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성년의 날 7
첫째, 하고 싶은 사람과/ 둘째, 하고 싶을 때/ 셋째, 안전하게 하자.
이것이 섹스에 대해 정해 놓은 원칙의 전부다.
생각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문제는 주로 2번 항목에서 발생하곤 했다.
상대방이 원하는 때와 나의 때가 일치하기란 사실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특히 첫 관계를 시작하는 시기에 대해,
남성인 상대방과 여성인 나 사이에 현격한 이견이 있기 일쑤였다.
물론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정서가 완전히 무르익었을 때,
또는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까지 기다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성향이나 세계관의 차이일 것이다.
나의 입장은 아무튼, 일단 마음이 통한다는 확신이 든 다음에 몸도 통하자는 쪽이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처음 만난 남자와 바로 ‘하러 가는’ 원 나이트 스탠드 따위와는
별로 친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누가 물어 봤냐고? 아아, 모두 구차한 변명이다.
지금 나는 그 밤의 일이 한순간의 우발적 실수였음을 강변하고 싶은가 보다.
분명히, 나는 만취로 인한 의식불명 상태가 아니었다.
평소보다 좀 많이 마신 건 맞지만,
처음 만난 남자에게 업혀 모텔 방에 널브러질 만큼 취하지는 않았다.
아니, 입구 계단 앞에서 살짝 부축을 받긴 했지만
업히기는커녕 멀쩡하게 내 두 발로 걸어 들어갔다.
팥죽색 카펫이 깔린 긴 복도와, 둘이 나란히 서면 어깨가 닿을 듯
비좁던 엘리베이터도 아슴아슴 기억난다.
그는 매너가 아주 좋은 편이었다.
전에 원 나이트 스탠드라는 걸 해본 적이 없으니 다른 남자들의 태도는 알 수 없으나,
옛 애인들과 비교해 볼 때 확실히 그랬다.
그가 보기 드물게 사려 깊은 남자라는 조짐은 그 오욕의 술자리를
단 둘이 빠져 나왔을 때부터 드러났다.
막상 같이 밤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흐른 건 당연지사였다.
“제가 아는 데가 있긴 한데 의자가 편하거나 화장실이 깨끗하지는 않거든요. 괜찮으시겠어요?”
의자와 화장실을 걱정해주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안내한 곳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지하의 작은 바였다.
적당히 어슴푸레한 실내에 델리스파이스의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소박하고 정감 있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동그란 스툴형 의자가 좀 딱딱하긴 했지만
엉덩이가 배길 정도는 아니었다.
데킬라 호세꾸엘보와 나초칩, 콜라가 포함된 세트메뉴의 가격도 착한 편이었다.
“내가 먼저 나오자고 했으니까 내가 쏠게요.”
“그래도, 돼요?”
나는 대답 대신 빙긋 웃어주었다. 한눈에도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남자 아이에게 술값을 부담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자가 비용을 부담할 때는 되도록 개중 저렴한 메뉴를 고르지만,
내가 부담할 때는 짐짓 호기로워지는 기분이란 참 기묘했다.
잘생긴 젊은 남자의 전매특허인 괜한 개폼잡기 따위를 하지 않고,
줄곧 부드럽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유지하는 걸로 보아
그는 자신이 가진 매력을 아직 잘 모르거나 아니면 진짜 고수임이 분명했다.
“친구가 전에 여기서 일했거든요.
사장이 장사는 안 하고 늘 여행을 다닌대요.
알바생들이 지들 좋아하는 대로 음악도 틀고 술도 꺼내 먹고 완전히 놀러들 나와요.”
“부럽네, 그 사장.”
“그게 부럽나요? 그래도 여기도 자기가 좋아서 시작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자꾸 도망치면 안 되죠. 책임을 져야지.”
책임이라는 발음을 할 때 야무지게 움직거리는 그의 입술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돌아보면, 사단은 이미 그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비슷한 속도로 취해갔다.
원래 술이 오르면 나는 눈웃음의 횟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혀가 짧아진다.
주로 마음에 드는 남자와 단 둘이 마실 때 그런데,
의도적인 건지 아닌 건지는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제1부 성년의 날 8
단언하건대, 만약 이 세상에 술이 없었다면 세계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였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 인생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 만난 지 두 시간째인 남자와 주거니 받거니 데킬라 한 병을 다 비울 동안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별로 또렷이 기억나는 내용이 없었다.
“대한민국 결혼율이 바닥을 치고 있다고? 웃기지 말라 그래요.
내 주변 게네들은 다 뭔데? 어찌나 열심히 애국들을 하시는지 원.”
“죽을 때까지 만들고 싶은 영화는 딱 한 편이에요.
아무도 인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그걸로 충분하잖아요.”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대화는 자주 어긋났다.
대화의 본질이라는 게 어차피 다 그렇고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는 주로 ‘영화감독이 되겠다.
학교를 때려치웠다.
군대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후회하지 않겠다’ 등의 파편적인 문장들을 나열했다.
나 역시 ‘더 이상 뒤통수 맞기 싫다. 되는 일이 없다.
세상에서 인간이 제일 무섭다.
하긴 내가 나를 못 믿는데 누가 날 믿겠는가’ 따위의 전후맥락 없는 말들을 뒤떠들어댔다.
공통점이라면, 둘 다 급속하게 혀가 꼬부라져 가고 있었다는 것.
그래도 죽이 척척 맞는다는 느낌이 들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신용카드로 계산을 하는 동안 그는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어둑한 계단참에서 그가 나를 돌려세웠다. 우
리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오르는 계단에 서서 키스했다.
혀와 혀가 엉기고 타액으로 상대의 입술을 흠뻑 적시는 딥키스였다.
키스하는 동안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백하자면 고릴라와 헤어진 뒤(아니, 솔직해지자.
고릴라와의 초창기 불꽃 튀던 몇 개월이 지난 뒤) 이런 열정적인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너무 어지러워. 어디 조용하고 편한 데 가서 누웠으면 좋겠어요.”
그 결정적 대사가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 헷갈리지만,
나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한 표 던지겠다.
“잠깐만요.”
길을 걷다 말고 그는 편의점 앞에 나를 세워두고는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뽑는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어룽져보였다.
여관 카운터 앞에서 미적거리거나 “너 만 원짜리 있니?”
아예 대놓고 묻는 남자들이 있다는 얘기는 간혹 들었다.
말을 전하는 여자애들은 대개, 내 친구의 친구가 그런 놈을 겪어봤대, 라는 식의 화법을 사용했다.
이 남자가 적어도 ‘그런 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어이없게도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편의점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제법 묵직한 비닐봉투가 들려 있었다.
“무슨 컵라면 좋아하는지 몰라서 여러 가지 샀어요.”
“김치 맛. 해장에는 역시 얼큰한 게 좋아요. 참, 나무젓가락은 받아왔어요?”
“앗, 깜빡… 할 리가 없죠.”
그가 종이포장지로 싸인 나무젓가락을 의기양양하게 흔들었다.
나는 따라 웃었지만 속으론 좀 후회가 되었다.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척, 쉬러 가자고 한 여자가 젓가락까지 챙기다니
아무래도 생뚱맞아 보일 터였다.
방은 좁고 단출했다. 더블베드, 화장대, 작고 동그란 원형테이블,
조잡하게 멋 부려 만들어 놓은 일인용 의자 두 개 등이 가구의 전부였다.
침대 옆 벽면에는 대형거울이 붙어 있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거울을 그런 위치에 붙여놓았단 말인가. 갑자기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가 상당히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자각이 그제야 몰려왔다.
더 기가 막힌 건 내 동행인의 행위였다.
방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그는 양말조차 벗지 않고, 내게 달려들기는커녕,
일회용 커피 포트에 생수를 들이붓고 끓이기 시작했다.
치지직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이 끓는 동안, 김치 맛 컵라면 두 개의 비닐 포장을 얌전히 벗기고,
조심스레 뚜껑을 열고, 스프를 면 위에 골고루 흩뿌렸다.
“빈속에 잠들면 내일 속 아파요. 이거 드시고 주무세요.”
아, 어쩌면 이 남자애야말로, 파란만장한 하루를 보낸 한 가련한 어린양을 위해
오늘 밤 하늘에서 내려 보내준 살아 있는 천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서 천사와 나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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