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1부 성년의 날 3

오늘의 쉼터 2017. 7. 23. 12:37

제1부 성년의 날 3



“나 결혼해.”
 
그럴 리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면서 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재인은 어쩐지 쑥스럽다는 듯 슬며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고자 일자 뱅 스타일로 자른 앞 머리칼이 이마 위에서 깜찍하게 흔들렸다.
 
“에이, 설마.”
 
먼저 입을 연 건 내가 아니라 유희였다.
유희 역시 적잖은 강도의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그렇다. 서른한 살의 미혼여성에게 무엇보다 충격적인 소식은
옆자리 동료가 로또복권에 당첨되었다거나,
나보다 공부 못하던 여고 동창이 뒤늦게 환골탈태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런 경우야 뭐 좀 얼떨떨하고 묘한 시샘이 일기도 하겠지만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영역의 일이므로 금세 받아들일 수 있다.
서른한 살은 그 정도 가벼운 쇼크쯤은 웃으며 극복할 수 있는 나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이건, 이건 명백히 다르다.
늘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가 갑자기 결혼을 선언한 것이다.
발 딛고 선 땅바닥이 흔들리는, 진저리 나도록 현실적인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미안해. 어쩌다 보니 후다닥 그렇게 됐어.”
 
재인의 말투에서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미리 말을 못해서 미안하다는 건지,
아니면 우리를 남겨놓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건지 헷갈렸다.
졸지에 불우이웃이 된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결혼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겨우 물었다.
 
“근데 대체 누구랑 한다는 거야? 너 남자 없었잖아.”
 
“기억 안 나? 얼마 전 주말에 선본다고 했던 거.”
 
나와 유희가 동시에 헉, 신음을 내뱉었다.
두 주쯤 전인가 금요일 저녁에 만났을 때
재인은 내일 오후에 맞선이 있는데 귀찮아 죽겠다고 투덜거렸었다.
그럼 왜 나가는 거냐고 유희가 냉소적으로 묻자,
재인은 “하는 수 있니. 집에서 밥이라도 얻어먹고 살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라고
한숨을 쉬며 대답했었다.
 
“그러니까 불과 이 주 만에 결혼을 결정했다는 거 아냐, 지금?”
 
“야,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을 해봐. 이게 말이 되냐?”
 
우리의 협공에 재인이 정색을 했다.
 
“이 주일 넘었어. 오늘이 십칠 일째야.”
 
나와 유희의 눈빛이 허공에서 짧게 마주쳤다.
나와 유희와 재인은 올해로 딱 15년째 친구로 지내오고 있었다.
열여덟 살, 독서실 옥상에서 첫 키스를 나눈 첫사랑 남자아이가
다른 여자와 껴안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내가 당장 자살하겠다고 난리법석을 떨었을 때
내 옆에 있어준 건 유희와 재인이었다.
스물세 살, 유희가 군대 간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재인은 제 장학금을 선뜻 수술비로 내놓았었다.
나와 재인은 마취에서 깨어난 유희의 손을 꼭 잡고 함께 훌쩍거렸었지.
그때처럼 코끝이 맹맹해져 왔다.
 
15년은 끔찍하게 긴 시간이 분명했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에게는 제각각의 인생이 있었다.
하재인, 네가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 오늘,
나의 엑스보이프렌드 고릴라가 장가가는 날,
내 뒤통수를 때려? 그렇게 따지고 들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좀 쓸쓸해졌다.
15년 우정의 힘을 발휘하여 나는 가까스로 친구가 원하는 질문을 찾아냈다.
 
“진짜 대단하다. 도대체 얼마나 멋진 남잔데?”
 
재인의 안색이 금방 환해졌다.
우리보다 네 살 많은 비뇨기과 전문의, 교육자 집안의 차남,
선배와 동업으로 조만간 개원 예정 등의 프로필을 재인은 조잘조잘 읊어댔다.
여기가 어린왕자가 사는 별이 아니니 당연하겠지만,
그 남자의 머리색깔이나 눈동자 빛깔 같은 것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하긴 뭐 어차피 한국 남자,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졌을 게 뻔하지만 말이다.
가만히 재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유희가 불쑥 물었다.
 
“그래서 그 남자를 왜 사랑하는데?”
 
사랑이라니.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재인이 동그란 눈을 한껏 치켜떴다.




제1부 성년의 날 4


일부일처제 사회의 위대한 규칙 한 가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진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면서 사랑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맞선에서 만난 비뇨기과의사를 대관절 ‘왜’ 사랑하느냐는,
 재인을 향한 유희의 질문은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재인은 맥주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술을 들이켜는 시늉을 했지만 수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뒤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말이야.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
 
그리고는 한쪽 손바닥을 펼쳐 제 심장 위에 가져다 댔다.
 
“여기, 뭔가가 와. 아, 이 남자였구나 하는 그런 느낌. 걱정 마,
너희들도 머지않아 금세 느끼게 될 거야.”
마지막 문장은, 대학생활을 묻는 여고생의 질문에
‘너희도 대학생이 되면 알게 된단다’라고 대답하는 교생선생의 그것처럼 들렸다.
마침내 제도권의 문 안에 들어선 자의 오만함이 묻어나서 솔직히 좀 재수 없었다.
나는 묵묵히 소시지를 씹었다.
눈치도 없지, 유희가 미심쩍어하는 기색을 거두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확인할 건, 다 해 본 거야?”
 
확인할 것. 유희의 입에서 나왔으므로 그 표현은 부동산 소유 현황이나 숨겨둔 자식의 유무,
대머리 같은 유전적 형질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재인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우리를 또 한번 멍하게 했다.
 
“아이 답답해. 평생 한 침대를 쓸만한 남자가 확실하냐는 거지.”
 
“글쎄. 너희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재인의 말투가 평소와 달리 몹시 조신하고 우아했기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소시지 대신 혓바닥을 씹어 삼킬 뻔 했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정신적 파트너십이지.”
 
재인이 화장실에 가자마자 유희가 참지 못하고 내 옆구리를 찔렀다.
 
“쟤, 미친 거 아니야? 사람이 저렇게 삽시간에 변할 수도 있니.
침대에서 3분을 못 넘긴다는 이유로 남자 차버릴 때는 언제고.
야, 그때 그 3분맨이 누구더라. 그 연구원이었나, 아니면 웹디자이너라던 그 남자였나?”
 
새신부의 은밀한 과거지사를 시시콜콜 알고 있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는 듯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그리고 뭐, 이 남자가 내 남자였구나?
놀고 있네. 이거 왜 이러셔. 그런 확신이라면 나는 새 남자 만날 때마다 들어.
그러니까 지금까지 스무 번도 넘는다고! 은수, 넌 안 그래?”
 
나? 글쎄, 잘 모르겠다.
확신의 느낌은커녕 남자를 만날 때면 언제나
‘신이시여, 이 남자가 정녕 내 남자가 맞습니까?’ 라는
의심과 혼란에 시달리곤 하는 인간이 바로 나였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돌이킬 수 없을까봐,
새끼발가락도 제대로 담그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이다 포기하고 마는 것이 나의 특기였다.
 
술집에서 나와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재인은 청첩장을 맞추러 간다고 했고, 유희는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한다고 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뭔가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는 생각을 정리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한 정거장쯤 걷기로 했다.
그러나 신촌 뒷골목을 삼십 미터 지나기도 전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골목은 이십대 초반의 아이들로 바글거렸다.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길쭉길쭉한 다리를 놀리는 기린 같은 여자애들 사이를
 쪼그랑 할망구처럼 헤치며 나아가야 했다.
‘조심들 해라, 그렇게 높은 굽 신고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무릎관절 다 망가지니까!
암튼 요즘 애들은 겁도 없어.’ 투덜대다 말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요즘 애들’ 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레 사용하고 있었다.
스르르 힘이 빠졌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옛 애인이 결혼식을 올리고 베스트 프렌드가 결혼을 발표한 날이라면 하물며 그렇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어 저장된 전화번호 목록을 ㄱ에서부터 차례로 훑어보았다.
목록은, 참혹했다.


'소설방 > 달콤한 나의 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부 성년의 날 9   (0) 2017.07.24
제1부 성년의 날 7   (0) 2017.07.23
제1부 성년의 날 5   (0) 2017.07.23
제1부 성년의 날 1   (0) 2017.07.23
정이현 靑春소설  (0) 2017.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