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한국의 野史

2. 朱蒙과 禮氏夫人

오늘의 쉼터 2018. 12. 6. 17:44

 2. 朱蒙과 禮氏夫人



주몽은 곧 이 곳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모친 유씨와 작별하는 것도 슬픈 일이었지만 헤어지기 어려운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아내 예씨(禮氏)였다.
주몽은 몇 달 전에 예라는 어여쁜 처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예씨는 이미 주몽의 아기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떠나시면 언제 또 만날 수 있겠어요?”
 
예씨는 주몽의 소매를 잡고 울기만 했다.
 
“사람이란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또 다시 만나는 법이요.
그대가 잉태한 아기나 잘 낳아 때를 기다리도록 하오.”
 
주몽은 이렇게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장차 제 몸에 무슨 변이 있어서 아기가 혼자 아버님을 찾아가는 날에는
 어떻게 서로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겠어요?”
 
“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나의 유물(遺物)을 일곱 모가 난 돌 위 소나무 아래 감추어 두었으니
그 아기가 만일 사내아이거든 그것을 찾아가지고 나를 만나러 보내오.”
 
주몽은 수수께끼 같은 말 한마디를 남기고 마침내 예씨와 작별(作別)했다.
 
주몽은 길을 떠날 때 전부터 친히 지내오던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부(陜父) 등
세 젊은이와 준마를 거느리고 떠났다.
그들 일행이 한참을 가다가 엄호수(지금 압록강 동북쪽에 있었다고 한다.)에 당도했을 때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건너갈 다리가 없을 뿐 아니라 배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주몽이 도망간 것을 안 왕자들의 군사가 추격해 오지 않는가.
이때 주몽이 위기를 모면하여 그 강을 건너게 된 경위 또한 신비스럽다.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부딪친 주몽은 하는 수 없이 하늘에 도움을 빌었다.
즉 채찍을 높이 들어 하늘을 향해 외쳤다.
 
“천제의 후손이며 하백의 외손이 난을 피하여 여기까지 왔다가 목숨을 잃게 될 곤경에 빠졌나이다.
슬프고 외로운 이 몸을 천지신명(天地神明)은 굽어 살피소서.”
 
이렇게 애소한 다음 활을 들어 강물을 치니 난데없는 물고기와 자라들이 무수히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었다.
주몽과 세 동지는 그것을 밟고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으나 뒤미처 추격해 온 왕자들의 군사가
건너려 하자 고기와 자라들은 모두 흩어져 버려 수중고혼(水中孤魂)들이 되었다.
 
또 이런 전설도 있다.
그후 한참 길을 가다가 양식이 떨어졌다.
마침 인가에서 먼 산중이라 먹을 것을 구할 길이 막연했다.
네 사람은 기진맥진(氣盡脈盡)해서 나무 그늘에 의지하고 있으려니까
어디선지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와서 나무 가지에 앉았다.
 
죄 없는 날짐승을 죽이기는 싫었지만 굶어 죽느니보다는 나리라 생각하고 활을 쏘아
떨어뜨린 다음 배를 갈라 보니 뜻밖에도 그 속에 보리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제야 그 비둘기를 자세히 보니 모친 유화가 항상 귀여워하던 비둘기들이었다.
 
"어머님이 내가 굶주릴 것을 염려하시고 이것을 보내신 모양이구나!"
 
주몽은 그 보리알을 모두 꺼내어 밥을 짓는 한편 비둘기의 배를 꿰매고 물을 뿌렸더니
비둘기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북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들 일행이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렀을 때 다시 동지 세 사람을 얻게 되었다.
한 사람은 베옷을 입고 한 사람은 누비옷을 입고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이며 성명은 무엇인가?"
 
주몽이 물으니 베옷을 입은 사람은 재사(再思)라 하고 누비옷을 입은 사람은 무골(武骨)이라 하고
수초옷을 입은 사람은 묵거(默居)라 했다.
그 이름이나 복장으로 미루어 재사는 농사일에 농할 것 같았으며 무골은 전투에 능할 것 같았고
묵거는 낚시질고 고기잡이에 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재능에 따라 앞으로 할 일을 맡기는 한편 재사에게는 극씨(克氏)라는 성을 주고
무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을 주었다.
 
이후부터 주몽의 덕(德)을 흠모(欽慕)하고 모여 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졸본촌(卒本村)에 이르렀을 때에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 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직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으므로 비류수(沸流水) 상류에 집을 짓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칭하고 자기 성을 고씨(高氏)로 짓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바로 한 효원제 건소(漢孝元帝建昭) 二년(西紀前三七)이었으며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위에 오른지 二十一년 되던 해였다.
그리고 주몽은 이때 二十二세라는 젊은 나이였다.
그 후 주몽은 말갈족(靺鞨族)을 정벌하고 비류국(沸流國)을 합방해서 국위를 점점 떨치니
그가 다스리게 된 민가는 실로 二十一만五백八호나 되었다고 한다.
 
주몽이 망명한 후 동부여에 남아 있던 예씨는 달이 차자 과연 옥동자를 낳았다.
예씨는 아들의 이름을 유리(類利)라 지어 주고 정성껏 키웠다.
주몽의 모친 유화는 금와왕의 애호를 받아 편안한 세월을 보냈으나
예씨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어 가난과 고생 속에 오직 유리의 성장만을 낙으로 삼고 살아왔다.
유리도 부친 주몽을 닮아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즐겨했다.
날만 새면 산과 들을 달리며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을 사냥하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세월은 흘러 유리는 어느덧 세상 물정을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소년이 되었다.
그날도 유리는 거리에서 새를 쏘다가 화살이 빗나가서 물 긷는 여인의 물동이를 깨뜨렸다.
여인은 노발대발(怒發大發)했다.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더니 저 녀석도 애비 없이 자라서 저렇게 버릇없는 짓만 하는 모양이야.”
 
이렇게 욕설(辱說)을 퍼부었다.
 
그말을 듣자 유리는 부끄럽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즉시 집으로 달려가서 모친에게 따졌다.
 
“어머니 남들은 날더러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어째서 계시지 않아요?
돌아가셨으면 무덤이라도 있을 텐데 어째서 한 번도 그 곳을 찾아가지 않으세요?”
 
아들의 말을 듣고 예씨는 이제 모든 것을 밝힐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똑똑히 듣거라. 유리야. 너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신 게 아니라 훌륭히 살아 계신단다.”
 
“그럼 어째서 우리하고 같이 사시지 않나요? 지금 어디 계세요?”
 
예씨는 주몽이 망명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한 다음
“지금 너의 아버지는 남쪽 땅에 고구려란 나라를 세우고 임금으로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계시 단다.
그러니 이제 너도 아버지의 유물을 찾아가지고 가서 후사가 될 차비를 하여라.”
 
이렇게 말하니 유리는 입 속으로 몇 번이나
 “일곱 모 난 돌 위 소나무 아래 감추어 둔 유물…”
이라고 중얼거리며 산 속으로 달려갔다.
일곱 모 난 돌 위에 서 있는 소나무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다녀도 소나무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낙심(落心)을 하고 집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까
바로 자기 집 한 기둥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즉시 그 기둥 밑을 파 보았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끊어진 칼 한토막이 나왔다.
 
깜짝 놀란 유리는 그 주춧돌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분명히 일곱 모가 난 주춧돌이었다. 
그리고 기둥은 틀림없는 소나무로 깎은 것이었다.
 
“일곱 모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둔 유물… 그것이 바로 이 칼끝이로구나!”
 
유리와 예씨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는 즉시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등 평소부터 친히 지내오던 동지들과 함께
부친을 찾아 고구려(高句麗)로 향했다.
그때 유리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고구려(高句麗)로 찾아간 유리가 주몽을 뵙고 스스로 왕자라고 칭하자
주몽은 처음 대하는 늠름한 젊은이를 자세히 뜯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일 내 아들이라면 내가 감추어둔 유물을 가지고 왔을 텐데 어디 내보아라.”
 
유리는 즉시 품에 품고 온 칼끝을 바쳤다.
주몽이 즉시 그 칼끝을 자기가 가지고 있던 칼 토막과 맞추어보니 꼭 들어맞았다.
 
“반갑다. 유리야! 너는 과연 내 아들이다.”
 
크게 기뻐한 주몽은 곧 유리를 세워 태자를 삼았다.
 
주몽은 나라를 세우자 예씨 이외에 월군녀(越郡女)라는 여인을 맞아 비를 삼고 두 아들을 얻었다.
큰 아들은 비류(沸流)라 하고 작은 아들은 온조(溫祚)라 했다.
두 아들은 유리가 태자가 된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특히 큰 아들 비류는 이때까지 다음 왕위는 자기가 계승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유리를 태자로 세운데 대한 불만은 한층 더했다.
그래서 아우 온조와 함께 남쪽으로 망명해 버렸다.
 
이렇게 돼서 명실 공히 다음 왕위의 계승자가 된 유리는 곧 부왕에게 간청해서
다시 모친 예씨를 모셔와 근 20년이나 헤어졌던 세 사람은 반가운 해후를 했으나
그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해 9월 주몽은 우연히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슬픔 속에 부왕을 용산(龍山)에 장사 지낸 유리는 부왕을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받들어 부르고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곧 제2대 유리왕(瑠璃王)이며 때는 서기전 19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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