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손자병법

6篇 (10) 결전지와 일시를 알면 적지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오늘의 쉼터 2017. 12. 29. 18:32

손자병법(孫子兵法) 6篇 <허실편(虛實篇)>
<주도권을 잡으려면>
여기서는 전투에 있어서  승리의 비결이란,

아군의 실(實)로써 적의 허(虛)를  찌르는 것이다.

그 전술은 적에게 조종당하지 않고 오직 적을 조종하는 데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용병하는 방법도 상황에 따라 천변만화하나, 항상 적의 실(實)을 피하고 허(虛)를

쳐야 한다는 것이 이 편의 요지이다.




(10) 결전지와 일시를 알면 적지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故知戰之地(고지전지지) 知戰之日(지전지일)

그러므로 싸움의 땅을 알고 싸움의 날을 알면,

則可千里而會戰(즉가천리이회전)

곧 천리에서라도 회전해야 한다.

不知戰地(부지전지) 不知戰日(부지전일)

싸움의 땅을 모르고 싸움의 날을 모르면,

則左不能救右(즉좌불능구우) 右不能救左(우불능구좌)

곧 왼쪽이 오른쪽을 구할 수 없고, 오른쪽이 왼쪽을 구할 수 없다.

而況遠者(이황원자) 數十里(수십리) 近者(근자) 數里乎(수리호)

하물며 먼 자는 수십 리, 가까운 자라도 수 리에 있어서랴.

以吾度之(이오탁지) 越人之兵雖多(월인지병수다)

내 이를 생각건대 월나라 병사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亦奚益於勝敗哉(역해익어승패재)

역시 어찌 승패에 도움이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결전장이 확실하게 예측되고, 그 시일이 추정도 가능하면

그것이 아무리 먼 곳일지라도 충분히 이쪽이 생각한 대로 회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강의 짐작이라도 서지 않는다면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다.
왼편에 포진하고 있는 병력이, 적의 주력과 조우(遭遇) 하여 싸우고 있는

오른편의 아군을 원조 할 수 없으며, 왼편에 있는 병력이 오른편에 있는 병력을 돕지 못한다.

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병력이, 후방을 돕지 못하고, 후방의 병력이 전방을 돕지 못하는 수가

있게 된다. 

하물며 수십 리나 떨어져 있는 아군이라면 한층 더할 것이다.

수십 리가 아니라 수 리라도 어떻게 구원하러 달려갈 수 있겠는가.

손자로서는 아무리 적국인 월나라 병사의 수가 많다하더라도 그 병사의 수가 많은 것이

싸움의 승패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앞서말한 전황 판단에 따라 결전장을 예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능력 차이로

 어떻게 전력이 총화적으로 보람있게 사용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점에 대한 설명이다.
마지막에 손자가 숙적인 월나라에 대하여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은 유쾌하나

역시 정치적인 의도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예화] 결전지와 일시를 알면 적지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知戰之地(고지전지지) 知戰之日(지전지일)

싸움의 땅을 알고 싸움의 날을 알면,

則可千里而會戰(즉가천리이회전)

곧 천리에서라도 회전해야 한다.

 

<맹자>에 말하기를,

"천시(天時)는 불여지리(不如地利)"라고 하였고,

관자(管子)도 ‘천시지리(天時地利)’를 말하고 있다.

그곳은 배(舟)가 좋은가, 전차를 통과시킬 수 있는 평원인가,

또는 보병을 전개시킬 곳인가,

기병으로 단숨에 격파할 수 있는 곳인가를 알지 못하고는 싸울 수가 없는 곳이다.

즉 지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漢)무제(武帝)는 서역(西域) 평정을 국시로 삼았다.

먼저 흉노를 격멸하기로 하였으나, 강대한 흉노를 대적하려면

전부터 흉노를 원수로 생각하고있는 대월씨(大月氏)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하여

장건(張騫)이 사신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흉노 영내를 통과하지 않으면 대월씨에게 갈 수가 없었으므로 장건은

그곳을 지나다가 붙잡혀서 10여 년의 구류 생활을 하였다.

마침내 장건은 기회를 포착하고, 겨우 탈출하여 다시 서로 향하였다.

대완국(大宛國), 키르키즈(康居國)을 지나 아프가니스탄 북부(大夏韓)를 경유하여

대월국으로 들어갔다.

결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는 할수 없었으나,

십수년 동안 서역에서의 생활은 장건의 지식욕을 충족시키고도남음이 있었다.

오손국(烏孫國),간치(干寘),누란(樓蘭),고사(姑師),안식(安息:폐르샤), 신독(身毒:인도)에

이르기까지 두루 견문을 넓혔으며, 곤륜산(崑崙山)에서 발하는 황하의 근원까지 알게 되었다.


후에 장건은 교위(校尉)가 되어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공격 하였는데,

황야에서 수초(水草)가 있는 곳을 세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은 막힘없이 싸울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장건은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다.

이듬해 구경(九卿)의 하나인 위위(衛尉)로 승진 하였으나 숱한 실책을 범한다. 

이광(李廣) 장군과 함께 다시 흉노를 공격하였으나 전면 포위를 당하여 대패한 것이다.

이는 장건이 회전 기일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것이 원인이었다.

원칙대로 하자면 참죄에 해당되는 실책 이었으나 서역통(西域通)의 제1인자인 까닭에

특별히 용서 받아 서민(庶民)이 되었고, 그 후에도 무제에게 헌책하여 오손국 기타

서역 제국과 화친을 맺고 흉노 붕괴에 성공하였다.

싸움터를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어서 어느때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판단할수 있다면

자기 지역을 멀리 떠난 적지라도 충분히 싸울 수 있다는 예는 극히 많다.

이를테면 잘 알려져 있는 손빈(孫臏)과 방연(龐涓)이 마릉(馬陵)에서 벌인,

숙원의 대결에 제(齊)나라의 장군 전기(田忌)가 손빈의 계략을 듣고 저녁무렵에

방연의 군이 반드시 도착할 것을 추정하여, 험조한 곳에 복병을 숨겼다가 대승한 것은

시일과 싸움터를 잘 판단한 결과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