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한국의 野史

6. 一頭二身의 怪鳥

오늘의 쉼터 2018. 12. 8. 17:21

 6. 一頭二身의 怪鳥



유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3대 왕이 된 무휼태자가 바로 건국 기초를 완성한 대무신왕(大武神王)이다.

 
대무신왕이 즉위했을 때(西紀 18年) 그의 나이 11세였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왕자의 몸으로 부여군을 격파한 일까지 있으니
그것은 그릇 전해진 것이 아니면 왕이 비범한 인물임을 과장한 때문일 것이다.
 
왕은 즉위하자 무엇보다도 숙적 부여를 멸망시켜 화근을 없애버리고자 마음먹었다.
그래서 군비를 확장하고 기회만 기다리고 있는데 3년 10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파견하여
붉은 까마귀 한 마리를 보냈다. 머리는 하나인데 몸은 둘로 갈라진 괴조(怪鳥)였다.
 
대소가 그 까마귀를 보낸 데에는 계략이 있었다.
어느 날 부여 백성이 그 이상한 까마귀를 잡아서 왕에게 바치자
왕은 좌우 시시들에게 그런 새가 나타난 것이 어떤 징조인가를 하문(下問했)다.
그랬더니 한 시신이 제법 아는 체하면서 아뢴다.
 
“까마귀란 것은 원래 검은 법이온데 저렇게 붉은 빛을 하고 한 머리에 두 몸을 가졌으니
두 나라가 합칠 징조로 압니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시면 고구려는 우리의 것으로 될 줄 압니다.”
 
이 말을 듣자 대소는 대단히 기뻐했다.
대소는 그 신하에게 새가 나타난 징조를 글로 쓰게 했다.
 
<부여왕 대소는 고구려 대무신왕에에 새 한 마리와 이 글을 보낸다.
새란 본래 그 빛이 검은 법인데 이 새는 전신이 피로 물들인 듯 붉다.
곧, 멀지 아니 해서 크게 피를 흘릴 징조다.
또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인 것으로 미루어 둘로 갈라졌던 나라가 하나로 다시 합친다는 뜻이니
곧 멀지 않아 부여는 고구려를 쳐서 합치게 될 것이라는 하늘의 뜻임이 분명하다.>
 
새와 글을 받은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상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한 신하가 나서며 말했다.
 
“대왕, 염려 마시오. 결코 흉조가 아닙니다.
원래 까마귀란 검은 것이며, 검은 것은 북쪽을 가리키는 색입니다만,
이제 우리 고구려가 있는 남쪽을 뜻하는 붉은 색으로 변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원래 붉은 새는 상서로운 것으로 일컬어 왔는데 부여의 대소는
그것을 기르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이것으로 이루어 두 나라의 흥망은 과히 판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신하의 말을 들은 임금은 대단히 기뻐했다.
이번에는 그와 같은 뜻을 글로 써서 부여로 보냈다.
 
그 글을 받아 본 부여왕 대소는 자기의 경솔한 처사를 뉘우쳤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무신왕은 그 해 봄, 마침내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부여를 치기로 했다.
길조(吉鳥)를 얻어 백성들의 사기가 한창 높아졌으므로 가장 좋은 기회라 여긴 것이다.
왕이 거느린 군사가 이물림(利勿林)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날이 저물었다.
왕은 그 곳에 진을 치도록 분부했는데 그날 밤 문득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이나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왕은 소리 나는 곳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산등성이에 올라가 보니 쇳소리는 한층 요란스러워 왕은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런 즉 동편 골짜기에 푸른 달빛을 받고 무엇인지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다.
 
왕은 달려 내려가 보았다.
그 산골짝 움푹한 동굴 안에 창이며 칼 같은 무기가 잔뜩 쌓여 있는데
그것들이 바람에 부딪혀 그런 소리를 냈던 것이다.
왕은 곧 부하들을 불러 무기를 거두게 했다. 부하들이 무기를 거두는 걸 살피고 있던 왕은
무엇인지 발에 차이는 것이 있기에 집어 보았다.
 
그것은 금으로 만든 임금의 도장이었다.
하늘이 이렇게 무기와 금새(金璽)를 내려 주고 자기를 하늘이 보낸 임금으로 인정하신 모양이고 보니
이번 싸움에 크게 승리를 거두리라 여겨졌다.
왕과 장졸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 이튿날, 날이 새기를 기다려서 왕의 군대는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얼마를 갔을 때였다.
저편에서 괴상한 사나이가 다가왔다.
키는 9척이나 될 만큼 어마어마하게 크고,
얼굴은 백옥같이 희고 두 눈에서는 푸른 광채가 돌고 있었다.
왕의 말 앞까지 온 그 괴한은 공손히 절을 하더니 말했다.
 
“반갑습니다. 대왕,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대왕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그토록 나를 기다렸다고 하는가?”
 
“이 사람은 본시 북명(北溟)에 사는 괴유(怪由)라는 인간입니다.
들려오는 소문에 대왕께서 이번에 북부여를 치러 가신다기에 모시고 갈까 하옵니다.”
 
늠름하고 믿음직한 말이었다.
 
“좋아, 그러면 그대를 선봉장으로 삼을 테니 앞장 서 쳐들어 가 부여왕의 목을 베어라!”
 
괴유는 크게 기뻐하고 앞장을 섰다.
 
고구려군은 드디어 부여의 남쪽 국경을 넘어섰다.
그리고는 가만히 지세를 살펴보니
그 자리는 땅이 낮고 수렁이 많아서 진을 치자면 대단히 불리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소 높은 다리를 택해서 진을 치고 수렁이 있는 쪽은 일부러 비어둔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 왔다는 기별을 받자
교만한 부여왕 대소는 크게 웃으며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군의 진을 향해 돌진했다.
고구려군이 진을 친 맞은편 언덕에 당도했을 때였다.
 대소는 천천히 고구려군의 진을 살펴보더니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저 걸 보아라! 과연 소국이란 할 수 없다니까.
진하나 제대로 칠 줄 아는 장수가 없는 모양이군.
저기 저편을 내려다보아라. 아무런 방비도 없이 텅 비어 있지 않은가!”
 
부여군은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그 방비가 부족한 쪽을 향해서 쳐들어갔다. 그
러나 잠시 후, 부여군은 큰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수많은 인마는 수렁으로 밀려들어갔고 점점 허리까지 빠져 들어가 흙탕물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말들이 우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싸우기 전부터 이미 수라장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까닭이 없다.
 
“부여왕의 목을 벨 때는 바로 이때다. 누가 가서 속히 공을 세워라!”
 
왕의 말이 떨어지자 괴유가 칼을 빼어 들고 타고 있던 말을 치니
말은 두 발을 들고 한바탕 소리치고 적진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9척 괴한이 장검을 비껴들고 한 번 번득하면 그 앞엔 적의 목이 바람 아래 낙엽처럼 떨어졌다.
 
이것을 보자 부여왕 대소는 크게 노했다.
몸소 나서서 괴유와 마주 싸웠다.
그러나 얼마 싸우지 아니하여 대소의 목은 괴유의 칼날을 받고 떨어져 버렸다.
 
주몽을 비롯해서 고구려 왕실 3대의 숙적 대소는 이제 최후를 맞이했다.
대무신왕의 기쁨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괴유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는 한편 왕을 잃은 부여군사쯤은 단번에 섬멸될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왕을 잃은 부여군은 복수심에 불탔던지 오히려 용기백배(勇氣百倍)하여 고구려군을 포위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하는 동안에 고구려군이 무엇보다도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군량의 결핍이었다.
적군의 포위망을 뚫을 길 없으니 군량을 구해올 방법은 없고 미리 준비했던 군량은 이미 다 떨어졌다.
 
또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났다.
굶주린 군사들은 전투는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제는 적군에게 전멸 당하느냐 아사하고 마느냐 두 가지 중 한 가지 길밖에 남지 않은 듯 여겨졌다.
 
그런데 적에게 포위 된지 7일째 되는 날이었다. 
 갑자기 안개가 끼기 시작하더니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하늘이 돕는 바다.”
 
왕은 장수들을 불러 군사들로 하여금 풀을 베어 수많은 허수아비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허수아비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군기(軍器)를 잡히어 군영주위에 벌려 세워
의병(疑兵)을 삼아 적의 눈을 속인 다음 사잇길을 따라 몰래 포위망을 벗어났다.
 
워낙 굶주린데다 적에게 추격을 당하지 않으려고 강행군을 했으므로 군사들 중에는
기운이 다하여 죽어 넘어가는 자가 허다했다.
 
왕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국도로 개선하자 왕은 곧 잔치를 베풀어 굶주린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한편
전사한 자들을 후히 제사지내고 상하고 병든 자들은 일일이 문병하며 이렇게 사과했다.
 
“내가 부덕(不德)하여 너희들을 이렇게 고생시키니 실로 미안한 일이다.”
 
그런 즉 백성들은 왕의 인자한 덕에 감격하여 상하가 다 심신을 바쳐 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서했다.
 
부여왕 대소가 죽은 후 그 아우가 해두국(海頭國)으로 가서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대소의 종제는 부여백성 만여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항복해 왔다.
대무신왕 5년 7월이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숙망이던 부여를 합방하여 한층 더 강대한 국가가 되었다.
일두이신의 붉은 까마귀의 징조가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었다.
 
고구려의 국세는 날로 강성해 갔다.
대무신왕 9년 10월에는 왕이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왕모(王母)를 사로잡고 백성을 거두어 그 국토를 고구려의 군현(郡縣)으로 삼았다.
이렇게 되자 그 해 12월에는 구다국왕(句茶國王)이 개마국이 멸망했다는 말을 듣고
미리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이렇게 고구려의 강토가 넓어지고 국세가 강해지는 것을 보자
불안을 느낀 것은 대륙의 한(漢)나라였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의 힘이 더 커지기전에 눌러버릴 것을 생각하고
요동태수(遼東太守)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케 했다.
 
이 보고를 받은 대무신왕은 곧 대신들을 모아 놓고 전수(戰守)의 계책을 의논해 보았다.
그랬더니 병마를 총관하는 우보(右補)로 있는 송옥구(松屋句)가 진언(進言)했다.
 
“신이 듣기에 덕을 베푸는 자는 창성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합니다.
지금 중국은 나라가 어지러워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는데 그것을 진압하지도 않고
멀리 우리나라로 명분 없는 군사를 내어 쳐들어오니
요동태수가 공을 세우고 욕심을 채우려고 일으킨 일로 압니다.
그러하오니 기병을 내어 적군을 쳐서 섬멸하면 중국 조정에서는
더 원병을 내거나 하는 일이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智)는 그 의견을 반대했다.
 
“소적(小敵)이 아무리 강해도 대적(大敵)에게는 잡히고 마는 법입니다.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 군사를 비교해 보십시오.
어느 쪽이 많습니까?
그러하오니 계교를 써서 치면 모르오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줄로 아옵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왕은 을두지를 향해서 물었다.
 
“한병(漢兵)을 치는 계교란 어떤 것이오?”

“우리 힘으로는 한창 사기가 충전한 한병의 예봉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오니
대왕께서는 마땅히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시다가 적의 군사들이 피로함을 기다려 물리치는 것이
상책인 줄로 아옵니다.”

왕은 을두지의 의견을 채택했다.
왕은 곧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들어가서 수십일 동안 농성을 해보았으나
적군은 포위를 풀지 않는다.
오히려 고구려 군사의 사기만 저하할 뿐이었다.
그래서 왕은 다시 을두지에게 대책을 물었다.
 
“과히 염려할 것은 못 될 줄로 압니다.
한인들은 우리가 있는 성이 암석으로 되어 있으므로 물이 나는 샘이 없을 것이라 믿고
저렇게 포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증에 못 이겨 항복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니 우리의 식수가 풍족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 단념하고 돌아갈 줄로 압니다.”
 
“식수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거늘 어떻게 풍족한 체한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계교이옵니다.
마침 채 마르지 않은 연못에는 잉어 몇 마리가 있사오니
그것을 잡아 수초로 싸서 보내고 한편 주류를 곁들여 보내면
우리의 군량과 식수가 풍족한 것으로 믿지 않겠습니까?”
 
왕은 을두지의 의견을 따라 잉어와 술을 보내며 요동태수에게 글발을 띄웠다.
 
<과인이 우매하여 상국에 죄를 져서 장군의 백만 군사로 하여금
 이 곳까지 이르러 수고를 끼치게 하였으나
그 후의에 보답할 길이 없으므로 변변치 못한 물건을 보내오니
여러 장졸들에게 먹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능청스러운 술책이었다.
그 술책에 요동태수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성중에 그렇듯 먹을 것이 풍족하다면 아무리 오래 포위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간다면 대국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고구려왕에게 회답을 하고 군사를 거두어 회군했다.
 
<우리 황제께서 대왕의 뜻을 모르시고 군사를 내어 죄를 묻게 하시므로
이곳에 이르러 수십 일이 지났으나 대왕의 글을 대하니
유순한 말과 공손한 뜻이 조금도 대국을 가벼이 여기는 바가 없으므로
이대로 돌아가서 우리 황제께 고하도록 하겠소이다.>
 
역시 능청스러운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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