로 법당을 중창하여 지금(주지 상덕스님)에 이른다.

○ 조각을 담당한 춘담성한(春潭盛漢)은 원래 불화를 그리는 화승이다. 근대불화에서 일가를 이룬 금호약효(錦湖若效)의 제자이며, 보응문성(普應文性)과는 동문이다. 금호약효는 보응문성, 춘화만총(春花万聰), 호은정연(湖隱正淵), 춘담성한을 제자로 두었으며, 이후 금용일섭(金蓉日燮)으로 이어진다. 이들을 계룡사파(鷄龍寺派) 혹은 마곡사파(麻谷寺派)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계보는 <금호불모비(錦湖佛母碑)>를 통해 확인된다.(공주시·마곡사·한얼문화유산연구원, 『麻谷寺誌』, 한얼문화유산연구원, 2012, p.354.)

○ 이처럼 춘담성한은 불화를 그리는 화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23년에는 경남 하동 쌍계사에서 보응문성과 함께 대웅전 삼세불도 가운데 <석가설법도>를, 1925년에는 고산축연과 함께 법주사 대웅보전의 <사천왕도>를 그렸다. 1932년에는 석성화경(石城和璟)을 만나 함께 작품활동을 이어간다. 1932년에는 과천 연주암에서 석성화경과 함께 <아미타설법도>, <지장시왕도>, <신중도>를 그렸으며, 동시에 소조관음보살좌상과 소조대세지보살좌상도 석성화경과 함께 조성했다. 이후에도 석성화경과 함께 활동하는데 전남 담양군 용주사 소장의 원통사 치성광여래도를 비롯하여 충남 아산 옥련암이 소장하고 있는 1934년 <영산회상도>도 그와 함께 그렸다.

○ 이처럼 춘담성한은 불화작업에 매진했던 화승이지만, 흙으로 불상을 조성하기도 했다. 미타사의 소조여래좌상은 춘담성한이 석성화경과 함께 활동하기 전인 1930년에 춘담성한이 혼자 조성한 상이다. 이 상을 조성하기 3년 전인 1927년 이미 미타사 금보암의 <아미타삼존도>를 그린 것을 보면, 미타사와의 인연은 불상을 조성하기 이전부터 이미 맺어졌던 것으로 추정한다.

 

미타사 정수암 소조여래좌상
미타사 정수암 소조여래좌상
미타사 정수암 소조여래좌상
복장물
복장물
복장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