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1부 성년의 날 11

오늘의 쉼터 2017. 7. 24. 15:52

제1부 성년의 날 11




세상 모든 엄마의 목소리엔,
그 자식들에게 기기묘묘하고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주파수라도 흐르는 걸까.
 
“많이 바빠? 그럼 나중에 다시 할까?”
 
그렇게 말하는 엄마 목소리를 듣는 순간,
뾰족한 창끝처럼 곤두섰던 마음이 순두부처럼 몽글몽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냐, 괜찮아. 얘기해요, 엄마.”
 
그러나 잘못된 선택임을 깨닫는 데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된 애가 매일같이 늦니.
그러게 더도 말고 딱 십 분씩만 일찍 일어나랬잖아.
아무튼 학교 다닐 때도 늦잠 자서 허구한 날 지각이더니
그 나이 먹도록 달라진 게 없다니까.”
 
얇은 틈만 보였다 하면 옳다구나,
바로 잔소리 공격을 퍼부어대는 것이 30년째 변함없는 엄마의 장기였다.
평소라면 아주 조금은 더 참을 수도 있었으련만,
그만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이 씨! 엄마가 뭘 안다고 그래. 나 요새 지각 같은 거 안 한단 말이야.”
 
“어이구, 퍽이나 그렇겠네.”
 
나의 신경질 따위에는 이미 익숙하다는 듯
엄마는 그저 덤덤하게 한마디 받아치고는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너 집엔 언제 올 거야? 이번 주말에는 올 거지?”
 
부모님 곁을 떠나 혼자 살기 시작한 지 여섯 달째다.
독립의 명분은 뚜렷했다.
경기도 분당 신도시의 집에서 마포에 위치한 회사까지 출퇴근이 너무 힘들다는 것.
나는 서른 살 넘은 신체 건강한 성인이며, 꼬박꼬박 갑근세를 내온 성실한 직장인이고,
통장에는 서울 변두리 원룸의 전셋값에 해당하는 금액이 들어 있었다.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일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만의 방’을 가지지 못할 까닭이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부모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시집 안(못) 간’ 과년한 딸년이 ‘나가 살겠다’는 것을 전쟁 포고로 받아들였고
쉽사리 수긍하려 들지 않았다.
그에 맞서 싸워야 했던 지루한 투쟁의 과정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엄마의 입장은 “남들이 우리더러 뭐라고 하겠니”라는 탄식으로 요약되었고,
 아버지는 못마땅한 일 앞에서 평생 그래왔듯 내 얼굴만 마주치면 ‘쯧쯧’ 크게 혀를 차고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곤 했다.
 
“이번 토요일엔 오빠네도 온다니까 너도 꼭 와.
 한 달에 한두 번 겨우 모일까 말까 한 게 무슨 가족이니?”
 
“…시간 봐서.”
 
“비싸게 굴기는.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을 거 아냐. 집에 와서 한 끼라도 제대로 된 밥 먹어.”
 
생각해보면 그때 부모가 나의 독립을 그토록 맹렬히 반대했던 이유는,
 지금처럼 얼굴 한 번 보여 달라고 자식에게 치사한 애원을 하게 되는 상황을
 예견했기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이번 주말에 바쁘기는커녕 시답잖은 약속도 없었다.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티브이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졸다 깨다 반복하다 보면
토요일 오후가 더디게 흘러갈 터였다.
오라는 데도 가야 할 데도 없이 맞이 하는 토요일 저녁 일곱 시 경의 허기만큼 난감한 것도 없다.
차라리 빨랫감을 갓난아기 업듯 등에 짊어지고 분당 행 지하철에 몸을 싣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쓴다는 양 대답했다.
 
“알았어. 갈 수 있으면 갈 게요.”
 
“…참, 막내야.”
 
엄마의 음성에서 묻어 나오는 주저와 망설임의 기미를 나는 즉시 포착했다.
이래봬도 30년이 넘도록 최측근으로 지내온 사이였다.
엄마가 “어제…”라고 발음하며 운을 떼는 순간, 더럭 겁이 났다.
혹시 눈썰미 좋은 누군가로부터 목격담을 제보 받았는지도 모른다.
“은수 엄마,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하는 건데 말이우.
엊저녁에 시시덕거리면서 여관으로 들어가는 웬 남녀 한 쌍을 봤거든.
근데 그 여자 얼굴이 은수랑 많이 닮았더라고.
 아니, 그 집 딸내미가 그럴 리야 없겠지만서두 혹시나 싶어서.
에이, 사실 또 그러면 좀 어떠우? 이번 기회에 확 시집 보내면 되지.”
 
진정 그렇다면 그 열두 치마폭 오지랖의 고발자를 찾아내어 뒤엎어버릴 테다.
그러나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제1부 성년의 날 12


딸이 사귀는 남자친구에게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는 모친도 있다고 한다.
유희의 어머니가 그런 타입인데, 음식물 씹을 때 유난히 쩝쩝거리며
추접스런 소리를 내는 남자도, 들어가는 회사마다 3개월 내에 망해 버리곤 하는
징크스를 가진 남자도, 평소에는 극히 조잔하게 굴다가 술만 마시면
1만원권 지폐를 바닥에 흩뿌려대는 남자도, 다 흔쾌해하셨다.
 
우리 엄마였다면 단칼에 아웃시킬 조건들이다.
고릴라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도 엄마는 “너 눈 낮은 거야 진즉에 알았지만”이라는
 코멘트로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냈다.
뭐 하나 번듯한 데 없는 놈이 어디가 좋으냐는 퉁도 여러 번 맞았다.
그러던 엄마였는데, 고릴라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긴 탄식을 내뱉어 나를 아연실색케 했다.
네가 지금 그렇게 튕길 때냐는 둥, 세상에 별 남자 없다는 둥,
결국 올해도 또 넘기는 거냐는 둥 엄마의 근거 없는 추측성 비난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그 게임의 패자가 당신 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물론 엄마가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뭐 하나 번듯한 데 없는 놈’에 대한
뒤늦은 아쉬움을 연거푸 피력하지 않았다면, 굳이 그의 결혼 일시까지 또박또박 밝히며
확인 사살을 감행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도 엄마가 그 날짜를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짐작하지 못했다.
 
“어제는, 잘 보낸 거지?”
 
“네?”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먹고 아주 행복하게 지내지 그랬어?…보란 듯이.”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던, 어쩌면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깨닫지 못하던
깊은 속내가 타인에 의해 느닷없이 확 까발려져 버린다면?
화석처럼 굳어지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을 가장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후자를 선택할 경황도 없었다.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응, 그랬어. …걱정 말아요.”
 
고릴라의 이름이나 그의 결혼식 같은 단어는, 엄마도 나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짧고 강력한 침묵이 우리 사이를 뒤덮었다.
엄마는 어쩐지 좀 어색하다는 듯 쿨럭 헛기침을 했다.
 
“늦겠다. 잘리기 전에 얼른 출근해. 노처녀 주제에 백수까지 되면 진짜 큰일이잖니.”
 
지독하게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젖은 머리칼을 대충 감싸두었던 수건이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헤어드라이어의 전원을 켜고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머릿속을 윙윙 사정없이 울려댔다.
화장대 거울 너머로 나의 100퍼센트 맨얼굴이 선연히 비쳤다.
슬그머니 눈을 돌려 그것을 외면했다.
유리창의 블라인드 틈새로 부신 햇살이 정직하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지금부터 내가 발라야 할 화장품들이 순서대로 늘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화장솜을 끼우고 스킨토너를 듬뿍 적셨다.
스킨을 바른 후에는 밀크로션, 에센스와 데이크림, 자외선 차단제도 필수적이다.
 그 다음에는 파운데이션을 얇게 펴서 검푸르게 착색된 다크서클과 주근깨를 가리고,
전용 펜슬로 눈썹을 꼼꼼히 그린 뒤에, 진주 색과 에메랄드 색 아이섀도로 눈두덩을 칠할 것이다.
입술에는 바비브라운의 브라이트핑크를 바르고 싶다.
 아니다, 오늘은 루비슈가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아니면, 색 없이 투명한 립글로스를? 아아, 모르겠다.
 도무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라도 빼먹거나 차례를 바꾸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살아왔다.
검푸른 실핏줄이 도드라져 보이는 눈 밑 그늘과 주근깨를,
파운데이션으로 대충이라도 가리지 않고 외출하면 꼭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온 것마냥
불안해지곤 했다.
 
화장에도 순서가 있듯, 삶도 그럴 것이다.
내가 하는 메이크업은 나를 잘 숨기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잘 드러내기 위한 것일까.
아아, 모르겠다. 뇌세포가 뒤죽박죽 엉켜버린 기분이다.
 
이런 미래는 꿈꿔본 적이 없다.
 인생이 점점 끔찍한 속도로 달려드는 느낌이다.
심술궂은 미소를 머금은 누군가가 내 모습을 멀뚱멀뚱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손바닥으로 황망히 얼굴을 가렸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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