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거의 모든 사랑의 법칙 1
감쪽같이. 자취도 없이.
오빠는 제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쳐댔다.
아버지가 맥없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오빠의 말과 아버지의 말은 미묘하게 어긋났다.
50대 가정주부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그녀의 아들은 ‘실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그녀의 남편은
내심 ‘가출’이라고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야 원, 경찰서에 신고하러 갔다가 ‘가족끼리 의견 통일해서 오세요’라는
충고를 듣고 쫓겨날 지경이었다.
오빠가 소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나를 채근했다.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가 험하게 눈을 흘겼다.
역시, 안 되는 집구석에서는 힘을 합쳐 일을 해결하기도 전에 내분 먼저 일어난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들어갔다.
반질반질 엄마의 손때가 묻은 낡은 주방기구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붙박여 있었다.
개수대에 지저분하게 쌓여있는 설거지 감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냄비 세 개와, 세 벌의 수저. 그것들은 엄마의 부재를 요란하게 증거하고 있었다.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찌꺼기는 차례로, 신라면, 생생우동, 짜파게티의 흔적이었다.
“밥통에 밥은 없고 별 수 있냐. 우동 하나 끓여 먹었지.”
“오 마이 갓. 그럼 엄마가 언제 나갔는지도 정확히 모른다는 거잖아요.”
어스름 해가 진 뒤에도 엄마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자
아버지는 은근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버튼을 누르면서
“이게 미쳤나”
를 약 열번 가량 중얼거렸음이 틀림없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되풀이되었다.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아버지, 장남에게 연락을 취했다.
오빠가 달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쨌든 저녁밥은 먹어야 했으므로, 짜파게티를 해 드신 거다.
“싸움은 무슨. 네 엄마가 기어오른 거지.”
“난 딱 한마디 했을 뿐이다.
이걸 지금 먹으라는 거냐고. 그런데 네 엄마, 갑자기 뚜껑을 확 닫더니
그냥 조용히 냉장고에 넣어버리는 거야.
세상에, 그깟 콩자반 때문에 집을 나갔다는 게 말이 되냐?”
“어디 전화해볼 만한 데 없나?
강릉 삼촌네는 안 가셨을 거고, 엄마 친구 누구 없어?
아, 그래. 김포아줌마한테 한번 해볼까?
전화번호부 어딨지?”
“안 돼!”
“뭐 좋은 일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 근처 찜질방에 갔을 거야.
뻔하지, 뭐. 엄마가 갈 데가 어디 있어? 좀 있음 들어올 거야.”
출근하는 척, 집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아버지가 소리쳤다.
양심이 콕콕 찔렸다.
하지만 퇴직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나는 바로 아버지의 전속 가정부로 옭매이게 될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마당에 이 따위 계산이나 하고 앉아 있다니,
나라는 인간의 이기심에 기가 질렸다.
내 이기적인 유전자의 대부분은 부계로부터 온 것이 확실했다.
아아, 밥. 아버지의 거룩하신 밥. 더 이상 말해 뭐하랴.
조금 전 내가 급히 차려낸 아침 밥상 앞에서조차 국이 없다는 둥,
계란프라이 대신 계란부침을 해오라는 둥 반찬 타박을 자행하던 분이 우리 아버지다.
어디 가서 굶고 있을지도 모르는 엄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자동차가 분당에서 광화문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러나 지금으로서 최선의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보였다.
세종문화회관의 돌계단 위에 서서 나는 버튼을 꼭꼭 눌렀다.
그의 전화기는 꺼져 있지 않았다.
나직한 중년남자의 목소리. 나는 숨을 쉬지 않고 말했다.
“예에… 압니다만.”
“저는, 딸 되는 사람인데요.”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저희 어머니가 지금 집에 안 들어오고 계세요.”
“저희 엄마, 지금 어디 계신지 혹시 아세요?”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네. 잘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저기, 잠깐만요. 은수양.”
“시간이 괜찮으면 잠깐 좀 봤으면 싶은데.”
“어머니 젊었을 때하고 아주 똑같네. 빼다 박았어.”
흰색이 더 많은 머리칼, 검버섯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피부,
셔츠 안에 감춘 묵직한 아랫배까지. 엄마의 남자친구는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평범한 초로의 남자였다.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을 우리 아버지와 별로 큰 차이도 없어 보였다.
아버지보다 더 핸섬하지도 않고, 세련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왜? 지금 이 순간, 엄마 남자친구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보다 더 가엾은 사람은 이 서울 하늘 아래 없을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안으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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