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解明王子의 悲劇
이성에게는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왕이었지만 유리는 새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는데 있어서는
신중하고 슬기로운 임금이었다.
그가 즉위한지 14년 되는 정월이었다.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파견하여 질자(質子)를 교환하자고 청해왔다.
대소는 이에 앞서 그의 소망대로 부여국의 왕위를 계승했던 것이다.
유리왕의 처지로 볼 때 대소는 선왕(=朱蒙)을 괴롭힌 숙적이다.
감정적으로는 질자까지 보내어 수교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여는 아직도 고구려보다 훨씬 강대한 나라다.
감정적으로 맞서다가 노여움을 사면 지극히 불리했다.
총명한 왕은 이 점을 잘 판별(判別)할 줄 알았다.
그는 태자 도절(都切)을 불렀다.
“네가 질자로서 부여엘 가야겠다.”
도절은 겁이 많고 용렬한 인물이었다.
“제가 질자로 가요?
그러다가 두 나라 사이가 험악해지면 저는 맨 먼저 죽고 마는 게 아니에요?
싫습니다. 아버님 다른 사람을 보내 주세요.”
벌벌 떨며 거절하는 아들을 보고 왕은 탄식했다.
“어리석은 아들이 나라를 망치는 구나!”
왕의 예견은 들어맞았다.
태자가 질자로 가지 않게 되자 부여왕 대소는 크게 노했다.
그해 11월 대소는 5만 대군으로 고구려 땅을 침공했다.
고구려의 군력으로서는 당해내지 못할 대군이었으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 수많은 장졸이 얼어 죽었으므로 부여국은 겨우 회군했다.
뜻하지 않게 고구려는 위기를 모면한 셈이었다.
이후부터 왕은 더욱 이웃나라와 분쟁을 회피하고 오직 안으로 국력을 키우기에 부심(腐心)했다.
용렬한 도절이 그 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왕은 그 대신 해명왕자(解明王子)로 태자를 삼았다.
해명은 도절과는 반대로 용감한 젊은이였다.
힘도 강하고 무술에도 능했다.
왕은 그것이 대단히 대견했으나 한편 격하기 쉬운 성격이 은근히 염려스러웠다.
유리왕 22년, 왕은 국내(國內)에 위나암성(尉那巖成)을 축조(築造)하고 천도했다.
그러나 해명은 천도에 반대하고 고도(古都)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들의 태도가 달가울 리는 없었지만
왕은 그 무용을 아끼어 과히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왕과 태자 사이가 결정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해명태자의 용명은 고구려 나라 안 뿐만 아니라 널리 이웃나라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고구려는 근처에 황룡국(黃龍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도 해명의 용명을 듣고 그 힘을 시험해 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황룡국 사람 중에 아무도 당기지 못하는 강한 활을 만들어 사신을 시켜 보내고
태자의 힘이 과연 강하다면 이 활을 듣자 해명은 껄껄 웃었다.
“나에게 어린애 장난감 같은 활을 쏘아 보란 말이요?”
그리고는 그 활시위를 한 번 힘껏 당기니 그렇듯 강한 활이 뚝 부러지고 말았다.
황룡국의 사자는 크게 놀랐다.
“태자는 과연 천하장사이옵니다.”
그러자 해명은 다시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 힘이 강한 것이 아니요.
활이 너무 약해서 꺾어졌으니 다시 내 힘을 시험할 의향이 있거든
훨씬 더 강한 활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라고 왕에게 전하오.”
사자가 돌아가서 그대로 전하니 황룡국 왕은 몹시 부끄러워했다.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구나!”
그리고는 고구려에 해명태자가 있는 한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하고
군비를 확장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 사실이 새 서울에 있는 유리왕의 귀에 들어가자 왕은 크게 노했다.
즉시 황룡국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해명은 비록 내 자식이지만
이웃나라에 무례한 짓이 많았으니 죽이도록 하시오.”라고 부탁했다.
이것은 해명의 거만한 태도를 미워한 때문도 있었지만 그 보다도 해명이 힘을 과시한 때문에
황룡국에서 군비를 확장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해명을 없애버리면 황룡국에서도 고구려측에 딴 뜻이 없음을 깨닫고 경계를 풀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유리왕의 말은 황룡국 왕에게도 반가운 말이었다.
해명태자만 없앤다면 마음 놓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황룡국 왕은 사람을 보내어 태자와 만날 것을 청했다.
황룡국 왕이 만나자는 의도 어떠한 것인지 해명태자 자신도 그의 측근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태자의 측근자는 태자가 황룡국으로 가는 것을 극구 막았다.
“이웃나라에서 까닭 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반드시 음흉한 속셈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가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믿는바가 있는 태자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염려들 마라.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어찌 황룡왕이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해명은 즉시 황룡국으로 향했다.
황룡국 왕은 해명이 오는 길로 죽일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해명이 당도한 것을 보자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그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할 뿐 아니라
그를 죽이는 날에는 유리왕은 비록 가만히 있을는지 모르지만
해명을 추종하는 부하들도 적지 않고 모두 다 굉장한 용사들이므로
어떠한 분란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예를 갖추어 후히 대접하고 그냥 돌려보냈다.
황룡국 왕이 해명을 무사히 돌려보냈다는 말을 듣자 유리왕은 더욱 난처했다.
특히 해명의 세력을 두려한 나머지 돌려보냈다는 점이 불쾌했다.
이대로 둔다면 밖으로는 이웃나라들이 모두 경계해서 고구려는 고립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안으로는 날로 강성해지는 해명의 세력이 부왕의 위치까지 위협할는지 알 수 없다.
유리왕은 마침내 해명에게 사람을 보내어 꾸짖었다.
“내 도읍을 옮겨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자 했거늘
너는 내 뜻을 거역하고 그 곳에 그냥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조그만 힘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으니 아비에게는 자식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한 셈이고
나라에는 전란을 불러일으키는 죄를진 셈이다. 마땅히 죽어야 하겠다.”
사자는 유리왕의 말을 전한 다음 왕이 자결하라고 보냈다는 칼을 내주었다.
칼을 받아들자 해명은 눈물을 뿌리며 탄식했다.
“부왕께서는 그렇듯 나를 알아주시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내 이 칼로 죽을 수밖에 없다.”
즉시 칼을 뽑아들고 목을 찌르려 하자 곁에 있던 늙은 신하가 칼을 뺏어 들며 간했다.
“태자 잠시 참으시오.
대왕의 맏아드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태자께서 마땅히 그 뒤를 이으셔야 할 몸인데
지금 자결하신다면 나라 일이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대왕께서는 직접분부하신 것도 아니고 사자가 전한 말이니
그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나 해명은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일찍이 황룡국 왕이 강한 활을 나에게 보냈을 때 내가 그것을 꺾어버린 까닭은
그가 우리나라를 가벼이 볼까 염려해서 힘을 과시했던 것이지만 부왕께서는
그 행동이 오히려 분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시니 부왕과 나 사이엔 메울 수 없는
생각의 틈이 있는 거야.
이대로 가다가는 그 틈이 점점 벌어지고 신하들도 강한 생각을 갖는 파와
유한 생각을 갖는 파로 갈라질는지도 몰라.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서도 나는 없어져야 해.”
해명은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홀몸으로 여진 동원(礪津東原)으로 달려가더니 땅에 창을 거꾸로 꽂아 놓았다.
그리고는 말을 달려 그 주위를 돌다가 스스로 몸을 날리어 그 창끝에 꽂혀 죽었다.
이 끔직한 자결의 방법만 보아도 그의 성격이 얼마나 강렬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유리왕 27년 3월, 이때 해명의 나이 한창 젊은 2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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