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모래시계

<제17회> 모래시계

오늘의 쉼터 2018. 11. 7. 19:07

<제17회> 모래시계 




# 1 교도소 면회실


면회실 안의 문이 열리고 간수의 안내를 받아 나오던 강대영, 기다리던 사람을 보고 멈칫 선다.

칸막이 저편에 우석이 있다.

대영, 의심스러워하며 멈칫멈칫 다가선다.


우석 : 건강하지요?


대영 : 여긴… 아니 왜 검사님이 여기루 이렇게…


우석 : 오늘은 검사 자격으루 온 거 아니에요. 그냥 아는 사람으루 면회 왔어요.


대영 : (영 의심이 풀리지 않아 우석을 보고 뒤에 선 간수를 보고)


우석 : 나 이번 사 건에선 손 뗐어요. 손 뗐는데, 한 가지 영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서 왔어요.


대영 : (뻗대듯)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데요.


우석 : (끄덕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이번 일 … 박 회장 살해사건… 윤재용 회장이 시킨 거 아니죠?


대영 : 변호사 있는데서 얘기하겠수. 내 변호사 만나보슈.


우석 : (피식 웃고) 알아요. 좋은 변호사와 손을 잡았드군요. 내 알기론 아주 비싼 변호사든데…


대영 : (딴 데만 쳐다보는)


우석 : 부인하고 애들 만나봤어요? 가장이 잡혀 들어갔는데 그다지 생활 걱정은 안 하는 거 같더군요.


우석, 강대영을 가만 본다.

대영, 우석의 시선을 마주 받지 못한다.

우석, 그런 대영을 보다가 낮게 한숨을 쉰다.

씁쓸한 미소가 스친다. 짐작을 확인한 기분이다.

우석, 미련 없이 일어선다.



# 2 교도소 밖


기다랗고 높은 담장

그 옆을 걸어 나오다가 우석, 문득 멈춰 선다.

발밑의 땅을 툭툭 차본다.

담장에 기대어 선다.

잠시 갈 곳을 몰라 하는 기분.

그 위에


검사장 소리 : 점수로 매기면 몇 점이나 받을 거 같애요?



# 3 검사장실


마주 앉은 우석과 검사장


검사장 : 내 보기엔 40점두 안 돼요. 낙제에요, 낙제.


우석 아무 말 없이 앉아있지만 이미 마음의 결정을 끝낸 평온한 얼굴.


검사장 : 강 검사 언제나 그런 식이에요? 뭐 좀 해볼려다가 안 되면 애들처럼 삐져서 사표 던져요?


우석 : 죄송합니다.


검사장 : 그러니까. 강 검사 사표 던지는 속뜻이 뭐에요? 나는 소신껏 정의롭게 일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 바닥이 너무 썩어서 내 뜻을 몰라준다. 에이, 더럽다 집어치우자, 그런 거 아니에요?


우석 :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검사장 : 이 바닥에서 일하는 선배 동료들… 죄다 소신 없구 정의롭지 못해서 아직 사표 던지지 못하구 있다… 그런 거예요?


우석 : ……제가 분수를 몰랐던 겁니다. 전 처음부터 자격이 없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제가 주제넘었다구 생각하구 있습니다.


검사장 : 그럼 날 이해시켜 봐요.


우석 : (잠자코 보다가) 80년 5월 전 광주에 있었습니다. 계엄군이었습니다.


검사장 : (끄덕 없이) 그래서요?


우석 : 아버님 유언이 아니라면 사법고시 같은 건 치지 않았을 겁니다.


검사장 : 그래서요?


우석 : (말이 막혀 보는)


검사장 : 어리광부리지 마세요.


우석 : 어리광이라고 하셨습니까?


검사장 : 그만한 상처없이 사는 사람 별루 없어요. 혼자만 생각 많이 하구 사는 거 아니에요.


우석 : (더 이상 얘기 할 것을 단념하고 일어선다) 그동안 고마왔습니다.


검사장 : (말없이 보는)


우석 : (고개 숙여보이고 돌아서 가는데)


검사장 : 강 검사.


우석 : (돌아보면)


검사장 : 광주 얘기, 다른 사람한테는 할 거 없어요.


우석, 문득 전해져오는 따뜻한 마음에 끄떡인다.



# 4 법원 근처 술집


우석 한 잔을 단숨에 비운다.

돌아보는 곳, 오 계장이 술 마시다 말고 잠이 들어있다.

우석, 다시 한 잔을 따르고 잠든 오 계장에게 건배를 하고 마시다가 멈춘다.

입구 쪽에 들어서고 있는 신영진 기자.

두리번거리며 찾다가 우석을 발견하더니 곧바로 와서 앉는다.


영진 : 아이구 다리야 이 근처 술집은 죄 뒤졌네. (신을 벗고 아예 책상다리로 올라앉는다.)나눠 마십시다. (오 계장의 잔을 들어 내민다)


우석 : (말없이 따라준다)


영진 : 사표 냈다면서요? 그럼 이제 변호사 하는 거예요? (술잔은 입에만 댔다가 내려놓고) 하긴 변호사 쪽이 돈은 더 벌수도 있어요.


우석 : (담배갑을 내밀어준다)


오 계장, 끄응 소리를 내며 불편한 듯 자세를 옮겨 계속 잔다.


영진 : (한가치 빼어 입에 물고) 오 계장님은 벌써 가셨네. 이래서 오 계장님하군 술마시면 안 돼요. 맥주 두 병, 양주 넉 잔이면 주무시거든요.


우석,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있는 영진을 말없이 보고 있다.


영진 : 사무실 얻을 돈은 있어요? 광고지는 안 돌리구요?


우석 : 술 안 들어요?


영진 : 한동안 엄청 마셨거든요. 덕분에 위에 고장이 났어요. 좀 쉬는 중이에요.

 

우석 : (웃는)


영진 : 왜 웃어요?


우석 : 담배 끊은 거 아니죠?


영진 : 담배요?


우석 : 처음부터 필 줄 몰랐죠? 술도 처음부터 마실 줄 몰랐구요.


영진의 앞에 놓인 술잔에는 술이 그대로 채워져 있다.


영진 : ……어떻게 알았어요?


우석 : 몰랐어요. 넘겨짚었어요.


영진 : (보다가 흐흥 웃어) 아깝네요. 괜찮은 검사가 됐을 텐데…


잠시 둘 말이 없다.

옆자리에는 남녀가 마주앉아 다정하게 술을 마시고 있다.

그들을 구경하다가


영진 : (불쑥) 변호사라는 거 검사들한테는 마지막 카드가 아닌가요? 쫓아낼래면 내라. 그래도 난 먹고살 수 있다. 그렇게 쓰는 건데… 아까운 카드를 너무 빨리 던져버렸어요.


우석 : (웃고) 검사라는 직업, 게임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저만치 카운터에서 종업원 전화를 받아…


종업원 : 강우석 씨, 손님 중에 강우석 씨 계세요?


우석, 실례한다는 표시를 보이고 카운터 쪽으로 간다.

영진, 혼자 물 컵을 찾아 마시는데 오 계장, 부시시 일어나 앉더니…


오 계장 : 강 검사 괜찮은 남잡니다. 남자가 볼 때 괜찮은 남자가 진짜 괜찮은 남자라구요. 그 거 압니까?


영진 : 언제부터 깨어있었어요?


오 계장 : 신 기자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을 때부터…


카운터 쪽에선 우석이 전화를 받고 있다.


오 계장 : 어떤 여자한테는 별 볼일 없는 남자일수도 있을 거예요. 돈 욕심 없지, 출세 욕심 없지. 그런데 이 거 하난, 내 장담할 수 있어요. 강 검사, 태어날 때부터 바람 같은 건 못 피게 태어났어요. 일단 한번 혼인신고하구 나면 평생 보증수표에요. 한번 해봐요.


오 계장, 말하다보면 영진 어이없어 보고 있다.

오 계장, 멋쩍어져서 딴전을 피우는데 전화를 끝낸 우석, 급히 다가와 윗도리를 집어 든다.


우석 : 먼저 가야겠습니다.


오 계장과 영진이 뭐라 대꾸하기 전에 벌써 가고 있다.


오 계장 : 하숙집 아가씨일 겁니다. 여기 들어서자마자 전화했거든요.


영진, 저도 모르 게 술 한 모금을 마시다가 써서 찌푸린다.


오 계장 : (답답하다는 듯) 차 안 갖구 왔어요?


영진 : 네?


오 계장 : 마감 지나서 기사쓸 거예요?


영진 멍해서 보다가 벌떡 일어선다.



# 5 술집 앞


택시를 잡으려고 애쓰는 우석.

그 앞에 와서 서는 차.

영진이 상체를 기울여 조수석의 문을 열어준다.

우석, 잠시 망설이다가 탄다.



# 6 병원 복도


우석 빠른 걸음으로 와서 접수구에 위치를 묻는다.

간호사가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르쳐준다.

우석 뒤를 돌아본다. 따라온 영진 저만치 서있다가 딴 데를 본다.

불청객인 셈이다.

우석, 상관없이 간호사가 가르쳐 준 곳으로 간다.

영진, 자신이 좀 한심해보이긴 하지만 따라간다.



# 7 중환자실 앞


대기 의자에 앉아 손수 건만 쥐어 뜯고있던 선애,

다가오는 우석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선다.


우석 : (중환자실 쪽을 보고) 저녁때만 해도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선영 : 괜찮으셨어요, 괜찮았는데… (그새 혼자서 공포에 질려있었다. 우석을 보자 갑자기 긴장이 풀어지며 횡설수설하여) 텔레비전 보시다가 갑자기… 병원에 전화했는데 앰블런스가 없다구. 택시를 잡아야 해서 아버지만 놔두구 ……택시두 없구 돈두 안 갖구 와서…


우석 : (선애의 어깨를 잡아) 됐어요. 별일 없을 거예요. 병원에 왔으니까 됐어요. 접수는 했어요?


선영 : 돈이 모자라서… 입원할래믄 돈을 미리 내야 된다구…


우석 : 제가 다녀올 게요.


돌아서 가려다가 보면 선영, 우석의 옷자락을 움켜쥐고있다.

선영, 우석의 옷자락을 움켜잡은 채 결국 비죽비죽 울음이 나오고있다.

우석, 얼핏 영진 쪽을 본다.

이만치에서 영진,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 채 그들을 본다.

우석은 우는 선영을 위로하고 있다. 영진 쪽은 다시 보지 않는다. 신경을 끄기로 한듯.

영진, 그들을 보다가 혼자 웃고, 그리고 돌아선다.



# 8 윤 회장 집 전경



# 9 윤 회장 서재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떨어져 내리고 있다.

혜린 그 너머로 보이는 영재를 보고 있다. 영재는 아내와 전화를 하고 있다.


영재 : 내일 병원 가는 날이지? 혼자 괜찮겠어? 웬만하면 전화해서 이틀 미루지. 내일이면 내가 갈 텐데. 어 ……여기 시간으루, 오후 한시 출발이야. 몸두 무거운데 공항에 나올 거 없어. 글쎄 집에 있어.


영재는 아내에 대한 정겨움으로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다.


영재 : 혼자 있다구 대충 먹는 거 아냐? 과일 사놓은 건 아직 남았어? ……오렌지는 2번가에서 사. 거기 오렌지가 좋아. 응 …


영재, 문득 보면 혜린, 문을 나서고있다. 그 모습에 잠시 말을 잊었다가…


영재 : 아니 듣구 있어. 어.



# 10 정원


혜린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영재 다가와 옆에 선다.


영재 : 너한테 미안 하대. 아버지 장례식에도 못 오고 시누이 볼 면목이 없댄다.


혜린 : 예정일이 얼마 안 남았다며. 안 데리구 오기 잘했어. 내 조카가 비행기에서 태어나는 건 나두 싫어.


일부러 밝게 얘기하는 혜린을 보다가


영재 : 나야말루 미안 하다. 모든 걸 너한테 떠맡기구.


혜린 :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은 건 나야. 내 나이에 나만큼 부자가 된 사람 없어.


영재 : 혜린아.


혜린 : 응.


영재 : (말없이 보다가) 미안 해.


혜린 : (미소 짓고 있지만 목이 메는)…


영재 : 어뜩하니. 너 혼자 이렇게 힘들어서.


혜린, 언뜻 말을 못하다가 영재의 품에 고개를 박는다.

그런 혜린을 안아주는 영재.

잠시 그대로…



# 11 대문 앞


장근섭이 운전하고 영재를 태운 차가 떠나간다.

대문간에 선 혜린과 민 변호사.

혜린, 손을 흔들어 보낸다.

차가 멀어지자 혜린, 차가운 얼굴로 돌아간다.


혜린 : 날짜 잡혔어요?


민 변호사 : 일주일 뒤야. 주주총회 처음이지?


혜린 :


민 변호사 : 숫자는 얼마 안 되지만, 하나같이 보통은 아닌 늙은이들이야. 할 수 있겠어?


혜린, 민 변호사를 돌아보는데 생긋 웃고 있다.



# 12 서재


민 변호사 한 아름의 서류와 장부를 책상에 올려놓는다.

혜린, 민 변호사가 알려주는 장부의 세목들을 듣는다.



# 13 혜린의 방


침대 가득한 서류들…

바닥에도 널려있는 장부들…

혜린, 바닥에 퍼질러 앉아 커피를 마셔가며 장부들을 살펴보고 있다.

창 밖은 어두운 밤



# 14 식당


혜린 아침으로 빵을 먹으며 어깨에 건 전화를 하며 건너편의 민 변호사가 알려주는 서류의 내용을 듣고 있다.

커피잔을 향해 손을 뻗치는데 어느 틈에 다가온 재희, 커피잔을 치우고 우유잔을 놓아준다.



# 15 욕실


욕조에 물이 넘치고 있다.

그 옆에 옷을 입은 채 서성이며 서류를 보고 있는 혜린.

졸리고 피곤하여 서류의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서류를 든 채,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욕조에 들어간다.

주저앉은 채, 서류를 든 손은 높이 올린 채 멍하니 천정을 보다가 얼굴을 물 속에 박아버린다.



# 16 새벽 거실


새벽 운동을 끝내고 들어서던 재희, 소파에 잠들어있는 혜린을 본다.

소파 주위에는 서류들이 흩어져있다.

재희, 조심스레 다가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담요를 혜린에게 덮어주고 혜린이 손에 들고있는 서류를 빼내 테이블에 놓는다.

혜린, 끄응 돌아눕는다.

재희, 옆에 앉아 잠든 혜린을 바라본다.

안쓰러움과 비밀스러운 애정.



# 17 건물 복도


(회의실이 있는)

혜린과 민 변호사, 재희 걸어온다.



# 18 회의실


혜린네 들어선다.

이미 와있던 주주들 십여 명. 대부분이 오십대의 신사들…

혜린이 들어서는 모습을 앉은 채 보고만 있다.

혜린, 상석에 비어있는 자신의 의자 뒤에 가 선다.

양옆에는 민 변호사와 재희가 자리하고.

혜린, 선 채 앉지 않고 모두를 보고만 있다.

불편해서 보는 주주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눈치를 챈 주주 한 명 불편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어 나머지도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두가 일어서길 기다려서


혜린 : 처음 뵙겠습니다. 윤혜린이라고 합니다.


혜린 그제야 자리에 앉는다.

주주들 따라 앉는다.

혜린의 양 옆에 앉는 민 변호사와 재희.

주주들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혜린은 만만치가 않다.



# 19 별실


(회의실이 있는 건물의 한 방)

시계를 보는 장도식


장도식 : 지금쯤 시작했겠구만.


그 앞에 앉은 태수.

그들 사이 테이블에 놓여있는 칵테일 잔


장도식 : 윤 회장 딸 …혜린이, 장례식 이후에 한 번도 안 만났다고 했나?


태수 : 예.


장도식 : 나 같은 사람은 남녀 간의 문제에 있어선 영 아는 게 없어서 말이야, 자네 두 사람 사이 잘 이해가 안 돼. 둘이 아주 가까운 사이 아니었나?


태수 : 그랬던 적이 있었지요.


장도식 : (살피듯 보며) 부장님께 자네를 적극 추천한 것두, 결국 자네 둘의 친분을 생각해서였어.


태수 : 그랬습니까?


장도식 : 윤 회장 죽고 나서 그 자리에 눈독 들이는 사람 많아. 우리로선 조용히 처리하고 싶은 거야. 조용히 자연스럽게…… .자네하고 혜린이라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태수 : ( 술을 마신다) 장 선생님하고 여자 얘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장도식 : 이해를 못하는군. 난 사업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태수 : 그렇다면 사업 정보가 잘못됐군요. 윤 회장의 따님께서는 날 떠난 지 오래됐습니다.


장도식 : 그럴까?


태수 : 확실히 해두죠. 내가 윤 회장 딸을 다룰 수 없다면 자격이 없는 겁니까?


장도식 : (허허 웃고) 전에 내가 이 말을 한 적이 있든가? 자네 순화교육 받을 때 윤 회장이 날 찾았어. 혜린이하고 모종의 거래를 했다고 하드구만, 자네를 빼내는 조건으루 말야.


태수 : (말이 없이 본다)


장도식 : (생각을 더듬는 척) 그 때 뭐라고 했드라? 그래 그 조 건 중에는 자네를 다시 안 만난다는 조건두 있었지 아마. 윤 회장 참 재미있는 양반이야. 나 그 양반 좋아했어. 이따금 보고 싶어질 거야. (웃고는 시계를 본다) 시간이 됐는데 그만 일어나야지.


장도식 보면 태수 뭔가 생각하고 있다.



# 20 회의실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긴장되고 딱딱한 분위기다.

주주1 어이없다는 듯 말하고 있다.


주주1 : 이거 봐요, 윤 양.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지금 우린 사업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사업이란 건 애들 장난이 아냐. 그래, 우리들이 새파란 여자애한테 사업 경영권을 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혜린 :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는 지금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새로운 경영자를 뽑아야한다는 거 아닌가요?


주주1 : 그래서 자네가 하겠다?


혜린 : 저 역시 주주의 한 사람으로서 저 자신을 추천했을 뿐입니다.


주주1 : 허! (어이가 없다는…)


다른 주주들도 웅성웅성 당돌하다는 듯…


주주2 : 자아 자, 진정들하시고 차근차근 얘기합시다. 윤 양.


혜린 : 듣고 있습니다.


주주2 : 윤 양이 우수한 재원이란 건 알고 있어요. 윤 회장께서 평소에 착실히 교육시켜 온 것도 알고 있고. 허나 최 사장 말대로 사업은 쉬운 게 아니에요.


혜린 : 알고 있습니다.


주주2 : 우린 상당한 재산을 이 카지노에 투자했어요. 우린 윤 양이 사업 공부하라고 그 돈을 대준 게 아니에요.


혜린 :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장 회장님 말씀은 새 경영자를 주주선 거를 통해 선출하는 걸 반대하신다는 건가요?


주주2 : (헛기침을 하고) 사실은 그래요. 우린 윤 양을 만나기 전에 이미 새 경영자를 구했어요.


민 변호사 놀라 혜린을 돌아본다. 혜린 꼼짝 않고 주주2를 보고 있다.


주주2 : 윤 양도 알겠지만, 카지노 사업이란 거, 이 거 장부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아랫사람들도 잘 다스려야 하고, 또 외교적인 능력도 필요하고, 잘 알잖아요. 그런 여러 가지를 감안해서 우리가 만장일치로 찬성한 분이에요.


혜린 : 제가 아는 분입니까?


주주2 : 아, 오늘 참석을 하신다고 했는데. (시계를 본다)


주주1 : 7층에 와있어요. 아까 봤어 사람 시켜 부르지.


그 때 노크소리.

재희, 일어나 가서 문을 열어준다. 문을 연 재희, 잠시 그대로 서있다가 천천히 비켜준다.

들어서는 태수.

혜린, 놀라 테이블을 짚는다.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 했다.

태수, 들어서며 주주들과 분분히 인사를 나눈다.


태수 : 좀 늦었습니다.


주주1 : 아냐 딱 맞춰왔어요.


주주2 : 어서 오세요. 이 쪽 자리로 …


태수, 혜린과 반대편 테이블 끝에 앉는다.

비로소 혜린을 쳐다본다.


주주2 : 인사 하세요. 이쪽은 윤 회장 따님되시는 혜린 양이고, 이쪽은 박태수 사장이에요.


태수, 다시 일어나서 혜린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다.

혜린, 충격 때문에 잠시 굳어있다. 문가의 재희, 그런 혜린을 걱정스레 본다.


주주2 : 박 사장 역시, 나이는 젊지만, 우리와 유사한 사업을 주욱 해오신 분입니다. 윤 양 우리를 믿어요. 박 사장이라면 아버님의 사업을 더욱 번창하게 해줄 거예요.


태수, 자리에 앉는다.


주주1 : 여기 모인 분들 다 바쁜 사람들이니까, 짧게 짧게 끝냅시다. 그리고…


혜린 : 과연 외교능력이 뛰어난 분이군요.


혜린은 태수만 똑바로 보 고있다. 충격으로 침착했던 태도를 잃고 있다.


혜린 : 뒤에 장도식 선생, 그 위에 강동환 부장, 그 위에 또 있나요?


민 변호사 얼른 혜린의 팔을 잡아 자제시킨다.


민 변호사 : (낮게) 혜린이.


혜린 :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모두 침묵하여 혜린을 보고 있다. 태수도 말없이 보고 있다. 혜린, 가쁜 숨을 겨우 진정시킨다.


혜린 : (천천히 일어서 좌중을 둘러본다) 죄송합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만 일깨워드리겠습니다. 회칙에 의하면 주주총회에 제기된 모든 안건은 투표에 의해 결정됩니다. 각 주주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지분만큼 투표권을 가집니다.


주주2 : 잠깐만 윤 양. 윤 양이 가진 지분은 50프로를 넘지 못해요.


혜린 : 이주일 뒤 다시 총회를 열겠습니다. 거기서 새 경영자를 투표로 선출할 겁니다. 이상입니다.


혜린,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으로 회장을 나간다.

태수 쪽은 보지도 않는다. 뒤따르는 민 변호사. 문을

열어주는 재희. 그들 나가는 뒤로 소리치는 주주1


주주1 : 이봐 너를 편들어줄 주주는 없어. 절대 과반수는 넘지 못해.


문을 나서려던 혜린, 문득 태수를 돌아본다.

태수, 시선을 받는다.

혜린의 표정은 언뜻 아픔이 느껴진다.

다음 순간 혜린은 방을 나선다.

웅성대는 주주들 속에서 태수, 말없이 자기 앞 테이블만 내려다 보고 있다.



# 21 건물 앞


재희, 자동차를 댄다.

민 변호사 혜린을 위해 뒷문을 열어주는데 생각에 잠겨있던 혜린, 그 문을 잡고 들어서지 않은 채


혜린 : 각 주주들의 신상명세를 뽑아주세요.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민 변호사 : 그러지.


혜린 : (자신에게 다짐해주듯 한 번 더) 할 수 있을 거예요.


혜린 차에 오른다.

민 변호사, 문을 닫아준다.

운전석의 재희, 백밀러로 혜린을 본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상태에서 혜린, 괴로움을 드러낸다. 아직 마음의 격동을 다스리기에는 어리다.

조수석에 탄 민 변호사


민 변호사 : 집으루 갈까?


거울 속의 혜린, 얼른 냉정한 얼굴을 되찾는다.


혜린 : 서부 카지노루 가요, 할 일이 있어요.


재희, 잠자코 차를 출발시킨다.



# 22 장도식의 사무 건물 전경


언뜻 보기엔 가정집으로 보이는 이층집. 굳게 닫혀진 대문.

대문 옆으로 감시 카메라가 보인다.

자동차 한 대가 도착하고 두 명의 사내가 내린다.

대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르고 감시 카메라를 향해 장난을 치듯 손을 흔들어 보인다.

잠시 후 대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사내 둘 안으로 들어간다.



# 23 마당


사내들을 따라가며 보이는 마당에는 역시 사복 차림의 사내 몇이 잡담을 나누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 24 집 내부


각 방은 사무실로 꾸며져 있다.

열려진 문으로 보이는 방에는 사무 책상들이 있고, 전화를 받거나 사무를 보는 사내들…

복도는 바쁘게 지나치는 사내들…

대문을 들어섰던 사내 두 명 안 쪽의 닫혀진 문을 노크한다.



# 25 방안


장도식의 사무실이다.

장도식 전화를 받으며 들어선 이들의 인사를 받는다.


장도식 : 그래 계속 지켜봐. 무슨 짓을 하든지 보고만 있으라고. 그렇지. 누구를 만나는지만 잘 체크해 그래. (전화를 끊고) 알아봤어?


사내1 : 윤재용 회장, 사망 일주일 전에 은행에 개인 금고를 빌렸습니다. 윤 회장은 단 한번 이용을 했다던데요.


장도식 : 은행이라. (생각해보는)



# 26 윤 회장의 서재


민 변호사, 서류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 앞에 혜린.


민 변호사 : (가방을 열려다 멈추고) 이건 마지막 처방이야.


혜린 : 알고 있어요.


민 변호사 : 회장님께서 생전에 이것을 쓰려던 것은 그 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혜린 : (미소 지어) 걱정 마세요, 너 죽고 나 죽자, 그럴 만큼 저 아직 절망적이지 않아요. 그냥 내용만 볼려구요. 내용을 알아야 거래를 붙여보죠.


민 변호사 내키지 않는대로 가방을 연다.

거기에는 몇장의 서류 위에 금고 열쇠가 얹혀져있다.

혜린 열쇠를 들어본다.

잠시 아버지의 생각……


혜린 : 얼만큼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있죠?


민 변호사 : 전부다. 주고 받은 거래 내역. 장소와 일시까지.


혜린 : 물론 상대의 이름도 쓰여있겠죠.


민 변호사 끄덕인다.



# 27 밤 외딴 곳.


자동차 한 대 와 선다.

운전석의 장도식. 혼자다. 자동차의 실내등을 켠다.

어둠 속에 드러나는 장도식의 모습.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마치 한가로운 드라이브를 나온듯한 표정.

담배연기를 창밖 어둠 속에 날려보낸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나오는 종도.

장도식, 종도의 뒤를 살펴본다.

태호와 다른 사내 몇이 어둠 속에 주위를 지키는 모습이 보인다.

종도, 조수석으로 들어와 앉는다.


종도 : 오랜만입니다.


장도식 : (피식 웃고) 그새 겁이 많아졌구만.


종도 : (떨떠름한 표정) 웬일이십니까, 전 아직 수배중인 처진데요.


장도식 : 맞아 참. 자네 수배중이지.


종도 : (농담 할 기분이 아니다) 요즘 바쁘시다면서요. 박태수를 거물로 키우시느라고.


장도식 : 어허 질투하는가? (재미있다는 듯)


종도 : 일이 있으시면 태수를 부르시지요.


장도식 : 그러 게 누가 죄를 지으래?


종도 : 안 그래도 후회가 막심입니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요. 회개하고 있습니다.


장도식 : 어이 죄를 지었으면 보상을 해야지. 공을 세워서 갚아야 할 거 아닌가?


종도 : (눈치를 보는) 제가 할 일이 있습니까?


장도식 : 박 회장 사 건은 윤 회장이 무덤으루 끌구 갔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안 그래? (혼자 웃고) 이봐. 고향 가서 새 출발을 해보는 게 어때. 자네 정도면 금방 기반을 닦을 텐데. 인생은 생각보다 길어요. 차근차근 터를 닦아서 서울에 재상륙을 하는 거야.


종도 : (기대감에 부푼다. 납작 고개를 숙여) 뭐든지 하겠습니다. 수배만 풀어주십시오.


장도식, 혼자 재미있다. 이와 같은 용병술이 어쩌면 장도식의 인생에 즐거움이다.



# 28 은행 내부


창구 직원이 아닌 중간 간부가 혜린을 맞고 있다.

민 변호사가 내어놓은 서류들을 검토해 보고 있다.

혜린과 윤 회장의 관계 증빙 서류들이다.

혜린, 주민등록증을 내어놓는다.



# 29 은행 건물 앞 길


재희, 차를 대어놓는다.

조수석에는 장근섭.

장근섭 내려서 잠시 목운동을 한다.

재희도 내려서 시계를 본다.

무심히 고개를 들다가 한곳을 본다.

길 건너편 쪽을 천천히 지나가는 차 한 대.

그 뒤에 타고 있는 태호.

재희, 긴장하여 장근섭을 친다.

장근섭도 그를 본다.

재희, 재빨리 차를 따라간다.

태호가 탄 차에는 사내들이 네 명 가득 타고 있다.

차는 은행 뒤의 주차장 쪽으로 들어간다.

내리는 태호와 또 한 명의 사내.

그들 은행이 있는 건물의 뒷문 쪽으로 들어간다.

뒤따라온 장근섭.

재희와 마주보더니 재희를 그 뒤로 민다.

따라가라고.



# 30 은행 내부 개인금고실


혜린과 은행 직원 각자의 열쇠를 사용하여 금고를 연다.

직원 비켜서고 혜린, 열린 금고에서 가방을 꺼낸다.

한 쪽에 마련된 칸막이 안 에서 가방을 연다.

가득 들어있는 장부들…



# 31 건물 뒷문 쪽


마악 들어서던 재희, 기다리고 있던 태호와 또 한 명에게 막힌다.

재희, 멈칫하여 뒤를 돌아본다.

차에 있던 두 명이 어느새 뒤를 막으며 들어선다.

재희, 아뿔사하는 마음에 한 사내를 치고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한다.

순간, 누군가 휘두른 각목이 재희의 무릎 뒤를 치고 재희, 휘청 무릎이 꺾인다.



# 32 은행 뒤 주차장


뒷문 쪽으로 급히 가던 장근섭. 걸음을 멈춘다.

미리부터 와있던 차 한 대가 장근섭의 퇴로를 막듯 뒤에 와 선다.

돌아보면 차에서 우루루 내리는 사내들.



# 33 은행 내부


가방을 든 혜린과 민 변호사가 은행을 나서고 있다.

은행문 밖은 건물의 로비.



# 34 뒷문 안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격투.

재희 다급한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지만 태호를 비롯한 사내들에게 막힌다.

좁은 공간이 재희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다.

두 명까지는 젖히지만 태호에게 잡힌다.

재희 초조함이 극에 달한다.



# 35 은행 문 앞 건물 로비


입구 쪽으로 걸어오는 혜린과 민 변호사.

회전문으로 들어선다.

순간 반대쪽에서 사내 한 명 회전문으로 들어선다.

회전문이 돌고 혜린, 밖으로 나서는데 가로막는 사내, 무사시.

회전문 안으로 들어선 사내는 문을 잡아 민 변호사가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그 짧은 순간, 무사시가 혜린의 팔을 움켜잡아 바싹 붙는다.

놀란 혜린 내려다보면 무사시의 바바리 코트, 주머니로부터 혜린의 옆구리를 찌르는 흉기.

그 사이 어쩔 줄 모르는 민 변호사를 젖히고 다시 회전문으로 나오는 사내.

무사시, 여유있게 혜린의 가방을 가로 채더니 사내에게 넘긴다.

그 사내는 미리 대기해있던 차에 오른다.

혜린, 잡히고 위협받는 채로 꼼짝없이 가는 남자를 보고 있다.

무사시, 미소를 남기고 차 쪽으로 간다.

행인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벌어진 찰나의 사건.



# 36 뒷문 쪽


장근섭, 사내들을 젖히고 들어서자마자 재희를 잡고 있던 사내들을 공격한다.

잇단 공격으로 뒷문의 길을 트고 재희를 움켜잡아 밖으로 밀쳐낸다.



# 37 건물 앞


숨가쁘게 뛰어온 재희, 혜린을 발견한다.

길가에 우두커니 서있는 혜린.


민 변호사 : (격해져서) 어디 있다 이제 오는 거야?


재희, 무엇보다 혜린의 안부가 관심이다. 혜린에게 달려가 얼굴을 본다.

혜린,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거리를 보고 있다.


재희 : 잠깐만 기다리세요. 뒤에 놈들 패거리가 있습니다.


뛰어가려는데 혜린, 그의 팔소매를 잡는다.


혜린 : 소용없어.


재희 : 그렇지만.


혜린 : 내 잘못이야, 내가 상대를 잘 몰랐어.


재희, 안타까움에 이를 악무는데 혜린, 차 쪽으로 걸어간다.

재희, 돌아보는 곳에 태호 등을 태운 차가 달려 지나간다.

그 뒤를 쫓아 나온 장근섭. 헐떡이며 선다. 입가에 배어나온 피를 손등으로 훔친다.

상황은 끝났다.



# 38 하숙집


안 방 앞의 마루에 걸터앉은 우석, 종이백에 선영의 옷가지들을 넣고 있다.

잘 들어가지 않아 넣었던 것을 다시 빼고 서툰 솜씨로 다시 개고 있는데 열려져있던 대문으로 들어서는 검사장.


검사장 : 계십니까?


우석 놀라서 일어선다.


우석 : 아니 여긴 어떻게…


검사장의 뒤를 따라 들어서는 신영진.


영진 : 제가 모시구 왔어요.


검사장 : 내가 부탁을 했어요. 강 검사 보고 싶다고.


우석 : 전화를 주시면 갔을 텐데요?


검사장 : 나 강 검사 방에 들어가서 얘기해두 돼요?


우석 : (당황하고 있다) 아 죄송합니다. 이 쪽입니다. (방으로 안내하는)


영진 : 두분 말씀 나누세요. 저 밖에서 망볼 게요.


들어가는 둘을 보다가 영진, 우석이 밀어놓은 선영의 옷가지들을 본다.

대충 짐작이 간다.



# 39 우석의 방


우석 : 누추합니다. 방석도 없고…


검사장 : (앉으며 방안 을 둘러보며) 학생 방 같으네요. 책도 많고 검소하고… 바람직한 검사의 방이라구 해야 되나.


우석 : 저 차라두…


검사장 : 아니에요, 여기 주인집에 우환이 있단 말 들었어요. 됐어요 나 금방 갈 거예요.


그래놓고 여전히 둘레둘레 방안 을 구경한다.



# 40 마당


저녁 무렵

마루에 걸터앉은 영진, 물끄러미 옷가지들을 내려다보다가 혼자 웃고, 에이. 옷들을 개켜 종이백에 넣기 시작한다.

(한눈에도 여자 옷인 줄 알만한…)



# 41 방안


마주앉은 두 사람.

우석, 민망해서 웃고 있다.


검사장 : 어허 진지하게 하는 소리에요. 남자가 일을 제대루 할려면 아내가 필요한 거예요.


우석 :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


검사장 : 가정이 안정되어있지 않은 남자는 못써요. 애를 낳아보지 못한 여자나 같애요. 철이 안 들어요.


우석 : 명심하겠습니다.


검사장 옆의 바둑판 위에 엎어져있던 바둑책을 들어 한가하게 뒤적여본다.


우석 :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검사장 : (바둑책을 보며) 예. 일이 있어요.


우석 : (기다린다)


검사장 : 이종도라구 수배했었던 인물 있지요?


우석 : 예.


검사장 : 수배가 풀렸어요. 무혐의 처리됐어요.


우석 : (말이 막히는. 불끈해지는 마음 자제한다)


검사장 : (그런 우석을 살펴보고) 광주로 내려갔대요. 와신상담할려나 봐요.


우석 : …그렇게 됐군요.


검사장 : 그리고 강 검사 휴가는 이번 주로 끝나요.


우석 : (무슨 소린가…) 휴가요?


검사장 : 내가 휴가루 처리했어요. 충분히 쉬었지요?


우석 : (그제야 말뜻이 이해된다) 저 검사장님.


검사장 : (말을 막아) 이번 인사이동 때 명단에 들어있나 봐요. 강 검사 광주로 전출됐나보던데 … 사실 이 거 미리 알려주면 안 되는데, 내가 슬쩍 봤어요. (바둑책을 넘겨 다음 장을 본다)


우석 : (말없이 그런 검사장을 보고 있다)


검사장 : 시작한 일은 마무리 지어야지요. 한번 도망치기 시작하면, 그 거 버릇돼요, 평생 고치기 힘들어요.


우석 할 말이 없다



# 42 동네 길


어두운 밤길

차를 타고 떠나는 검사장을 배웅하는 우석과 영진.

우석 고개 숙여 보이고 차 창 안 에서 검사장

끄덕여 보이고 차는 떠나고……

우석, 우두커니 서있는데

영진 옆에서 어색하게 있다가


영진 : 안 에서 무슨 얘기했어요?


우석 : 취재하는 겁니까?


영진 : 저기… (답지 않게 어색해하다가) 내 얘기 안 했어요?


우석 : 신 기자 얘기요?


영진 : 으흠 (목에 걸려 안 나오는 말 얼른 해치워버린다) 고백할 게요. 검사장님 저희 작은 아버지 되세요.


우석 : (돌아보는)


영진 : 실은… (지레 당황해하다가 머리를 벅벅 긁고 에잇) 작은 아버지하고 협상했어요. 내가 강 검사님 사표 철회하게 도와주면, 작은 아버지가…그러니까 도와준다구요.


우석 : 뭘 도와줘요?


영진 : (멀뚱멀뚱 우석을 보다가 딴 데를 보다가 다시 보고는) 중매요. 우리 둘이.


우석 : (잠시 후에야 말뜻이 전해진다. 어이없다)


영진 : (용기 낸 김에) 나 안 되겠어요?


우석 :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영진 : 왜는 없구, 그냥 생각했어요. 검사와 사회부 기자. 맞벌이 부부하면, 서로 득이 될 것두 같구, 집에선 선보라구 야단이구 내가 본 남자 중에 제일 낫다싶구…(우석의 눈치를 본다)


우석 : (뭐라 할 말이 없어 그저 보고만 있다 난처할 따름이다)


영진 : 역시 안 되는구나.


영진,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걷기 시작한다.

우석 선 채 보고만 있다.

영진 걷다가 돌아서 뒤로 걸으며


영진 : 좀 걸을래요? 나 방금 실연당했는데 위로해주는 게 어때요?


우석 후 웃음이 나오고 따라 걷는다.



# 43 동네 다른 곳


공원?

영진, 뒤로 기대앉아 밤하늘을 보고 있다.

우석, 옆에 앉은 채 그런 영진을 본다.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웃으면 안 될 것 같고.

영진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본다.


우석 : 별이 보입니까?


영진 : 봐두 몰라요. 그냥 어색해서 이러구 있는 거예요.


우석, 얼굴을 돌려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춘다.


영진 : 웃고 싶으면 웃어두 돼요.


자세를 바로 하여 우석을 본다.

우석. 전혀 웃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영진을 본다.


영진 : 작은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 나하구 작은 아버지 관계를 알리면 될 일두 안 될 거라구요. 강 검사 그런 사람이라구. 처가집 빽을 쓰느니 총각으로 죽을 거라구요.


우석 :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영진 : (배시시 웃어) 하숙집 아가씨 좋아하죠? 선영 씨라구 그랬든가.


우석 : 선영씨하군 그런 얘기 해본 적 없는데요.


영진 : 에에이, 보니까 알겠든데 뭐.


우석 : (어쩔 수 없이 웃는)


영진 : 강 검사님 성격에, 마음에두 없는 여자가 계속 추파를 던지는데, 삼 년 이상씩 같은 집에 눌러 살 리가 없어요. 그렇죠?


우석 : 기자하구 얘기하는 건 무서운데요.


영진 : …병원에 가보셔야죠. 아까 선영 씨 갖다 줄 옷을 싸구 있었지요?


우석 : (보다가 끄덕인다)


영진 : 미리 딱지 먹을 각오했었어요. 나 선영 씨처럼 내조할 자신 없어요. 사실 나한테 필요한 건, 남편이 아니구 마누라에요. 그런 거 같죠?


우석 : 예 .


영진 : 흐흥 잔인하군.


우석 : 여성운동가들한테 욕먹을 얘기지만, 정말루 나 신 기자가 사내들보다 열배 낫다구 생각하구 있습니다.


영진 : 계속하세요.


우석 : (미소 짓고 있지만 진지한 어조) 나보다 훌륭해요. 난 신 기자 같은 용기 없어요. 언제나 속으루만 계산해요. 혼자 속으루 따져보구 정리하구… 예전에 좋아하던 여자두 그렇게 해서 보냈어요.


영진 뭐라 대꾸하려다가 관둔다.

우석은 아까의 영진처럼 뒤로 기대어 하늘을 본다.

영진 턱을 괴고 그런 우석을 본다.

우석, 영진을 돌아보고 피식 웃는다. 영진도 웃는다.

나란히 앉아 밤바람 속에서 잠시 평화롭고 따뜻한 시간을 보낸다.



# 44 고속도로 휴 게소


칠팔대의 검은 승용차가 줄줄이 와 선다.

승용차에서 내리는 양복의 사내들, 그 중의 한 차. 무사시가 뒷문을 열어주면 종도가 의젓하게 내려선다.

손에는 혜린의 가방을 들고있다.



# 45 휴 게소 한곳


(경치가 좋은)

종도와 장도식이 만나고 있다.

장도식 열린 가방(혜린의) 안 의 내용의 확인하고 닫는다.

장도식, 저만치 뒤에 어슬렁거리고 있는 양복의 종도 패거리들을 본다.


장도식 : 금의환향하는 사람같구만.


종도 : 지방은 서울하고 다르니까요, 일단 기선을 잡는 게 중요합니다.


장도식 : 기선을 잡는다…… 그럴듯한 얘기야. (한가하게 경치를 둘러본다) 가을이구만. 이런 계절에는 브람스나 들어야하는데 괜찮은 커피 한잔하구 말이지…


종도, 그런 장도식의 여유에 같이 맞출 기분이 없다.

수배가 풀린 지금 거만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경치 감상을 하고 있는 장도식의 뒤에서 태호 등을 향해 자기 손목시계를 가리키고 손짓으로 지시를 내린다.

재빨리 차 쪽으로 가며 출발준비를 하는 패거리들…

장도식, 종도가 가져온 가방 위에 손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며 경치를 보고 있다.

속으로 브람스의 음악이라도 생각하는 듯.



# 46 윤 회장의 집 정원


정원의 나무에도 단풍이 들었는데…

그 앞을 왔다갔다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는 혜린.

문득 걸음을 멈추고 보면 정원 저만치 잔디에 재희,

평상복 차림으로 앉아 죽도를 손보고 있다.

끈을 조이고 다듬고…

옆에는 두어 개의 손 때 묻은 죽도가 놓여있고.

혜린, 그 옆에 앉는다.

재희, 혜린을 힐끗 보고 약간 미소 짓고 하던 일 계속.

혜린 놓여있는 죽도 하나를 들어본다.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아 허공을 겨냥해본다.

재희, 혜린의 손 위치를 바꾸어준다.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벌어진 두 손은 중심을 바르 게 조여주고

혜린, 두어 번 허공을 때려본다.


혜린 : 생각보다 무겁네.


재희 : (빙긋 웃고 끈을 조이는 일 계속)


혜린 : ……어떻게 생각해? 나 할 수 있을까?


재희 : ……


혜린 : 내가 아버지 자리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재희 :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혜린 :


재희 : 왜 그렇게 애를 쓰는 겁니까? 회장님하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가요, 아니면…


혜린 : (웃어서) 아니면 갑자기 돈 욕심이 생겨서 그런 거냐구?


재희 : 상대가 박태수이기 때문입니까?


혜린 : (말이 막혔다가……) 그렇게 보였어?


재희 : 회장님이 돌아가시면 자유로워지실 거라구 생각했습니다. 원래 이런 사업 좋아하지 않았잖습니까?


혜린 : …그랬어.


재희 : 모든 거 다 정리하구 … 원하는 곳으로 갈 거라구, 짐작했었습니다.


혜린 : (뭔가 대꾸하려다가 머뭇거린다. 원래 하려던 말 관두고 농담처럼) 내가 어디론가 가면 같이 가줄 거야?


재희 : (엄한 눈길로 보고 있다)


혜린 : (어색해지며 시선 피하는데)


안 에서 나오는 장근섭.

혜린, 벗어나는 기분으로 보면


장근석 : (앞에 와 서서) 장도식이 전화했습니다, 만나고 싶다는데요.


혜린 : 일루 오라고 하지요.


장근석 : 밖에 장소를 정했답니다.



# 47 레스토랑 입구


(예쁘고 고급)

정장을 차려입은 남녀 손님이 도착하여 들어가려는데 지배인이 막아선다.


지배인 : 죄송합니다. 자리가 없어서 모실 수가 없습니다.


남자, 안을 기웃 거린다.


식당 안은 조용하고 비어있다.


남자 : 비어 있잖아요. 아무도 없는데.


지배인 : 예약이 끝났습니다. 죄송합니다.


남녀 언짢아서 돌아선다.

문가 저만치에 서있던 창민과 정근.

벽에 기대었던 몸을 세워 본다.

혜린과 재희가 오고 있다.

창민 등 얼른 나서서 맞는다.


창민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배인 공손히 혜린을 향해 절을 한다.



# 48 레스토랑 내부


들어서는 혜린과 재희, 안 족에 자리에 앉아 기다리던 장도식, 손을 들어 보인다.

지배인의 안 내로 다가서면.

혜린, 멈칫 선다.

장의 옆에 앉아 있던 태수.

혜린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재희, 혜린을 돌아본다.

혜린, 금세 냉정을 되찾고 마저 걸어간다.

장도식도 일어선다.


장도식 : 바쁜데 여기까지 나오라고 해서 미안 합니다.


재희, 혜린의 의자를 빼어 앉히고 자기도 그 옆에 앉는다.

장과 태수도 앉고.

혜린, 태수 쪽은 보지 않는다


장도식 : 사무실에서 김밥 먹어가며 일한다면서요. 가끔은 이런데서 여유를 찾는 것두 좋아요.


혜린 : 분위기가 아주 좋군요. 조용하고


장도식 : 아 여기, 우리 박 사장이 전세 냈어요. 얘기하는데 조용한 게 좋다고 말이지요.


혜린 새삼 주위를 둘러본다.

손님이 하나도 없는 식당 안 에는 제복을 입은 종업원들만 각자의 자리에 대기하고 있다.

다가온 종업원 한 명 혜린과 재희의 컵에 물을 따르고 옆에 선 지배인


지배인 : 특별코스를 준비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혜린 : 좋아요 고마워요.


지배인과 종업원 물러가고


혜린 : (장도식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구요?


장도식 : 꼭 해야 될 말 같은 건 없어요. 그냥 뭐랄까, 가을이 이유라고 할까? 날씨 얘기도 하고 하늘 얘기도 하고 그럽시다. 하하.


얼음에 채운 와인 병을 트레이에 밀고 온 지배인. 맛보기로 장도식의 잔에 솜씨 좋게 따르고 기다린다.

장도식, 와인 맛을 음미해보고 만족한 듯 끄덕인다.

지배인, 정중하게 각각의 잔에 와인을 따르는 동안 , 태수, 뒤로 기대 편한 자세로 혜린을 보고 있다.

혜린, 고집스럽게 태수 쪽은 보지 않고 있다


장도식 : 지금 나오는 곡 알아요? 브람스에요. 브람스 좋아해요?


혜린 : 장 선생님 관심사가 다양하시네요. 국사를 돌보시고 음악 감상도 수준급이시고… 남의 회사 경영도 간섭하시구요.


장도식 : 하하, 역시 날씨 얘기는 무리였나. 자아 건배합시다. 우리 혜린 양의 건강과 미모를 위해서.


혜린, 잠시 망설이다가 잔을 들어 보이고 조금 마신다.

재희는 그저 움직임 없이 있다.


혜린 : 한 가지 여쭤볼까요? 장 선생님 쪽에서 새로 밀고 있는 경영자 말이예요.


태수, 혜린을 본다.


혜린 : 거래 조 건이 어떻게 되죠? 제 아버지 보다 더 많은 정치자금을 대겠다고 하든가요?


태수, 그만 허, 웃는다.


장도식 : 허허 이 거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혜린 : 물론 그래야 하겠지요. 그러지 못할 경우엔 언제든지 잘라버리고, 새사람으로 바꿀 테니까요. 더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말이지요.


장도식 : 혜린 양.


혜린 : 아버지한테 했던 것처럼… 그렇지요? (미소 지어 보고 있다.)


장도식 : 내 충고하나 할까?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에요. 한 회사를 책임지는 사람은 먼저 할 말 못할 말을 가릴 줄 알아야지.


혜린 : 장 선생님. 그렇게 해서 얼마나 버세요? 혹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저 스카우트하고 있는 건데요.


장도식 : (보다가 허허 웃는다) 영광인데. 내 생각해 보지요, 허허. 박 사장 어때요? 이런 분보다 경영을 더 잘할 자신 있어요?


태수, 아무 말 없이 혜린을 보고만 있다.

그 바람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재희, 슬쩍 혜린을 돌아본다.

혜린은 마치 태수 쪽에는 아무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


장도식 : 자아, 사실 내 오늘 좋은 일을 하려고 이 자리를 마련했어요. 혜린 양 그리고 우리 박 사장 두 분 원래 잘 아는 사이지요? 오늘 그간의 회포도 풀고 또…


태수 : 예전에는… 잘 안 다고 생각했었지요.


혜린, 결국 태수를 돌아본다.

여전히 혜린을 똑바로 보고 있는 태수


태수 : 그 때는 돈 같은 건 아주 경멸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장도식 : 내 보기엔 전혀 변하지 않았는걸, 두고 봐요. 아마 조만간 카지노에 노동조합을 만들지도 몰라요. 하하.


태수 : (혜린을 향해 똑바로) 이거 아주 더러운 사업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혜린 : (웃는)


태수 : 당신은 못해, 하지 않는 게 좋아.


혜린 : (잠시 보다가 자제하여 조용하게) 내가 뭘 못한다는 거죠? 이종도란 사람과 댁과 한패였죠? 그 사람 시켜서 아버지의 장부를 빼내고…… 아… 박 회장 사 건도 댁의 솜씨였겠지요. 그리고 아버지한테 덮어 씌웠구요. 그런 거라면 물론 난 못해요.


일어선다. 재희, 일어나 혜린의 의자를 빼준다.


혜린 : (장도식을 향해) 실례하겠어요. 식사할 기분이 아니군요.


핸드백을 들려다가 놓친다. 사실은 마음속으로 흔들리고 있다. 재희, 슬쩍 도와준다. 장도식 일어선다.


장도식 : 아쉽군요, 혜린 양.


혜린, 목례하고 나선다. 자리에 앉은 채 꼼짝 않고 있는 태수. 재희, 혜린을 감싸듯 걷는다.


재희 : 고개를 드세요.


혜린 : (저도 모르 게 숙여졌던 고개를 세운다.)


재희 : 됐습니다.


입구를 나서는 혜린을 배웅한 창민과 정근, 태수를 돌아본다. 장도식,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장도식 : 따라가 봐야 되는 거 야냐? 아직 감정이 남아 있는 거 같은데.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고 있다)


태수, 무표정하게 창 밖을 돌아본다. 그렇게 창 밖을 바라본다.


<17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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