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1부 성년의 날 5

오늘의 쉼터 2017. 7. 23. 12:46

 제1부 성년의 날 5




한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그의 전화번호부를 훔쳐보라.
내 전화기에는 총 158개의 전화번호가 들어있다.
그런데 도무지 누르고 싶은 번호가 없다니! 나는 비참한 심정으로 목록을 훑어 나갔다.
 
강×철. 제길. 지지난달에 헤어진 남자다.
아니, 소개팅으로 만나 도합 열 번쯤 데이트한 사이이니 헤어졌다고 말하는 것도 아깝다.
틈만 나면 술을 먹이고는 저기서 좀 쉬었다 가자고 러브호텔 불빛을 가리켜대곤 했다.
그래도 명색이 21세기인데, 70년대 영화에나 나올 법한 구태의연한 작업방식은 너무하지 않은가.
번호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래도 동갑에다 키도 크고 연봉 높기로 유명한 다국적기업에 다닌다. 일단 놔둬 보기로 한다.
 
김×태. 이 인간 번호를 왜 아직 안 지웠던 거지? 대학 다닐 때 잠시 사귀던 과 선배다.
졸업하곤 연락 한번 없더니 작년에 느닷없이 회사로 전화를 걸어 왔다.
 반가운 마음에 약속을 했다.
한창 때의 장국영처럼 희멀겋고 야리야리하던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어 중년아저씨가 다 되어 있었다.
그 뒤에,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다시 사귀어 보자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와서 고민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마누라가 둘째를 임신 중인 상태라고 했다.
한 다리만 건너면 금방 들통날 뻥을 아무렇지도 않게 쳐대던 그 배짱이 아직도 존경스럽다.
 
박×훈. 전에 함께 일했던 고객사의 홍보담당자였다.
클라이언트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편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인 관계였다.
개인적인 만남은 피차 위험했다.
업계 바닥이 좁아 소문이 부풀려질 가능성도 컸으며,
갑과 을의 관계이니만큼 상대편(갑)에서도 이쪽(을)의 인간적 호의에
저의가 숨겨져 있다고 오해하기 쉬웠다.
 여러 모로 말이 잘 통하는 사이였는데 시작도 못하고 흐지부지돼 버려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올봄, 그가 다른 회사로 옮겨간 뒤에는 길에서 우연히 부딪친 적도 없었다.
 
그래. 이만하면 오늘 같은 밤, 술친구로 괜찮을 듯싶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나는 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문자메시지는 참 고마운 도구다.
전화통화의 어색한 침묵과 말줄임표의 곤혹을 감당하기 싫을 때 더없이 유용하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인간관계의 내밀한 커뮤니케이션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까마득했다.
 
친밀하지 않은 사이의 이성에게 문자를 보낼 때는 일단 자연스럽고 쿨해 보이는 게 중요했다.
평소 오매불망 당신 생각만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오늘 불현듯 당신이 떠올랐다는 분위기를 풍겨야 한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답장을 유도하기 위해 마지막 문장은 반드시 의문문으로 하는 것이 좋다.
 
―문득 생각나서 연락드려요.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심심한 저녁이네요. 뭐하고 계세요? ^^
 
웃고 있는 이모티콘을 뺄까 하다가 그냥 넣어서 보냈다.
터덜터덜 걸어 다음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고요하기만 한 전화기를 나는 공연히 만지작거렸다.
삐빅. 문자메시지 수신음이 울린 것과 버스가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미련 없이 버스를 포기하고서 부리나케 휴대폰을 확인했다.
 
―W백화점 고객사은대잔치. 15만원마다 상품권 증정. 보너스! 고객 열 분 추첨 무료 해외여행.
 
액정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내 인생이란, 정말이지 딱 요 모양이다.
기다리는 전갈은 도착하지 않고 엉뚱한 유혹만 넘실댄다.
놓쳐 버린 버스를 다시 기다리고 싶진 않다.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집 앞 편의점에 들러 맥주 두 캔을 노란 플라스틱 장바구니에 담았다.
안주로 치즈 포를 집을까 육포를 집을까 갈등하고 있을 때 삐빅,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은수씨 반가워요.
저는 강남에서 일잔 꺾고 있슴다.
혹시 근처에 있으면 조인할래요?
 
플라스틱 바구니의 맥주 캔들을 슬며시 꺼내어 냉장고에 도로 집어넣었다.
편의점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답장을 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쪽에서 질문을 던졌으니, 공은 이제 내게로 넘어와 있었다.
우선은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의 첫 데이트에 어울리는 의상으로 갈아입을 것이다.




제1부 성년의 날 6


삶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모욕을 당하는 순간, 나는 도망갈 궁리 먼저 한다.
박이 일러준 술집에 들어섰을 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일행이 그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스무 명도 넘는 인원이 탁자를 붙여놓은 채 와글대고 있었다.
나는 입구에 엉거주춤 서서 고개를 내리깔았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홱 돌아서 이대로 뛰쳐나가버리자.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박이 먼저 나를 발견했다.
 
“와아, 오은수씨! 정말 왔네.”
 
그는 ‘정말’이라는 부사적 용법을 사용했다.
그럼 안 올 줄 알고 그냥 한번 불러봤다는 뜻인가.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그에게 인사했다.
집에서 여기까지 오기 위해 1만3500원의 택시비를 지급했다.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두었던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새 원피스도 입었다.
오늘은 나의 옛 애인이 결혼한 날이다.
지금 첫날밤을 치르고 있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오늘 밤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보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자주 그렇듯 내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은수씨. 진짜 오랜만이다. 우리 한 일 년도 넘었죠?”

“아마 그럴걸요.”

나는 말끝을 흐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약 일곱 달 전이다.
민망하게도 그날 그가 입었던 셔츠 색깔까지 기억났다.
하긴 누굴 원망하랴. 쓸데없는 기억력이 좋은 것도 아무튼 백해무익한 일이다.
 
그 자리는 한 영화제작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영화홍보 관련 회사로 옮겨간 박은 말하자면 그곳의 특별게스트인 셈이었다.
자기가 주빈도 아닌 주제에, 살갑게 챙기거나 다른 데로 데리고 나갈 의지도 없으면서
도대체 왜 나를 불렀는지는 불가사의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유치한 의도를 대강 때려잡을 수 있었다.
대각선에 앉은 한 여자가 내 얼굴을 계속 흘낏흘낏 훔쳐봤기 때문이다.
한눈에 봐도 꽤 미인인 여자는 지금 뭔가 뾰로통한 상태였다.
박 역시 그녀 쪽을 의식하며 부자연스러워하는 태가 역력했다.
 
그러니까 나는, 저 둘의 밀고 당기는 연애질에 일종의 낚싯밥으로 초빙된 모양이었다.
질투를 유발하기 위한 목적물 말이다.
뭐, 기왕이면 좋은 말로 사랑의 메신저라고 해두자. 나는 한숨을 안으로 삼켰다.
하다하다 이젠 별꼴을 다 당했다.
지금이라도 이 오욕의 사슬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하나?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 홀연히 밖으로 걸어 나간 것은 아까의 그녀가 먼저였다.
박의 낯빛이 하얘지더니 부리나케 여자 뒤를 쫓아나갔다.
‘놀고들 있네’ 말고 더 적절한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소주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이 쓰디썼다.
이럴 수가! 내 안에서 미처 예상치 못한 격렬한 오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내 피는 지금 적어도 미적지근한 온도는 아니었다.
나도 다시 섭씨 100도로 활활 타오를 수 있었다.
얼음마녀가 되어 죽어갈 염려는 없다고 생각하니 어쨌든 다행스러웠다.
 
“시시하죠? 여기.”

누군가 일본만화의 주인공처럼 심드렁히 말을 걸어왔다.

“뭐 여기만 그런가요?”

나는 상냥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꼭 그렇지도 않아요. 나름대로 맘에 드는 걸요.”
 
“성격 되게 좋으신가 봐요.”

남자가 씩 웃었다.

“저는 따분해 죽겠거든요. 어쩌다 따라오게 됐는데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스물서넛쯤 되었을까.
쌍꺼풀 없이 갸름한 눈이 선량하게 빛나고 풍성한 속눈썹이 예사롭지 않다.
아름다운 존재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긴장시킨다.
나는 자세를 얼른 바르게 고쳐 앉았다.
곧게 뻗은 콧날과 부드러운 턱선. 남성이라기보다 미소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성싶은 얼굴이다.
그가 내 앞의 빈 잔에 맑은 술을 가득 부어주었다.
 
“같이 나갈래요?”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내가 더 깜짝 놀랐다.
사방에서 펄럭이던 요란한 소음이 일제히 멈추고,
시계초침소리만이 코끼리 발자국처럼 쿵쿵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아니, 다른 뜻이 아니라.” 나

는 황황히 말을 주워 담았다.

“우리 둘 다 어차피 여기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좋아요.”

남자의 담백한 대답이 너무 고마워서 하마터면 꾸뻑 고개 숙여 인사할 뻔했다.
조금 뒤, 내 인생 최고의 비밀스런 밤이 시작된다는 걸 그 순간에는 차마 짐작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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