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靑春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 제1부 성년의 날 1
옛 애인의 결혼식 날, 사람들은 뭘 할까?
혼자서 훌쩍 여행을 떠나버릴 수도 있겠지.
남태평양의 해변가에 누워 칵테일주스를 한 모금 마시면서 까짓것 쿨하게 행복을 빌어주는 거다.
아니면 돌멩이가 잔뜩 든 배낭을 메고 북한산에 오르거나 걸어서 잠수교를 횡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산하는 길 위에 돌멩이를 하나씩 버리다가 혹은 찰랑이는 강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도 좋겠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출근을 했다.
수요일 아침 세상의 다른 모든 회사원처럼 말이다.
올해의 연차 휴가는 지난 여름에 이미 깡그리 써버렸을뿐더러
오후에는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다.
“부장님, 저 북한산엘 좀 다녀와야 해서 하루만 쉬어야겠는데요”라고
말할 수는 도저히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주말이나 휴일이 아니라 왜 하필 수요일에 결혼하는 거냐며
오늘의 신랑에게 전화해 항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정도로 뻔뻔한 인간은 아니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오늘이 그날이라는 사실도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디데이를 알려준 것은 휴대전화의 기념일 알림 서비스였다.
AM 11:59에서 12:00로 넘어가는 찰나,
점심으로 포호아의 월남국수를 먹을까 동천홍의 자장면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벨이 울렸다.
액정화면에 ‘애도! 고릴라 사망’ 이라는 글자가 떴다.
고릴라는, 본인은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던 그의 별명이었다.
고릴라는 내 입에서 어쩌다 결혼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부르르 몸을 떨던 녀석이었다.
“너는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의식이 없냐.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 얼마나 힘든 굴레인지 몰라? 식 올리는 순간,
바로 무덤에 들어가 눕는 거라고.”
제 입으로 무덤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니,
열두 시 정각, 강남 모처의 예식장에서 그는 꼴까닥 숨이 넘어가 버렸을 터였다.
형식적이고 부질없는 제도의 결합 따위에 목매지 말고 영원히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자고
감언이설을 풀 때는 언제고, 놈은 나와 헤어진 지 6 개월도 안 되어 청첩장을 보내왔다.
동봉한 포스트잇에 〈친애하는 우리 은수. 우리 정말 식구 같았잖아.
너라면 진심으로 축하해주리라 믿는다. 건강해라!〉 라고 씌어 있었다.
괴발개발, 천하의 악필은 여전했다.
아니, 그리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입에 올리는 거냐고! 나는 청첩장과 포스트잇을 차례로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애니콜의 기념일 알림 서비스 메뉴에 들어가 녀석의 결혼일시를 입력했다.
그 시간이 오면, 남쪽 방향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엄숙하게 묵념한 뒤에,
국화꽃 한 송이를 땅바닥에 깔고 하이힐 굽으로 짓이길 생각이었다.
마침내 휴대전화가 그 순간을 알려왔으니 이제 참았던 분노를 폭발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피가 거꾸로 치솟지도,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심장이 벌렁거리지도 않는다.
배신감도, 질투도, 자기연민도 느껴지지 않는다.
평상시의 정오 무렵처럼 몹시 배가 고플 뿐이다.
자장면을 곱빼기로 주문하여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어 보았다.
트림만 나올 뿐 역시 격렬한 감정은 끓어오르지 않았다.
남태평양 리조트의 칵테일주스 대신, 3800원짜리 스타벅스 카페모카를 손에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희한한 고민에 휩싸였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도 나를 사랑했다.
틀림없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혹시, 내 피가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건가?
앞으로 이렇게 점점 더 차가워져 갈 일만 남은 건가? 더럭 겁이 났다.
이러다가 곧, 냉동 칸의 동태처럼 꽁꽁 얼어붙은 채 늙어갈지도 모른다.
영원히 무감동한 인간으로 말이다.
시럽을 듬뿍 넣었음에도 카페모카는 입 안을 쓰게 휘감았다.
옛 애인과의 그리운 추억 때문이 아니다.
흐리멍덩한 동태눈깔 같을 내 미래 때문에 콧등이 시큰해져 왔다.
시계를 보았다.
두 시간 뒤면 경쟁 프레젠테이션이었다.
마스카라가 번지면 끝장이다.
나는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통곡하는 대신, 팽, 힘차게 코를 풀었다.
옛 애인의 결혼식 날 울지 않다니.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제1부 성년의 날 2
일찍이 김광석은 노래했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그렇게 말한 시인은 최승자다.
서른 살에 대한 으리으리한 경고는 너무 흔하다.
스물아홉 가을,
나는 갓난아이에게 홍역 예방접종을 맞히는 엄마의 심정으로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와라! 서른 살! 맞서 싸워주마. 절대 지지는 않을 테다.
그런 식의, 유치하지만 제법 비장한 각오도 했었다.
지금은 서른한 살. 뭐 아직까지는 견딜 만하다.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해서 눈가 주름이 확 늘어나거나 갑자기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건 사실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더럽고 치사한 일들을 예전보다 훨씬 잘 참아내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나 자신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 직장으로 옮겨온 건 약 2년 전이다.
기업체의 사보와 홍보 브로슈어 등의 편집을 대행해주는 곳인데,
회사원이라면 대개 그렇듯 업무는 재미있을 때도 짜증날 때도 있다.
요새는 정신없이 바빴다.
한 생명보험회사의 사외보 수주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2주 내내 준비해 왔다.
확률이 높진 않아도 잘 하면 따올 수 있는 건수였다.
그런데 PT시간을 불과 두 시간 남겨 놓았을 때,
그러니까 내가 놀라운 프로정신을 발휘하여 통곡 대신 코풀기로 옛 애인을 떠나보내고 있을 때,
부장이 갑자기 황당한 명령을 내렸다.
내가 아니라 인턴사원 여자애 둘을 향해서였다.
“너희들도 얼른 준비해. 화장도 좀 고치고.”
“예?”
“아, 고객사 같이 들어가자고.
PT할 때 썰렁하면 안 되니까 뒤에 배경으로 서 있어.
칙칙한 오은수나 내 얼굴 말고, 뽀얀 니들 얼굴 감상하고 있는 게
그쪽 사람들도 덜 지루할 거 아니야.”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밥 잘 먹는 오은수, 머릿결 나쁜 오은수, 어깨 넓은 오은수라면 용납할 수 있었다.
가수 비에 목매는 오은수, 주제도 모르고 눈만 높은 오은수도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칙칙한 오은수’는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코 풀고 난 휴지뭉치를 손으로 구기면서 가만히 숨을 골랐다.
부장은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칙칙하다니요? 눈이 삐셨어요?”라고 맞받아치거나
“지금 여성 노동자의 외모를 가지고 실언하신 것 아세요?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사과하시죠”라고 정색하거나 꼴이 우스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장은, 유들유들한 데다 입이 거친 면은 좀 있지만 큰 악의는 없는 사람이었다.
보나마나 “어, 우리 은수씨 기분 나빴어? 에이, 용서해 줘. 다 내 부덕의 소치야.”
이렇게 눙치며 지나갈 위인이었다.
사회생활 어언 7년차. 참는 데는 이골이 났다.
나는 순순히 부장 고물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뒷자리에 여대생 인턴들을 태우고서 차는 PT장소로 신나게 출발했다.
중3 때, 수학선생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칠판 한가운데 백묵으로 점을 찍곤 했다.
“수업 듣기 싫은 놈은 떠들지 말고 이거 보고 있어!”
어른의 말은 무조건 거역하고 보던 시절이었으나,
이번만은 어쩐지 복종하고 싶다는 중압감에 사로잡혀
나는 한 학기 수학시간 내내 칠판이 뚫어져라 흰 점만을 바라보았었다.
그래. 쟤들을 점이라고 생각하지,
뭐. 그 회사에도 일하기 싫어 몸이 근질근질한 인간은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별 위안은 안 되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PT는 그럭저럭 끝났다.
드라마 속 커리어우먼들이야 하나같이 좌중을 압도하는
야무진 말발과 똑 부러지는 능력을 보여주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치명적인 실수만 안 하면 다행이지.
부장이 수고했으니 다같이 삼겹살이나 먹자고 했다.
“저는 안 돼요. 약속 있거든요.”
나는 힘주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날이 날이니 만큼 사랑하는 친구들,
재인과 유희를 만나기로 해 두었던 것이다.
나이 들수록 새록새록 느끼는 바지만 역시 친구가 제일 소중하다.
나의 옛 남친 고릴라의 결혼을 애도해야 하는 오늘,
모두 한자리에 모이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우정인가.
그러나 내 착각은 오래지 않아 무참히 박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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