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조선

매천야록 제2권

오늘의 쉼터 2016. 11. 6. 17:17

매천야록 제2권

 

고종 31년 갑오(1894년) ①

 

1. 천둥

 

갑오년(1894)(청국 광서20년. 일본 명치 27년) 2월 12일 밤, 천둥이 두 번이나 울렸다.

 

2. 고부민란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 군수조병갑이 도주하자 고종은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라는 명을 내리고, 룡안현감박원명을 대신 그 직위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흥부사리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였다. 조병갑은 고 군수조규순의 서자로,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뇌물을 탐하고 가혹한 행위를 하였다. 계사년(1893)에 한해가 극심하여 기근이 들었지만, 그는 재결을 숨기어 세조와 함께 징수하므로 결국 민란이 발생하였다.

박원명은 대대로 광주에서 살았고 많은 재산도 모았다. 그리고 그는 기민한 재주가 있어 무슨 일이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또 그는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어서 그곳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영준이 기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순천에도 민란이 발생하여 부사금갑규를 쫓아내고, 령광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군수민영수를 쫓아냈다.

 

3. 일식

 

3월 초1일 일식이 있었다.

 

4. 전봉준의 봉기

 

고부에서 동비 전봉준 등이 봉기하였다. 이때 박원명은 난민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조정의 호의를 표명하고 그들의 죄를 사면하여 향리로 돌려보내자 난민들은 모두 해산하였다. 동학 괴수 전봉준 등 수명은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다. 그 후 리용태가 와서는 박원명이 하는 것과는 달리 백성들을 오역률을 적용하여 모두 죽이려고 하였고, 또 부호들에게 민란을 주도했다는 구실을 붙여 뇌물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가 감사금문현과 공모하여 감옥으로 이감된 백성들이 줄을 잇고 있으므로, 백성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민란을 일으켰다.

전봉준은 집이 본래 가난한 데다가 의지할 곳도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동학에 물이 들어 항시 울분을 지니고 있었다. 민란이 일어날 때 많은 동학도들이 그를 괴수로 추대하였으나,

그가 간사한 뜻을 펴 보기도 전에 동학도가 해산하였으므로 자신도 창황히 피신하였다.

그 후 순찰사와 안핵사가 그를 급히 수색하자 그는 그의 일당 금기범, 손화중, 최경선 등과 모의하여 대사를 꾀하였다. 그들은 전화위복책으로 백성들을 꾀어내어, 동학이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또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며, 살인과 약탈을 하지 않고 오직 탐관오리들만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들과 호응하고 우도 연해 일대의 10여 읍도 일시 호응하여 10일 만에 수만 명이 늘어났다. 동학도와 난민이 합류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5. 리용태의 유배와 금문현 삭직

 

고부안핵사리용태는 금제로 유배하고, 전라감사금문현은 직위를 삭탈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을 그르치어 민란을 더욱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6.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

 

유생 홍종우가 상해에서 금옥균을 살해하였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온 후 조정에서는 김옥균에게 역률을 추가 적용하였다.

홍종우는 경기도안산 사람이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락척불우한 생활을 하면서 고금도로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들어가 김옥균과 함께 놀았다. 그는 언제나 틈만 있으면 김옥균을 죽여 나라의 걱정거리를 없애려고 하였으나 김옥균은 일당이 많아 뜻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해에 김옥균이 청나라로 유람하러 갈 때 홍종우를 데리고 상해로 갔는데, 이때 그는 김옥균을 창으로 찔러 살해하였다.

그리고 그의 시체에 양칠을 하여 부패하지 않도록 한 후 그 시체를 배에 싣고 본국으로 돌아오자 고종은 그의 시체를 로량진에서 다시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의 시신을 처형하기 전에 류재현의 아들 모는 그의 배를 해부하여 그의 간을 꺼내 먹고 리조연의 아들 리탁도 그곳을 가보았다.

그러나 기타 갑신정변 때 피살된 자제들 중 민영선, 민형식,조동윤, 한린호 등은 가지 않았다. 중궁은 이 소문을 듣고 탄식하기를, “재상의 아들들이 중궁의 양자보다 못하구나!”고 하였다. 고종은 홍종우를 초청하여 위로를 해주고, 그 후 얼마 안되어 과거를 설치하여 홍종우를 발탁한 즉시 홍문관교리로 임명하고 서울에다가 집을 하사하였다.

 

7. 김옥균 암살 전모

 

<중동전기>에서 홍종우가 김옥균을 살해한 기사를 보면, 김옥균은 갑신정변 때 역모를 하다가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재산을 가지고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이때 김옥균은 「암전주작」이라는 성명을 사용하였으나 그가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는 「화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서양의 각국을 유람하였을 때 그는 서양 옷을 입고 서양말을 하였다.

그리고 홍종우는 각국의 방언을 잘 알았고, 그도 역시 서양 복장을 한 후 독일과 프랑스를 유람하였다. 그리고 그는 혹 김옥균과 서로 만나면 반가운 척하였다. 그 후 계사년(1883) 김옥균이 오사카로 왔을 때도 홍종우는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 갑오년(1894) 봄에 그들은 서로 중국을 유람하기로 약속하고 2월 21일 상해에 도착하여 북하남로 동화가 있는 길도덕삼의 객사에 숙소를 정하였다. 김옥균은 왜노 북원연차랑을 데리고 청국인 오정헌과 함께 덕삼의 객사 2층에서 거처하고, 홍종우는 다른 방에서 혼자 거처하였다. 이때 김옥균은 그가 자기를 해치려고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22일 새벽 홍종우는 서양 돈 5천원권을 김옥균에게 보이며 소동문에 있는 천풍전장에 보내어 함께 무역을 하자고 하더니, 잠시 후 그는 다시 와서 “천풍전장 주인이 출타하여 오후 6시 정각에 온다고 하니 그때까지 기다립시다.”라고 하였다. 김옥균은 그 말을 유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홍종우는 오후 4시쯤에 조선관복으로 갈아입고 김옥균의 방으로 갔다. 김옥균은 서쪽 창가에 있는 등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홍종우는 북원연차랑을 밖으로 나가라고 한 다음 갑자기 총을 꺼내어 쏘았다. 첫번째 맞은 곳은 왼쪽 볼이었다. 그 탄환은 볼을 뚫고 올라가서 턱의 오른쪽을 관통하였다. 선혈이 낭자하였다. 그는 통증을 못이겨 미친 듯이 아우성을 쳤다. 홍종우는 다시 총격을 가하였다. 그 탄환은 왼쪽 가슴을 뚫고 오른쪽을 통과하다가 피막을 뚫지 못하고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제3탄은 어깨 밑을 관통하였다.

이때 길도 등 여러 사람들은 다락 밑에 있다가 별안간 탕 하는 소리를 듣고 문밖에서 어떤 사람이 화폭놀이를 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다락 3층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들이 떼를 지어 내려와 보니 김옥균이 총을 든 채, 동쪽의 다섯번째 방앞으로 도주하다가 땅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길도 등은 일본 령사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그는 한국 사람들끼리 원수가 되어 하는 일이라며 들어보지도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상해령황승훤은 일본, 영국, 미국 등 각국 관리를 대동하고 홍종우를 심문하였다. 홍종우는 모습이 훤칠하고 복장도 단정하게 입었다. 그는 강경한 어조로, “그는 대역불도한 사람으로 사람마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나라를 위해 적을 죽였으니 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그는 또 “나라의 명령을 받아 하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청나라 관리들은 조선으로 전화를 하였는데 그 내용을 대충 열거하면, 김옥균은 조선의 반신이며 홍종우는 관리이다, 이번 사건은 합리적인 일이므로 속히 석방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16일, 상해령황승헌은 홍종우를 호위하여 현서로 갔다가 다시 군문의 용정 4명을 시켜 홍종우를 조선으로 송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원연차랑은 처음에 김옥균의 시체를 싣고 일본으로 가려 하였으나 청나라 관리가 저지하자, 그는 초7일, 25일에 조선으로 보낼 관이라고 하면서 호남회관에다가 갖다 놓았다. 그 후 홍종우는 그 관을 싣고 귀국하여 길거리에 달아 놓고 소금물을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김옥균이 참변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유발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다. 이 때 모여든 조정 대신 및 시골 신사와 상하의원의 인원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모두 그의 상여를 메려고 하였다. 그 후 시체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각 신문사는 그 사실을 일제히 보도하며 그 치욕을 씻으려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고 하였다.

한편, 홍종우가 귀국한 이후, 그 사건이 만리 밖에서 발생하여 들리는 말이 서로 다르므로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중동전기>에 기재된 내용을 인용한 것은 청나라 사람들의 목격에 착오가 없을 것으로 믿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하였다.

김옥균을 길거리에서 효수할 때 그곳을 지나던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기록을 참고하면, 그 사건을 국치로까지 언급하였으니 김옥균이 무슨 덕을 쌓아 일본인들에게 그와 같은 인심을 얻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갑신정변 때 제적 중에서도 김옥균이 가장 흑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가 만일 죽지 않았다면 갑오경장 이후에는 정반대 행위를 하였을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김옥균의 재주가 서광범과 박영효보다 더 낫기 때문에 그가 갑오경장을 맞았다면 그의 솜씨를 볼 만한 것이 많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8. 량호초토사홍계훈의 출정

 

홍계훈을 량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의 병대를 인솔하고 호남의 동비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리고 4월에 금학진을 전라감사로 임명하고 전라병사리문영을 파직하여 서병묵을 대신 그 직위에 임명하였다.

이때 동비의 경계가 점차 심하여 서울에서는 하루에 네다섯 번씩 놀랐다. 조정의 여론도 힘있는 관리들이 직무유기를 한 것은 그 허물이 민영준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민영준은 그 여론을 무마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런 명령을 내려 하루 속히 부임하도록 한 것이다.

김학진은 사폐하면서 편의대로 일을 보게 해 달라고 간청하므로 고종은 억지로 대답하기를, “경이 하고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김학진은 문관이라 난을 진압할 만한 재주가 없어서 가족과 작별할 때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눈물을 흘렸는데,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걱정하였다.

서병묵도 그가 강진수사로 있을 때 성품이 청렴하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다시 그를 제수하였으나, 다른 장점은 없었다.

 

9. 량호순변사리원회의 원병 파견

 

전판윤리원회를 량호순변사로 임명하였다. 고종은 홍계훈으로부터 오랫동안 승전 소식이 없자 고군의 원병이 없음을 우려한 나머지 이원회에게 강화병과 청주병을 원병으로 보내게 하고, 아울러 홍계훈의 병사를 통제하도록 하였다.

 

10. 엄세영안핵사 부임

 

엄세영을 삼남안핵사로 임명한 후 백성의 병폐를 보고하게 하였다.

 

11. 홍계훈의 동학군 추적

 

초7일, 홍계훈은 청나라 군함 청원호와 우리 군함 창룡호 및 한양호에 경병 800명을 싣고 군산항에서 전주로 들어가고, 초9일에는 2대 병력을 동원하여 금구와 태인을 진주하였으며, 15일에는 1개 대대를 인솔하고 전주를 출발하여 동비의 향방을 추적하였다.

 

12. 동학군 전주 점령 및 노령과 리서의 싸움

 

27일, 동비가 전주를 함락하자 감사금문현이 도주하였다. 4월 초에 김문현은 렬읍에서 병대를 모집하여 동비를 추격하기 위해 고부의 황토산까지 갔다가 동비에게 패하였고, 또 이때 홍계훈이 전봉장으로 나서서 장성 월평에서 동비와 싸우다가 패하였다.

한편, 동비들은 경병 1개 대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샛길로 정읍을 침범하여 홍계훈의 뒤를 포위하고 있다가 이날 새벽, 전주 서문에 도착하자, 김문현은 서문 밖 민가를 불태우고 성을 의지하여 방어망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정오가 지나 서문이 열리면서 동비들이 일제히 들어오므로, 김문현이 경기전으로 들어가 태조의 어진을 지고 떨어진 옷과 짚신 차림으로 난민들 사이에 끼어 도주하므로 본영은 큰 난리가 일어났다.

그리고 경기전에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지난 무자년(1888) 봄에 까치와 백로 수천 마리가 이 은행나무를 둘러싸고 싸우다가 까치가 진 일이 있었으며, 기축년(1889) 정월에는 노령들이 리서들과 몽둥이를 들고 싸우다가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반석리에서는 1천여 호가 모두 불에 타자 사람들은 이것을 까치가 싸운 응보라고 하였다. 이때 어진이 몽진하고, 영하의 만가가 동비에게 유린당하고, 망명한 노령들은 동비에게 투항하여 리서들을 다 죽이려고 하므로 이서들은 도주할 때 그들의 집을 모두 불태우고 날마다 약탈을 일삼았다.

 

13. 홍계훈의 전주 탈환전략

 

홍계훈이 전주에서 동비를 포위하였다. 그는 동비가 북쪽으로 달아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뒤를 따라 28일 전주에 도착하였으나 전주성은 이미 함락된 뒤였다. 처음에 홍계훈이 우려한 것은 동비와의 중과부적인 데다가 그들은 더욱 흩어져 있어 앉아서 끌어들일 수 없으므로 약 10일 동안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전주성이 함락되자 그는 죄를 지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어, 관군이 모인 틈을 타서 일거에 섬멸하려고 하였다. 이때 기조 지방의 원병들이 날로 모여들고 호좌렬군에서 새로 모집한 의병들도 속속 도착하였다. 이에 그는 초병을 나눈 후 요충지를 수비하게 하여 동비의 돌격을 방어하고, 또 서로 연락할 수 있도록 포진한 후 오랫동안 동비를 포위하여 곤경에 처하도록 하였다.

 

14. 김문현 유배

 

금문현을 거제부로 유배하여 천극을 가하였다.

 

15. 청국에 군대파병을 요청

 

청나라로 원병을 청하였다. 이때 동비의 기세가 날로 치성하여, 성읍이 비록 함락되더라도 백성들은 희색이 만면하였다. 그들은 혹 동비가 패했다는 말을 듣더라도 그 말을 믿지 않고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관군이 패했다고 말하고, 서울의 대관들도 시골 사람에게 동비의 소식을 들으면 모두 탄식하면서 “어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리원회가 떠난 후 서울에서는 유언비어에 서로 놀라, 혹은 전주가 함락되었다고 하고 혹은 동비가 금강을 건넜다고 하면서 피난민들이 사방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동비가 홍계훈에게 보낸 글에 「상봉국태공」이란 구절이 있자 홍계훈은 이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를 본 량전은 크게 노하여, 동비를 속히 평정하지 않으면 점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민영준을 불러 대책을 논하였다. 그것은 중국으로 전문을 보내 원병을 청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영준은 “지난해 천진조약을 체결할 때 청일 양국이 조선으로 파병을 할 때는 서로 알려야 한다고 하였는데, 청나라는 우리에게 별다른 악의는 없지만 일본은 오랫동안 우리를 엿보고 있는 처지이므로, 그들이 만일 조약을 빙자하여 속히 오지 않으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중궁이 동비가 보낸 글을 내놓으면서 꾸짖기를, “이 못난 놈아, 내가 어찌 일본놈의 포로가 되겠느냐? 다시는 임오년과 같은 일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패하면 너희들도 멸종될 것이니 여러 말 말라”라고 하였다. 이에 민영준은 원세개에게 간곡히 원병을 청하였고 원세개는 리홍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이홍장은 허락한다는 답서를 보냈다.

“지난번 한국정부에서 우리나라로 보낸 서한의 내용은 이러했다. 전라도 관할인 태인, 고부 등지의 백성들이 흉하고 사나워서 본래부터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요즈음 동학교비에 붙어 1만여 명의 무리를 이루어 10여 군데의 성읍을 빼았고 이제 또 전주성을 함락시켰으므로, 군대를 보내 그들을 다스리기 전에 미리 선무를 하였습니다만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여 우리 군대를 격파하고 많은 병기를 빼앗았습니다.

이와 같이 흉측한 자들이 오랫동안 소란을 피우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입니다. 하물며 그곳은 서울과의 거리가 4백몇십 리밖에 되지 않는데, 만일 그들이 다시 북상하도록 놓아둔다면 왕성 주위가 소란하게 되어 그 피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새로 만든 군대들은 도회지만 지키고 있고 또한 전투을 해보지 않은 병사들이므로 그들을 섬멸하기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습니다.

만일 흉구들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중국 정부에 우려를 끼치는 일이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지난 임오년과 갑신년 두 차례의 내란 때도 모두 중국의 병사들에 의지해서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번 원군문제도 귀 총리에게 간청하오니, 속히 북양대신께 전문를 보내어 몇 개의 부대를 보내도록 해주십시요. 이들이 속히 와서 저희 군대 대신 동비를 초멸하였으면 합니다. 아울러 우리 군대에 군무를 따라 배우게 하여 방어의 계책을 미리 세울 수 있게 하였으면 합니다. 한번 크게 도적들을 막아 쓸어 없애버리게 되면 감히 계속 주둔해서 막아줄 것을 바라지 않고 즉시 철군을 청하여 대병을 오랫동안 밖에서 수고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귀 총리께서는 속히 도움을 주시어 이와 같은 급박한 처지를 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중동전기>)”

 

16. 이홍장의 답전

 

“청국 북양대신이홍장의 답전은 이러했다. 이미 정여창에게 칙령을 내려 해군함 제원호와 양위호 두 척을 인천으로 파견하여 서울의 상인들을 보호하게 하였고 아울러 직례제독엽지초에게 태원진총병섭사성과 함께 해군 1,500명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군장비를 지급하고 이들을 상선에 나누어 태우고 차례로 출발하도록 하였으며, 한편, 주일공사왕사에게 전화를 하여 이 사실을 일본 외무성으로 알려 전일의 조약을 준수하였습니다. (<중동전기>, 왕사는 청국 주일공사왕봉조)”

 

17. 민영준의 고종 기만

 

민영준은 고종이 동학난을 키웠다는 죄로 벌을 받을까 싶어 신료들에게 외부의 일을 보고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홍장의 답전 내용도 비밀에 붙여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호남에서 난이 일어난 사실을 고종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하급 신하들도 그 비밀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조동윤이 고종을 알현하자 고종이, “도성의 인심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피난민들이 사방으로 피신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후 민영준이 들어오자 고종은 또 “도성의 인심이 어떻습니까?”하고 묻자 그는, “옛날처림 평온합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이 다시 “조동윤의 말은 피난민이 사방으로 피신을 한다는데 당신은 평온하다고 하니 도대체 어느 말이 옳은 것입니까?”라고 하자 민영준은, “조동윤은 소신이라 도를 어지럽혀 성상의 이목을 가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민영준이 밖으로 나오자 조동윤은 그를 맞아 읍을 한 다음 큰 소리로 “전주가 함락되고 도성이 텅텅 비었는데 공은 백성이 모두 평온하다고 하니, 누가 도를 어지럽히며 누가 성상의 이목을 가리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민영준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눈에 노기를 띠고 나갔다.

이때 민영준은 근심과 공포감에 쌓여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는 날마다 은을 쌓아둔 곳간에 들어가서 은덩이를 쓰다듬어 보다가 서쪽 곳간에 있는 은을 동쪽 곳간으로 옮기고는 잠시 후에 다시 동쪽 곳간의 은을 서쪽 곳간으로 옮겨 놓는 등 분분하게 움직이다가, 긴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때 바깥사랑에는 많은 공경들이 있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민두호는 민영준과 재산을 달리 모아, 따로 전곡과 보화 100만냥을 저축해 놓았다가 이때 하인들을 불러 탄식하기를, “너희들이 여러 해 동안 일을 하였지만 노고의 보수를 받지 못했으니 이것들을 가져가거라”고 하면서 한 사람당 백미 다섯 말과 당오전 100문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그 하인들은 기꺼이 받고 웃으며 헤어졌다.

 

18. 안국방의 감고당

 

숙종 기사년(1689)에 인현왕후는 안국방 사제로 쫓겨났다. 그 집은 인현왕후가 복위한 후 대대로 봉쇄하여 신서들이 거처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중궁이 다시 개수하여 민영준에게 하사하면서 문처마 「감고당」이란 편액을 붙여두었다.

이해 봄에, 민영준이 일찍 일어나 보니 큰 구렁이가 자신이 누워 있는 그 옆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크게 놀라 뛰어나오면서 하인을 불렀다. 그렇게 소란을 피우는 사이에 그 구렁이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민영준은 점점 더 그것이 나쁜 징조라고 생각이 들어 그 사실을 중궁에게 알리고 다시 그 집을 폐쇄하여 교동으로 이사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되어 그가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그것을 구렁이의 장난이라고 하였다.

 

19. 중궁의 아리랑 타령

 

정월에 고종이 낮잠을 자다가 광화문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다. 고종은 너무나 놀라 잠에서 깨어났으나 매우 좋지 않은 꿈이었다. 이해 2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하여 그 즉시 동궁을 개수하였다. 이때 남도에서는 계엄이 급박하였지만 토목공사는 더욱 열을 올렸다.

고종은 밤만 되면 전등을 켜 놓고 광대들을 불러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이번 곡은 「아리랑타령」이라고 했다. 이 타령이란 말은 곡조를 길게 빼는 것을 세속에서 일컫는 말이다. 원임대신민영주는 그 광대들을 거느리고 오직 아리랑타령만 전담하고 있으면서 그 우열을 논하여, 상방의 금은으로 상을 주었다. 이 놀이는 대조규개가 대궐을 침범한 후에 중지되었다.

 

20. 식년소과

 

이달에 식년소과의 방목을 발표하여 생원과 진사 1,300명을 선발하였다. 옛날의 제도에는 생원, 진사가 200명에 불과하였지만 근년에는 고종이 내탕전의 궁색함을 우려하여 매 식년마다 100명을 추가 선발하였다. 이들은 모두 납전자를 모집하여 원방에 붙인 자로서 이를 「원방진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납전자만 추가 선발하면 명문거족들에게 원한을 살 것 같아 하민들에게까지 은전을 내려 대신, 유현, 동궁, 관속의 자제, 형제, 질, 손으로부터 공주, 옹주, 전세명신, 사손 및 동궁의 동년인과 해시에 참여한 70세의 노인을 모두 방말에 붙여 이를 「은전진사」라고 하면서 중외인을 기쁘게 하였다.

이에 명현의 사손으로 위장한 자, 수염이 새파란 사람이 갑술생이라고 한 자, 심지어는 염치없는 조정 대신들까지 시골 부자들에게 많은 뇌물을 요구하고 자기 친척이라고 하면서 윤리를 무시하고 나라를 속여, 갖은 간사한 일을 자행하였다. 이해 봄에 생원과 진사의 회시가 2월에 있었으나 적도의 계엄으로 인하여 방목을 발표할 시기가 연기되었다가, 이때 조촐하게 거행하였다.

그러나 먼 곳에 사는 선비들은 큰 난리가 일어날까 싶어 일찍 귀향하였으므로, 그들은 백패도 받지 못하고 란삼과 폭건도 갖추지 못한 채로 떠났다. 이를 그때 사람들은 「공명진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옛날 제도에 생원과 진사의 방목을 낼 때는 방목 한 개에 다섯 명을 적었으므로 방목 40개를 내야만 200명이 되었다. 그리고 방목 끝에는 「필」자를 써 이를 필도라고 하였다. 이 방목은 돈을 내는 사람이 정원에 차지 않으면 수시 모집하여 수시로 방목을 내었으므로 매일 1~2번씩 방목을 낸 셈이어서 결국 「필」자는 쓰지도 못한 채 끝이 났다. 그것은 합격과 불합격을 막론하고 금전만 들어가면 방목을 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서리들은 고시관과의 내통으로 농간을 부려 백패를 위장하여 쓰고 편방에다 첨가 기록하였으며, 혹 시골의 간활한 무리들은 스스로 백패를 만들어 자기의 시골집으로 내려간 뒤 진사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진사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이 방목과 같이 무질서한 것은 일찍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조선 진사는 금년에 끝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후 과연 그들의 말과 같이 되었다.

 

고종 31년 갑오(1894년) ②

 

1. 청국 제독섭지초의 진주

 

5월에 청나라 제독엽지초와 총병 섭사성이 군함을 타고 아산의 둔포에 와서 정박하고 있으므로, 리중하를 영접사로 임명하여 그곳으로 파견하였다. 섭지초 등이 오게 된 동기는 리홍장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2. 일본 외무성으로 보낸 청국 조회문

 

초3일, 청나라 주일공사왕봉조가 일본 외무성으로 다음과 같은 조회문을 보냈다.

“본대신이 북양대신이홍장의 전보를 받아 보니 그 내용에, 광서 11년(1885)에 체결한 중동조약에 명시하기를, 이후 조선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중국이 마땅히 병사를 파견하되 반드시 일본으로 먼저 알리고, 조선이 평정된 후에는 즉시 병대를 철수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조선왕의 전보를 받아 보니 동학이 창궐하여 급히 원병을 간청한다고 하면서 난이 평정되면 즉시 철병하기를 희망하며 오랫동안 왕사가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이홍장 대신의 생각에는 조선이 전보를 하면서까지 원병을 간청한 것은 사세가 급박한 것이므로 막연히 바라만 볼 수 없어, 조선 왕의 뜻에 따라 제독엽지초를 조선의 충청도로 보내 속히 그 환난을 평정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면 그 나라에 있는 각국 관리와 상민들도 의지할 수 있어 두려운 마음이 없어질 것이며, 섭지초도 난을 평정한 후 바로 철병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합의대로 이행할 것이므로 삼가 유지를 기재하여 귀대신에게 아뢰오니 중동조약을 참작해 보시고 또 문서를 갖추어 일본 외무대신에게 조회를 해 보신 후, 이것이 합의되면 즉시 문서를 갖추어 회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그 회신를 기다리겠습니다.”



 

3. 청일간의 왕복 전문 내용

 

일본외무성경 륙오종광은 다음과 같이 회답을 하였다.

“귀 대신의 조회를 받아 보니 그 내용이, 명치 18년 4월 18일 중일 양국이 체결한 조약에 의거하여 조선이 보낸 요청 등에 따라 귀국이 이미 병대를 조선으로 파견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본 대신은 귀국이 비록 조선을 번국으로 보고 있으나, 조선왕은 귀국의 속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성명에 의하여 회답한 것이니 번거롭더라도 주청일본공사소촌수태랑에게 조회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청나라 총리아문에게 조회를 보내서 말하기를.

“귀 정부의 조회를 받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명치 18년 4월 18일 본국과 귀국이 체결한 조약에, 만일 조선으로 파병하고자 하면 피차가 서로 알리기로 하였습니다. 조선에서 내란이 매우 치열하여 본국이 부득이 파병하지 아니 할 수 없어서 이미 출병을 명령하였습니다. 즉시 그 사실을 관계 대신에게는 알려주고, 중국 총리아문 등에게는 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본 대신은 이를 받들어서 즉시 문서를 갖추어 조회하였으니 청컨대 번거롭더라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사리를 잘 살펴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청국 총리아문에서는 일본 공사소촌수태랑에게 다음과 같이 회답을 보냈다.

“우리나라가 원병을 급파하는 것은 조선의 간청에 의한 것입니다. 그 적도들을 평정한 즉시 철병하겠습니다. 귀국에게 파병이라고 말한 것은 상민을 보호하는 데 불과하며, 처음부터 중병을 파견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에서 만일 원병을 청하지 않았다면 우리 병대가 내지까지 들어간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며, 우리 병대가 떠나는 날 갑자기 귀병을 만나면 서로 군율도 다르고 언어도 불통하기 때문에 의외의 소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으니 이 뜻을 귀 조정으로 알려, 우리 뜻을 참작하시게 하여 사

건을 확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시 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에 앞서 을해년(1875)에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과 화약을 체결할 때, 제1조에 「일본은 조선을 자주국으로 생각하며 일본과의 그 자주가 평등하다」고 하였다. 청국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질책이 없었다. 그 후 을유년(1885) 천진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조선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여 중, 일 양국이 파병할 때에는 반드시 서로 알린다」고 하였다.

그것은 일본이 교사한 꾀를 꾸며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가불 청나라와 교제를 끊어야 하고, 청나라와 교제를 끊으려고 하면 불가불 자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을해조약을 체결하였고, 또 우리 나라는 내란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청나라의 원병을 요청할 것으로 생각하여, 그들이 파병할 때 서로 알린다는 조문을 인용하여 우리의 목을 쥐고 등을 두들기는 계략으로 을유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논평한 사람들은 리홍장이 외교에 실패하여 동방을 잃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실제에 있어서는 일본이 청나라를 내려다보고 우리 나라를 일본 외무성이 빼앗고야 말 심산이었다. 가령 조약을 체결할 때 그 조약 내용을, 중국은 파병할 수 있고 일본은 파병할 수 없게 하였더라도 그 사건의 귀추를 볼 때 일본이 어찌 병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확고한 조약을 만든 것은 그들의 구실에 불과한 것이다.

 

4. 홍계훈의 전주 동학군 구축

 

초8일, 홍계훈은 동비들에게 반사령을 내려 포위망을 풀고 그들을 놓아주었다. 그 적도들은 포위되어 있을 때 누차 출전하였지만 번번이 패하였으므로 홍계훈이 계속 승첩을 아뢰었고, 그 승첩을 보고할 때마다 반드시 중궁의 교지를 간청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본래 인자하여 그 적도들을 무마하기만 하면 모두 양민들이라고 생각하여 차마 살해하지 못하고 륜음을 내려 홍계훈에게 그들을 풀어 주도록 하였다. 이때 적도들은 북문을 열고 나가다가 관군과 충돌한 후 서쪽으로 유유히 떠났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가면서 약탈을 자행하였으나 어떻게 저지할 수도 없었다.

적도들이 물러간 지 2일 후에 홍계훈이 입성하였다. 이때 날씨가 매우 더워 시체 썩은 냄새가 거리에 가득하여 그 시체들을 낭가에 실어 냈으나 수일 동안 작업을 해도 다 실어 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전주는 삼남에서 제일 갑부였으며 그중에서도 서문 밖에 있는 부호들의 상점은 더욱 금굴로 칭하였는데, 이때 모두 불에 타 버려 그 소각된 집채와 기와조각들이 시체와 범벅이 되어 읍내와 마을이 쓸쓸하였다. 그리고 금학진은 적도들이 물러갔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날 동안 배회하고 있다가 15일경 리원회를 따라 입성하였다.

 

5. 일본군의 서울 진주

 

일본 공사대조규개가 다시 서울에 도착하고, 그 후 수사제독이동우형과 육군소장대도의창이 왔다. 대조규개는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으나 동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돌아왔으며, 이동우형은 초6일 입성하였다.

그리고 대도의창은 해구에 군함을 배치하여 수륙군이 도합 5천명이나 되었는데, 이때 군함 7척, 포함 2척, 료신선 1척, 상선 5척이 계속 도착하여 인천 연안을 상륙한 후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어 많은 적과 대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

 

6. 섭지초의 아산 진주

 

섭지초가 방문을 내어 적당들을 안무하다가, 그 후 전주가 수복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아산에 류진하고 있으면서 북양대신이홍장의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7. 일본군의 남산 포진과 대조규개의 알현

 

12일 황혼에 일병대대가 숭례문에 도착하였으나 숭례문이 닫혀 있자, 그들은 성을 헐고 남산으로 올라가 잠두봉에 진을 치고 주위에다가 대포를 묻어 전투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울에서 수원과 인천까지 수십 리 거리마다 군영을 한 개씩 설치하여 봉수를 서로 연결하고 징과 북소리를 내어 행인을 철통같이 단속하므로 원근이 크게 소란하였다.

이때 일본 공사대조규개는 고종을 알현하여 아뢰기를, “요즈음 남도민들이 적으로 화하여 감히 유사를 대항하므로 왕사를 동원하여 하루아침에 이들을 초멸하려고 하였으나 한편, 그것이 쉽지 않음을 우려하여 린방에게 원병을 청하였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 중대한 사실을 듣고 황제의 유지를 받들어, 이 사신에게 병대를 인솔하고 가서 우리 공관과 상민을 보호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아울러 귀국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도 생각하여, 귀국이 만일 우리에게 원병을 요구한다면 우리도 도와 친목을 위하여 성의를 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신은 그 명령을 띠고 서울로 온 것입니다. 그 결과 전주를 수복하고 잔당들은 도주하여 선후대책이 점차 풀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상의 덕을 입어 내외가 경하해야 할 일입니다. 대체로 볼 때 우리 나라와 귀국은 동양의 한 방향에 처하고 있어 지역이 매우 가까우므로 순치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렬방의 대세를 볼 때 그 정교, 치민, 립법, 리재, 권농, 장상 등에 있어서 자국이 막강하다고 생각하여 세계를 웅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옛날 법에 구애되어 세계와 공통하는 권리로 변통하거나 세력을 다투어 자립하지 못하면 어찌 열강의 사이에 낄 수 있겠습니까? 이로부터 우리 조정에서는 다시 이 사신에게 귀 정부와 회동하여 이 방법을 강구해서 실질적인 정치를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양국이 기쁘거나 슬프거나 서로 관련이 있는 데다가 볼처럼 서로 의지한 처지이므로 시종 서로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동할 대신에게 칙령을 내려 이런 사정을 다 말씀해 준다면 우리 대황제께서 린국을 생각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일본은 우리 정부로 「5강16조」를 보내어 국가의 기강을 개혁하도록 하였다. 그 26조 중에는 대충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1. 불필요한 관리를 감원하고 재덕이 있는 사람을 택하되, 문벌을 가리지 말 것.

2. 내외의 대권을 모두 정부가 장악하고 그 밑에 6부를 둘 것.

3. 왕궁의 사령관은 정부와 구별하여 간섭하지 말도록 할 것.

4. 팔도의 현을 너무 많이 분리하였으므로 서로 병합하여 경비를 절감할 것.

5. 뇌물로 관직에 오른 사람은 모두 축출할 것.

6. 관리의 봉급을 정하여 지출을 넉넉하게 하고 분수 외의 탐욕을 내지 말 것.

7. 각 관리들이 뇌물을 수수한 자는 중벌에 처할 것.

8. 경향을 막론하고 모든 관리는 상업을 경영하지 못하게 할 것.

9. 전국의 재정을 한결같이 밝혀 수입에 따라 지출하는 신법을 정할 것.

10. 국내의 토산물을 일일이 밝혀 세칙을 정할 것.

11. 국내의 관로는 일체 넓게 하여 서울의 철로를 통상항구까지 연결할 것.

12. 각 해관은 정부에서 관리하여 외인이 간섭하지 못하게 할 것

13. 법률을 정하여 옥사를 공평하게 할 것.

14. 병대를 증원하여 내란을 막을 것.

15. 무인은 독서인을 기용하여 문무의 재질을 갖추게 할 것.

16. 도성과 외도의 요새지는 순포방을 설치할 것.

17. 학교의 장정을 만들어 각도에 유학당과 전문학교를 설치하되, 서양의 예를 따를 것.

18. 학교에서 우등생을 택하여 각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그들이 학업을 마친 후 기용할 것.

이 조약을 살펴보면, 반드시 우리를 진정으로 위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병에 약을 쓰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도 불가한 일이므로, 이 조약을 강력히 시행했더라면 어찌 오늘처럼 화가 생길 수 있겠는가?

전에 이르기를, 「나라는 자국이 친 후에 남이 친다」고 하였으니 아, 슬프다!

 

8. 이남규의 상소

 

형조참의리남규의 상소문은 대충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의 영역이 비록 작지만 토지세와 호구세의 수입에 따라 지출하므로, 위로는 항시 소비량이 있어 사사로 저장할 수 없고 아래로는 정공이 있어 사적인 상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입이 비록 적어도 경용은 그리 궁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토지와 호구가 옛날과 같지만 경용이 날로 궁색해진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어찌 성상께서 하시는 일이 무익한 경비를 마구 써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극히 한정된 재정으로 한없이 남용을 한다면 그 형세는 반드시 방백과 수령에게 징색하게 될 것이며, 방백과 수령은 반드시 백성들에게 가렴주구를 하여 공사를 핑계로 사욕을 채우면서 모두 상납한다고 할 것이며, 모으기를 직업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연못이 마르도록 다 파헤쳐 고기가 없어지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에 이르기를, 「부극백성을 착취하는 대신. 편자주 은 원망 사기를 덕으로 여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이런 무리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방백으로서 수비하지 못하고 도주한 사람을 위리안치만 하고, 수령으로서 백성을 학대하고 난리를 일으킨 사람을 도배에만 그치며, 안핵사로서 백성을 속여 소란을 일으킨 사람을 유배에만 그치고, 균전사로서 민읍에 폐를 끼친 사람을 그 직위만 감하고 치죄를 하지 않으며, 전운사로서 일정량 이외로 징수하여 그들이 비방과 원망을 사서 화란의 조짐이 된다고 만구동성으로 말하지만 결국 불문에 부치니, 이것은 형법의 형평을 크게 잃은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인이 병대를 인솔하고 도성을 들어오고 있습니다만 신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또는 그 병대가 들어온 것이 무슨 명목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린방을 구하러 온 것이라고 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원병을 청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이 만일 상민을 보호하러 왔다면 우리는 상민을 잘 보호하여 아무 걱정도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그들에게 원병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구제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으니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속이는 행위이며, 우리는 상민을 잘 보호하여 아무 탈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도 그들은 호위를 한다고 하니 이것은 우리를 의심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갑신정변 때 도망친 흉도들이 그들을 의지하였지만 이들을 머물게 하고 보호하였으니 <춘추>의 법으로 따지자면 그것은 이미 위배된 행위인데, 지금 그들은 구제한다는 구실을 들고 나서니 이것은 이미 완급의 질서를 잃은 것입니다

하물며 그들은 지금 구제하지도 않으면서 명목만 호위한다고 하니, 어찌 그들이 또 방어를 한다는 우려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외무서의 신료가 그들을 의리로 타이르고 의와 신의를 베풀면 그들은 반드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였는데도 그들이 만일 그 의리와 성의와 신의에 감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이며 린방이 아닙니다. 이렇듯 적과 인방이 되어, 안으로는 그들을 꺼려하고 밖으로는 얽매이는 태도만 보이면 결국 아무 탈없이 넘어간 경우가 일찍 없었습니다.”

 

9. 조필영의 유배

 

전일에 이미 조병갑과 리용태를 멀리 유배하였는데, 이때 또 조필영을 도배하였다.

 

10. 이설의 상소

 

부사과리설의 상소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지금의 형세를 조용히 생각해 보니, 마치 사람이 종기가 터져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 어느 여가에 그 병이 일어난 원인을 따지며 지루하게 시약만 논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바라는 바는 먼저 혹독한 수술을 가하여 그 종기를 딴 후에 구급방을 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법을 전하를 위해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지금 병세가 매우 위급합니다. 그 병이 난 원인은 다름 아닌 동학도와 란민의 일당들 때문입니다. 그 동학은 아무 근거도 없는 사설로 세상을 속이고 군중을 의혹시킬 수 없는 것이지만, 그 동학에 빠져든 세력이 이렇듯 창궐하고 있고, 난민은 본래 왕화에 함육된 적자들이라 그들은 반드시 감화되어 귀순할 사람들이지만 한번 흩어진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오랫동안 향리에 있으면서 근일 되어가는 사태를 목격하였습니다만 방백과 수령들은 나라에 보은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백성들이 혹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면서 의식이나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 그들을 동비라는 누명을 씌워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내리고, 또 그들을 감옥에 가두어 형틀에 매 놓고 실토를 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슬프고 미련한 저 백성들은 비록 호소할 길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피와 땀으로 얻은 재산을 그 호랑이 입에다가 다 바쳐 겨우 목숨을 건진 뒤에는 그들의 처자를 이끌고 길가에 엎드려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동학도들은 그들을 유도하여 “너희들이 우리 당에 들어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므로 그 백성들은 서로 손을 끌어당기며 그들과 합세하여 국가의 기강을 언제 범했는지 돌아볼 여가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동학도와 난민은 하나가 되고 그들은 날로 불어나고 달로 늘어나 결국 오늘과 같은 이변을 일으킨 것입니다.

아! 전운사의 임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그들은 나라를 생각지 않고 사욕만 채워 자신을 살찌게 하였습니다. 감결을 숨기고 다닌 역졸들이 도내에 가득하여 토색하는 일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국가의 량곡을 도적질하여 그것을 팔아 모리한다는 소문까지 자자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행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난을 일으킨 자는 조필영입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균전사의 이름을 빙자하여 남모르게 치부를 하고, 국결을 속여 세금을 징수하므로 백성들은 그 피해를 입은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금창석도 난을 일으킨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난이 처음 일어난 곳은 고부입니다.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으면서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 난을 주창한 사람은 전군수조병갑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안핵사의 임명을 받았으면 당연히 신중을 기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세를 이용하여 재물을 빼앗으며 도리어 탐학을 일삼고, 또 가라앉은 기염을 다시 선동하여 그 난을 재촉한 사람은 리용태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전감사금문현은 그중에서 더욱 행패가 심한 사람입니다. 그는 탐학을 자행하여 난을 빚어 내고 또 백성들을 잘 무마하여 난을 진압하지도 못하더니, 결국은 그가 오히려 백성들을 격분케 하여 난을 재촉하였으므로 그런 난리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때 적기를 한 번 흔들면 백성들은 짚신을 신고 길에 넘어지며 창황히 도경을 넘어 목숨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는 묘당의 소중함도 생각지 않고 변방의 수비를 잃었으니 그래도 신하의 본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렬읍의 수재들의 비행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만 그들은 혹 기회를 살펴보다가 산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식량을 싸 가지고 바다로 도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령광군수민영수가 그중 한 사람입니다. 이렇듯 그들의 범죄가 비록 경중은 있습니다만 그들이 잔혹한 행동을 하여 기강을 무너뜨린 것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에는 떳떳한 법이 있고 법에는 그에 해당된 조항이 있는데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아! 신이 말한 구급방이라고 한 것은 그 항목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비록 노인들의 상담에 불과하지만 혹 병증에 대한 좋은 치료제가 될 것입니다.

1. 속히 애통스러운 내용을 담은 조서를 내려 회오의 마음을 보일 것.

2. 급히 진휼을 베풀어 흩어진 백성들을 부를 것.

3. 궁금을 더욱 엄하게 하여 간세배의 출입을 막을 것.

4. 언로를 개방하여 여러 정책을 수습할 것.

5. 원병의 도움만 믿고 무비를 늦추지 말 것.

아! 병을 치료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병을 치료한 후에 조섭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난을 평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난을 평정한 후에 치안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그 병이 생긴 원인을 규명하여 한번 논해 볼까 합니다. 그 병이 일어난 원인은 한 가지 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이 「사」자라는 한 글자에 있다고 봅니다. 그 사심을 버리지 못하면 공도가 행해지기 어렵습니다.

자고로 국가를 위하는 사람은 누가 인심을 감복시키지 않으려 하였겠습니까만 그 백성들을 감복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옛날 주자가 송나라 효종에게 말하기를, “만일 강명하고 공정한 사람을 기용하여 재상을 삼으면 내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될 것 같기 때문에, 평일에 정색을 하며 직언을 하지 못한 사람을 취하여 그들의 역량을 헤아려 보고 그들이 지극히 용렬하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고 방해가 되지 않은 뒤에 기용을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재삼 읽어 보고, 이 말은 만세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도 이 말을 거울삼아 목이 마르면 물을 찾듯 항시 현인을 생각하고 반드시 그런 사람을 얻으시고 또 그 현인에게 책임을 맡겨 소임을 성취하도록 책망하되, 그 현인을 의심도 하지 말고 이랬다저랬다 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현인을 고종중국 은의 제왕. 이름은 무정. 편자주 이 부열부설은나라 고종 때의 재상. 고종은 성인의 꿈을 꾸어, 백공의 들에서 전설을 구하였음. 편자주 에게 맡기듯 하고 유비가 제갈공명을 믿은 것같이 하면, 사심을 버리려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버려지고 공도를 행하지 않으려고 해도 스스로 행해져, 하늘에 빌어 국명을 영구히 하려는 기틀이 바로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많은 근심은 성상의 마음을 열리게 하고 어려운 일이 많으면 나라가 흥한다」고 하였으니 성상께서는 다시 많은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금창석도 유배되었다.

 

고종 31년 갑오(1894년) ③

 

1. 청일 양국의 조선 내정개혁에 관한 조회

 

16일, 일본 외무경륙오종광이 청나라 공사광봉조에게 다음과 같이 조회하였다.

“목하 귀국이 본국과 함께 동학당의 난리를 이미 평정하였으므로 우리는 조선을 대신하여 그 내정을 정비하기 위해 우리 양국은 각기 대신들에게 공환을 보내고, 또 조선으로 가서 그 국고의 출납과 관리의 기용과 내란의 탄압과 병대의 정비 등 모든 폐단을 살펴 조선의 진흥을 꾀하려고 하오니 귀 대신은 귀 조정으로 이 사실을 아뢰어 속히 시행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2. 왕봉조의 회조

 

왕봉조는 다음과 같이 회답을 보냈다.

“귀측의 전화를 받은 후 그 사실을 우리 황상에게 아뢰었습니다. 그 회답 내용에 조선의 내란이 이미 평정되었다고 하니 본국에서는 다시 외지에 군대를 파견할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후환을 예방한다는 일관은 그 뜻이 비록 좋기는 하지만 그들의 내치는 그들 나라에서 정돈할 일이며 우리 중국은 간섭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귀국이 이미 조선을 자주국가로 인정하였는데 어찌 그들의 내정을 간섭하려 하십니까? 이것은 그 의의가 명백하지 않을 뿐 아니라 피차가 병대를 철수하는 사항은 이미 을유조약에 명시되어 있으니 그 조문을 한번 보시어 다시 거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륙오종광의 조회

 

23일, 륙오종광은 다시 왕봉조에게 다음과 같이 조회를 하였다.

“창국이 청하는 일을 귀국이 일체 허락해 주지 않아, 폐국으로 하여금 동심지의 잃게 하였으니 어찌 그 섭섭함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볼 때 조선에서 어떤 음모로 인하여 난리가 일어나면 폐국에서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주력이 너무 약하여 무거운 책임을 질 수 없고 우리 폐국에게 관련된 일도 통상 관계 하나뿐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 대신 좋은 법을 마련하여 전국을 안정시키려고 합니다. 시일이 오래 지나면 화란이 더욱 치열해지므로 지금 양국이 병력을 철수하기 전에 그 철수 범위를 정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질서를 바로잡도록 하고, 그 질서가 문란하지 않은 후에 철병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심정을 이해하지 않고 시종 거역만 한다면 우리는 단연 철병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4. 청국군대가 조선에 진주한 원인

 

이때 일본에 있는 청국 관리는 왕봉조이며 우리 나라에는 원세개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여 북양대신리홍장과 내통하였는데 그들이 서로 주고받은 전보 중 한두 가지만 기록하여 그 대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이 병력을 동원한다고 한 것은 그 뜻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중국의 청을 거절한 것이며, 이홍장은 영국과 러시아를 의지하여 자국이 대리행사를 하려고 하였다. 이때 영국과 러시아는 관망하면서 먼저 병력을 동원하지 않고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으므로, 이홍장은 병력동원을 결의하여 수륙제군이 우리 나라로 진출하였다.

 

5. 조병호를 경상감사에 임명

 

리!!영을 경상감사로 임명하였으나 그가 부임하기 전에 교체되어, 충청감사조병호를 대신 임명하였다.

 

6. 교정청 신설과 시정 개혁

 

6월에 교정청을 신설하여 심순택, 김홍집, 김병시, 조병세, 정범조 등을 총재관으로 임명하여 금영수, 박정양 등과 함께 서정을 개혁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조규개의 말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22일 일본인은 대궐을 침범하여 강제 맹약을 체결하고, 대원군리하응을 위협하여 궁중으로 들어가서 국사를 논하게 하였다.

 

7. 대조규개에게 보낸 회답

 

대조규개가 서울을 들어온 후 우리 정부에 대한 협박이 날로 심해지자, 우리 정부는 25일 다음과 같이 조회하였다.

“병자수호조규 제1관에, 조선은 자주지방이므로 일본국과 평등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구절이 있으므로 본국은 그 조약을 체결한 후 우리 양국의 교섭에 있어서 동등한 자주권을 행사하였고, 이번에 중국으로 원병을 청한 것도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행사하여 조일조약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본국은 다만 이미 결정된 조약을 준수하여 시행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내정과 외교를 자유롭게 하고 있음은 중국도 잘 알고 있으므로 중국 왕대신의 조회와 큰 차이가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본국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며, 본국이 귀국과의 교제에 있어서도 다만 양국의 조약에 의하여 시행한 것이니 이에 대한 회답을 해주시기 바라며, 번거롭더라도 이 조회를 보신 후 귀 외부대신에게도 그 내용을 전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대조규개는 회답을 보내면서 우리의 의견을 억지로 꺾었다.

 

7. 이홍장이 원세개에게 보낸 전문

 

26일, 리홍장이 원세개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한국이 중화에 속한 지 이미 1천여 년이 된 것은 각국이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만 한국이 서양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성명까지 낸 것은 왕에게 견지하기를 권한 것이므로 왕은 일본이 두려워 결국 인준하고 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화의 속국이 아니라는 문서까지 냈다고 하니 우리 중화는 병력을 동원하여 그 죄를 물어야겠습니다.”

이것은 이홍장이, 대조규개가 한국의 정치를 강제로 개혁한 것은 자주정신을 고취하여 청나라와 국교를 끊게 하려고 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원세개에게 이 전보를 보내 엄하게 담판을 짓도록 한 것이다.

 

8. 원세개가 리홍장에게 보낸 전문

 

6월 초3일,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일본이 정치개혁을 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한국이 어찌 끝까지 견지할 수 있겠습니까? 또 무슨 변이 생길까 싶습니다. 지금 그들은 또 병대를 더 동원하여 인천에 도착한 수가 1,500명이나 된다고 하니 그들은 결코 강화할 뜻이 없습니다.

우리가 강화를 하려고 하면 속히 한국의 정상을 일본과 상의하여 그들의 행동을 만류해야 하고, 우리가 싸우려고 하면 은밀한 계획을 짜야 하므로 이 원세개는 이곳에서 아무런 담판을 지을 방법이 없고, 함부로 담판을 하려다가는 공연히 욕만 보게 될 것이므로 천진으로 가서 자세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때 강화를 하건 전쟁을 하건 그 대책에 도움이 되어 혹 승낙을 해주신다면 즉시 그 지시대로 시행하여 당수(초의)를 잠시 나의 대리인으로 임명하겠습니다. 당수는 담력과 식견이 있지만 아무 명예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를 꺼리지 않을 것이므로, 그에게 일본의 소식을 염탐하여 은밀히 한국을 돕는 것이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럼 속히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이홍장은 그의 귀환을 허락하여 주었다.

 

9. 청국 총리아문이 이홍장에게 보낸 전문

 

초4일, 청국 총리아문에서 북양대신리홍장에게 전화를 걸어, 원세개에게 보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전일에 원세개에게 함부로 병력을 동원하지 말라고 한 것은 본래 일본이 우리가 한국을 치지도외한 것으로 의심하고 또 그들이 먼저 리간할 행동을 보일까 염려되어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웨베르(Karl Waeber)가 와서 한국으로 떠난다는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그는 오로지 한일 관계를 위해 가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러시아도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웨베르가 만일 한국에 도착하면 원세개와 면담이 있을 것이니 조금 그 시기를 기다렸다가, 혹 형세가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거나 혹 존처에서 면담을 구실로 삼아 천진으로 오더라도 행적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며, 한국에서 대조규개에게 회답한 내용도 체통을 잃지 않았으니 이 시기에 원세개에게 한국이 조그마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책망하지 말라고 부탁해 주시기 바랍니다.”

 

10. 고종이 주진종사관서상교에게 보낸 전문

 

초8일, 고종은 주진종사관서상교에게 전화를 걸어, 리홍장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하도록 하였다.

“일본이 병대를 철수할 의사도 없이 위협은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5조약을 억지로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파견한 관원들이 사적으로 상의하여 작전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결코 변혁할 뜻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총리와 매사를 의논하여, 속히 일본 병대를 철수시켜 도하의 인심을 안정시키고 간세배들을 엄단해야겠으니 수시로 중당이홍장의 호. 편자주 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기 바랍니다.”

 

11. 리홍장이 서상교에게 보낸 회답전문

 

초9일, 리홍장이 성선회를 시켜 서상교에게 보낸 회답전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중화의 분통이 한국과 같이 간절하다는 것을 모르고 이미 대대적으로 병력을 원병으로 진주시키니, 우리 양국이 서로 다투면 서울이 전쟁터로 바뀌어 한국이 크게 유린될까 싶습니다. 우리 조정은 이런 점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차마 병력을 파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태가 만회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단연 좌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다른 나라들도 일본이 조약과 공법을 어겼다고 하여 모두 중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이미 조약과 같이 한국에게 자주국가임을 인정하였음에도 어찌 자기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한국에 대한 정치개혁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마음을 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한편, 들은 말에 의하면 한국 조정의 소인배들이 왕에게 일본인의 의견을 따르라고 권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일본이 내정을 간섭하는 것이 곧 한국을 속국으로 대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 화를 헤아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종사가 폐허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러시아 공사웨베르도 조선의 옛 제도를 갑자기 바꾸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러시아 조정에서는 정치에 대한 간섭을 원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였고, 중당리홍장도 한국에서 정치개혁을 기대하려면 한국정부가 스스로 개혁하도록 권해야 하며 우방을 협박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웨베르의 의견도 이와 같아 일본 공사소촌이 총리서에서 회담을 개최할 때 자기에게 서명을 요구하자 그는 이와 같은 의견으로 대답하기를 “대조규개가 요구한 5개 조약은 한국이 자랑해서 할 일이지 어떤 것은 단연 개혁하지 못하고 어떤 것은 적당히 개혁하고 하며, 어떤 것은 또 늦게 개혁하려고 합니까? 먼저 원도대에게 은밀히 상의하여 다시 그 의견을 대조규개에게 회답하십시오. 그리고 일본이 먼저 철병을 한 후에 다시 회의를 개최하여 자세히 논해야 합니다. 만일 전군을 철수하지 않으려면 서울의 주둔병부터 철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총리서의 내정을 논할 때도, 그는 조선이 스스로 개혁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일본인이 강제로 개혁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므로 자기의 권리를 보존해야만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왕도 자책하는 교지를 내렸는데, 그 뜻이 우리의 뜻과 같으니 원세개와 어찌 상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혹시 서상교에게 전화를 하여, 우리 중화가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그 여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여 만에 하나라도 틀림이 없게 하시기 바랍니다.”

 

12. 원세개의 귀국

 

원세개가 상민을 인솔하고 인천으로 나가 해로로 귀국하였다. 원세개의 자는 위정이며 호는 항성으로, 직례의 하간 사람인 고 순무사갑삼의 아들이다. 그는 이홍장에게 발탁되어 우리 나라의 일을 맡은 지 10년 사이에 위엄과 은혜를 고루 발휘하여 일본인이 꺼려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강화가 결렬되자 그는 일본인의 획책에 말려들까 싶어 당소의를 그의 대임으로 남겨 두고 자국으로 귀환하였다.

이때 그를 논평한 사람의 말을 들으면, 동비를 평정하는 데 청나라의 원병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으나 원세개는 무슨 이유를 들든 자기가 전공을 쟁취하기 위하여 장황한 말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이러한 파란이 생겼으며, 그때만 해도 일본이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못하여 결국 원세개의 말을 믿고 모든 허물을 이홍장에게 돌렸다고 한다.

그 말이 모든 여론을 덮을 만한 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당소의가 13일 보낸 전보를 살펴보면 원도대가 땀이 났다고 하며, 그 뒤에 보낸 전보에는 그가 천진에 도착하여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고 하고, 18일 전보에는 일본 공사의 말에 의하면 원총리가 천진에 도착하여 아마 병이 났을 것이라고 하였다.

원세개가 서울에 있을 때 번민을 하다가 병이 나서, 여가를 이용하여 천진으로 떠난 시기는 이달 15일 전후였다.

 

13. 엽지초가 리홍장에게 보낸 전문

 

초10일, 엽지초가 아산에서 이홍장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일본이 날로 창궐하여 한국은 원병이 와 주기를 바라며 각국으로 타진을 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으니, 이런 시기에 북방에 있는 수군과 육군을 보내 주시면 제가 그 부대를 인솔하고 전진하여 요새지를 점거한 후 「상민 보호」라는 구실로 명분을 내세울까 합니다. 그리하여 만일 일본군이 결렬되어 우리 병대가 진출할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이것이 상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선 3,4척을 아산으로 보내어 우리 군대를 철수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동비를 초멸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지금 동비들은 그 선무를 받아들인 즉시 농성을 철회하였으니, 이 일을 바르게 처리한 후 각국 공사관과 일본 조정으로 공문을 보내 전일에 동시 철회한다는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약조를 따르지 않는다면 초가을에 다시 거병하는 것이 중책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곳만 지키고 있으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면 한국인은 공연히 일본인들에게 곤욕을 당하게 되어, 그들은 우리를 실망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병사들도 아무 전쟁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로숙을 한다면 이 무더운 빗속에 병이 날 것이니 이것도 매우 우려됩니다. 그럼 속히 전화를 주시어 시행사항을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14. 일본인의 대원군 영입

 

20일, 일본인은 대궐을 침범하여 강제로 맹약을 맺고 대원군이하응을 궁중으로 영입하여 국사를 논하였다. 그리고 대조규개는 외부서로 다음과 같은 조회를 하였다.

“청국인이 귀국을 속방이라고 하면서 병대를 출동하여 보호한다고 하니 이것은 자주권을 침탈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귀국이 이런 명분을 용인하여 참다운 길을 잃는다면 청국군들은 오랫동안 귀국의 경내에 머물러 있을 것이니, 이것은 귀국의 자주권을 침해당할 뿐 아니라 그 조약에 기재된, 한국과 일본은 평등하다는 구절이 한갓 문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므로 그것은 체통이 서지 않는 소행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 정부는 빨리 청군을 물러가게 하여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할 것을 의논하십시오. 만일 시일을 지연시킨다면 본사는 마음속으로 결정한 바가 있으므로 외부서의 종사관에게 약속을 어겼다는 대답을 하겠습니다.”

이 조회를 보낸 후에도 대조규개는 우리에게 청나라의 속국인지 아닌지를 물어 왔다. 그의 말은 매우 긴밀하므로 침순택 등은 그 명칭을 시정하겠다고 하였으나, 아무 건의도 하지 않고 은밀히 청국인의 병대를 믿으며 관망만 하고 시일을 보냈다.

대조규개는 우리측의 이러한 태도를 알고 병대를 지휘하여 경복궁까지 진주하여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별전까지 이르므로 우리측의 호위군과 시신들은 모두 도주하고 오직 량전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하얗게 번쩍이는 칼을 들고 양전을 에워싸고 있으므로 양전은 전전긍긍하면서 자세를 잃고 있었다. 그들에게 무슨 까닭으로 이러는지 물으려고 하였으나 옆에는 통역관조차 없었다.

이때 마침 안경수가 들어왔다. 안경수는 일본어를 잘 하였다. 고종은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통역을 하라고 하였다. 이때 대조규개는 칼을 빼들고 고함을 치며 “국태공이 아니면 인주로서 오늘과 같은 날이 없었을 것이니 국태공을 속히 데려오시오.”라고 하였다. 대원군이하응이 들어오자 대조규개는 고종의 교지를 받아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일병들은 대궐문을 파수하고 있으면서 들어오는 사람마다 일일이 점검하여 들여보냈다.

금홍집, 금병시, 조병세, 정범조 등이 차례로 들어오고 그 후 침순택이 도착하자 그는 손을 저으며 들어오지 못하게 하므로, 심순택은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을 물러나와 조방에서 사흘 동안을 앉아 있었다. 대신들은 대궐로 들어갔으나 그들이 두려워 아무 대항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빠른 시일 내에 옛 제도를 변경하자는 여론을 전개하였다.

대조규개는 대원군을 대궐 안에 구류하고 있었다. 이때 대궐 안에 있던 각사의 관원들은 모두 그곳을 떠났고 어공도 들여오지 않았다.

고종은 배가 매우 고파 운현궁에 명하여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 수라상이 대궐문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던 일병들은 그 음식을 마구 집어먹어, 수라상이 고종 앞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빈 상이 되어 있었다. 고종은 그 후 다시는 성찬을 차리지 말라고 하였다.

대조규개가 대궐을 침범할 때 평양병 500명은 대궐을 호위하고 있다가 대조규개를 향해 창을 던졌다. 이에 그는 협문을 통하여 고종이 있는 곳으로 가서 고종을 협박하여 함부로 요동하는 자는 참한다는 교지를 내리게 하자, 병사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총통과 군복을 마구 찢고 부순 후 도주하였다.

또 여러 영병들은 하도감에 모여 맹세하기를, “우리가 비록 천한 졸병이지만 국가의 후은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변괴가 이런 지경에 이르러 궁중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도 모르고, 그들은 우리 영병들이 해산하지 않는 것을 알고 감히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만일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면 우리는 결사투쟁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대포를 정비하여 궁장을 수비하고 있다가, 일병들이 대궐에서 나와 여러 영병을 약탈할 기세가 있으면 영내에서 일제히 대포를 발사하였다.

그러나 대조규개가 고종의 교지를 받아 의장병을 내보내자 영병들은 분이 나서 칼로 돌을 쳐부수고, 곡성은 산이 무너지듯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하다가 해산하였으므로 영병의 병기는 모두 일병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에 일병들은 사방을 수색하고 다니며 대내의 보화와 렬조의 진품과 종묘의 기명 등을 찾아 모두 인천항으로 싣고 갔으므로 우리 나라가 수백 년 동안 쌓아 두었던 국보가 하루아침에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는 조그마한 병기도 없었고 민씨들도 모두 도피하고 없었다. 이때 민영주는 양주, 민영준은 관서로 도피하였다. 민응식은 그의 아들 민병승과 함께 삿갓을 쓰고 짚신을 허리에 찬 채 맨발로 걸었다. 그 모습은 교부와 같았다. 그가 숭례문 밖으로 나가자 방민들은 그에게 기왓장을 던지고 손가락질을 하며 “이 사람이 지난날의 민보국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민두호가 춘천에 머무르기 위해 가벼운 보물을 싸가지고 내권을 호화로운 교자 10개에 나누어 태우고 춘천에 도착하였다. 이때 춘천민들은 그 교자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이런 난리를 만났으니 관동의 도둑을 다시 들어오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민두호는 이런 낭패를 만나 길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가 진령군과 함께 충주로 도주하고, 민영환과 민영소만 도주하지 않으면서 “나는 수년 동안 휴직하였으므로 아무런 죽을 죄가 없는데 왜 도망을 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민영익은 향항에서 전화로 말하기를, “만일 대조규개의 말대로 시행하면 그에게 속임수를 당하여 안남의 전철을 다시 밟게 될 것이니 이 문제를 흐지부지하다가는 화를 부를 뿐 아니라 국가의 존망 성패가 달려 있으므로, 우리의 주장을 완강히 지키어 우리 스스로를 강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15. 민영준 등의 유배와 민씨들의 도주

 

민영준은 임자도, 민형식은 록도, 민응식은 고금도, 민치헌은 홍원, 금세기는 영양으로 도배하여 위리안치하려고 하므로 조야는 형량이 적합하지 않다고 분개해 하였다.

그러나 민씨들은 모두 도주하여 배소로 떠나지 않았고, 김세기도 그들과 같이 떠나지 않자 사람들은 더욱 분개해 하였다

그리고 금윤식을 강화류수로 임명하고 금학진을 불러 병조판서로 임명하였으며, 장흥부사 모를 전라감사로 임명하고 리유인을 함경도 병사로 임명하였으며, 리규석을 춘천유수로 임명하였다.

 

16. 금홍집의 영의정 임명

 

해륙군의 군무를 모두 대원군에게 결재받도록 하였다

금홍집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17. 금가진 등 관직 임명

 

김가진은 외무협판, 유길준은 외무참의, 리원경은 내무참의, 안경수는 우포장, 어윤중은 선혜청당상, 조희연은 장위사, 리봉의는 총어사 및 경리사, 신정희를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18. 금만식 등 관직 임명

 

금만식은 평안감사, 금춘희는 황해감사로 임명하였다.

금만식은 김윤식의 종부형이며, 금춘희는 김홍집의 조카이다.

 

19. 상소자의 승지임명

 

정언지석영, 주사금하영, 박준양, 금학우, 리응익, 륙종원, 부사과한창수, 리설, 리최승, 함우부 등을 모두 승지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금년 이후 상소하여 국사를 거론한 사람들이다.

 

20. 신기선 등 유배자의 석방

 

24일, 유배된 사람에게 대사면령을 내려 신기선, 리도재, 안종수 및 권봉희, 안효제, 조희일, 려규형 등을 모두 석방하였다. 그중 홍진유는 사망하였다. 그리고 권봉희와 안효제는 홍문관 교리로 제수하였다.

이때 소문에는, 박영효가 대조규개를 따라가 니현에 있는 일본공관에 잠복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대조규개가 꾸민 음모는 사주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21. 군국기무처의 설치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영의정금홍집을 회의총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박정양, 민영달, 금윤식, 금종한, 조희연, 리윤용, 금가진, 안경수, 정경원, 박준양, 리원경, 금학우, 권형진, 유길준, 금하영, 리응익, 서상집 등을 회의원으로 구성하여 날마다 회의를 개최하고, 그곳에서 상의한 대소사무를 주달하여 반포하였다.

 

고종 31년 갑오(1894년) ④

 

1. 성환역의 청일전투

 

청국 제독엽지초 등이 함환역에서 일병들과 싸워 패하자 리홍장은 22일 수군과 육군을 우리 나라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육로를 따라 대동구에서 의주와 평양으로 향하였고, 수로로는 섭지초를 후원하기 위해 아산항 외양까지 진주하였다.

그리고 23일 오전 7시에서 9시 사이에 일본 군함의 습격으로 청국 군함이 간혹 불에 타거나 침몰되어 육지로 오르지 못하고 다시 려순 앞바다로 퇴각하였다. 이때 일본 장수 대도의창은 서울에서 일병 1만여 명을 인솔하고 아산으로 향하였다.

엽지초는 수군이 참패한 데다가 대도의창이 진격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25일 병사 2천여 명과 함께 일전을 맹세하고 성환으로 진을 옮겼다. 아산과의 거리가 약 30리 정도 되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솥을 묻고 밥을 지었다. 그들은 일병들의 습격도 생각지 않고 척후병도 두지 않았다.

이때 대도의창은 소사에서 송림 사이로 행군하여 성환역의 동쪽에 도착하였다. 그는 높은 곳에 올라가 여러 곳에 복병을 배치하고 일제히 대포를 발사하였다. 청병들은 밥을 다 먹지도 못하고 급히 일어나 저항을 하였다. 밤이 어두워 서로 보이지도 않고 폭탄 튀는 소리와 함성이 날이 새도록 요란하였다. 일병 사망자는 1,700여 명이었고, 청병 사상자는 모두 300여 명이었다. 섭지초는 중과불적이어서 남쪽을 향해 도주하였다. 일병들은 그를 수십 리쯤 추적하다가 중지하였다.

이 성환역은 삼남의 국도에 있으므로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곳 100여 개나 되는 마을이 모두 그들에게 유린되어 노인과 어린이 사망자가 줄을 잇고 있었다. 청병이 이미 패배하여 총에 맞아 미처 도주하지 못한 병사는 땅을 기다가 일병의 칼에 맞아 죽고, 건장한 병정들은 그 시체의 옷을 벗겨 입거나 또 그들이 딴 머리로 상투를 틀거나 농민들의 삿갓을 빼앗아 쓰고 도주하다가 길에서 더위를 먹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공주에 도착하였을 때 행방을 모르거나 죽은 사람이 절반이나 되었고, 생존해 있는 사람도 모두 상이군인인 데다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병사로서는 쓸 수 없었다. 청일 양군이 한창 싸울 때 일병은 5명이 1대가 되어 서로 돌아가면서 대포를 발사하였고, 청병은 매 1대마다 일제히 발포하였다. 그리고 섭지초는 한밤중에 한 손에는 방패를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어 좌충우돌하면서 일병 1대를 격파하였고, 또 그는 나무를 의지하여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나가 일병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가 수차에 걸쳐 이와 같이 하자 일병들은 그를 신장이라고 하면서, 그로부터 다시는 그를 추격하지 못하였다.

이 전투가 일어난 지 수년이 지난 후 내가 성환역을 지나다가 그 전쟁터의 유적지를 가 보았더니, 그 주변에 사는 주점 주인이 이상과 같은 이야기를 일러주었다. 이때 가는 곳마다 유언비어가 많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우리 조정에서 청나라와 이미 절교를 하였다고 하였고, 공주 관리들은 청국인을 매우 박대하였다. 청병이 수일 동안 머무르고 있던 중 공주 주민들은 거짓말로 일병이 곧 추격해 온다고 하자 청병들은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또 동북쪽으로 100여 리쯤 가면 청주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의 성지는 수비할 만하다고 하자 엽지초는 청주로 향하였다. 이해 청병들은 길을 가다가 밥을 사먹고는 우리 나라 돈이 없으므로 식대를 주지 못하고 은전으로 우리 돈을 사려고 하였으나 주점 주인은 거짓말로 “우리 나라는 은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청병들은 할 수 없이 1천냥 정도 되는 돈을 100냥의 값으로 주기는 하였지만 매우 원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점포에서도 오이나 과일 등을 팔 때 값을 배나 올렸고, 간장 한 그릇을 요구해도 매우 인색해 하였으므로 청병들은 모두 배고픈 것도 참고 떠났다. 그리고 섭지초 등은 청주에서 강원도로 갈 때 서울의 뒤를 돌아 나갔는데, 이때 북양대신리홍장이 지휘하는 륙군이 우리 국경을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그곳으로 가 이홍장과 회견을 하기 위해 7월 중 안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병사 금동운이 그를 예우하지 않자 엽지초는 우리 국민들이 그들을 저버린 데 대한 양심을 품고 크게 화를 내며 김동운을 결박하여 곤장 30대를 쳤다. 김동운은 수치심과 노기로 병이 발생하여 그 직후 사망하였다. 그 후 섭지초와 섭사성은 평양에서 위여귀 등과 회동하였는데, 청병이 성환전투에서 사망한 사람으로는 리대본, 오천배, 왕국우, 염기룡, 허의우, 리옥상 등이다.

맨 처음 이홍장이 원병을 보낼 때 섭사성이 건의하기를, 일병이 한국을 들어오기 전에 우리 대병이 먼저 압록강을 건너 속히 평양을 점거하고 또 해군 함대는 인천항구를 점거하여 일본 군함이 기세를 펴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아산에 있는 청병은 북양대신이 인솔한 해군과 일병을 견제한 후에 평양에 있는 대군이 서울을 습격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이홍장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후 아산의 주둔병이 패배하자 이 계획도 폐지되었다.

 

2. 대도의창의 청원

 

대도의창이 서울에서 출발할 때 우리 병사 3천명이 도와줄 것을 요구하자 우리 조정에서는 흩어진 병졸 3천명을 모아 음식을 먹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출발을 하려고 할 때 서로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적국을 도와 원병을 습격하면 하늘은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이며 또 일본인은 우리를 향도로 내세워 선봉부대로 삼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고래 싸움에 새우만 죽게 될 것이므로 이곳은 우리가 죽는 곳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은 큰 고함을 지르며 “우리는 모두 헤어지자”고 하고 일시에 모두 해산하였다.

 

3. 일본군의 서울 진주

 

일본 해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들어오고 육군은 동래에서 조령을 넘어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의 수송대는 천리 길에 뻗어 있고 연도에는 24개의 병참을 설치해 두었다. 그들은 우리 백성들을 고용해서 그 치중을 수송하였다. 우리 백성들은 일병들이 갑자기 쳐들어온 것을 보고 모두 놀라 도피하여, 마을마다 한결같이 비어 있다가 한 달 후에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일병들의 명령은 매우 엄하였으나, 사람을 살해하거나 촌락을 약탈하는 일이 없어 청국 병대와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4. 지석영의 민영준 청주 상소

 

형조참의지석영이 상소하여 민영준과 금창렬의 어머니 진령군을 처형하라고 하였으나 그 청을 윤허하지 않았다. 민영준이 도주할 때 많은 사람들은 분개해 하였으나 장래 그의 위협이 두려워 그를 성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지석영의 상소가 나오자 어떤 사람들은 시체에 매질한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모두 통쾌하게 생각하였다.

 

5. 최익현의 공조판서 사양과 어윤중 등의 관직 임명

 

최익현을 공조판서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어윤중, 리용구, 조희일, 금가진, 금종한 등은 판서로 임명하였으며 한기동, 리건창, 신기선, 조정구 등은 참판으로 임명하였다.

앞으로 관제를 개혁하려고 하기 때문에 일시 명망이 있거나 오랫동안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가자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와 2이상의 품계로 승급한 인사행정. 편자주 를 해주었다 그중 금종한은 그 서열에 교묘히 참여하여 유식인들은, 새로 전개될 정국은 자리다툼을 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6. 신법개정

 

27일, 다음과 같이 「신법개정령」을 발표하였다.

1. 전권대사를 각국으로 특파하여 자주독립을 포고할 것.

2. 광서년호를 정지하고 개국기년이라고 쓸 것.

3. 영원히 사색당을 폐지하고 오직 현재를 기용할 것.

4. 양반과 상인의 문벌을 타파할 것.

5. 문관과 무관의 존비를 폐지하고, 다만 품계를 따를 것.

6. 죄인은 자기 이외의 연좌률을 폐지할 것.

7. 적첩이 자식을 두지 못하면 양자를 둘 것.

8.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가 되면 가취를 허용할 것.

9. 부녀자의 재가는 귀천을 막론하고 그들의 자유에 맡길 것.

10. 공사간의 노비를 폐지하여 인구판매를 금지할 것.

11. 각아의 례속은 적당히 가감할 것.

12. 역인, 재인, 백정 등을 면천할 것,

13, 승니의 「서울출입금지령」을 폐지할 것.

14. 상제를 개정하여 기부을 허용할 것.

15. 조관의 의제와 폐하 알현시에 입을 공복은 사모, 장복, 반령, 착수 등으로 하고 연거 시의 사복은 칠립, 답!!, 사대로 하며, 사서인은 칠립, 주의, 사대 등으로 하고, 병정은 요즈음 예를 준수하고 장관도 병정과 같은 예를 따를 것.

16, 정부 이하 각사, 각궁방의 전곡과 전장을 일일이 밝힐 것.

17. 국사에 관계되는 일은 비록 천민이라도 좋은 의견이 있으면 기무처로 보고하여 의원들에게 회부할 것.

이상의 조목은 의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조목을 다 기록하지 못한 것은 다음에 첨가하기로 하겠다.

 

7. 고종을 대군주폐하로 개칭

 

뭇 신하들이 고종을 높여 「대군주폐하」로 칭하고 금년 6월부터 「개국 503년」이라고 하였다. 대조규개는 강경하게 고종을 황제로 칭하고 년호를 사용할 것과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으라고 하였으나, 모두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고종을 대군주로 칭하여 황제의 칭호를 대신하고 개국기년을 사용하여 연호의 칭호를 대신하였으며, 의복제도를 변경하여 단발과 양복을 대신하자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조야는 뒤숭숭하여 점차로 시행하자는 여론이 높았다.

 

8. 관제개혁

 

10개처의 아문을 개혁하여 궁내부, 의정부, 내무아문, 도지아문, 군무아문, 공무아문, 학무아문, 농상아문, 법무아문 등을 신설하고 옛날의 직원들도 각기 그 부서에 맞는 명칭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이 밖에 종백부, 종친부 등의 명칭이 있었는데, 그것은 전문성 있는 아문을 설립한 것이 아니며 어떤 기관에 소속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성부, 경무청 등의 명칭이 있으나 이것은 10개 아문 이외의 기관으로, 그 직원의 수가 다른 기관에 비하여 조금 적은 편이었다.

그리고 궁내부 이하에는 대신, 협판, 참의, 주사 등의 직위를 두었는데 이것은 옛날 판서, 참판, 참의, 정랑, 좌랑 등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의정부에는 총리대신 1명, 좌우찬성 각 1명, 사헌 5명, 참의 5명을 두었다. 그 체재는 다른 아문보다 조금 높지만 대소관계는 칙임, 주임, 판임 등 3등급이 있고, 1품에서 2품까지는 정과 종의 품계가 있으나 9품은 정, 종의 분별이 없었다.

 

9. 금홍집의 내각

 

10명의 대신은 총리금홍집, 궁내부리재면, 내무민영달, 외무금윤식, 탁지부어윤중, 법무부윤용구, 공무서정순, 학무박정양, 군무리규원, 농상엄세영 등이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되어 민영상을 민영달의 대리로 임명하고 한기동을 윤용구의 대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리봉의는 경무사, 이규원은 제주찰리사로, 엄세영은 호남안렴사로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원군은 군국사무를 결제하고, 리재면은 궁내부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옛날 문객들을 날로 기용하므로 그의 집은 언제나 요란스러워, 갑술년(1874) 이전으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들 중 서주보와 정만조 등은 더욱 아첨하여 용사를 하므로 대원군이하응은 의젓한 세도가로 자처하였다.(서울사람들이 말하기를, “속담에 하얀 개 꼬리는 3년 동안 굴뚝 속에 넣어 두어도 하얗다”고 하였다.)

 

10. 과거제도 폐지

 

문무대소과의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다음과 같은 선거제도를 채택하였다.

1. 각 대신들은 그가 관장하고 있는 판임관을 없앨 것.

2. 서울은 귀천을 막론하고 품위와 재질이 있거나 시무에 능통한 사람을 택하여, 그에게 선임상을 주어 그것을 전고국으로 보내게 할 것.

3. 선임장 내용에 본인의 재기를 명기하여, 전고국에서 보통시험에 합격하면 다시 특별시험을 거친 후 각 아문으로 보내 기용할 것.

4. 많은 학교를 짓되 미리 정부의 관칙에 의할 것이며, 외도는 향공법에 의하여 추천하되 그 향공 수효는 경기 10명, 충청, 전라 각 15명, 경상도 20명, 평안도 13명, 강원도 10명, 함경도 10명, 서울 5부 및 제주도는 각 1명으로 정할 것.

그러나 교활한 시속배들은 신법을 반대하지 않으며 청국을 배반하고 일본을 지지하였고, 김홍집도 그것을 타당하게 생각하여 날마다 정부에서 붓을 잡고 앉아 온갖 지혜를 다 짜내고 있었다. 그는 모든 시책을 실질에 입각하여 동료 관리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구시대의 제도를 개혁한 소인이 되어 청직한 여론에는 죄를 지었지만, 다시는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 되어 후세에 죄를 지어서는 안될 것이니 일시의 부귀만 생각하지 말고 각자가 노력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해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상유한에 비유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왕안석에게 비유하기도 하였으나, 그를 질투한 사람들은 일본 대신이라고 비꼬았다.)

 

11. 정현석, 김승집 등의 기용

 

정현석은 황해감사, 금승집은 강원감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때 금춘희는 황해감영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승지정헌시는 대조규개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가 억지로 맹약을 맺고 신법으로 개혁한 데 대해 꾸짖으며, 또 우리 나라에게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복종하지 않으므로 앞으로 큰 화가 생길 것이니 속히 물러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조규개는 웃으며 “이 사람은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니 입을 꼭 다물게 해야겠다”고 하고 정부에 부탁하여 그의 아버지 정현석을 금춘희의 대리로 임명하여 그의 거취를 살펴보았다.

정현석은 비록 늙었지만 정력은 쇠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본래부터 개화를 사모하였으므로 관직을 사양하지도 않고 부임하자, 그때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하기를, “금헌시는 명예를 낚아 모든 이익을 독점하려 하고 시속배들은 김홍집을 외롭게 생각하였으므로 금승집과 금동백을 제수하여 그를 위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승집은 김홍집의 형이며 김춘희의 아버지로, 그는 주군의 령을 지낸 지 10여 년 동안 청백리로 칭송되었다.

 

12. 리설의 사직 귀향

 

리설을 녕변부사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는 충정공 리귀인조 때 반정공신. 자는 옥여, 호는 묵재. 리이와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음. 편자주 의 후손으로 대대로 홍주에서 살았다.

한장석은 본래 이설과 잘 아는 사이였는데, 그가 응제과의 시관으로 있을 때 관절고관에게 뇌물을 바칠 때 보낸 서신. 편자주 로 이설을 발탁하여 장차 문형홍문관대제학의 별칭. 편자주 으로 추천하려 하였다. 이에 혹자는 그의 불공정한 행위를 조롱하였다. 그러나 이설은 글을 잘하고 지기도 있었기 때문에 한장석이 그를 기용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10년이 되도록 요직을 거치지 못했지만 항시 고상한 뜻을 간직하고 있다가 이때 세태가 날로 문란해지는 것을 보고 향리로 돌아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때 그의 아들 리상규도 영흥부사를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3. 대원군의 원굴 구제

 

근세에는 벼슬길이 막힌 사람을 원굴이라고 한다.

관제를 개혁할 때 대원군은 서울 이외의 지방에서 문과에 급제한 자로서 옥당홍문관의 별칭. 편자주 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벼슬길이 막혔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일제히 제수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금종한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하여 사색당파를 골고루 배열하도록 하였다. 그는 해당인물을 물색한 후 종이 한 장에다가 교리와 수찬 100여 명을 제수하자 이때 사람들은 옥당에 풍년이 들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특별히 지목하여 「갑오옥당」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일도 취회가 공정하지 않아 명기를 더럽힐 뿐이었다.

 

고종 31년 갑오(1894년) ⑤

 

1. 민비의 대조규개 접견

 

임오군란이 일어날 때 대원군이 일병의 협박을 받고 대궐로 들어서자 조희연, 안경수 등이 그를 맞이하며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은 민씨들의 죄이므로 그들을 다 죽여야 합니다. 대감께서 그들을 처분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냉소를 지으며 “내가 고폐생활을 한 지 20년이 되어 민씨 집안의 공죄를 관계하지 않았는데, 지금 그들의 죽고 사는 것을 논하는 당신들이 있으니 내가 어찌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중궁은 멀리서 이 말을 듣고, ”후한 덕을 지니셨다, 대감이시여! 대감께서 우리 집안을 이렇게 관대하게 용서해 주실 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후 신법을 제정할 때 대조규개는 공법에 있는 각국의 황후와 각국 공사를 접견한다는 조문을 들어 중궁의 알현을 간청하므로 중궁은 의복을 곱게 차려입고 그를 접견하였다. 상견례를 마친 후 대조규개는 고종에게 말하기를, “백성들이 생업에 있어서 현처의 도움을 받듯이 제왕가에서도 더욱 내조가 요구됩니다. 전고의 흥망성쇠를 거울 보듯이 다 알고 계시니 보다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한집안같이 일을 보고 있으므로 감히 과한 염려를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우리 집안도 내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라고 하여 좌우에 있던 시신들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것은 대조규개가 비웃은 말을 고종은 눈치채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2. 윤치호의 우문과 홍종우의 격분

 

신법을 제정하여 태묘에 고유할 때 고종은 궁내부에서 고유문을 찬하게 하므로 참서관정만조가 찬진하였는데, 그 첫머리 구절에 「천우종팽」이란 말이 있자, 윤치호는 고종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말이 전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지금 천우라는 그 「천」자를 서구인들은 지적하기를, 조선도 천주교를 믿는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중궁은 크게 웃으며 손가락을 꼽아 세어 본 후 “<시전>에 「하늘은 믿기 어렵다」고 한 그 하늘이 어찌 천주교를 말한 것이며, <서전>에 「하늘이 밝게 보시어 두렵다」고 한 하늘이 어찌 천주교를 말한 것이며, <주역>에 「하늘의 이치가 건전하다」고 한 하늘이 어찌 천주교를 말한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고서를 다 열거해도 한 군데만 기록된 것이 아닌데 당신은 정말 무식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자 윤치호는 얼굴을 붉히며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중궁은 자신의 총명함을 이와 같이 자신하고 있었다. 나는 이 말을 정만조에게 들었다.

그리고 대조규개가 협박하면서 맹약을 체결할 때 모든 관리들은 날마다 정부에 모여 있었으나 아무런 대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헤어지기가 일쑤였다. 이때 홍종우가 와서 일일이 읍을 한 후 묻기를, “여러분이 이곳에 모인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대답하기를, “국가의 일이 매우 위태롭기 때문에 신하된 도리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거늘당신은 어찌 그렇게 빗나간 질문을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홍종우는 화를 내면서, “당신들은 혀로 적을 물리치려고 하십니까? 평일에 상의 총애를 받아 직위가 경상까지 이르고, 또 좋은 갖옷과 말과 많은 식량과 솥을 진열해 놓고 살면서 백성들이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과 나라가 편안하고 위태로운 것을 월나라가 진나라의 망하는 것을 보듯 아무 관심없이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가 변하고 국사가 잘못되어가도 주야로 겁만 내고 있다가 칼이 머리 위를 겨누고 있으면 머리가 땅에 닿도록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걸՘고 ވ었으니 하늘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 누구에게 죄를 빌 수 있겠습니까? 아, 개와 말도 주인을 그리워하고 시랑이와 수달도 근본을 알고 있는데, 하물며 당신들은 평일에 잘난 체하는 사대부로서 자신을 대할 때 과연 어떻게 하였습니까?

이와 같이 주상은 모욕을 당하고 신하는 주상을 위해 죽어야 할 때 한 사람도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머리를 돌에 찧어박아 조금이라도 나라 팔아먹은 죄를 속죄하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느린 걸음과 낮은 말소리로 여유 있는 해학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민씨 가문에 출입하는 사람을 나는 수일 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하도 답답하여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겨 특히 이곳에 와서 염탐을 하는 중인데, 당신들이 도리어 나를 잘못한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리종건, 한규설 등이 자리에 앉아 있자 홍종우는 또 부채로 그들을 가리키며 , “저… 편안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10년 동안 장수를 지낸 사람이 아닙니까? 그의 팔뚝에는 인수를 다 들 수 없을 만큼 많이 차고, 허리에는 다 차지 못할 만큼 병부를 많이 차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금호문으로 달려가고, 아침에는 전동 길을 달리면서 창은 숲처럼 삼엄하고, 앞에서는 꾸짖는 소리 요란하고 뒤에서는 많은 사람이 호위를 하였습니다. 그때는 장신 노룻을 하고, 나라의 임금이 볼모가 되고 사직이 위태롭게 되거나 일병들이 궁궐을 침입하여 심지어 악기까지 약탈해 가는데, 이때는 장신이 아닙니까?

이미 절충장군, 어모장군이 되어 적국의 간사한 음모를 꺾지 못한다면 이런 때를 당하여 삼군을 격려하고 궁성을 호위하여 반드시 죽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보여, 적도로 하여금 우리를 꺼려하여 감히 음모를 뻗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도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화난 모습으로 대궐로 가서 단칼로 그들과 싸워, 대궐 앞에 시체를 수북이 쌓아 놓고 국민에게 사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만분의 일이라도 신하의 직분을 다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우성으로서 자신이 못난 사람으로 변하여 여러분의 뒷전에 나와 인원 수만 채우고 있으니 장신이라면 세상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주운한의 평릉인. 자는 유. 성제 때 괴리령으로 있으면서 성제에게 상방참마검으로 안창후장우를 참하자고 간청하자, 성제는 화를 내며 하관이 상관을 비방하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사에게 그를 끌어내리게 하였다. 그때 주운은 난간을 잡고 전상에서 내려가지않으려고 하다가 그 난간이 부러져 할 수 없이 끌려 내려갔다. 이때 주운은 고함을 치며 “신이 죽어서 룡봉, 비간과 놀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였다. 편자주 이 사용한 칼과 수실송나라 진화의 자. 시호는 문개. 편자주 이 사용한 홀기가 없기 때문에 이 7척의 몸을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은 1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이제 처음으로 관리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떠나도 좋고 떠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내일 떠나렵니다. 그러나 가장 한이 되는 것은 일본 사람들을 다 죽이지 못하고 또 간신들도 다 죽이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이 「우리 조정에는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고 말할까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말을 마친 후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누구를 치려는 기세를 지어 보였다. 이에 리종건 등은 그의 기세에 놀라 위축되어 있어 그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홍종우는 집 천장을 우러러보며 길게 탄식을 하다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것은 리최승이 목격한 후 나에게 말해 준 것이다.

 

3. 리홍장이 북경 총리아문으로 보낸 전문

 

이홍장은 북경 총리아문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한국 국왕이 민상호를 보냈다.”라고 하였다. 이때 그는 양복으로 바꿔 입은 후 륜선을 타고 천진에 도착하여, “500여 년 동안 중국의 황제가 하사한 문서를 일본인이 모두 약탈해 가고 병고에 소장된 수십 년 동안 구입하였던 양창, 대포, 화약 등도 모두 빼앗아 갔으며, 모든 인사발령을 할 때도 자기들 마음대로 승진시키거나 파면하였습니다. 이런 일을 한국 국왕이 모른 것은 아니지만 천조에 알려 이 애정을 밝히오니 도와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한다.

 

4. 라주목사민종렬의 동학군 격퇴

 

라주목사민종렬이 영장리원우와 함께 성을 지키며 적과 대항하고 있었다. 이때 홍계훈은 전주에서 적을 놓아주고 리원회와 함께 북상하고 있었다. 금학진은 적을 제압하는 재주가 없으므로, 적들이 말하기를, “관리도 믿을 수 없고 지금 나라 안은 큰 난리를 겪고 있으니 우리가 하늘을 대신하여 사람을 다스리고, 나라를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대포와 말을 구입하고 전곡도 운송하여, 사방에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난민들도 곳곳에서 용기하여 천리가 아 호응하므로 한 달 내에 삼남 지방이 소란하여, 수령들은 도주하거나 혹은 그들에게 위협을 받아 누구 한 사람도 성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적들이 나주로 향하자 민종렬은 관리와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을 지킬 대책을 세우고, 영장리원우는 용맹과 지략이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때 적들은 북을 치며 행진하고 있어 누구도 그들의 기세를 저항할 수 없었으므로 나주도 곧 유린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원우 등은 복병을 대비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에 적들은 분이 나서 여러 차례 침범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여, 감히 라주성을 넘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곳은 나주성 하나뿐이었고, 그 나머지 성들은 잔혹하게 유린되어 다른 지방보다 더욱 처량하였다.

 

5. 안의현감조원식의 동학군 섬멸

 

적들이 안의현을 침입하자 현감 조원식은 그들을 유인하여 섬멸하였다. 조원식은 남원의 적들이 침입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객관으로 맞아들여 황육과 술을 대접하자 적들은 술에 취하여 정신이 없었다. 이해 장사들이 일어나 그들을 몽둥이로 내리쳐 한 사람도 맞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후 시체 100여 구를 한 구덩이에 묻고 민간 장정들을 편대하여 보책으로 들어간 후 60개의 산령을 한계로 적도를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조원식은 문렬공조헌1544~1592. 선조조의 문신이며 의병장임. 자는 여식, 호는 중봉. 편자주 의 사손이다.

 

6. 홍주목사리승우의 동학군 격퇴

 

호서에 있던 적들이 홍주를 침범하자 목사리승우가 그들을 맞아 크게 격파하였다. 홍주는 내포의 웅부이다. 이승우는 관리의 재간이 많아 그가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자자했고, 관리와 백성들도 그를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곽을 의지하여 적도를 초멸하자고 의논하고, 난이 처음 일어났을 때 낙후한 적도 수백 명을 생포하거나 살해하였다. 이에 적들은 1만여 명의 대대가 합세하여 성을 삼중으로 포위하였다. 이때 리승우는 땅을 파 대포를 묻은 후 탄환을 넣지 않고 소리만 요란하게 내었다. 적중에서는 서로 희희낙락하며 “들은 말에 의하면 납으로 만든 탄환은 도인을 맞추지 못한다고 하던데 이 말이 정말이다”라고 하면서 성 가까운 거리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승우는 이때 대포에 탄환을 넣어 일제히 발사하자 적들은 서로 부딪혀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었으므로 그 탄환을 맞은 사람은 그대로 죽었다. 또 그들은 남보다 뒤에 쓰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차례로 쌓여 그 시체가 성보다 높았으며, 긴 언덕처럼 쌓인 곳은 세 곳이나 되었다. 리승우는 성문을 열고 적들을 모두 쫓아 버렸다. 그 적들은 10리 안팎에서 산이 무너지듯 사방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그의 군대는 명성을 크게 떨쳐 호서와 호남 백성들은 이승우를 장성처럼 기대하였다. 그것은 적들이 자칭 도인이라고 하고 도인의 부작을 가지고 주문을 외우면 군인이 쏜 화포도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므로 이승우는 그들의 거짓말을 이용하여 그들을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홍건은 남양 사람이다. 그는 의기와 담력이 있고 또 이승우와 매우 친하게 지낸 사이여서 이때 그를 막객으로 삼았는데, 그가 성을 지키고 있을 때 흥건이 많은 계략을 제시하였다.

 

7. 리홍장이 감사민병석에게 보낸 전문

 

7월 초3일, 청국 이홍장이 평양전화국으로 전화를 걸어, 감사민병석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조선왕이 일본인의 협박을 받고 있고 명령도 모두 일본인이 한다고 하는데 그들의 명령은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본대신은 많은 병력을 인솔하고 한국을 구원하기 위하여 평양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해도의 민병석에게 옛날과 같이 진의를 인식시켜 직책을 완수하도록 하고, 또 그가 천병과 함께 중요한 임무를 맡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서울에서 다시 신관을 파견하려고 하면, 미리 각 통수에게 알려 그 신관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본대신이 모든 일을 주관할 것이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8. 청국군의 평양 진주

 

청국 총병위여귀, 마옥곤, 풍승하, 좌보귀 등이 평양에 들어오자 엽지초, 섭사성 등이 그곳으로 가서 회동하였다. 이달 15일경이다.

그리고 그들의 병정들은 34영을 합하여 15천명이 있었으며, 제장들은 통솔하는 원수가 없으므로 직위가 서로 같았고 호령도 한결같지 않아 군대의 대열에 기강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간음과 약탈을 자행하였으므로 서도민들은 그들을 매우 원망하고 있어, 유식한 사람들은 그들이 패할 줄 알고 있었다.

이때 민병석은 시국이 바뀐 데다가 민씨들마저 도주하고 없었으므로 자신에게 무슨 죄명이 내려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그는 금만식이 부임해 온다는 말을 듣고 혼자서 방황하고 있으면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북양대신리홍장의 전화가 오자, 그는 김만식을 거절하여 그의 대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만식은 평괴서윤서병수와 함께 정방산성으로 들어가 40일 동안 나오지를 않고 있어, 평안도에서는 「민병석은 청나라의 감사이며, 김만식은 일본의 감사」라고 하였다. 민병석은 김만식의 명령도 따르지 않고 청나라의 원조만 바라보며 조정의 명령마저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민병석은 일찍 간재전우의 문하에 있었는데, 그는 평안감영에 있을 때 자칭 학문을 강론한다고 하면서 수시 치포관과 심의 차림으로 유생을 불러 <중용>과 <대학>을 가르쳤다. 또 별도로 뇌물 받는 길을 열어 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뇌물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성품이 나약하고 세상일에 어두워 무슨 일이든 세밀하게 살피지 못하였으므로, 모든 리윤은 아랫사람이 차지하고 원망은 자기에게 돌아갔다. 서도민들은 이런 그를 「강학적」이라고 하였다.

관서지방은 산천이 그윽하고 깊어 진귀한 보화가 생산되는 데다가 화장품(분대), 현악기, 관악기, 루관, 산수 등은 평양을 능가할 곳이 없었다. 그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평안감사를 부러워하여 부귀를 누리는 신선처럼 생각하였고, 100년 이후 권력을 누린 사람이 아니면 그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남인으로는 채제공1720~1799. 정조 때의 대신. 자는 백규, 호는 번암. 시호는 문숙. 편자주 이후로 한 사람도 없었고, 소론으로는 서념순미상. 편자주 이후 한 사람도 없었으며, 북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한계원1814~1882. 고종 때의 대신. 자는 공우, 호는 류하. 편자주 과 남연순미상 편자주 등이 남인과 북인으로서 서로 번갈아 가며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명맥만 유지한 격이었고, 갑술년(1874) 정국이 바꿔 이후 20년 동안은 민영위, 민응식, 민영준, 민병석 등이 서로 교대하여 부임하였으며, 민영위는 두 번이나 부임하였다. 그러므로 서도민의 민요에는 「평양 선화당은 민씨의 사랑」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해 8월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인하여 평안도 일원이 모두 슬어질 듯 피폐하게 되었고, 또 그 후 얼마 안되어 남도와 북도로 나뉘어, 그렇게 부유하고 번화하던 곳이 옛날의 그 면모는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이 한 번 성하면 한 번 쇠하게 된다는 섭리인 것이다. 이것을 거슬러 말한다면, 그때 민씨들이 얼마나 염치없는 일을 많이 했던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9. 청국군의 약탈

 

청군들은 말(마)이 많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약탈을 잘 하였다. 그들은 성환역에서 괴산과 충주를 들어갈 때 지나는 곳마다 닭과 개를 모두 잡아가고 심지어는 부인들의 내의까지 훔쳐갔는데, 부인들이 그들을 따라가며 고함을 치면 내의를 버리고 갔다.

 

10. 임헌회 등 산림을 기용

 

정경원은 호서선무사, 리중하는 령남선무사, 전지평금흥락과 유만주는 승지, 전도사금병창은 집의, 전도사전우는 장령, 전집의박문일은 태천현감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산림처사이다.

고종은 유사를 숭상한다는 명예를 좋아하여 여러 차례 유일을 발탁하여 임헌회, 송병준 등을 경상의 대열에 임명하고, 금락현, 박성양, 리상수 등을 경연관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을 기용할 뜻이 없었고, 다만 조종의 고사를 따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어떤 실학을 가지고 수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모두 그들이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을 고상하게 생각하였다. 또 관직을 임명받는 데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침묵을 지키며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간혹 상소를 할 때에도 진부한 말만 나열하여 상에게 덕을 쌓으라고만 하였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이런 그들을 싫어하였다. 이때 그들 다섯 사람 중 전우와 박문일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한때 명망이 있었지만 그들도 세상에 나오지는 않았고, 그 후 얼마 안되어 박문일은 사망하였다.

관서 지방에는 선우협1588~1653. 인조 때의 학자. 자는 중윤, 호는 둔암. 편자주 이 사망한 이후 오랫동안 유학이 끊겼지만 박문일은 조행이 단정하고 노경에도 경서에 힘써 선우협의 뒤를 이었다고 한다.

 

11. 박봉양의 운봉수비

 

전주서인 운봉의 박봉양이 의병을 일으켜 동비를 토벌하였다.

박봉양의 초명은 문달이며, 그는 운봉현의 아전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현민에게 착취를 하였는데, 박봉양은 그 선대의 대를 이어 더욱 심한 착취를 하였다. 이에 어사리면상은 그를 수감하여 뇌물 5만냥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박봉양은, “내가 이면상에게 5만냥을 바쳐 죄를 면하느니보다 차라리 민영준에게 10만냥을 주어 과거급제나 하겠다”고 하면서 서울로 도주하여, 민영준에게 10만냥을 주고 강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1년 여를 지난 후 동비가 일어나, 영남과 호남이 큰 난을 겪게 되었다. 운봉현은 본래 성곽이 없지만 본현의 지세가 절벽으로 되어 있어 사방을 모두 우러러보며 올라갔다. 이때 현감이 도주하여 관리와 백성들이 동비들을 잘 대접하려고 하였다. 이를 본 박봉양은 개연히 탄식하기를, ”우리는 대대로 아전이 된 지 수백 년이 지나도록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이 모두 국가의 은혜인데, 하물며 내 몸이 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고 있으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종당을 규합하여, 경내의 장정 수천 명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그는 남원을 한계로 하여 산봉우리마다 성책을 설치하여 굳게 수비하였다.

하루는 그의 아들이 군령을 어기자박봉양은 그를 참하려고 하였다. 이를 본 그의 부하들은 강력히 간하여 곤장 50대를 맞도록 간신히 허락을 받아냈다 그는 몇 번이나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이로부터 많은 병사들은 박봉양의 명령에 굴복하였다. 그리고 조원식이 안의현을 지키고 박봉양이 운봉현을 수비한 이후로는 호남의 동비들이 감히 영남을 넘보지 못하여 함양, 거창 등의 수군이 조금 안정되었다.

 

12. 박제순의 충청감사 임명

 

박제순을 충청감사로 임명하였다.

금학진이 피소된 지 약 한 달쯤 되었으나 전봉준 등이 류진하고 있어 부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박제순이 남고산성에 도착하였으나 금학진이 대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조정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금가진 등은 김학진을 두둔하여 그 사실을 교묘하게 미봉하였고, 조정에서도 현재 진을 치고 있는 판국에 장수를 바꾼다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김학진을 다시 유임하고, 박제순을 충청감사로 임명하였다.

 

고종 31년 갑오(1894년) ⑥

 

1. 개혁의안

 

다음과 같이 속개의안을 공포하였다.

1. 갑오년(l894) 10월부터 각항의 부세를 상납할 때 모두 대전을 마련하되 은행을 설립하여 공전을 획급하며, 또 미곡을 사들여 서울에 충분히 저장하고 원전은 탁지부로 반환할 것.

2. 개정도량 두, 곡, 평, 형 등을 신식으로 반포하여 문란을 방지할 것.

3. 신구화폐개정법을 정할 것.

4. 대관으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목패에다가 가주성명과 동명을 적어 문 위에 걸어 놓을 것.

5. 각도에서 상납할 관포와 리포는 각 도신이 명확히 보고할 것.

6. 각 지방에는 향회를 설치하고, 각 면에서는 향회원 1명을 택하여, 공당에 모여서 읍무를 상의한 후 시행할 것.

7. 모든 대소관원이 공사를 막론하고, 죄를 범하면 그들은 모두 법무아문이 법률을 적용하여 인민과 다름없이 처단할 것.

8, 총명한 자제들을 외국으로 유학시켜 기용할 인재를 양성할 것.

9. 각 서리는 문장과 재기가 있는 사람을 택하여 기용할 것.

10. 민영준은 정권을 도용하여 군상을 기만하고 백성을 학대하였고, 금창렬의 어머니는 신령을 가탁하여 위복을 조종하였으며, 민형식은 삼도를 장악하여 그 해독을 모든 백성에게 끼쳤으나 아직도 처형하지 않고 있어, 여정이 비등하므로 일체 그들에게 법률을 적용하여 신인의 울분을 없앨 것.

11. 10년 내에 백성의 산업이 권귀와 향호에게 강점되거나 억압으로 매도된 것은 본주들이 기무처로 호소하여 그 사실을 밝힌 후 본주에게 반환하게 할 것.

12. 각부아문에서는 외국고원 1명을 고문으로 두고, 또 무슨 의안이 있을 때에는 대소 관원이 공사를 막론하고 편하게 출입하게 하여 초헌, 평교자 등을 일체 폐지하도록 할 것,

13. 대소 환원과 사서인은 말에서 내리거나 회피하는 규칙에 구애받지 말게 할 것.

14. 관청에서 상피하는 것은 아들, 사위, 친형제, 숙질에만 적용하고 기타는 논하지 말 것.

15. 장률을 엄하게 하여 그 원장물을 관아에서 몰수할 것.

16. 환관은 그들의 재질에 따라 구애를 받지 말고 통용할 것.

17 칠반천인은 이미 면천한 사람 이외에도 그들의 재질에 따라 전형을 거쳐 기용할 것.

18. 비록 고관을 지냈더라도 휴직한 후에는 그들의 마음대로 상업에 종사하게 할 것.

19. 국내외에 관계된 모든 공사문자는 외국의 국명과 각 지명, 인명이 서구문자로 되어 있으면 우리 국문으로 번역하여 사용할 것.

이상의 의안은 10일에 한 번씩 회의를 개최하여 토의하였지만 명목이 맞기도 하고 혹 맞지 않기도 하였다. 혹은 오랫동안 시행한 것도 있고 혹은 다시 개정한 것도 있어, 아직까지 일정한 안이 없는 데다가 문적도 너무 번거로워 다 기재할 수 없으므로 한두 가지만 기록하여 일시 시행했던 것을 열거하고, 그 후에 있었던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2. 금기범의 남원 점령

 

호남적 금기범이 남원을 점령하였다. 그는 전봉준과 2개 대대로 나누어, 전봉준은 전주에서 금학진을 인질로 잡고 일도를 호령하며 형세를 보아 가면서 작전계획을 짰다. 김기범은 동학란이 일어날 때 남원으로 들어가 그곳의 풍부한 농산물을 보고 매우 부러워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부사윤병관이 도주했다는 말을 듣고 우도에서부터 포목 5만여 필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격문을 먼저 보낸 후 침입하였으므로 관리와 백성들은 감히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비들은 도참서를 인용하여 두 달 동안 남원에 류진하고 있으면서 그곳을 초토화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기마대를 사방으로 보내 백성들의 금전, 양곡, 기명 등을 착취하여 인근 10여 읍의 공청과 민가를 일시에 탕진하었다.

금기범 자신의 말에 의하면, 꿈에 어떤 신인이 그의 손바닥에다가 「개남」이란 두 글자를 써 주어 자호를 개남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그를 」개남「이라고 한 것은 발음이 와전된 것이다.

 

3. 성절사북경 파견

 

청나라의 서태후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리승순과 민영철을 성절사로 임명하여 북경으로 파견하였다.

서태후는 자희황태후이다. 그는 동치청나라 목종의 연호. 편자주 때부터 지금까지 수렴청정을 하여 그 권위가 천하를 진동하였다. 그리고 그의 만수절온 8월 15일이었으므로 우리 나라의 사대전례에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를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해 봄에 리승순을 정사로 파견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중궁도 대내의 경사가 있었으므로 별도로 정을 표시하고자 방물 이외에 금은 보화를 더 보냈다. 또 친당이자 사인인 민영철을 선발하여 부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청나라와 국교단절을 선언하고 있었으므로, 만일 예로부터 내려오는 예법을 따른다면 일본인이 저지할까 싶어 오랫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사신이 길을 떠날 때 방물을 상품처럼 포장하여 남모르게 수송하였다. 이때 민영철은 대조규개를 만나 “서쪽 변방에 볼일이 있어, 그곳에 갔다가 오려면 수개월이 걸립니다”라고 하였다. 대조규개는 웃으며 이를 기억해 두었다.

리승순 등이 태고, 천진 등지를 거쳐 북경에 도착하자 그곳 사람들은 크게 놀라워했다. 서태후는 그들이 도착한 즉시 대궐로 나가 희극을 보자고 하여 이승순 등을 제왕 및 대신들의 끝자리에 앉혔다. 이것은 특별한 예우였다.

이승순 일행은 귀국길이 매우 까다로워, 오랫동안 북경에 머물고 있다가 을미년(1895) 봄에 귀국하였다.

 

4. 박영효의 특사

 

8월 초4일, 죄인 박영효를 특별히 사면하였다. 이때 국내에서는 박영효가 동학란이 일어날 때 서울로 들어와 니현에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인천에 있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때 모습을 드러내어 다음과 같은 원정을 올렸다.

“신은 대대로 봉록을 받은 사람의 후예로, 신의 부자형제가 특별히 총애를 입고 아울러 영화를 누리며 봉록을 받고 있으므로 신의 부자는 자못 감격스러워 어떻게 보은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의 아버님 박원양은 항시 신의 형제에게 경계하기를, “나라를 위해 은혜를 갚고 위태롭거나 어려운 일을 피하지 말아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나이가 어리고 아는 것도 없어 그 말을 듣고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오직 만분의 일이라도 성은을 보답하겠다는 마음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리의 순역을 판단하지 못하고 갑신년(1884) 겨울에 시국이 날로 어려워져 국가가 점차 위태롭게 되는 것을 보고, 분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그 병폐를 바로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단충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악명만 드높아, 위로는 군상에게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사문에 재앙이 뻗쳐 신의 부모 형제가 다 사망하고, 신의 일신만 남아 이역만리로 도망하였습니다. 신이 군상을 저버린 죄는 단 일각도 천지간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만, 신이 일생 동안 마음속에 맹세한 것을 저 푸른 하늘에 물어 보면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한 번이라도 신의 충정을 말씀드리지 않고 구렁에서 목매달아 죽는다면 그 시커먼 악명을 천추에 씻을 수 없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난리 속에 떠돌아다닌 지 12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즈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조의 정치를 개혁하여 모든 죄인을 석방한다고 하므로 신은 그 기쁨을 참지 못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죽을 수 있는 날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이 이곳에 온 것은 다시 천안을 뵙고 구구한 이 충정을 다 호소하고 싶은 것이 첫번째이며, 부모와 형제의 백골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는 것이 두 번째 일입니다. 이 소원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비록 시골로 돌아가 죽는다 하더라도 아무 여한이 없겠습니다.

신은 이미 군상에게 죄를 짓고 부모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하였으니, 천지 사이에 한 궁인에 불과합니다. 일본에서 11년 동안 지내면서 밤이면 편한 잠을 한 번도 자지 못했고, 밥을 먹을 때도 음식이 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처자도 두지 않았고, 어떤 잔치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밤만 되면 근심에 쌓여 우리 성상의 양해가 있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서울 밖에까지 와서 부복하고 있는 지 이미 많은 시일이 지났습니다만, 구중궁궐이 너무 깊기만 하여 이 촌성을 말씀드릴 수 없으므로 머리를 진흙에 박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천지 같은 부모님이시여! 신의 이같은 고충을 굽어살피시어 신이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을 양해해 주시고, 사법관으로 하여금 명령을 어긴 죄를 속히 논하게 해주신다면 아무리 두려운 부월과 탕확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지금 신은 너무 황공하여 어쩔 줄 몰라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의금부초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죄인 박영효는 신원을 한다고 하면서 원정을 올렸는데 그의 죄명이 너무 과중하여 감히 봉입할 수 없었지만 전교에는 “알았으니 봉입하라”고 하였다. ”

그리고 승정원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계를 올렸다.

“이 죄인이 저버린 죄는 너무 과중하고 사체에 관계된 것이 매우 지대하여 멀리 해도에까지 망명을 하였으므로 오랫동안 왕장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사법부에는 법이 엄연히 있고, 날이 갈수록 여론도 진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가가 다사한 때를 당하여 이 기회를 노려볼 만하다고 판단한 나머지, 돌연 모습을 나타내어 당당하게 신원을 외치면서 조금도 기탄이 없으니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속히 봉입하라는 명을 철회하시어, 엄한 처분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황공스러운 마음으로 감히 이 상계를 올립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렸다.

“즉시 봉입하라.”

이때 좌승선윤조영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렸다.

“나라를 배반하고 은혜를 저버려 왕장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는 바다를 건너 자취를 감추었으니 어찌 신하로서 그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내려진 명령을 철회하시고 속히 그에 해당한 법률을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사간금영선과 기주관리희화 등도 상소하여 극간하였으나 보고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전교가 내려졌다.

“지난날 박영효가 저지른 일은 그의 형적을 논할 때 누가 처형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그의 심정을 참작하여 용서를 해야 합니다. 지금 그의 원정을 보니, 10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였으나 지금까지 나라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그의 죄명을 지워 우리 조정의 관대한 마음을 보여 주기 바랍니다.”

1) 왕의 헌장. 즉 헌법.

 

5. 청국군의 평양 패전

 

일병들이 평양을 침공하여 청국의 총병좌보귀가 전사하고, 엽지초 등이 크게 패배하여 도주하였다. 이때 일병들은 전후로 수군과 육군 2만여 명이 평양을 진격하고 기병 1만명은 원산과 문천에서 출발한 후 평양을 포위하여 의주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그들은 병대를 출동할 때 15일을 한하여 평양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안중에는 이미 청국인이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초10일, 청국의 제장들은 일본이 병력을 증원하여 공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서로 전략을 상의한 후 마옥곤은 4개 군영을 인솔하고 의각세를 형성하고, 위여귀와 풍승하는 18개의 군영을 인솔하고 평양성 남쪽 강안을 수비하였으며, 좌보귀는 6개 군영을 인솔하여 평양 북쪽 산성의 위를 수비하고, 엽지초와 섭사성은 성안에서 일병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용감한 장정으로 편성된 6개 군영과 우리 병사 800명은 태세를 살피고 있다가 병력을 조절하여 파견되었다.

이때 섭지초는 현상금을 걸어 일병을 격퇴시킨 병사에게는 은전 3만냥을 상으로 주고, 대포 1문을 빼앗은 병사는 은전 1천냥을 상으로 주고, 적병을 생포한 병사는 60냥을 주고, 적병 1명을 살해한 병사는 30냥을 주었다.

그리고 12일, 일병은 압록강 건너편에서 진을 치고 있고 청국병은 동남쪽에서 수시로 첩보가 전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엽지초는 갑자기 성안으로 철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위여귀 등이 병대를 철수하여 돌아오자 일병들은 그 즉시 기세를 올려 압록강을 건너와 산 위로 올라가서 높은 산봉우리마다 보루를 쌓았다. 좌보귀는 북성을 강력히 수비하고 친히 대포를 조준하여 성 위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15일 오전 1시경에 일병 대대는 다시 결사대를 투입하였는데, 그들은 12일부터 16일 해가 질 때까지 나흘 밤낮을 격전하였다. 이때 일병들은 대포를 발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병들은 아무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병들이 군량과 탄환이 모두 떨어지자 일병들은 100여 문의 대포를 묻어놓고 있다가 일시에 발포를 하면서 사방을 포위하여 압축해 왔다.

이때 좌보귀는 큰 탄환이 복부에 명중되었으나, 그는 손으로 그 환부를 누르고 북장대에서부터 련광정에 이르기까지 구두로 전략을 일러주다가 절명하였다. 그 소속병은 모두 큰 소란을 일으켰다. 이때 섭지초가 급히 백기를 달아 정전을 청하였다. 이에 일병들은 그날 저녁에 성을 나가라고 하면서, 만일 이 명령을 거역하면 다시 대포로 맹공하겠다고 하였다. 섭지초는 할 수 없이 병대를 지휘하여 후퇴하였다. 그는 싸우다가 도주하곤 하였으나 일본 복병들은 연도를 차단하여 18일에 겨우 안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병의 추격은 중지되었지만 의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병사들이 거의 사망하여 생존자가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섭사성은 몸에 상처를 입어 병사들과 서로 행방을 잃어버렸다. 그는 부득이 우리나라 사람이 입던 도포와 삿갓을 걸치고 간도로 탈출하여 돌아갔다. 그러나 마옥곤은 압록강 동쪽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7문의 대포를 빼앗고 수명의 일병을 생포하여 병사 하나도 낙오없이 귀환하였다.

그리고 청장 의극과 당아는 평양으로 원병을 투입하기 위해 기마대 9개 영과 보병대 13개 영을 인솔하고 압록강을 건너가려다가 청병의 참패소식을 듣고 섭지초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서쪽 지방으로 돌아와 구련, 봉황 등의 여러 성을 수비하고 있었다. 이 전투가 전개될 때 일병들은 모든 군수품을 자국에서 운반하고 심지어 땔나무까지도 자국에서 운반하여 사용하였으며,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마시는 물까지도 사서 마셨다. 그들의 군령은 이와 같이 엄숙하여 우리 나라 백성들은 그들에게 병사라는 것을 느낄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길잡이가 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병은 음행과 약탈을 자행하여 날마다 뇌물을 요구하므로 공청과 민가를 막론하고 모두 곤경에 빠져 그들을 원수처럼 여겼다. 심지어는 그들이 평양에서 포위되었을 때 가산을 다 바쳐 일병을 인도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들이 패전하여 도주할 해 백성들은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다 가르쳐 주었으므로 그들은 포위망을 벗어난 사람이 드물었다.

그리고 위여귀는 은전 8만냥을 도용하고 문서만 되돌려 주었으므로 병사들의 마음이 흩어진 데다가, 그는 진을 치고 있을 때 먼저 도주까지 하였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파면하여 신문하고, 12월 22일에는 섭지초를 처형하였으며, 좌보귀는 그 정상을 감안하여 사당을 지어 주고 용렬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청국 병사들이 물러간 후 금만식은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참혹한 병란을 치른 뒤여서 평양성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였고, 선화당 청판 밑에는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이것은 청병들이 일병을 피하여 숨어 있다가 일병이 그들의 배후에서 폭격을 가하여 희생된 사람들이다. 그 시체들은 성밖으로 끌어내어 모두 불에 태웠으나 열흘 동안을 태워도 다 타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교궁은 청, 일 량진이 대치하고 있던 중간에 있었으므로 탄환이 우박처럼 쏟아졌으나, 교노인 김씨 한 사람은 대성전을 지키며 죽음을 무릅쓰고 떠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 모든 관리들은 그를 가상하게 여겨 대대로 대성전을 지키도록 하였다.

 

6. 조희일을 관서선유사로 임명

 

조희일을 관서선유사로 임명하여 류민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이때 청병들은 육로를 따라 도주하였으므로 압록강에서부터 의주에 이르는 군과 읍은 모두 그들에게 약탈당하였고, 수령들은 모두 도주하여 마을마다 폐허가 되었으므로 수백 리 길에 밥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금가진이 태조규개에게 평양대첩을 축하하자 대조규개는, “지금 이 전투에 서도민들이 크게 놀라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므로 우리는 이미 사람을 보내 효유를 하였습니다만 귀국에서는 아직 한 사람도 보내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가진은 그를 속여,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선유사가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라고 하고 의정부로 가서 대조규개의 말을 전하였다.

이 말을 들은 김홍집은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선유사로 보내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김가진이, “조희일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조희일이 휴직한 지 20년이 되어 시국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또 그는 겨우 유배에서 풀려 나왔는데 지금 선유사로 보낸다면 너무 민망스러운 일입니다”라고 하므로 김홍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민간에서는 말이 와전되어 조정이 다 일본인의 일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도민들은 지방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선유사를 그곳으로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가 만일 우리 일파에서 나갔다고 하면 백성들이 어찌 믿겠습니까? 순유가 오랫동안 휴직하였으므로 시속배들과 조야가 다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니 이 사람을 선유사로 보내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물며 그는 지략이 있어 믿을 만하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나랏일이 이렇게 위급하니 순유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그 즉시 그를 추천하여 임명하였다. 순유는 조희일의 자이다.

 

7. 청국 해군제독정여창 등의 대동구 패전

 

청국의 해군제독정여창 등이 일본 해군대장이동우형과 대동구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등세창, 림태증 등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이달 초에 리홍장은 여러 차례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제독정여창의 전화를 받고 해군 4천명, 철갑병함 6척, 수뢰선 4척을 보내고, 또 상선 5척에다가 병정, 은, 미곡 등을 실어 보내 이 선척이 15일 대동구(압록강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6일 새벽 남쪽에서 시커먼 연기가 가느다랗게 보이더니 일본 군함 11척이 순식간에 다가와 청국 군함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을 가하였다. 그 군함은 매우 빠르고 대포와 탄환도 먼 곳까지 발사할 수 있어 항시 청국병이 사용한 병기보다 수리쯤은 더 멀리 나가므로, 청국 군함은 그 위력에 견디지 못하여 군함 4척이 침몰되고 2척은 도주하였다.

그리고 등세창과 림태증은 바다에서 익사하고 사망한 병사들도 1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정여창은 려순항으로 도주하였다. 리홍장이 보낸 해군과 육군이 모두 패배한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원병은 끊기고 청국인도 자국을 구제할 여가가 없어졌다. 이때 우리 국내에는 평양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다시 의지할 곳이 없었지만, 일본인에게 아부한 시속배들은 의기양양하여 무슨 경사를 만난 것처럼 기뻐하였다.

 

8. 의화군리강을 일본의 보빙사로 임명

 

9월에 의화군리강을 일본의 보빙사로 보내 다시 강화조약을 체결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일본 천황이 고종의 친왕자를 보빙사로 보내기를 바랐으므로 이강이 그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때 금사준이 이강을 배종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강은 오랫동안 떠나지 않아 일본행을 면할 수 있었지만, 김사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서리 자격으로 대사의 일을 대행하였다.

 

9. 동학군의 안성, 죽산 진출

 

호위부장신정희를 순무사로 임명하여, 개성부와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제영병을 인솔하고 삼남 지방의 동비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동비의 세력은 치열하여 여러 고을이 모두 붕괴되었는데, 그들은 또 경기 지방을 침범하여 안성과 죽산을 함락하므로 이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신정희는 먼저 령관리두황과 성하영 등을 보내어 동비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10. 홍남주를 통제사로 임명

 

홍남주는 통제사, 리항의는 경상우병사로 임명하였다.

홍남주는 국량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어 여러 차례 병사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나이가 많아 믿을 수 없었다.

 

11. 홍주목사리승우의 유임

 

홍주목사리승우를 전라감사로 임명하자 홍주의 관리와 백성들은 대궐로 나가 그의 유임을 간청하므로, 정부에서도 적진과 대치하고 있는 판국에 장수를 바꾸는 것은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그의 유임을 간청하여 고종도 정부의 의견을 따랐다. 이때 그에게 초토사를 겸직하게 하여 포유서를 내리고, 또 특별히 한 자계를 승진해 주었다.

 

12. 이승수의 귀국

 

주미판리대신리승수와 서기관장봉환이 귀국하였다.

 

13. 이용익을 남병사로 재임

 

리용익을 남병사로 임명하였다. 이용익은 임오군란 때 호종공신으로서 크게 총애를 받고 있다가 갑신정변 때 남병사로 임명되어 민란을 충동하였다.

이때 한장석은 함경도 관찰사로 있고 금병덕은 의정부에 있으면서 중앙과 지방에서 서로 의지하여, 반드시 이용익을 연좌하기 위해 장계도 올리고 상소(연주)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끝까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한장석이 인수를 걸어 놓고 고향으로 돌아가므로 다시 그를 남병사로 임명하였다. 그것은 정부의 추천에 의한 것이다.

 

14. 일본군의 요동 공격

 

28일, 일병들은 압록강을 건넌 후 청국의 료동을 침공하여 구련, 봉황 등의 여러 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일병들은 대동구에서 전투를 벌인 이후 군함과 병기를 수리하고 40여 일 동안 휴전을 하고 있다가 이때 수사제독이동우형은 려순을 공격하고, 륙군총관대산암은 금주에서 상륙하고, 산현유붕은 안동현을 침입하였는데 청나라 장수들은 이들을 보자마자 뿔뿔이 흩어졌다.

 

15. 신정희의 패전

 

신정희는 리규태를 좌선봉으로 임명하고, 리두황을 우선봉으로 임명하여 제각기 다른 길로 남쪽 지방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대조규개는 전투를 할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16. 전동석의 금학우 암살

 

10월에 어떤 자객이 금학우를 암살하였다. 김학우는 관북 사람으로 그는 먼 시골의 천한 가정에서 태어나 개화에 앞장을 섰으므로, 시속배들은 그의 재주에 감복하였다. 그는 수개월 사이에 법무협판에까지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손님들을 초대하여 한밤중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술기운이 달아오를 무렵 상복을 입은 어떤 사람이 마루로 올라와 “이곳이 김협판댁입니까?”라고 물었다. 금학우는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또 “주인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므로 김학우는, “제가 주인입니다”라고 하자 그 상복을 입은 사람은 절을 하려고 하였다. 이때 등잔불 그늘 밑에서 갑자기 어떤 사람이 뛰어올라 왔다. 순간 김학우의 머리는 이미 땅으로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치켜든 칼끝은 옆에 앉아 있는 손님의 어깨를 스쳐 일촌 정도의 상처를 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손님들은 절규를 하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그 자객을 찾아보았으나 자객은 이미 도망을 치고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온 장안은 술렁거렸다. 갑자기 출세할 시속배들은 그 자객을 두려워하여 경무청으로 하여금 엄한 수색을 하도록 하였으나 결국 그 자객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전동석 사건이 발각되자 금학우를 살해한 사람이 전동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신문하는 마당에서, 모든 시속배들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김학우만 살해하고 그 나머지는 살해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 사건은 대원군의 지시라고 하였으나, 결국 자세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17. 일본공사정상형의 내한

 

일본공사대조규개가 귀국하고 정상형이 왔다.

 

고종 31년 갑오(1894년) ⑦

 

1. 각지의 초토사, 소모사 임명

 

라주목사민종렬은 호남초토사로 임명하고, 남원부사리룡헌, 장성부사리병훈, 려산부사류제관은 호남소모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홍주목사조재관과 진잠현감리세경은 호서소모사, 창원부사리종서와 전승지정의묵은 령남소모사, 안의현감조원식은 령우조방장으로 임명하였다.

 

2. 각지 위무사 임명

 

전라감사금학진을 파직한 후 리도재를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여 위무사를 겸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충청감사박제순은 호서위무사를 겸직하게 하였으며, 령남선무사리중하를 조병호 대신 감사로 임명하여 위무사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3. 한국군 및 일본군의 동학군 토벌

 

우리 관군은 일본장수 령목창 등과 합류한 후 동비들을 공주까지 추적하여 대파하였다. 이때 리두황은 내포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신창, 해미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그가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동비들은 주문을 읽으면 관군의 탄환과 화살도 막을 수 있다고 유인하였기 때문에, 많은 동비들은 그 말을 믿고 전투를 벌일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후퇴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울 영병들은 비록 양총을 휴대하고 있었지만, 기강도 엄하지 않고 수효도 훨씬 적기 때문에 싸울 때마다 전세가 불리하므로 일병들에게 원병을 청하였다. 일병들은 명령도 엄하고 병기도 예리한 데다가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전진하였다. 그들이 쏜 탄환은 동비가 소지한 총보다 두어 배나 더 나가므로, 동비들은 일병들을 꺼려하여 자기 군사가 조금만 좌절되어도 모두 도망을 쳤기 때문에 리두황 등이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 병사와 일본 병사가 남쪽 지방으로 내려간 수는 모두 2천명이었다.

 

4. 해주의 동학난

 

황해감사정현석을 파직하고 관서선유사조희일을 대리 임명하였다.

이때 해서지방 백성들은 동학에 심취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난을 일으켜 황해감영을 침범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감사의 파직을 청하여 조희일을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때 신정희는 황주병이 해주를 구원하도록 명을 내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5. 청국의 여러 성의 함락

 

청국의 금주, 대련만, 려순항, 수암주 등의 여러 성이 일병들에게 함락되었다.

 

6. 갑신정변 죄인의 관직복원과 석방

 

11월에 박영효에게 금릉위의 직첩을 다시 환원하고 홍순목, 박원양, 서상익 등의 관직을 복원하였다. 이와 아울러 갑신제적의 죄명도 신설하여 유배된 그 지속을 모두 석방하였다.

 

7. 호위사, 통위사 등 관직 폐지

 

호위사, 통위사, 장위전, 총어사, 경리사 등의 관직을 폐지하여, 그 관직에 예속되었던 장졸과 금군조선시대 룡호영에 예속된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의 무관을 가리킴. 편자주 과 무감조선시대 무관의 관청. 일명 무예청. 편자주 및 친군영조선 말기 서양식 군대를 모방하여 서울과 지방에 설치한 여러 군영을 통괄하던 관청. 편자주 의 리교들을 모두 군무아문으로 귀속시켰다. 이것은 법에 의해 편제한 것이다.

 

8. 박영효와 서광범 등의 기용

 

한기동을 공무대신, 리건창을 법무협판으로 임명하였으나 한기동은 사양하는 상소를 보내 왔고, 이건창은 강력히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영효는 내무대신, 조희연은 군무대신, 서광범은 법무대신, 신기선은 공무대신, 윤웅렬은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박영효가 처음 귀국하였을 때 많은 부랑배들이 그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사대부들도 모두 그에게 추세하여 그의 문전은 저자처럼 요란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 원수로 지낸 사람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까 싶어 일병으로 하여금 그의 대문을 파수하도록 하여 매우 엄하게 통제를 하였다. 서광범도 그 후 귀국하여 모두 기용되었다.

이때 행정과 인재 기용 등 제반 기무가 모두 일본인의 임의로 처리되므로 금홍집은 이를 고종에게 아뢰어 시행하고, 고종은 그의 의견에 따라 대답만 하고 압인만 할 뿐이었다.

 

9. 전호군리윤종의 박영효 탄핵상소

 

전호군리윤종이 박영효를 탄핵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상소는 다음과 같다.

“신 등은 재주도 없고 인품도 없지만 벼슬이 하대부까지 이르러 그 영광은 극에 달하지만 두려운 마음은 한결 더합니다. 이런 처지에 어찌 조금이라도 견마지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죄인을 징토하는 일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그들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감히 위치를 벗어난 계율을 침범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에게 호소하는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깊이 통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전하께서 내리신 전교를 보니, 그 내용이 갑신정변 때 죄를 저지른 흉도들의 죄명을 감면하여 박영효, 서광범 등의 직첩을 다시 제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이것을 본 후 가슴이 떨리고 또 마음이 현혹되어 실망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밝은 세상에 다시 류예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상의 덕망이 하늘과 같아 무도한 사람도 포용하여 그들의 허물을 숨겨 주시지만, 지금 경장을 서두르고 있으므로 옛날 제도를 버리고 새로운 제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천지가 개벽한 이후 박영효, 서광범처럼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오늘과 같이 은전을 베푸는 일은 일찍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10월에 군부를 협박하여 국가가 거의 의지할 곳이 없었지만,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이 도우시어 종사가 다시 튼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인들은 법망을 벗어나 이웃 나라로 도주하므로 우리 동방의 백성들은 그들을 죽여 공분을 터뜨리고자 한 지 벌써 11년이나 되었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그들의 죄를 감면하여 렬조의 죄인명부에 경미한 죄를 우연히 범한 것처럼 꾸며 놓았습니까? 그렇다면 곧 란신적자들이 일어나 임금님에게 불궤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어찌 후회할 일이 있겠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국가의 기강이 부진하고 주상을 침범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임금 자리에 계실 수 있겠습니까?

저 일본인들은 우리 국내 사정과 외교 관계가 어려워지자 이 기회를 노리자고 하기도 하고, 하늘을 속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여 그 흉측한 음모를 가지고 억지로 그 죄명을 붙여 우리 국사범들과 함께 서울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그들을 살해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벼슬까지 주면서 총애하셨으니, 이것은 신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가 비록 국사범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부친들이 모두 사형에 처한 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여 고국으로 돌아오는 날이 있었으니, 참으로 그들이 조금이라도 사람다운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손을 거두고 앉아서 감히 사람으로 자처하지 못할 것인데, 그들은 지금 의기양양하게 세상에 나와 뜻을 얻은 듯 날뛰고 있습니다.

신이 들은 말에 의하면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업신여긴 사람은 임금도 업신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록 그들과 함께 정치를 하려고 하더라도 명분이 정답지 못하고 말이 순리적으로 통하지 않으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도성의 여론을 들으면 멀고 가까운 곳이 없이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꾸짖으며,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맹세코 이 두 적도와 한 하늘 아래서 살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구한 신의 마음도 이 두 적도의 머리를 베어 네거리에 걸어 두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헌장을 바로 하시고 신인의 분통을 터뜨리게 하여, 백성들의 여론을 따르시면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동해에 뛰어들어 자결을 할지언정 어찌 이 적도들과 한 조정에서 얼굴을 맞대고 구차히 살겠습니까? 신은 그 충격과 간절한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 상소가 나오자 일시에 전송되었다.

 

10. 중추원 설치

 

기무처를 폐지하고 중추원을 설치하여 원임대신금병시를 의장으로 임명하고, 조병세와 정범조를 좌우의 의장으로 임명하였다.

 

11. 승정원 공사청 폐지와 관보 간행

 

승정원의 공사청을 폐지하고, 종전에 시행했던 공문령포규칙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일체의 칙령을 시행하기로 하여 전교는 칙지, <저보>는 <관보>로 대체하였다.

옛날에 <매일저보>는 각 아문 관리들이 초록한 것을 전달하였는데, 그 초서로 된 기록이 매우 황란하였다. 이것을 <기별초>라고 한다. 이 <기별초>를 본 사람들은 오랜 동안 보지 않는 사람은 그 기사를 다 암기할 수 없었으므로, 이때 관보국을 설치하여 <관보>를 간행하였다.

 

12. 동학군의 장흥 공취

 

12월 초5일, 호남의 동비들이 장흥을 함락하여 부사박헌양을 살해하였다.

박헌양은 7월 중에 부임하였는데, 그가 길을 떠날 때 그의 친구들이 그를 만류하자 그는 탄식을 하며 “평일에 국록을 먹은 사람이 위태로운 난리를 만났다고 해서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 전라, 충청 양도의 동비들은 경군에게 패배한 후 남쪽으로 도주하여 장흥과 강진에 모여 있었다. 특히 장흥 지방은 수비가 허술하여 박헌양에게 도피를 권하였으나, 그는 친구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동비들이 침입하자 박헌양은 조복을 입고 인부를 찬 후 당상에 않아 그들을 크게 꾸짖자, 동비들은 그를 끌어내어 대포로 살해하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쥔 채로 죽었다.

 

13. 동학군의 강진 공취

 

초10일, 동비들이 장흥에서 강진의 병영을 침범하자 병사 서병무는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중군정규찬은 사망하였다.

장흥과 강진이 함락된 후 병영에서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서병무는 령암으로 도주하고 성안에 있는 병사들은 싸울 투지가 없었다. 정규찬이 여러 차례 방어할 대책을 말해 주었으나 서병무가 그의 말을 듣지 않자 그는 탄식하기를,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동비들이 일제히 성 위로 올라오자, 정규찬은 일이 이미 틀린 것을 예감하고 그의 손자 □□와 적진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수일이 지나서 동비들은 리두황의 추격을 받아 남쪽 끝까지 도주하여, 더 도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두황은 리규태 및 일병들과 합세한 후 그들을 크게 격파하여 3만3천천여 명을 살해하였다.

14. 전봉준의 생포

 

리도재가 금기범을 체포하여 죽이고, 전봉준 등을 생포하여 서울로 송치하였다. 그리고 령남토포사지석영은 일병들의 선봉이 되어 낙동강 좌우 연변을 공격하고, 리두황 등은 호남을 순시하고 있었다. 이에 영호남의 동비들은 모두 평정되었다.(<동비기략>에 자세히 나타남.)

 

15. 청국 교민의 보호규칙

 

서울 및 인천, 부산, 원산 등의 3항에 있는 지방관에게 명하여 청국 교민을 보호하는 규칙 8조를 반포하였다.

 

16. 고종의 자주독립국 선언

 

13일, 고종은 자주독립국임을 태묘에 고하고, 이튿날 다시 칙령을 내려 신민에게 포고하였다.

 

17. 이준용의 주일전권공사 부임 거부

 

리준용을 주일전권공사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부임하지 않았다.

 

18.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칭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칭하여 그 처소를 수정전으로 옮기고, 규장각은 내각으로 칭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소 관원이 서로 만날 때는 서로 존칭을 사용하게 하고, 또 감사, 류수, 곤수 이하는 지금부터 봉주를 하지 않고 사무를 분별하여 해아문에 보고하면 그 아문에서 핵심을 파악하여 주문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 관리들의 치적과 백성들의 병폐는 내무아문에서 파견원을 채방하여 그 병폐를 처리케 하였다. 또 조신들의 대례복은 흑단령을 사용하고, 궁궐에 나갈 때 입는 통상 예복은 두루마기와 흑색 답!!(호), 토산주포 및 사모, 화자 등으로 신년 정초부터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또 지금부터 함부로 국사를 핑계삼아 국시를 동요하는 상소는 받아들이지 않고 상소한 사람도 엄한 징계를 가하고, 또 전후로 죄명을 씌워 원한이 맺힌 사람은 모두 석방하는 한편, 이미 사망한 사람은 관직을 환원해 주도록 하였다. 이상의 여러 조항은 모두 칙령으로 시행하였다.

 

19. 내각의 각료 임명과 왕실의 존칭

 

총리대신은 금홍집, 내무대신은 박영효, 학무대신은 박정양, 외무대신은 금윤식, 탁지대신은 어윤중, 농상대신은 엄세영, 군무대신은 조희연, 법무대신은 서광범, 공무서리는 금가진 등이다.

그리고 왕실의 존칭은 종전에 주상전하라고 하던 것을 대군주폐하로 하고, 왕대비전하는 왕태후폐하, 왕비전하를 왕후폐하, 왕세자저하를 왕태자전하, 왕세자빈저하를 왕태자비전하, 전을 표, 제를 가라고 하였다. 그것은 장차 황제의 지위에 오르기 위한 것이었다.

 

20. 국한문의 혼용

 

이때 서울의 관보 및 각도의 이문을 국한문으로 섞어 문장을 만들었다. 그것은 일본의 문법을 본받은 것이다.

우리 나라의 방언에 옛날부터 한문을 진서라고 하고, 훈민정음을 언문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를 통칭 진언이라고 하였는데, 갑오경장 이후로 신시대의 업무에 종사한 사람들은 언문을 국문으로 칭하고, 진서는 한문으로 칭하였다. 이에 국한문 3자가 방언으로 되면서 진언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경솔한 사람들은 한문을 폐지하여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켰으나 그들의 세력이 저지되어 그 여론은 중지되었다.

 

21. 형법개정

 

능지처참, 효수 등의 참형이 폐지되고 교형, 포형 등의 사형법이 개정되어 관리에서는 교형, 군대에서는 포형을 사용하였다.

 

22. 세법개정

 

결세 및 호세를 개정하여 세금 대신 민전을 징수하였다. 매년 1결당 징수한 민전은 30냥, 1호당 징수한 민전은 3냥으로, 그 외에 징수하던 금액은 일체 엄금하였다. 그러나 관리들은 오히려 구습에 젖어 신법을 준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근세에는 결정이 크게 무너져 백성들에게 세미를 징수하고 있지만 읍마다 그 세미량은 동일하지 않아 매 1결당 납미는 60~70말 내지 100말에 이르고, 가장 가볍게 내는 세미가 50말을 내리지 않았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호포 및 두세도 그 명목이 소털처럼 많아 그 민전이 100냥에 이르렀다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 호포제도가 신설되었는데, 이것이 비록 옛날의 호세에 해당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각읍마다 그 징수된 양은 동일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관리들이 조종한 것에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결세 및 호세는 해가 거듭될수록 그 수량이 가중되어 백성들은 울부짖으며 죽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일을 해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새로 개정된 신법이 반포되자 백성들은 모두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여, 서양법을 따르든 일본법을 따르든 그들은 다시 태어난 듯이 희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수년이 지난 동안 비록 조정에서는 우려하는 기색이 눈가에 역력하였지만, 먼 지방의 시골 사람들은 배부르고 따뜻한 생활을 하여 승평시대처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무자년(1888) 큰 흉년이 들었을 때 민요 세 구절을 유행시켰는데, 그 민요는, 「곡식이 없어도 풍년처럼 여겨지는 것이 일불지요, 글이 없어도 선비가 많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이불지요, 임금이 없어도 태평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삼불지일세」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후 그들은 을축년(1889) 봄과 여름에 곡식이 많이 나와 가격이 떨어졌으므로 처음에 그렇게 많은 곡식이 나올 줄 생각지도 못하여 일불지를 경험하였고, 갑오년(1894)에는 동비들이 서로 접장이라 ֈ렀는데 접장이란 말은 세속에서 문사를 일컫는 말이라 이불지를 경험하였으며, 이때는 우리 나라가 일본의 견제를 받아 임금이 없는 나라 같았지만 백성들은 도리어 즐겁게 생활하고 있었으니 삼불지를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결세전은 연해읍의 경우 매결당 30냥을 징수하고 산악이 많은 군에는 25냥을 징수하였다. 호남에서 산악이 제일 많은 군으로는 무주와 룡담이었는데, 이런 경우로 미루어 보면 다른 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3. 은전과 엽전

 

옛날에는 관리들의 봉급을 미, 두, 포, 면 등으로 주었으나. 지난 6월 신법으로 개정할 때 먼저 봉급제도를 변경하여 매월 몇 원씩 주기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때 아무도 은전을 「원」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인이 은전 300만 원을 차용해 주었다. 그들의 1원은 우리 돈(상평통보) 5냥에 해당하였다. 그 후 원화는 조금씩 유통되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은 기호지방뿐이었다. 호남과 호서 지방에는 그때까지도 상평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원화로 세금을 바치기도 하고 상평전으로 세금을 바치기도 하였다. 상평전은 그 원화의 가치를 계산하여 교환되었다. 상평전은 엽전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이때 서울에서 당오전이 천하여 엽전 1문으로 사용되었다. 가령 당오전 1냥의 가치는 20문에 해당되어 이를 1냥으로 계산하였으므로, 서로 물건을 사면서 그 액수를 계산할 때 백성들은 매우 괴로워하였다.

 

24. 삼남지방의 대동미 반감

 

삼남지방의 대동미가 절반이나 감축되었다. 그리고 정부에서 보고하기를 전경상감사리용직이 가로챈 세금(장전)은 47만5,356냥 6전, 전통사민형식이 가로챈 것은 72만1,277냥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체포하여 치죄하고, 또 장전을 추심하여 국고에 충당하기를 간청하므로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리중하가 선무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서만 올렸을 뿐 의법처리를 하지 않았다.

 

25. 홍국영, 박영교 등의 사면과 복직

 

홍국영, 권유, 남종삼, 홍봉주, 조연승, 조락승, 신철균, 장동근, 정선교, 홍재학, 금응룡, 오윤근, 금응봉, 채동술, 임철호, 리휘정, 조총희 등의 죄를 사면하고, 박영교, 박호양, 홍진유, 홍영식, 금옥균, 리원진, 리회정, 임응준, 정현덕, 조병창, 조채하, 조우희, 리재만 등을 복직하였다. 이것은 김홍집, 서광범 등의 주청에 의한 것이다.

 

26. 안창제 체포령

 

전사과안창제가 상소하여 청국을 배반하라고 간청하자, 그를 체포하여 신문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안창제는 안효제의 서제이다. 그리고 박영효 등은 리윤종이 상소한 후 사람들이 자기를 논평할까 싶어, 국사를 말할 사람은 상소를 하지 말고 그 제의를 내각에 바치도록 하므로 이때부터 언로가 막혔다.

 

27. 신정희를 강화유수로 임명

 

신정희를 강화류수로 임명하였다.

 

28. 요동만의 청일간 전투

 

료동만에서 청병이 일병을 차단하였으나 싸울 때마다 모두 패배하여 문등, 녕해, 영성 등의 읍진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이때 일병들은 위해위를 침범하였다.

 

고종 32년 을미(1895년) ①

 

1. 중국기원의 폐지

 

을미년(1894) 개국 504(청국 광서 21년, 일본 명치 28년)에 청국의 기원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력서의 첫머리에 「대조선개국오백사년세차을미」라고 한 밑에 「시헌서」란 3자를 써넣었다. 그것은 기년은 고쳤지만 력은 아직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헌서라는 것을 준행한 것이다. 그리고 「력」이라고 하지 않고 「서」라고 한 것도 역시 옛날의 예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 고종의 휘가 홍력이기 때문에 청국인은 역 대신 서를 사용한 것이다. 홍력이라는 두 자는 갑오년(1894) 이전에는 공문에서 모두 사용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김홍집도 「굉집」이라고 고쳐 사용하였고, 또 역관들도 현씨 성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북경을 갈 때마다 원씨로 행세하다가 이때 비로소 그 본성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청나라 성조의 휘가 「현엽」이기 때문이다.

 

2. 경무사리윤용

 

리윤용을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3. 서병무의 면죄

 

전라관찰사리도재는, 병사서병무가 성을 빼앗겼으므로 그를 파직하여 쫓아내자는 장계를 올렸다. 이에 정부에서는 중과불적으로 정상을 참작하여 그에게 죄명을 띠고 관직에 종사하도록 하자고 아뢰었다. 이때 금가진은 금학진을 두둔하고, 서광범은 서병무를 두둔하여 그들은 모두 면죄되었다.

 

4. 전우와 곽종석 등의 관직 사양

 

전우는 순흥부사, 곽종석은 비안현감을 임명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사양하였고, 리성렬도 금제군수로 임명하였으나 그도 강력히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5. 박영효의 전횡

 

박영효가 리탁을 추천하여무주부사로 임명하였다.

이탁은 리조연의 아들이다. 이때부터 고종은 이탁이 그 부친의 원수에게 기용되므로 그를 총애하지 않았다. 이때 관직의 파직과 승진하는 일은 박영효가 모두 주관하였으므로 벼슬을 하고자 하는 사대부들은 박영효를 만나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다.

 

6. 허진과 윤웅렬 관직 임명

 

허진은 남병사, 윤웅렬은 경상좌병사로 임명하였다.

 

7. 영은문과 삼전도비의 철거

 

영은문과 삼전도의 비석을 철거하였다. 영은문은 경성의 서문 밖 수리의 거리에 있었는데, 명나라 때는 연조문이라고 하였으나 순치청국 세조의 연호 편자주 이후에는 영은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조사를 맞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석은 한강 삼전도에 있는데, 인조 정축년(1637) 남한산성에서 치욕적인 굴욕을 당한 후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 전공을 기록한 것이다. 고상리경석이 그 비문을 찬하였다. 이 비석에는 천자가 동정할 때 그 병사가 10만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그 글자는 몽고 글자로 썼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글자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우리 나라는 청나라와의 국교가 이미 단절되어 사대의절을 모두 삭제하였기 때문에 이 두 개의 유적도 철거한 것이다.

김가진은 금상용의 후예이다. 그는 이때 어깨를 으쓱이면서 “이제 루조 동안 피폐했던 치욕을 씻고 신자의 사수를 갚았으니 개화가 얼마나 좋습니까?”라고 하였다.

 

8. 박영효의 기복

 

박영효는 그의 부모상을 당하였으나 그를 기부하여 공무를 보게 하였다. 고종 갑신년(1884) 에 박영효 등이 살던 집을 모두 부수어버렸기 때문에 이때 박영효는 민영주의 집을 적몰하여 서광범과 나누어 거처하였다. 민영주의 집은 대안동에 있는데, 그 집은 크고 화려하여 대내와 같으므로 사람들은 고종과 반대로 된 것이라고 하였다

박영효의 아내가 일찍 사망하자 고종은 그에게 첩을 주었는데, 그 첩마저 사망하자 고종은 다시 그 첩의 동생을 첩으로 삼아 주었다. 이것은 모두 갑신정변 이전에 있었던 일이었는데, 이때 고종은 또 그에게 첩을 얻어 주었다.

 

9. 황해도에 동학도 활발

 

이때 삼남의 동학도들은 점차 안정되었으나 황해도에 있던 동학도들이 다시 치성하여 풍천, 수안, 장련 제읍에서 급보를 알리는 상계를 올리자, 정부에서는 황해감사정현석이 나이가 많아 직무수행을 다하지 못하므로 그를 파직시키고 또 그를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10. 일본군의 북경 침범

 

청국은 위해위와 류공도를 일병들에게 빼앗기고, 또 장군 재종건, 류보섬 등이 전투에서 사망한 데다가 정여창마저 전장병및 국민과 항복하기로 약속한 후 독약을 복용하여 사망하므로 일병들은 그 위세를 떨쳐 북경을 침범하였다. 이에 중외에 계엄을 선포하여 우리와 강화를 바란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11. 조희연을 일본군의 축하사절로 보냄

 

군무대신조희연을 청국의 해성현으로 보내 일본 병사들을 위문하였다. 이때 금홍집이 아뢰기를, “이번에 일본이 청국과 싸운 것은 우리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므로 지금 그들이 바다과 육지에서 승리를 거두어 계속 전공을 알려 오니, 그들에게 사신을 보내 위로를 베풀고 또 성상의 호의를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여 고종은 그의 말을 따른 것이다.

 

12. 신기선의 귀향

 

공무대신신기선이 친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

 

13. 조희일을 황해감사로 임명

 

조희일을 황해감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선유사로 있다가 임명되었다.

 

14. 시찰단의 각도 파견

 

2월에 각 도로 시찰원을 파견하였다. 경기에는 금우용, 충북에는 금정택, 충남에는 차학모, 경북에는 홍건조, 경남에는 리병휘, 전북에는 권명훈, 전남에는 조협승, 황해도는 안종수, 강원도는 금일하, 함경도는 금항기, 평남에는 권상문, 평북에는 금락구를 파견하여 청, 일전쟁 이후의 형편을 살피고 민간의 고통을 파악하였다.

그들은 개화의 장정에 관련된 물산과 관문 등에 있어서 두루 관계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들의 직책은 옛날 어사보다 더 중책을 띠고 있었지만 마패를 차지 않고 암행을 하지 않아 어사보다 위엄은 못하므로 실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조정을 떠날 때 탁지부에서 넉넉한 노자를 지급받아 지방의 민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경내를 들어선 이후관청에서 제공한 음식만 먹고 지냈으니 다른 일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시찰원으로 파견된 사람들은 매우 간교하여 무슨 일로 만나는 사람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찰원을 파견한 것은 박영효의 의견에서 나온 것이며, 그들이 지켜야 할 사목은 40조나 되었다.

 

15. 전라도의 조세감면

 

전라도의 재결 34,301결 19부 6속을 감면하였다. 그리고 지난해 조세 및 전주, 나주 등 15개 읍의 진결 5,418결 86부의 1년분을 감면하였다. 이것은 감사리도재의 간청에 의한 것이다. 이도재는 여러 고을을 순찰하면서 백성들의 숨은 고통을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지방에서는 그의 덕을 보았다.

 

16. 박용후순창군수 임명

 

박용후를 순창군수로 임명하였다. 박용후는 박영효의 당제이다.

 

17. 지방의 병부와 마패 폐지

 

3월에 지방의 병부와 마패를 폐지하였다. 감사, 류수, 곤수로부터 수령, 변장에 이르기까지 일체 병부와 마패 등을 거두어 정부에 바쳤다.

 

18. 조병갑과 민영주 등의 처벌

 

법무대신서광범이 아뢰기를, 조병갑, 조필영, 조병식, 민영주 등이 죄는 많지만 처벌이 가벼워 국법을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들을 다시 체포하여 징계하라고 간청하므로 그의 의견을 따라 조병갑과 조필영 등을 유배지에서 체포해 왔으나, 그 후 얼마 안되어 박영효가 도주하고 조정에서 다시 변란이 발생하여 그 죄인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모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서광범은 비록 박영효와 일을 함께 하였지만 그는 몸을 조금 도사려 간알을 사절하고 관사를 사의로 처리하지 않았으며, 출입을 할 때도 사시를 하지 않기 때문에 도성의 백성들은 그를 덕망 있는 재상으로 지목하였다.

 

19. 흑색주의의 권장

 

공사 예복 중 답!!(호)를 제외하고 대궐에 나갈 때는 모, 혜, 사대 등을 착용하도록 하였으며, 두루마기(주의)는 관민이 일제히 흑색 두루마기를 입도록 하였다. 지난 갑신년(1884) 가을 주의령을 발표하였을 때 전국이 흉흉하여 그 영을 따르지 않으므로, 그 후 얼마 안되어 옛날처럼 복제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지난해 여름, 주의령이 또 내렸을 때 그 령지 한 장에 백성들은 즐거워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 두루마기가 간편한 것을 좋게 여겼다. 10년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변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흑색 두루마기는 모두 입지 않았다

 

20. 이채연의 기복

 

농상부엄세영을 면직하고, 협판리채연을 기복하여 서리대신의 사무를 보게 하였다. 경재로서 기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21. 진하 등의 의식을 다시 시행

 

사은, 하직 등 외정에서 시행하던 행사를 폐지하고 다시 진하, 문안 등의 의식을 정하였다.

 

22. 전봉준의 사형집행

 

호남의 동학적도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한, 금덕명등을 처형하였다. 그들은 교형을 하고 참형은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알맞는 처형을 시행하지 못한 것을 매우 한탄하였다.

그리고 전봉준이 처형될 때 그는 박영효, 서광범 등을 역적이라고 꾸짖고 죽었다고 한다. 적의 우두머리 최시형은 망명하여 결국 체포하지 못하였다.

 

23. 내지류배법 폐지

 

내지로 유배하는 법을 폐지하여 지금부터 경범죄는 벌금, 면직, 감금을 하고, 중범죄는 징역과 사형을 하였으며, 그 유배로는 도배뿐이므로 대체로 이상과 같이 6등급뿐이라고 한다.

 

24. 삼남지방의 선무, 초토사의 폐지와 의병장의 록훈폐지

 

삼남의 선무사와 초토사를 폐지하고 경영에서 출정한 장병들도 모두 소환하였다. 동비가 전국에 만연하여 이웃 나라의 원병을 동원하였으나 이제 겨우 진정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큰 난리인 것이다.

이때 강토를 지켰던 사람은 리승우, 민종렬, 조원식 등이었고 초야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박봉양, 맹영재 등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그 전공을 추서하여 권장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은 매우 가슴 아파하였고, 또 이때 시국이 새로 바뀌어 날마다 그들의 공훈을 추서해 줄 수 없는 데다가 일본인들이 남모르게 국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우리 국민들이 혹시 충분을 발휘하지 않을까 생각하여, 기어이 우리의 애국자를 죽이어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시속배들은 일본인의 뜻을 맞추어 한 번도 전공을 세운 사람을 위로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금홍집도 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은 통탄스럽게 여기었다.

 

25. 박봉양의 귀향

 

박봉양을 내무주사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는 적도를 방어하고 경내를 잘 보호하여 공로가 매우 혁혁하였다. 그러나 간민의 모함을 받고 있었으므로 호남을 지나던 일병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전봉준 등이 처형된 후에 출옥하여 주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세태가 날로 문란해지는 것을 보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26. 청국과 일본의 강화조약 체결

 

청일 양국은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소위 마관조약이라고 한다. 그 약조는 모두 4개 조로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할 것.

2. 대만의 전도 및 성경남부의 요동 일대 지방을 할양할 것.

3. 병비는 고평은 2만 냥을 배상할 것.

4. 통상조약을 개정할 것

이날은 이달 23일이었다. 이때 청인들은 연전연패하였으므로 결국 강화를 주장하여 1월 중에 장음환, 소우렴등을 일본으로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으나 일본인들은 인원이 적게 왔다는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다시 전권대신 리홍장을 파견하였다.

그가 2월 23일 마관에 도착하자 일본은 이등박문과 륙오종광을 파견하였는데, 일본인들의 요구 사항이 너무 과다하므로 서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배상금 3만만 냥만 결정하였다. 이때 어떤 일본인이 단총으로 이홍장을 저격한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전역이 큰 소동을 일으키자 이등박문 등은 수치를 느끼고 이홍장의 말을 따라 2만만 냥을 배상받기로 결정하였다.

처음에 러시아인이 동삼성을 욕심내어 동아시아의 통로를 내려고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있다가 이때 일본이 료동을 넘본다는 정보를 듣고 크게 노하여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 연맹하여, 일본에게 대만은 할양할 수 있어도 요동은 할양을 할 수 없다고 하고 청나라로 하여금 은전 3천만 냥을 일본에게 주어 요동을 반환하게 하므로, 일본은 러시아를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따랐다.

이로부터 요동은 할양하지 않았으나 러시아인은 청나라에게 덕을 끼쳤다는 것을 자부하며 끊임없이 많은 요구를 하므로 일본에게 요동을 할양한 것보다 더 많은 손해를 보았다. 그리고 그 배상 한도도 너무 많아 갑자기 배상할 수 없으므로 그 기한을 30년간 더 연장받았다.

그러나 청나라는 큰 곤경에 처하여 국가를 영위함에 있어서 매우 어려움을 겪었고, 그 후 얼마 안되어 이홍장의 아들 리경방을 대만양계사로 임명하여 대만을 일본으로 할양하였으나 대만 사람들은 이에 결사반대하여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약 1년 동안 혈전을 벌여 기미년(1895) 여름에는 사망자가 무려 6만여 명이나 발생하였다. 그러나 결국 대만은 일본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27. 전주에 약령시 설치

 

전주에 약령을 설치하였다. 옛날 풍속에는 약시를 령이라고 하였다. 매년 2월 10일에는 대구와 공주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영남에 먼저 설치하고 뒤에는 호남에 설치하여 서로 10일 간격으로 운영하였다. 이 영을 실시한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것이다.

고종 경인년(1890)과 신묘년(1891) 사이에 민응식이 청주에 통어영을 설치하고, 공주의 영을 청주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인들이 옮기기를 원하지 않아 결국 이행되지 않았는데, 이때 전라감사리도재가 전주의 쇄락한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여 공주의 영을 그곳으로 옮겼으나 청주로 옮기려고 할 때처럼 소란스럽기만 하였다.

 

28. 서울의 승려 출입금지 해제

 

4월에 내각의 관제를 발표하여 서울의 승금을 해제하였다.

옛날 제도에는 스님들의 서울 출입을 엄금하였으나 정부로 서한을 올려 승금해제를 요청하자, 금홍집이 이 사실을 경연에서 아뢰어 이 명을 내린 것이다.

 

29. 리준용의 교동 유배와 박준양, 리태용 등의 처형

 

정경리준용을 교동으로 유배하고 전승지박준양과 전참판리태용 등을 처형하였다. 지난해 동비들이 소요를 일으켰을 때 박준양과 이태용은 그 소란한 시기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추대하기 위해 경기 지역으로 동비들을 소집하였으나 그의 일당 고종주, 전동석, 최형식 등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기타 남은 무리들은 차등을 두어 유배하였다.

동비가 치성할 때 중외에서는 대원군이 그들을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것은 동비들이 인심을 선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궁은 대원군을 꺼려하였고 서광범, 박영효 등도 그를 싫어하여 기회만 있으면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러던 중 금학우가 살해되자 어떤 사람은 대원군을 의심하였고 시속배들도 그를 의심하였다. 이에 박영효는 중궁의 교지를 받아 이준용을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고문을 가하여 이감하고 대원군을 역률로서 론죄하자고 하므로 부대부인은 운현궁으로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때 박영효 등은 사람들의 여론이 두려워 부득이 형량을 감해 주었다. 이준용이 국문을 받을 때 서광범도 그를 심문하였는데, 그에게 온갖 참혹스러운 고문을 가하여 발가락과 손가락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이때 이준용은 고함을 지르며 말하기를, “나를 빨리 죽여 주시오. 더 이상 할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옥졸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도 팔뚝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박준양은 박제순의 조카였다. 그는 지난해 무슨 죄로 연루되었다가 6월에 석방된 후 즉시 현시국으로 눈을 돌려 전주사로서 협판까지 승진되었고, 이태용은 민응식의 압객으로 이들은 모두 근신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고종주는 고경명1533~1592. 선조 때 의병장으로, 자는 이순이며 호는 제봉. 편자주 의 후예로, 그는 신묘년(1891) 진사시에 급제한 후 관상술을 가지고 서울에서 지내며 갑오년(1894) 여름에 운현궁에 출입하여 참봉이 되었는데, 그는 조급한 출세를 노리다가 결국 화를 당하고 말았다.

이준용이 심문을 받을 때 대원군이하응이 금오의금부의 별칭. 편자주 문하에서 고종의 명을 돕고 있었는데, 이때 고종은 궁내부의 관원을 그곳으로 보내 날마다 세 번씩 문안을 드렸다

하루는 정만조가 참서로서 그곳을 갔었는데, 그때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시자가 떡을 빚어 넣은 팥죽을 내왔다. 그곳은 죄수에게 곤장을 치면 울부짖는 소리가 대원군이 있는 데까지 들렸으나 리하응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 팥죽을 다 먹었다.

이때 그는 팥이 상 위에 떨어지면 젓가락으로 떡을 집어 그 팥을 찍어먹는 여유까지 보였다고 한다.

정만조가 이 사실을 나에게 말하면서 그는 혀를 내두르며 “그 노인은 참으로 독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30. 역적거성법의 폐지

 

역적의 거성법을 폐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고종 32년 을미(1895년) ②

 

1. 지방의 생사, 선정비 폐지

 

지방의 생사, 선정비, 만인산 등 잘못된 풍속을 금하였다.

 

2. 영남지역 빈민들에게 종조 지급

 

영남의 빈민들에게 종조 3천석을 지급하였으나 시속배들은 영남 사람들의 성품이 강하여 다른 변이 생길까 염려하였다. 정부에서는 전후에 걸쳐 영남 지방을 돕는 일이 다른 도보다 더 많았다.

 

3. 대원군에 대한 의절 존숭

 

대원군의 의절을 다음과 같이 높이었다.

1. 8명이 교자를 낮게 멜 것.

2. 공복의 흉배에는 구형을 부착하고 품대 1개, 청혜 1개와 자마호를 사용할 것.

3. 하얀 바탕과 푸른 테를 두른 일산을 사용할 것.

4. 문은 횡두목으로 만들 것.

5. 순검을 파견하여 대문을 지킬 것.

6. 대소신공은 칙명을 받기 전에는 사알하지 말 것.

7. 각국 공사를 방문할 때는, 외부로 조회하면 외부에서는 다시 궁내부로 보고하여 인도를 하게 할 것

8. 태공이 출입할 때 궁내부의 순검이 계종하여 호위할 것.

이것은 겉치레로 높인 것 같지만 더욱 자유를 금한 것이었다.

 

4. 각 관직의 개혁

 

각 사무소를 부로 개칭하고, 농상부를 공부로 이속하였다. 그리고 그 관직은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등 18등급으로 하였다.

 

5. 관리의 연봉 제정

 

백관의 연봉을 제정하여 칙임관을 1등급으로 하였다. (총리대신 5,000원, 부대신 3,000원, 2등 3,000원, 3등 1급 2,500원, 2급 2,200원, 4등 1급 2,000원, 2급 1,800원, 주임 1등 1,600원, 2등 1,400원, 3등 1,200원, 4등 1,000원, 5등 800원, 6등 600원, 판임 1등 500원, 2등 420원, 3등 360원, 4등 300원, 5등 240원, 6등 180원, 7등 150원, 8등 120원)

이후에 관제가 누차 변하여 봉급이 일정하지 않았으므로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 주일공사김사준과 주미공사이현직의 귀국

 

주일공사금사준이 귀국하여 그의 수행원 한영원이 서리로 임명되고, 주미공사리현직에게 환국하여 신병을 치료하도록 하고 번역관박용규를 서리로 임명하였다

 

7. 평양의 훈련대 설치

 

평양에 훈련대 제3대대를 설치하고 경무청에 양창을 지급하여 순검을 훈련시켰다.

 

8. 박정양총리대신 임명

 

5월에 총리대신김홍집을 면직하고 박정양을 대리로 임명하였다.

 

9. 주진독리리면상 귀국

 

주진독리리면상과 종사관서상교가 리승순, 민영철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10. 신기선과 서재필 등 관직 임명

 

신기선을 군부대신으로 기부하고 서재필은 외부협판, 윤치호는 학부협판, 리주회는 군부협판으로 임명하였다.

서광범과 박영효가 귀국할 때 서재필은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가 이때 귀국하였다.

그리고 윤치호는 윤웅렬의 서자로, 그는 10여 세 때 미국으로 들어가 대통령 푸트(L. H. Foote, 1826-?)의 양자가 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그는 왕래가 무상하였다.

리주회는 경성 사람으로 본명은 풍영이다. 그는 본래부터 일본인과 가까이 지냈으므로 그들에게 관직을 받아 10년 전에 가속과 함께 금별도에서 우거하고 있었는데, 그는 동비를 토벌하여 전공이 있었으므로 대내의 부름을 받아 잡자기 대신이 되었다. 그는 박영효의 주선으로 오게 되었다.

 

11. 고영희의 주일공사 부임

 

고영희를 주일공사로 임명하여 일본으로 부임하였다.

 

12. 예산현감남궁복의 급사

 

례산현감남궁복은 전동석에게 유인되었으나 그를 체포하여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는 놀람증(경계증)으로 사망하였다.

 

13. 지방제도의 개혁

 

감사, 류수, 안무사, 통제사, 병사, 수사, 방어사, 감리, 부윤, 목사, 부사, 군수, 서윤, 판관, 현령, 현감, 경력, 감목관, 첨사, 영장, 중군, 우후, 만호, 권관, 별장 등 관직을 폐지하여 지방제도를 개정하고, 전국을 23부 331군으로 나누어 부에는 관찰사를, 군에는 군수를 두었다.(한성부 11군 인천부 12군, 충주부 20군, 홍주부 22군, 공주부 27군, 전주부 20군, 남원부 15군, 라주부 6군, 제주부 23군, 안동부 16군, 강릉부 9군, 춘천부 6군, 의주부 13군, 강계부 6군, 함흥부 11군, 갑산부2군, 경성부 10군)

부에는 관찰사 1명, 참서관 1명, 경무관 1명 및 주사, 총순 등의 관직을 두었다.

이때 교활한 관리들은 시대에 영합하여 고위직에 승진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그들을 꾸짖어 「입도자」라고 비꼬았다. 그것은 동비와 다름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파벌이 이미 없어져 미천한 사람들이 말 한마디로 공경이 되고, 시골에서는 그런 기풍이 조성되어 명분이 날로 무너지고 있었으나 사족들은 감히 무슨 말을 하지 못하고 있어 귀천이 혼동되기 시작하였다.

 

14. 관리의 연봉

 

관찰사의 연봉(1급이 1,200원, 2급이 2,000원, 3급이 1,800원), 참서관(1급이 2,000원 2급이 900원, 3급은 800원, 4급은 700원), 경무관(참서관과 같음), 군수(1급이 1,000원, 2급이 900원, 3급이 800원, 4급이 700원, 5급이 600원), 주사(1등급이 360원, 2등급이 300원, 3등급이 240원, 4등급이 216원, 5등급이 192원, 6등급이 168원, 7등급이 144원, 8등급이 122원), 총순(주사와 연봉이 같다). 이후에도 연봉을 가감하여 그 액수가 한결같지 않았는데, 다시 13개 도로 변경한 후에는 그 관제가 변경되어 부군의 관리를 서기, 고원 등으로 구분하여 매월 7급 이하의 봉급자들은 그 월급을 다시 정하였다.

 

15. 구관의 사직과 신관의 관직 고수

 

이때 의원면직하는 사례가 있어 관직의 사표를 내면 사표를 수리하였으므로 지조가 있던 옛날 대신들과 추천을 받았던 산림처사들은 관직을 제수받으면 그 관직을 사직하였고, 관직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란당들과 고루하고 우둔한 신진관원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관료의 기강이 날로 문란하여 사직을 원하지 않는 관리에게도 강제로 면직시키는 제도가 도입되어 이를 의원면직이라고 하였다.

대소 관원을 막론하고 친상을 당하더라도 모두 기부을 허용하였다.

 

16. 지방관의 세무착취와 대일국채 증가

 

세미를 금액으로 내라는 반포령이 내려질 때 백성들은 기뻐하며 앞을 다투어 수납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개혁에 급급하여 세전 독촉을 소홀하게 하였으므로 관세장이란 이름은 있어도 누구 하나 세전을 서울로 운송한 사람은 없었다. 이에 군, 읍에서 바친 세전은 모두 관리들에게 돌아가고, 혹 조정에서 진전을 마련하여 흉년과 병란의 피해가 심한 곳을 도우려고 해도 남아 있는 정공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관제를 개혁하면서부터 봉급으로 거액의 돈이 들어간 데다가 일본국채가 300만 원이나 초과하여 채상가채가 되었지만 우리 관리들은 오직 일본인에게 갖다 바치기만 하였다

그리고 탁지부대신어윤중은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여 어떤 어려움도 피하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에 동조한 사람이 적어 늘 한탄하였고, 누차 사직을 하려고 해도 그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억지로 관직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17. 외영과 봉수대 폐지

 

각도의 외영병정을 폐지하여 각 군의 병기를 관찰부로 모으고 각처의 봉수도 모두 폐지하였다.

 

18. 군제개혁

 

군제를 개혁하여 대장, 부장, 참장, 정령, 부령, 참령, 정위, 부위, 참위 등의 군직을 두었다. 먼저 육군을 개편하여 이를 훈련대라고 하였다.

 

19. 재판소 설치

 

각부와 각 항구에 재판소를 설치하여 감금, 징역, 류배, 교형 등의 형법을 두고 장례원, 시종원, 규장각, 내장각 등을 두어 이를 궁내부로 이속하였다. 원에는 령이 있고, 사에는 장이 있었다.

 

20. 학교 설립

 

사범, 어학, 법률, 사관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총명한 소년들을 선발하여 일본 유학을 시켰다.

 

21. 대나무 열매로 죽을 쓰다

 

호남과 영남 사이에는 지이산과 백운산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이해 여름에 그 산골짜기에 우거진 죽림에는 죽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그 죽실로 죽을 쑤면 소맥과 같은 맛이 나므로 죽실을 채취한 사람은 호당 수석 정도 채취하였다. 이것은 순조 갑술년(1814) 이후 처음 보는 일이라고 한다.

 

22. 목린덕의 방한

 

주한 일본공사정상성이 귀국하고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llendoff)가 내한하였다. 그는 갑신년(1884) 겨울에 민영익과 함께 청나라를 방문하였는데, 그 후 소식이 묘연하였으나 이때 다시 온 것이다.

 

23. 궁내부 특진관 설치

 

윤5월, 궁내부에 특진관 16명을 두었다. 이것은 아경 이상의 대신만 선발하여 충당한 것이다. 이들은 왕실의 전례, 의식 등을 맡아 고종이 무슨 일을 물을 경우에는 알현하였다.

 

24. 박영효의 음모발각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개화 이후, 고종은 밖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고 안으로는 의정부가 마음대로 처리하여 어떤 사안 하나도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궁은 이를 매우 분통히 여기고 점차 고종의 부권을 꾀하여 러시아와 내통하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중궁의 행위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었으나 그는 중궁의 권위를 두려워하여 중궁을 시해하지 않으면 그 화근을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날짜를 정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일본으로 병력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유길준이 자기와 친한 사이여서 자기의 뜻을 내통하였으나 유길준은 그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박영효는 자기의 음모가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변장한 후 일병에게 호위를 요청하여 룡산으로 가서 기선을 타고 도주하였다. 그의 일당 신응희, 리규완 등도 그와 함께 도주하였다.

이때 소문으로는 일본인 일출웅이 우리측 한재익에게 박영효의 흉계를 말하자 한재익은 침상훈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서광범이 고변한 것이며 다른 사람의 고변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 후 을사년(1905)에 우리 나라 사람인 리기가 일본의 강호에서 박영효를 만났는데, 이때 박영효는 위에서 말한 대로 리기에게 그 사실을 전하며 간적 유길준 때문에 국사를 그르쳐 오늘과 같은 꼴이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리기에게 들은 것이다. 박영효가 도주하자 서광범은 불안해하며 사직상소를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박영효의 치죄를 명하고 그 외에는 불문에 부쳤다.

 

25. 유길준 등을 관직에 임명

 

내무협판유길준을 대신 사무서리로 임명하고, 안경수를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26. 사환 설치

 

타국의 동전은 사용을 금지하고, 환상곡을 사환곡으로 개칭하여 백성들이 양곡을 매매할 때 관리들이 간섭하지 말도록 하였다.

 

27. 윤용구와 이헌영을 대신에 임명

 

윤용구는 궁내부대신, 리⯶영은 내부대신으로 임명하였으나 이 두 사람이 관직을 강력히 사양하므로, 그 후 얼마 안되어 면직되었다.

 

28. 나주 관찰사한기동의 사직

 

나주 관찰사한기동이 관직을 강력히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한기동은 고 재상 한계원의 아들이다. 그는 대원군이 실권한 후 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이제 석방되어 돌아왔는데,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상례로 여겼다. 그는 갑오경장 이후 관직을 제수하면 사양하였으므로 청백하다는 소문이 리건창과 같이 널리 알려졌다.

 

29. 평안도, 황해도의 콜레라 유행

 

의주에서 유행병이 발생하여 10일 사이에 평안도와 황해도까지 전염되었다가 결국 서울에까지 병이 전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그 병은 목구멍이 막히고 토사를 계속하여 발병한 지 하루나 이틀만에 사망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를 괴질이라고 하고, 서양 사람들은 콜레라(호렬자)라고 하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검역소를 설치하여 참외를 먹지 못하게 하였다.

 

30. 영남과 호서의 호우피해

 

영남 낙동강의 좌도와 우도 수십 군에 호우가 내리고 호서의 금강 이북 지방에서 경기 연안에 이르기까지 평지에 수척의 물이 고여 릉곡지변이 있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서울이 더욱 심하여 떠내려간 인가가 400여 호나 되었다. 이런 피해는 100년 이후 드문 일이었다.

 

31. 청국의 수해

 

청나라의 양양, 강녕 지방에도 큰 수해가 발생하였다.(상해신보에 게재되었음)

 

32. 우체사 설치

 

6월에 인천에다가 우체사를 설치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우체국이 설치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후에는 우체국에 관한 일은 기록하지 않았다.

 

33. 이탈리아 국왕 질아부리의 고종 알현

 

이탈리아 국왕 질아부리(미상)가 입경하여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때 윤치호가 그를 영접하고 의화군리강이 전송하였다.

1) 이때 이탈리아 전권대신루카(F. Luca)가 내한하여 금병시와 한이통상조약을 조인하였음.

 

34. 이준용의 사면

 

리준용이 사면되어 돌아왔다. 금학우의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도 모두 석방되었다.

 

35. 신정희의 사망

 

전대장신정희가 사망하였다.

 

36. 군부대신신기선의 사직소

 

군부대신신기선이 기부을 사양하므로 비답을 내려 윤허하였다. 그 상소문은 대충 다음과 같다.

“운운…공평한 개화의 정치가 비록 지금의 급무이기는 하지만 요, 순, 주공, 공자의 교육은 조금도 변해서는 안될 것이며, 의관과 례악의 풍속도 다 개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특히 의제의 개혁은 너무 과하여 상하의 구별이 혼동되었으므로 중외의 여론을 흥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도를 위해 한심스러울 뿐 아니라 그 남모르게 우려된 점은 말로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강이 부진한 지금, 세목에만 역점을 두어 제도를 모두 개혁하고 또 문자도 모두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 본의를 규명하면 그것이 비록 이웃 나라를 위한 후의와 각신들이 헌장을 기초할 때 멀리 생각하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혹은 굽은 것을 바루려다가 너무 지나치게 바루는 결과를 초래하여 명분과 교육에 큰 해를 끼치기도 하고 혹은 뜨거운 국을 조심한다고 하면서 국에 뜬 부추를 불다가 국을 엎질러 사리를 통달하지 못한 결과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겉으로 모발을 그리고 한번 찡그려 웃는 것까지 한결같이 외국만 모방하는 것은 나귀에 기린가죽을 씌우는 것과 같고, 연나라 소년이 조나라에 가서 걸음걸이를 배우다가 연나라 걸음걸이까지 잃어버린 것같이 될 것이니, 이것은 통곡과 한탄과 살을 오리고 몸을 깎는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신의 충정은 누차 신의 언어에서 표현되었지만 결국 신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백성들의 마음은 해이해지고 나라는 장차 위태롭게 되어 어떻게 구제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고 말았으니, 신이 무슨 면목으로 친상을 당하지 않은 사람처럼 공무에 종사하여 후한 봉급을 앉아서 받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8개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기강을 세우고 상벌을 밝혀 지공무사함을 보일 것

2. 신중하게 선택한 인재는 오랫동안 직무를 맡겨 성적을 올리게 할 것.

3. 전적을 시정하고 호전을 명백히 하여 부세를 균일하게 하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것.

4. 동방의 구제를 조금 존속시켜, 각국의 신법을 참작하고 또 고금을 참작하여 그 형평이 중도에 맞게 할 것.

5. 먼저 유술을 진흥하고 서서히 신학을 의론할 것.

6. 무슨 일이든 옳은 것을 구하고 공적은 이루기를 구하며, 일과 권한을 스스로 판단하여 외국인이 대산하는 것을 면할 것.

7 안으로는 성의를 쌓고 밖으로는 유시하여 우둔한 백성들의 마음을 열어 주고 와언을 종식시킬 것.

8. 유식자를 금하고 백성의 생업을 안정케 하며, 귀천의 복장을 구별하고 관방의 품위를 명백히 하여 백성들의 뜻을 일정하게 갖도록 할 것.

신기선은 유사로서 관계로 진출하였으나 그는 관리생활을 문란하게 하였으며, 요즈음은 그가 또 기부되어 남의 말을 인용한 사직소를 내고 아울러 시대의 폐단까지 나열하므로 그 진부한 점과 아부성이 서로 모순되어 시속배들은 그를 비웃었다.

 

37. 호남의 서학 유행

 

고산군수장태수가 면직되었다. 이때 호남의 진산과 금산 사이에 서양학이 유행하였는데 이를 성교라고 하였다. 그런데 성교금지령을 범한 사람이 많아지자, 장태수는 그들을 법으로 다스리다가 서양 선교사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그는 이 일 때문에 장계를 올려 교체를 요구하였다. 장태수는 대대로 금구에서 부유하게 살고 지식도 풍부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였다.

그는 신해년(1911)에 일본인이 준 은사금도 받지 않고 음독자결하였다.

 

37. 수령의 근무성적 작성방식 개정

 

옛 제도에는 수령의 전최 편자주 를 치를 때 「사언이구」를 제목으로 하여 지었으며, 도신은 6월과 12월 15일에 그 전최 결과를 조정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 방식을 바꾸어 구절의 장단에 구애를 받지 않고 국문을 혼용하여 구절을 완성하였으며, 매년 연말에 이를 내부로 보고하면 내부에서는 이것을 근거로 파직과 승진을 결정하였다.

1)관찰사가 수령의 근무성적을 매겨 상을 「최」, 하를 「전」으로 하여 중앙에 보고한 근무성적.

 

38. 관동, 호서지방의 수해

 

관동은 춘천이 수해를 당하고 호서에도 10여개 군이 큰 수해를 당했으며, 서울에는 수개월 동안 장마가 계속되었다.

 

39. 일본의 장티푸스 대유행과 폭우피해

 

일본에서도 장티푸스가 치성하여 3월부터 5월까지 사망한 사람의 수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달 3,4일 동안 폭풍우가 강타하여 구주, 산양, 동경, 선대 등의 지방이 더욱 심한 피해를 입어 그 홍수로 인한 피해가 말할 수도 없었다. 그 장마는 월말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40. 각급 공문 명칭 개정

 

옛날 제도에 이문을 보낼 때는 서울에서 각도로 칙령을 내리고 순영에서 각읍으로 돌렸다. 이것을 관자라고 하기도 하고 감결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읍에서 영으로 올리고 영에서 경사로 올린 것을 보상이라고 하였으며, 수령이 백성들에게 효유한 것을 전령 혹은 하첩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관자와 감결을 훈령, 지령 등으로 칭하고, 보장은 질품, 보고, 청원이라고 하였으며, 전령과 하첩은 고시라고 하였다. 이 서류는 모두 국한문으로 혼용하여 관리와 백성들은 매우 불편스럽게 여겼다

 

41. 동학 잔당의 토벌과 체포

 

각도에 산재한 동비여당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때 수령들은 그들의 귀화를 유도하여 모두 불문에 부쳤으나 호남의 장흥, 강진 등지는 동비란에 리교들이 많이 사망하였으므로 그들의 가족들이 동비 추격작전에 나서서, 전후 사망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42. 민영준 등에 대한 대사령

 

7월에 대사령을 내려 민영준, 민영주, 민병석, 민영은, 민영순, 민형직, 조필영, 조병갑, 리용직, 조병식, 리용태, 금문현 등을 모두 석방하였다. 그러나 이때 지식인들은, 시속배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43. 김홍집, 박정양 등의 중용

 

다시 금홍집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박정양은 내부대신, 리경직을 궁내부대신, 성기운은 의주관찰사, 채규상은 라주관찰사로 임명하였다.

 

44. 삼포오루의 내한

 

일본 공사삼포오루가 래한하였다.

 

45. 개국기원절의 경회루 연회

 

개국기원절(16일)에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각국 공사들은 부부 동반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각부의 칙임관도 아내와 함께 잔치에 참석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풍속을 따른 것이다.

16일은 태조가 개국한 날이므로 지난해부터 이날을 개국기념일로 정하여 명절로 삼았다. 이것도 서양의 법이다.

 

46. 월식

 

16일, 월식을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달이 지구의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계만 하고 월식을 구제하는 행사는 치르지 못하였다.

 

47. 각지방의 호우 상황

 

서울은 수개월 동안 장마로 인하여 홍수피해를 입었고, 양천과 통진 등 영남 20여 개 군, 호서 7개 군과 호남 28개 군도 큰 수해를 입어 산이 붕괴되고 냇물이 넘쳐흘렀다. 삼남 등지도 이와 같았다.

 

48. 각지의 이변

 

초6일, 유성이 자미원별 이름. 일명 자미궁이라고도 하며, 천제가 거주한다고 함. 편자주 에서부터 북쪽으로 떨어졌는데, 그 별의 크기는 중발(완)만하였다.

그리고 27일에는 관동 인제군에서 서리가 내렸으며, 서울 이남 지방에는 개와 소가 광병으로 죽었다. 개는 사람을 마구 물어뜯고 소도 광병이 들어 죽었다. 이때부터 개의 광병은 끊이지 않고 계속 발생하였다.

 

49. 중남미의 지진

 

중남미에 지진이 발생하여 453명이 사망하였다.

 

50. 울릉도에 도감 설치

 

8월, 울릉도에 도감을 설치하였다. 울릉도는 오랫동안 황무지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요사이 주민의 입주를 허락하여 조금 촌락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도감을 두어 주민을 관리하게 하였다.

 

51. 이범진을 농상공부대신에 임명

 

농상공부대신금가진을 면직하고 리범진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52. 장박을 법부서리에 임명

 

법무협판장박을 법부서리로 임명하였다.

장박은 북관 사람으로, 금학우의 스승이다. 그는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가 장씨 집안으로 버렸으므로 그의 성을 장씨로 하였다. 그는 장성하여 많은 서적을 탐독하였고, 특히 서양학에 조예가 깊어 시속배들의 추대를 받았으므로 주사직에서 일약 협판으로 임명되었다.

 

고종 32년 을미(1895년) ③

 

1. 을미사변의 전말

 

20일, 일본 공사삼포오루가 대궐을 침범하여 왕후 민씨가 시해되고, 궁내부대신리경직과 대대장홍계훈이 적에게 저항하다가 사망하였다.

왕후 민씨는 오랫동안 배척을 당하여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정상형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고종의 부권을 꾀하고 자신이 전일처럼 거중용사를 하려고 하였으나, 박영효는 민후를 미워하여 지난 5월의 음모를 갖게 되었다.

삼포오루는 박영효가 민후시해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을 자주 듣고 있었다. 이때 민후는 어느 정도 복권이 되어 밤마다 궁중에서 연극을 관람하며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 소촌실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매우 영리하였으므로 민후가 사랑하여 항시 대궐로 불러들였다. 삼포오루는 그에게 일병을 따라 배우들과 함께 연극을 보게 하고민후의 초상 수십 개를 간직하게 하였다가 하루 속히 거사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모를 시해하면 죄가 발각될까 싶어 대원군과 내통한 후 한밤중에 공덕리로 가서, 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인들과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민후의 초상을 하나씩 들고, 소촌실의 딸은 그들을 인도하여 곤녕전에 도착하였다.

궁중에는 횃불이 훤하게 밝아 개미도 다 볼 수 있었다. 그는 리경직을 만나 민후가 있는 곳을 물었으나 이경직은 모른다고 말한 후 소매를 들어 그들의 시선을 차단하므로, 그들은 그의 왼쪽 팔과 오른쪽 팔을 잘라 죽였다.

이때 민후는 벽에 걸려 있는 옷 뒤로 숨어 있었으나 그들은 민후의 머리를 잡아 끌어내었다. 소촌실의 딸은 민후를 보고 확인하였다. 민후는 연달아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일병들은 민후를 칼로 내리쳐 그 시신을 검은 두루마기에 싸가지고 록산 밑 수목 사이로 가서,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운 후 그 타다 남은 유해 몇 조각을 주워 땅에 불을 지르고 매장하였다. 민후는 20년 동안 정치를 간섭하면서 나라를 망치게 하여 천고에 없는 변을 당한 것이다.

일병들이 대궐로 들어왔을 때 홍계훈은 그들을 꾸짖으며 병사를 부른 칙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아서 그는 총탄을 맞고 쓰러져, 그를 집으로 옮긴 지 수일 만에 사망하였다. 그는 졸병 출신으로 높은 관직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성품은 청렴 결백하고 몸가짐을 근신하게 하여, 사대부를 대할 때 실례를 범하지 않아 당시에 간사한 무리들과는 행실이 같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항시 그를 경계할 때 나라에 충성을 다하라고 하였다.

정병하는 19일, 대궐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민후는 밖에서 어떤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고 다른 곳으로 피하기 위해 정병하에게 어느 곳이 좋겠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일병이 비록 입궐하더라도 그것은 옥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민후는 그를 자기의 사인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고 있다가 그 화를 당하였다.

이 변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남원에 사는 어떤 사람이 금승집의 집에 와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 어떤 사람이 급히 와서 김승집과 무슨 말을 속삭이고 갔다. 김승집은 매우 불안해 하였다. 남원 사람은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함부로 물어 볼 수도 없었는데, 그 다음날 참변이 발생한 것이다.

 

2. 삼포오루가 외부로 보낸 조회와 김윤식의 회답

 

이때 삼포오루는 외부로 다음과 같은 조회를 보냈다.

“어제 병사들이 저지른 참변은 외간에서 전하기를, 이달 초8일(음력 20일) 새벽 훈련대가 대궐로 들어가 자기들의 원망을 호소하려고 할 때 편복을 입은 일본인 몇 사람이 그들과 함께 들어가 폭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본 공사는 비록 이 말이 와전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 일이 매우 긴요한 사건이므로 그만둘 수 없으니, 귀 대신께서 조금 번거롭더라도 그 사건을 조사하여 회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금윤식은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우리 군대가 당일 호소하러 갈 때, 만일 시위대와 서로 만날 경우 자세히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면 충돌하기 쉽기 때문에 외국의 복장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병기를 서로 겨룰 우려를 없애기 위한 것이며,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그럼 이것으로 회답을 드립니다.”

이때 훈련대를 감원하여 군인들의 마음이 불안하였으므로 삼포오루는 이것을 이유로 자신의 탈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선언하기를, 훈련대가 일병과 란당을 조직하였다고 하고 또 자기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하므로, 금윤식도 대궐로 들어간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훈련대가 일본인으로 가장한 것이라는 대답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일본인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을 두둔하여 하는 말이었다.

 

3. 이재면 등을 대신에 임명

 

리재면은 궁내부대신, 조희연은 군부대신, 권형진은 경무사로 임명되었다. 모두 이날(초8일) 임명되었다.

 

4. 민비를 폐한다는 조서

 

22일,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폐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짐(짐)이 림어한 지 32년이 지나도록 치화가 미흡한 것은 왕후 민씨가 친척을 끌어들여 그들을 좌우에 두어 짐의 이목을 가리고 인명을 박해하였으며, 정령을 탁란케 하고 관직을 매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학대는 하늘까지 치솟아 사방에서 도둑이 일어나고 종사는 위태롭게 기울어 조석을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짐이 그의 극악무도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벌을 내리지 못한 것은 짐의 불명한 이유뿐만 아니라 그의 일당이 두려워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짐은 지난해 12월, 태묘에 고하여 종척이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혹 뉘우치기를 바란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씨는 구악을 뉘우치지 않고 많은 소인들을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짐이 접견하려고 하는 대신들을 모두 저지하였으며, 짐의 명령을 위장하여 병사들을 해산하고 급기야는 큰 변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변란이 일어났을 때 짐을 피하여 자신 혼자만 피신하였습니다. 이것은 지난 임오군란을 답습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그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왕후의 작덕에 맞지 않을 뿐이겠습니까? 그의 죄악은 실로 천지에 가득하여 다시는 종묘를 계승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왕가의 고사에 의하여 그를 서인으로 폐하는 바입니다.”

이때 삼포오루는 자신이 이미 큰 죄악을 저질렀으므로 여러 나라들이 이것을 구실삼아 자신의 죄를 성토할까 싶어, 고종을 협박하여 폐후조서를 내리게 하고 또 유언비어를 조성하여 민후가 난을 피하여 밖에 있다고 하므로 민간에서는 민후가 임오군란 때처럼 충주에 있다는 소문이 전해졌으며, 어떤 사람들은 진주의 옥천암에 있다고도 하였다.

이 조서가 비록 고종의 의견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때 사람들은 실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5. 심상훈의 귀향

 

탁지부대신침상훈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므로, 그 후 어윤중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폐후조서를 내릴 때 금홍집, 리재면, 금윤식, 박정양, 조희연, 서광범, 정병하, 심상훈 등은 정부의 장관으로서 칙령을 받들어 당연히 서명을 해야 함에도 그중 심상훈은 서명하지 않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벼슬을 할 수 없다 하고 충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박정양은 이날 궁중에 있지 않아 그도 서명하지 않았다

외부대신김윤식은 각국 공관으로 조회하면서 그 조서를 적어 보냈는데, 그는 이어 “우리 대군주가 이 조서를 내는 것은 종사와 생민을 위하여 대의로써 결단을 내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미국 공사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은 회답하기를, “이 조서는 대군주가 친히 내린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고, 러시아 공사웨베르(Karl Waeber)는, “이 조서는 귀 대군주가 친히 내린 것이 아니므로 귀 대신은 불가불 그 이유를 알려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6. 서상우의 폐후조서 작성 거부

 

폐후 사유를 태묘에 고하기 위해 전참판서상우에게 조서를 제술해 올리라고 하였으나 그는 강력히 저항하며 “내 팔은 끊어도 이 글은 초안할 수 없다”고 하므로 리승오에게 제술을 명하였다.

 

7. 대원군의 고유문

 

대원군이 다음과 같이 고유문을 지어 중외에 포고하였다.

“흥선 대원군이 포고하는 것은, 근일 간당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군인들의 마음은 날로 변하고 있으므로 대신과 소민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조석을 보존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일 19일 밤, 나는 대내의 밀지를 받들어 병사를 골라 대궐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상의 몸을 보호하고 궁금을 숙정하였으며, 종사를 편안케 하였습니다. 아, 변란이 일어난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국사를 날로 그르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10년 사이에 네 차례나 병란이 일어났으니 그 참상을 어찌 차마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상은 크게 잘못을 뉘우쳐 종사의 대계를 주장하고 사은을 단절하였습니다.

특히 비상한 처분을 내리신 것은 단연 대공지정한 마음으로 용단을 발휘하신 성덕에서 나온 것이니 누가 만만세를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위로 종사를 보존하고 아래로 서민을 편안하게 하여 우리 500년간의 위대한 업적이 실추하지 않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들은 말에 의하면, 일부 우민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군중을 현혹시키며 혹 명분을 내세워 불궤한 일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은 모두 화란을 좋아하여 스스로 사지에 빠져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지방관들은 이런 사리를 가지고 일일이 효유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리씨의 종사를 위한 마음을 가슴속에 새겨 간사한 유언비어에 선동되지 말고, 종전에 백성들에게 학정을 베풀었던 일은 일체 개혁하여 새로운 정치로서 제각기 생업을 편하게 종사할 수 있도록 하시어 모두가 태평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고론문을 내는 것도 금홍집 등이 대원군에게 죄를 미루려고 한 것이다.

 

8. 왕태자의 직위 사양

 

왕태자가 상소하여 직위를 사양하였다.

 

9. 민비에게 빈호 하사

 

서인으로 폐한 민씨에게 빈호를 하사하였다.

 

10. 이건창 등의 연명상소

 

전참판리건창이 이달 30일, 전참판홍승헌, 정원하 등과 련명토역소를 다음과 같이 올렸다.

“아! 우리 성상의 사위 초에 신정왕후는 친히 령족을 간택하여 원비를 구하신 후 우리 성상을 도와 종묘를 계승하고, 만성을 아들처럼 여긴 지 지금 30년이 지나도록 하늘의 복을 받으며 원자를 낳으시어 우리의 위대한 기반을 닦아 놓으시므로 아름다운 일과 우려된 일을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온갖 변란을 겪어 이미 모든 고초를 다 맛보았습니다만 작년 이래 이웃 나라들이 서로 잘못했다 하며 싸움이 생기고, 역신의 음모는 국내에 만연하여, 비록 위엄과 용단이 있는 성상이라도 지금까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곤전에 어찌 지적할 만한 과실이 있었겠습니까?

설혹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성상과 지체가 같은데다가 동궁의 효성을 생각하더라도 어찌 차마 서인으로 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거행한 일들은 결코 성상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이런 일은 천지를 다 누벼 보아도 보지 못한 일이며, 만고를 거슬러 보아도 듣지 못한 일입니다. 길을 가는 행인들도 서로 그들의 음모를 전하여 모든 사람의 입이 흉흉하기만 합니다. 20일에 일어난 참변은 적이 이미 시해하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지만, 단 그것이 적이 한 일인지 우리 나라 사람의 소행인지는 아직 판명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례기>에 이르기를, 「신시기군 재관자 살무사」“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하면 관직에 있는 사람은 그를 살해하여 용서하지 않는다.” 편자주 라고 하였고, 또 「거군부지수 불여공천하, 불반병이투」“군부의 원수와는 하늘밑에 함께 살 수 없으므로 병사를 되돌려보내지 않고 싸운다.” 편자주 라고 하였습니다. <춘추>의 예를 들면 소군왕세자의 이칭. 편자주 도 군상과 같다고 하였는데, 저 각부의 대신 이하 정신들이 어찌 이 뜻을 모르고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찌 그들의 음모를 은폐하여, 열흘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도록 그렇게 무사한 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혹 그들 중 변란을 요행으로 생각하여 성상을 위협하고 서민을 억압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고식적인 말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복수를 늦출지언정, 그렇게 격렬한 변란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설사 그 변란이 다시 격렬해지더라도 어찌 지난 20일 같은 변란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20일의 변란보다 더 격해진다면 그것은 망하는 길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란이 격렬하기만 하고 망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격렬해져서 망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강력한 이웃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비록 우리 조정의 대신과는 다르겠지만 외국의 신하도 또한 신하인 것만은 틀림없는데, 그들이 과연 우리 군상을 침범할 경우 우리의 국법으로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훈련병의 경우에도 그들이 비록 흉측한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조선의 인종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두 쪽으로 잘라 죽일 일이 있으면 두 쪽으로 잘라 죽이고, 갈아 죽일 일이 있으면 갈아 죽여야 합니다. 지금 모든 백성들의 여론은 물이 끓듯 비등하고 많은 국가들의 공론은 사방으로 퍼지고 있는데, 그들이 어찌 다시 격렬한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역적 노릇을 하는 사람이 병사일 경우는 그 병사를 죽이고, 조정에 있는 신하일 경우는 그 신하를 처벌하여야 하며, 그 역적이 외국인이라면 그 외국인을 죽여야 합니다.

필부필부의 죽음에 있어서도 자신이 천명으로 죽지 못하면 원수를 갚지 못한 원한이 있는 것인데, 어찌 국모가 시해되었는데도 그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그 변란이 발생한 지 지금 10일이 지났습니다만 위로 저궁왕세자의 이칭. 편자주 으로부터 아래로는 관원과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통곡 한번 하자는 말과, 상복 한번 입자는 말 한마디가 없으니 천리와 인정에 있어서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성상께서는 속히 명을 내리시어 그 폐후칙령을 다시 거두시고 상례를 갖추어 애도를 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친히 그 범인들을 국문하여 복수를 하시고, 팔역의 관원과 백성들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그 철천지통을 풀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 신 등이 대대로 봉록을 받고 후한 은덕을 입은 사람으로서, 이런 변란을 당하여 의당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고 궁벽한 시골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상도 하지 못한 채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해도 끝이 없습니다.

저희들이 30년 동안 섬긴 신하로서 모든 말은 여기에서 마치겠으니 부디 성상께서 량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간절한 마음 금할 길 없어 이만 그치옵니다.”

이 상소를 올렸지만 보고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최익현, 윤태흥, 리남규 등도 모두 상소를 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 상소는 보지 못하였으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못하였다.

 

11. 상궁 엄씨의 입궁

 

전상관 엄씨를 불러 계비로 입궁시켰다. 민후가 생존해 있을 때는 고종이 두려워하여 감히 그와 만나지 못하였다. 10년 전 고종은 우연히 엄씨와 정을 맺었는데, 이때 민후는 크게 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고종의 간곡한 만류로 목숨을 부지하여 밖으로 쫓김을 당하였다가, 이때 그를 다시 부른 것이다.

민후의 시해사건이 발생한 지 겨우 5일째 되던 날이었다. 고종은 이와 같이 중심이 없었으므로 도성 사람들은 모두 한탄하였다.

엄씨는 얼굴이 민후와 같고 권략도 그와 같았으므로 입궁한 후 크게 총애를 받았다. 그는 국정을 간섭하고 뇌물을 좋아하여 민후가 있을 때와 동일하였다.

 

12. 궁내부의 국혼간택 발의

 

궁내부로 하여금 국혼간택에 관한 절차를 발의하게 하여, 곤의왕비. 편자주 를 하루도 비우지 않게 하였다.

 

13. 김가진을 주일공사로 임명

 

금가진을 주일공사로 임명하였다. 고영희의 대직으로 임명한 것이다.

 

14. 납세기한의 제정

 

9월에 세전과 호전의 납세기한을 2회로 나누어, 세전은 그해 10월과 이듬해 1월에 납부하고, 호전은 그해 3월과 9월에 납부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부에 세무시찰관, 각군에는 세무주사를 두어, 시찰관은 서울에서 파견하고 주사는 지방관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간사한 사람들은 군수에게 사적인 비호를 요청하므로 종종 타도 사람을 추천하여 경부로 허위보고를 하였다. 이때 어느 도를 막론하고 서울 사람이 가장 많았다.

 

15. 진위대 설치

 

평양과 전주에 진위대를 설치하였다.

 

16. 정삭 개정

 

조서에 “삼통천통, 지통, 인통. 편자주 을 서로 사용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 타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므로 지금부터 정삭(정월)을 개정하여, 금년 을미 11월 17일을 개국 505년 1월 1일로 한다”고 하였다.

 

17. 일본대사정상형의 내한

 

일본대사정상형이 내한하였다. 그는 갑신정변 때 우리 나라에 와서 많은 요구를 하였다. 그가 지금 다시 온 것은 「삼포오루 사건」을 미봉하기 위한 것이다.

 

18. 종가의 타종법 개정

 

종가의 당종법을 개정하여 오정과 자정에 종을 치도록 하였다.

옛날에는 오정에 종을 치지 않고 황혼에 치는 종을 인정종, 한밤중에 치는 종은 파루종이라고 하였으나 이때 모두 개정하였다.

 

19. 함남지방의 려역 대유행

 

함경남도 10여 군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7월부터 이달까지 2,700여 명이 사망하였고, 호남의 전주, 고부 등지에서도 500여 명이 사망하였으며, 관서의 강계에는 3천여 명이 사망하였다. 이것은 모두 호렬자이다.

 

20. 민종열, 조원식의 임지교체

 

민종렬은 라주에서 담양으로, 조원식은 안의에서 상주로 전임 발령되었다. 동비를 방어한 공로이다.

이때 지식인들은 그들이 사직하려고 하였으나 그 두 사람이 다 같이 임명되었다고 하였다.

 

21. 일본정부의 삼포오루 두둔

 

10월, 일본은 공사삼포오루를 소환하였다.

일본 재판결정서에 의하떤 삼포오루 등의 범죄는 별로 확증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모두 방면한다고 하였고, 또 각 신문에서는 대원군이 입궐하여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삼포오루는 왕명을 받들고 들어가 그들을 구제하였으며 시해사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기재되었다. 그것은 모두 삼포오루를 두둔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22. 민후의 복위

 

초10일, 왕후 민씨의 위호를 복권하고 법부로 하여금 그 범인들을 체포하게 하여 군부대신조희연과 경무사권형진이 범죄로 인하여 면직되었다.

그리고 8월 이후 외국 공사들이 역신을 신문하여 형법을 바로 세우라고 간청하자 금홍집 등은 왕후 민씨가 도주했다고 하면서 날짜만 보내다가, 점차 그 정황이 드러남에 따라 더 은폐하지 못하고 외국 공사들과 어전에서 칙령을 초안하여 민후를 복위하고, 역신을 성토하는 칙령을 반포하여 조회연 등을 면직시켰다. 이때 리두황, 우범선 등이 모두 도주하였다.

 

23. 민후의 사망 인정 칙명

 

“지난날 변란이 일어났을 때 왕후의 소재를 모르고 있었으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승하한 증거가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8월 20일 상오 5시에서 7시 사이에 곤녕각에서 승하하였으므로 그 사실을 중외에 포고합니다.”

 

24. 국휼조서 반포와 민후 장례

 

15일, 국휼조서를 반포하고 백관들은 경유문에서 통곡하였으며, 태안전에는 빈전, 문경전에는 혼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6일에는 습을 하고, 17일에는 소렴, 19일에는 대렴, 22일에는 성복을 하였다.

왕후를 이미 복위시켜 빈, 렴 등의 의식은 갖추었지만 옥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운각 서쪽 산봉우리 밑에 있는 록산 숲속으로 가서 그곳 땅을 파 보니 회사에 촌골이 섞여 있어 부위를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이때 고양군에 어느 로관이 있었는데, 그의 나이는 70여 세로 상사에 익숙하여 썩은 뼈도 잘 구분한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에 많은 관리들은 그를 불러 그의 말만 따라 옥골을 칠성판에 놓고 구분이 안된 곳은 재(회)를 넣어 보충하였다. 그리고 비단으로 된 어복 수십 벌로 여러 번 감아 재궁에 넣었다. 이것은 성복일을 대비하여 만든 것이며 그 부위를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서두른 지 3일 만에 겨우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정만조에게 들었다. 정만조는 궁내관으로서 그 일에 참여하여 목격하였다.

종전에는 국휼이 있을 때 언제나 성복기간에 백립횐 베로 싸개를 한 갓. 지난날, 대상 후 담제 때까지 상제가 쓰거나, 국상 때 일반 백성이 썼음. 편자주 을 쓰도록 재촉하여 백립 값이 매우 올랐으므로 이때는 곡반에 참석한 사람만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민들은 백지로 칠립옻칠을 한 갓. 편자주 을 싸가지고 다녔다. 그것은 머리만 가린 것이었으나 한 달도 안돼 모두 백립을 쓰고 다니라고 하므로, 이때 민간에서는 서로 입을 삐죽거리며 “나에게 무슨 은혜가 있었다고 다시 나에게 백립을 쓰게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것은 임오군난 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간사한 자들은 백지를 손바닥만하게 접어 삿갓 위에다 붙이고, 고루하고 둔한 사람들은 버젓이 칠립을 쓰고 다녔으나 이런 모습을 본 관리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신기선이 선유사로 임명된 후에는 령을 게시하여 엄하게 금하였지만 사람들은 영을 따르지 않았고, 정유년(1897) 봄에는 칠립을 쓴 사람들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것은 호남과 영남뿐 아니라 전국이 모두 그러하였다고 한다.

 

25. 민후의 시호와 능호

 

대행왕후의 시호는 순경, 전호는 덕성, 릉호는 숙릉이라고 하고, 인산은 숭릉현종과 명성왕후의 릉호. 편자주 오른쪽 산으로 정하였다.

 

고종 32년 을미(1895년) ④

 

1. 서광범, 이도재 등의 중용

 

서광범을 주미공사, 리도재를 학부대신, 조민희를 전주관찰사로 임명하였다.

 

2. 임최수, 이도철 등을 처형

 

전시종림최수와 전참령리도철 등이 교지를 위조하여 내각의 여러 신하들을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그 음모가 누설되어 처형되었다.

 

3. 문석봉의 체포

 

금해 사람인 문석봉이 호서의 보은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적도를 성토하므로 인근 고을의 유생들이 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로 모여들었으나, 그 후 얼마 안되어 문석봉은 공주부에서 체포되었다.

 

4. 천둥

 

26일, 오시에 남쪽 방향에서 큰 뇌성이 울리고, 27일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는 말(두)처럼 큰 불덩어리가 서쪽 방향으로 떨어졌다.

 

5. 이준용의 일본유학

 

11월, 리준용에게 일본 유학을 명하였다.

 

6. 민후 시해 관련자 처형

 

지난 8월의 역신을 다시 치죄하여 리주회, 윤석우, 박선 등을 처형하였다. 이주회가 군부협판으로 있고 윤석우가 훈련대의 참위로 있을 때 공모한 근거가 있었다.

그리고 박선은 본래 부산 사람으로, 그의 나이 약관에 일어를 잘하여 일본인의 고용원으로 있었다. 이때 금홍집은 역적을 엄하게 성토하지 못하여 물의를 빚을까 염려하였으므로, 대신들을 선별하지 않고, 그 3명만 옥사에 연루하여 애매하게 책임만 모면하였다.

 

7. 연호제정

 

연호를 처음으로 세워서 건양원년으로 하였다. 1세 1원을 제정하여 만세가 되도록 삼가 계승하게 하였다.

 

8. 장박의 청렴

 

유길준을 내부대신, 장박을 법무대신, 정병하를 농상공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협판으로서 승진도 되고 좌천도 된 것이다.

그중 장박의 성품은 강직하여 법도를 따라 동요되지 않았으며 더욱 장리를 미워하여 그들을 의법처리하였다.

그가 법부서리로 있을 때 호서 사람들이 령상침순택을 제소하였다. 심순택은 전일에 충청감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3만냥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장박은 그 소상을 받은 즉시 소장 끝에다가 「전충청감사침순택 착래사」라고 썼다. 심순택은 아무 대책이 없어 그날 3만냥을 내놓으므로 서울 사람들은 숙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권력층도 혀를 내두르며 서로 경계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종이 비호하고 있는 사람들을 더욱 통렬히 치죄하였고, 자기 친구 중에서도 관직을 청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정색을 하면서 “내가 대신의 죄를 다스리는 것은 인재를 구하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인데, 그대들이 기용할 수 있는 인재라면 어찌 그대들이 청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는가? 그대들 중 관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나의 돈을 갖고 싶어할 것이니 내 돈을 그대들이 다 가져가게”라고 하며 돈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관직 한자리도 그들에게 주지 않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그를 대신의 기풍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윤중도 오랫동안 재정을 맡고 있으면서 고종이 혹 사적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있을 때는 즉시 그 청을 거절하였으므로 이때부터 두 사람은 고종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유길준도 성품이 강직하여 자신이 받은 뇌물이 드물고 또 받았더라도 사적으로 챙기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은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남의 식생활을 도와준 곳이 10여 호나 되었다.

 

9. 고종의 단발과 단발령 시행

 

15일, 고종이 단발한 후 중외의 관료와 백성들에게 명을 내려 일체 단발하도록 하였다. 두루마기 착용을 선포한 이후 단발한다는 소문이 점차 퍼지더니, 10월 중 일본 공사가 고종을 위협하여 일찍 단발하기를 재촉하므로 고종은 인산을 마친 후에 단발하겠다고 하였다.

이때 유길준, 조희연 등이 일본인을 인도하여 궁궐 주위에 대포를 묻고 단발을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살해하겠다고 하자, 고종은 긴 탄식을 하며 조병하를 돌아보고 “당신이 내 머리를 깎으시오”라고 하므로 조병하는 가위를 들고 고종의 머리를 깎고, 유길준은 태자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단발령이 내린 후에는 곡성이 진동하였다. 사람마다 분이 나 죽으려는 기색을 보이며 곧 무슨 변이라도 일으킬 것 같아 일본인들은 병대를 동원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경무사허진은 순검들과 함께 가위를 들고 길을 막고 있다가 사람만 만나면 달려들어 머러를 깎아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인가를 침범하여 남자만 보면 마구 머리를 깎아 버리므로 깊이 숨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머리를 깎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 서울에 온 시골 사람들은 문밖을 나섰다가 상투를 잘리면 모두 그 상투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통곡을 하며 성을 빠져 나갔다. 머리를 깎인 사람들은 모두 깨끗이 깎이지 않았는데, 단 상투를 잘린 사람은 긴 머리가 드리워져 그 모습이 장발승과 같았다. 오직 부녀자들과 아이들만 머리를 깎이지 않았다.

이때 학부대신리도재는 년호개정과 단발령에 관한 상소를 한 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상소문은 다음과 같다.

“운운… 요즈음 내각에서 두 개의 제안을 제출하여 대신들에게 서명을 요구한 바 있습니다. 하나는 연호개정에 관한 것이며, 하나는 단발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조용히 생각해 보니 주상을 존경하는 사람은 그 명예를 중시하지 않고 실상을 중시한 것이며, 백성을 교화하는 사람은 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는 내란이 빈번하고 국세가 위태로워 상하가 한마음으로 실무에 치중해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지금 년호를 개정한 것만 해도 이것은 허명을 치장한 것입니다.

앞으로 수년이 지나면 나라가 부강하여 동양을 호시탐탐 노려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한 례만 살피고 문서를 응용하는 것에 불과한 일인데 오늘 왜 이것을 급하게 서두르십니까?

그리고 단발령에 있어서도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련한 신의 의견을 말씀드리면, 단군과 기자 이후로 편발하는 풍속이 상투를 트는 풍속으로 바뀌어 모발 사랑하기를 귀중한 물건 아끼듯 하였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으라고 하면 4천년 동안 굳었던 습관이 바뀌기 어려울 것이며, 억조창생의 흉흉한 여론을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어찌 난리를 조성하지나 않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옛날 청나라 사람들이 북경을 들어갔을 때 그들은 무력으로 북경 사람들의 관을 부수었으므로 그들의 분노가 300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아, 발비 한 사람이 크게 외치면 사방에서 호응하였고 이로 인하여 수십 년 동안 병력을 투입한 끝에 이제 겨우 안정되었으니 이것을 거울삼아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신이 어찌 한줌에 쥘 수 있는 단발을 아끼어 국가를 위하지 않겠습니까? 누차 생각해 보아도 그 이익은 보이지 않고 그 해만 보이기 때문에 감히 양심을 속여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금병시도 상소하여 극간하였으나 고종이 그 상소를 보지 못한 것은 유길준이 제재를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10. 친위대 증설

 

친위대 제3대대를 증설하였다.

 

11. 체두관의 파견과 의병의 봉기

 

각부로 체두관을 파견하여 바로 당일에 단발을 독촉하였다. 100년 이후 국민들은 처음으로 백회머리의 중앙부분. 편자주 를 깎았는데, 이를 두고 모두 두풍을 없앤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운세의 변화이다.

이때 수령들도 백회 부분을 넓게 깎고 양쪽 모발로 머리를 둘러 상투가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모두 깎고 시국을 따르기도 하였지만, 아전과 백성들은 단발령을 거부하여 누차 머리 깎는 기한을 연기하면서 무슨 변란이 발생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때 공주관찰사리종원이 금강을 차단하고 행인의 머리를 마구 깎으므로 길을 다니는 행인의 발길이 거의 끊기었다. 이때부터 국내는 소란하기 시작하여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12. 유인석 등의 의병 기병

 

강원도 의병 서상설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류린석은 경기, 주용규는 호서, 권세연은 안동, 로응규와 정한용 등은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근이 호응하자 유길준 등은 경군을 파견하여 그들을 추격하였다.

유인석은 고 지평류중교의 종질이며 리항로의 문인이었다. 그는 유학으로 저명하고 강개한 기질이 있었다.

그리고 욕동강 좌우도의 수십 군이 권세연과 호응하여, 수령들은 사람들의 머리를 깎다가 그들에게 종종 살해되었다. 대구관찰사리중하는 경내를 효유하였으나 그는 본래 민심을 얻은 데다가 이때 강제 단발을 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용서해 주었다. 이중하는 중요한 성을 고수하며 경군의 후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13. 백정의 면천

 

12월, 백정들에게 면천을 허락해 주자 그들은 칠립을 쓰고 다녔다. 옛날 풍속에 영남과 호남의 백정들은 감히 칠립을 쓰지 않고 평량자만 썼으나 내부에서 누차 칙령을 내려 그들도 평민과 같이 칠립을 쓰게 하였다.

그것은 천민들의 마음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들은 감히 칠립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강력히 요구한 후에 이행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칠립을 쓰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14. 조상학의 기병

 

전교리조상학이 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조상학은 의주 사람으로, 그는 압록강 너머로 사람을 보내 청나라의 성원을 요청했다고 말하였다.

 

15. 러시아 공사스페이어의 고종 알현

 

러시아의 신임공사스페이어(Alexei de Spryer)가 전공사웨베르와 함께 고종을 알현하였다.

 

16. 김복한 등의 기병

 

전승지리설과 금복한 등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관찰사리승우는 단발령이 내려졌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관망만 하고 있었고, 영장홍건은 교체되었으나 그는 귀향하지 않고 격분한 민심을 이용하여 이설과 함께 이승우를 위협한 후 단발령의 거부를 꾀하여 참서관을 축출하고 경무관을 수감하였으며, 관할권 내에 있는 13개 읍의 의병을 모집하여 홍주성을 수비하였다.

관북과 해서지방에 의병이 봉기하였다.

 

17. 주일공사김가진의 면직

 

주일공사금가진이 면직되었다.

 

18. 호남에 3개 군을 설치

 

호남의 해중도서인 완도, 돌산, 지도 등 3개의 도서를 군으로 승격하여 여러 도서를 관할하게 하였다. 완도는 소속도가 48개, 소속서는 52개이며, 돌산의 소속도는 52개, 소속서는 17개이고, 지도의 소속도는 98개, 소속서는 19개이다.

 

19. 아관파천

 

27일, 임금이 궁을 나왔다. 리범진, 리윤용 등이 고종을 러시아공관으로 옮기게 하고 금홍집, 정병하 등을 잡아 살해하자 유길준, 장박, 조희연 등은 도주하였다.

이 일이 발생하기 전에 고종은 헌정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하여 이범진, 이윤용 등과 함께 러시아의 힘을 빌려 김홍집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도리어 우리 나라를 차지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일본이 그들보다 먼저 조선을 차지하고 있음을 항시 불만스럽게 여기며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8월 이후 이범진 등이 러시아 공관에서 피신을 하고 있으면서 그들에게 후한 뇌물을 주며, 만일 러시아의 협조를 얻어 정국을 뒤바꾸어 놓으면 우리 나라 관료와 백성들은 일본을 섬기듯 러시아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자, 러시아 공사는 매우 기뻐하여 그의 청을 수락하고 병력을 파견하여 인천으로부터 서울로 진주하였다.

이때 이범진 등은 은전 4만냥을 엄상궁에게 바쳐 고종에게 주야로 변란이 다시 일어난다고 겁을 주게 하자 그는 또 눈물을 흘리며 오늘 저녁에 변란이 일어날 것 같으니 밖으로 피신을 하고 호소하였다. 이에 고종은 깜짝 놀라 엄상궁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범진 등은 교자 두 개를 마련하여 고종과 태자를 싣고 러시아공관으로 직행하였다.

그 후 고종은 경무관에게 명하여 김홍집 등을 처형하게 하였다. 이때 김홍집은 직방또는 조방. 조신들이 조회의 시작을 기다리는 곳. 궁문의 옆에 있음. 편자주 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도주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탄식하기를, “죽으면 죽었지 어찌 박영효처럼 역적이란 이름을 들을 수야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조병하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고 조병하도 자신이 죽을 줄 알고 흥분한 어조로 “우리는 대신인데 어찌 함부로 죽일 수 있겠는가? 재판을 받은 후에 죽게 해주시오”하고 말하자, 김홍집은 그를 돌아보며 “어찌 그리 말이 많습니까? 나는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을 살해한 후 그 시체를 길거리에 널어놓자 도성 사람들은 단발령을 주장한 김홍집을 원망하며 돌과 기와조각을 그 시체에 던져 살이 터지고 찢어졌으며, 그 시체를 베어 그대로 먹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리고 조희연, 유길준, 장박, 우범선, 리두황, 리범래, 리진호 등은 모두 일본공사관으로 도피하여, 군인들은 그들을 체포하지 못하고 수일 동안 도성에서 큰 소란을 피웠다.

김홍집이 비록 일본과 화합할 것을 주장하여 청의에는 배치되었지만 그는 국가를 위해 심력을 다하였고 재간도 다른 이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그가 살해된 후 매우 애석하다는 여론이 있었다. 그의 부인 □씨도 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리고 젖을 먹던 어린 아들은 강보에 싸인 채 죽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가련하게 생각하였다.

김홍집은 병자년(1876)에 일병들이 침략할 때 흥양현감으로 있으면서 굶주린 백성 약 1만명을 구제하였다. 또 그가 다니던 길 옆에는 옛 충신의 정려가 있었는데, 그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므로 그의 노복들은 그가 모르게 말에서 내린 횟수를 기록해 놓았다. 그는 아무리 비가 오는 어두운 밤이라도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였던 것이다. 그의 행동은 이와 같이 근신하였던 것이다.

이범진 등이 이런 일을 한 것은 충의가 지극해서 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러시아에게 후하고 일본에게 박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정권을 다툰 것 뿐이었다.

이때 세상에서는 금윤식과 어윤중을 청당, 김홍집과 유길준은 왜당, 이범진과 이윤용은 아러당으로 지목하였고, 이 3당이 갈아들면서 나라꼴은 점점 말이 아니게 되었다. 갑오경장과 을미사변 때는 일본인이 우리 국권을 장악하다가 지금은 러시아인이 집권하였고, 임인년(1904) 개전 이후는 일본이 다시 마음대로 주물렀다.

 

20. 김홍집의 사면

 

대사령을 반포하여 잘못 죄를 받은 금홍집 등의 죄명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21. 단발령 폐지, 의복제도의 자유

 

단발령을 폐지하고, 의제는 백성들이 편리하게 입도록 하였다.

 

22. 춘천, 원주 의병들에게 해산 종용

 

토목국장남궁억과 내무협판류세남을 춘천, 원주지방으로 파견하여 의병들의 귀향을 선유하였다.

 

23. 관청과 아전들의 세금포탈 탕감 선포

 

갑오년(1894) 6월 이전 등기에 기재된 관장과 리포를 모두 탕감하였다. 공전이 어그러지고 납입이 안되는 것은 모두 관청과 아전들이 중간에서 가로챈 때문이고 민간에서는 1문도 미납된 것이 없었다. 때문에 이와 같은 탕포령을 발표하였으나 백성들은 이를 더욱 불평하였다.

 

24. 어윤중의 피살

 

어윤중이 룡인에서 피살되었다. 그는 금홍집이 살해된 것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벌을 받을까 싶어 부인의 교자를 타고 동대문 밖으로 나갔다. 잠시 자신의 고향인 보은의 향리로 피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용인 어사리의 어느 주점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고 있던 중 군민 정원로, 안관현 등이 그와 오랜 원한이 있으므로, 그가 도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망명인으로 인식하여 공분을 이용하여 원수를 갚으려고 그를 역적으로 지목하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그의 뒤를 따라가 그를 몽둥이로 쳐서 살해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주점을 「성참주점」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어윤중이 본래 점괘를 잘 보았는데 이때 그가 점을 쳐보니 동쪽으로 나가면 길하다는 점괘가 나와, 그가 동쪽으로 나갔다가 이런 참변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남이 원망을 하더라도 목적을 과감하게 달성하였으므로 과오도 많았지만 공무에 열중하여 시속배들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는 김홍집과 함께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인재로 불리웠었고, 그가 살해된 후에는 개화에 앞장설 사람이 없음을 모두 한탄하였다.

갑오년(1894) 여름, 곤전이 탁지부에 새우젓을 올리라고 분부하자 그는 중국 사신에게 “새우젓은 이미 많이 먹었는데 아직도 새우젓을 찾고 있습니까?”라고 한 후 청나라의 서태후를 꾸짖으며 “그 로비가 반드시 청나라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은밀히 곤전을 가리켜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하루는 고종이 조희연에게 매우 화를 내며 그를 군부직에서 제외하려고 하자 모든 각료들은 그는 아무 죄가 없다고 하였다. 고종은 더욱 화를 내어 “짐이 재신 하나를 물리치지 못하니 어찌 임금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어보를 집어던지며 “짐은 임금이 아니니 경들이 이것을 가지고 가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대신들은 벌벌 떨며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윤중은 천천히 일어나 말하기를, “성인의 말에 임금은 신하를 례로써 대하고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써 섬기라고 하였는데, 폐하께서 신 등을 이렇게 대하시면 신들은 어떻게 폐하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우레와 같은 위엄을 거두시고 공의를 펼 수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후 법관들이, 정원로 등이 대신인 어윤중을 함부로 살해하였으니 그들의 죄는 교형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들에게 사형을 감면하고 유배를 시키라는 특지를 내렸다. 이것은 어윤중이 고종의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이때 금윤식은 성밖으로 나가 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고종은 아무 언급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어윤중도 도주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 민간에서는 유언비어가 무성하였는데, 그것은 민영익이 러시아로 가서 원병을 청했다고 하고 혹은 민영준이 원병을 청했다고도 하였다. 그 실상은 리범진이 은밀히 러시아와 연락을 취하면서 러시아가 장차 병력을 동원할 것이라고 호언하였기 때문에 일본인이 차마 발병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때 러시아 또한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며 정사는 모두 이범진 등이 결정하고 있었다.

 

25. 내각 조직

 

금병시를 총리대신으로 임명하였으나 강력히 사양하므로 박정양을 내부대신과 내각총리대신 서리 및 궁내부대신서리로 임명하고, 리완용을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완용은 학부대신 및 농상공부서리였다. 그리고 리범진은 법부대신 겸 경무사, 리윤용은 군부대신, 윤용구는 탁지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윤용구는 사직하였다.

 

26. 홍주의병장 김복한 등의 수감

 

홍주관찰사리승우를 체포하였으나 곧 석방하고, 금복한, 리설, 홍건 등을 서울의 감옥에 수감하였다.

이승우는 김복한 등에게 협박을 당하여 억지로 따르다가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다시 은밀히 음모한 후 그 의병장들을 잡아들였다. 또 그가 자명소를 지어 조정으로 올린 후로 경내의 백성들에게 강제로 단발하게 하여 모든 신사들도 단발을 면한 사람이 없었다. 이때 서울에서는 병사들을 홍주로 보냈으나 의병은 이미 평정되었다.

또 이승우가 조정으로 상소하여, 온화한 비답으로 그의 죄를 용서하고 모든 죄수들을 서울로 압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사건을 추궁할 때 이승우는 내용을 자주 번복하므로 그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고, 사대부들은 그를 꾸짖으며 “세상에서 그를 소북의 간신이라 하더니 그 말이 믿을 만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생 송병직, 리상린, 안병찬 등도 그 음모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는데, 이때 안병찬은 자결을 시도하여 그 흐른 피로 도포에 쓰기를, 「지사불망재구학 용사불망상기원 녕위단두귀불작체발인」지사는 시골에 있기를 잊지 않고 용사는 그 머리를 잃은 것도 잊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차라리 머리 잘린 귀신이 될지언정 머리 깎인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편자주 이라고 하였다. 그의 자상은 작아 다행히 사망하지 않았다.

보은군수리규백은 충무공이순신의 후예이다. 그에게는 매우 사랑하는 첩이 있었는데, 그가 단발을 하자 그 첩은 그를 크게 꾸짖은 후 자결하였다.

 

27. 일본군의 병참 설치

 

일본인들이 동로에 병참을 설치하였다.

 

28. 춘천관찰사조인승의 죽음

 

-- 춘천관찰사조인승은 본래 서법으로 저명하였으나, 그가 이때 단발을 하고 부임하자 강원도의병들은 그를 살해하였다. 이때 살해된 관리들은 20여 명이나 되었다(금택영이 추가 수록한 것임).

-- 춘천관찰사조인승은 본래 서법으로 저명하였으나, 그는 이때 단발하고 임지로 떠났다. 그가 춘천에 도착하여, 의병들이 자기를 살해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교자 안에서 소도를 꺼내어 자결하였다(이상은 리란곡이 개정한 것임).

 

건양 원년 병신(1896년) ①

 

1. 시헌력과 태양력

 

병신년(1896) 개국 505년(청 광서22년, 일본 명치29년). 고종은 러시아공관에 있을 때 맨처음 시헌서를 시헌력으로 개칭하고, 그 책력 위칸에 국기, 사전, 경력 등을 기재하였다.

그리고 태양력은 그 아래칸에 「일월」 및 「화수목금토」를 기재하여 공사가 다 이 책력을 준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책력들은 모두 음력으로 기재되어 있어, 조야에서 문서를 보낼 때 양력 일자를 사용하라고 하였지만 수천 년 동안 내려온 그 습관이 갑자기 변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2. 개성, 이천의 의병 해산 종용

 

서상집을 파주와 개성으로 파견하고, 신대균을 여주와 이천으로 파견하여 의병들에게 해산하라고 선유하였다.

 

3. 동남선유사 선유문

 

정월, 신기선을 남로선유사, 리도재를 동로선유사로 임명하여 그 선유문을 가지고 가서 의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유하도록 하였다.

“아! 짐은 덕이 적고 정치에 어두워, 간사한 사람이 기용되고 어진 사람이 물러가므로 수십 년을 지나는 동안 매년 변란이 일어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믿는 대신들 사이에서 화가 생기거나 혹은 골육지간에 변이 생기고 있으니 과연 낯이 붉어지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는도다. 모두 짐이 한쪽 말만 들어 농간이 생겨났고, 스스로 판단한 것은 잘못된 것이어서 누차 불행의 뿌리를 만들었으니 첫째도 짐의 과오이며, 둘째도 짐의 과오로다. 지금 과연 한 충량한 자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이 흉한 것들을 제거한다면 오랫동안 우울했던 민심이 반드시 바르게 될 것이며 어그러진 천도가 반드시 태평해질 것이다.

짐은 당연히 최대한 가벼운 법을 적용해야 하겠지만 작년 8월에 있었던 반역의 수괴들에 대해서는 단연코 용서할 수 없도다. 지금 요망한 자들과 난을 일으킨 자들이 차례로 법의 심판을 받았으므로 신인의 분통은 이제 거의 씻었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그 밖의 내외관리 및 군인, 이서, 하인(여대)에 있어서는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모두 대사령을 내렸으니 모두 마음을 일신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제각기 편안한 마음으로 공무에 종사하기 바라노라.

그리고 단발령에 대해서는 어찌 차마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요망한 적도들이 미친 듯이 협박하여 위로부터 아랫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이것은 결코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국의 사민들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도처에서 봉기하여 모두 뜬말들을 퍼지면서 마침내 경군이 출동하여 서로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이것도 어찌 짐의 뜻이 그러하겠는가?

아! 경군과 의병은 모두 짐의 적자들이다. 이를 비유하면 열 손가락을 깨물 때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 없는 것과 같도다. 아마 오랫동안 서로 싸운다면 모두 하나같이 죽고야 말 것이다. 짐의 말이 여기까지 미치니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서늘해지노라.

그러므로 지방으로 내려간 경군들은 즉시 서울로 돌아오고 각읍의 의병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는 의심스러운 마음을 갖거나 짐의 근심을 끼치지 말기 바라노라.

그리고 단발령에 대해서는 모름지기 다시 거론하지 말고, 의복과 갓을 쓰는 제도도 모두 편의에 따라서 하도록 하라. 그리고 민간의 고질적인 병폐들에 대해서는 당연히 어떤 처분들이 있을 것이다. 짐은 다시 말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은 모두 이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운운.”

전후에 걸쳐 내린 륜음이 7, 8번이나 되었지만 그 내용이 모두 비슷하므로 그중 하나만 수록하였다.

 

4. 춘천 의병 토벌

 

친위대장리남희, 신우균, 리겸제, 금구현 등이 춘천 의병을 격파하였다.

-- 이겸제는 영남에서 별로 하는 일 없이 있었고, 로응규 등은 뿔뿔이 도주하였다. 그 후 이겸제는 호남으로 들어갈 때 연로의 민가에서 많은 약탈을 하였다. --(금택영이 기록함)

 

5. 최익현의 남북선유대원 고사

 

최익현을 남북선유대원으로 임명하였다. 최익현이 강력히 척화를 주장하였으므로, 그가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기용한 것이다.

그러나 최익현은 상소하여 사양하고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단발령을 내렸을 때 최익현은 또 상소문을 지어 대궐문 앞까지 가서 부복하고 있었으나, 그 상소문이 보고되지 않자 귀향하였다.

 

6. 기우만의 기병

 

전참봉기우만이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기우만은 고참판기정진의 손자로, 그는 집안의 학문을 이어받아 문유로 추대를 받기는 하였지만 다른 재간은 없었다.

이때 호남 사람들은 다른 도에는 모두 의병이 있는데 호남만 의병이 없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기우만을 꾀어 그로 하여금 의기를 내세우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족들이 횡포를 자행하여 그 고을 사람들은 그들을 매우 고통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의병들이 모일 때는 모두 심의와 대관 차림을 하였고, 서로 만나면 읍(읍양)을 하고 길을 나설 때도 차례로 줄을 지어 걸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군량이나 병기, 기율도 없었으므로 그들을 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광주로 가서 진을 치고 있었으나 해남군수정석진이 리겸제에게 살해되자, 기우만은 두려움을 느껴 무리들을 해산시키고 도망을 갔다.

강제로 단발할 때 전국이 흥분하여 의병이 일어났으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의병들의 사기가 떨어져 경군만 만나면 패배하였으므로 죽은 자들이 무수히 나왔다. 그리고 충분을 가지고 의병이 된 사람들은 몇 명에 불과하고, 명예를 쫗는 사람들이 창의를 하거나 모험을 좋아하는 이들이 그들에게 따라붙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불량배 몇천 명 혹은 몇백 명이 무리를지어 작당하고는 의병이라 칭하였고, 심지어는 동비의 잔당들 중에서 안면을 바꾸어 의병을 따르는 사람들이 절반은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잔인하고 포악하여 온갖 음행과 약탈을 저질렀고 마치 미친 도둑들과 다름없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일을 남쪽 지방에서 보고들은 대로 열거하자면, 로응규가 진주를 점거했을 때 온 성내에서 분탕질을 해대어 주민들은 다시 동비들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안동 등 10여 개 군도 명색 의병이 들어간 곳은 민가가 약탈을 당했고, 이를 경군들이 다시 유린하였으므로, 공사를 막론하고 비참한 지경에 떨어졌다.

그 후 금홍집의 살해사건으로 인하여 윤음이 잇달아 내려졌지만 그때는 이미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을 일으킨 이들은 고을 수령들을 살해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후환을 두려워하여 무리들을 껴안은 채 해산하지를 않아 국내는 소란스럽기만 하였다. 그중에서도 기호 지방과 관동 및 영남 지방이 극심한 화를 당하였다.

대체로 의병들이 단발령을 구실로 삼았기 때문에 박정양 등은 정국을 잡은 후, 적신들이 한 일에 대해 반대로 하는 것만 주로 해서 결국 단발령을 폐지하고 백성들이 하고 싶은 대로 따라 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의병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국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둔한 백성들은 그들의 머리를 가리키며 “이것이 의병들의 힘으로 붙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때 어떤 사람은 단발을 하는 것은 일본인의 뜻이 아니라 유길준 등의 미친 생각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만일 일본인들이 큰 가위를 가지고 사람들 뒤를 따라다니면서 만주족이 중국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하였다면 백성들 중에 누가 단발하지 않을 사람이 있었겠는가?

 

7. 친위대 증설

 

친위대 제2대를 증설하였다.

 

8. 윤용선을 총리대신에 임명

 

윤용선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성품은 오만하고 탐욕스러워 집무한 지 수일 만에 그와 친한 사람 수십 명을 관리로 채용하므로, 탁지부 고문관브라운(J McLeary Brown)은 그들에게 봉급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사당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10여 명은 불안해 하며 모두 의원면직하였다.

브라운은 미국인으로 나라를 위해 경비를 절약하였으므로 그 직무수행에 성의를 다했다고 칭찬을 받았다.

 

9. 의병에게 살해된 관리들

 

진주관찰사조병필, 남원관찰사백악륜, 나주관찰사조한근 등이 도주하였다.

그리고 강제로 단발을 행하다가 의병들에게 살해된 자들은 춘천관찰사조인승, 안동관찰사금석중, 충주관찰사금규식 등이며, 관찰사 이하로는 의성군수리관영, 영덕군수정재관, 예천군수류인형, 안동경무관림병원, 우체국주사금재담, 청풍군수서상기, 단양군수권숙, 천안군수금병숙, 나주참서관안종수, 총순박선호, 양양군수양명학, 고성군수홍종헌, 강릉경무관고준식, 삼수군수류완수, 함흥참서관목유신, 주사피상국과 홍병찬, 해주경무관리경선, 총순황목, 세무관찰인석보, 지평군수맹영재, 광주부윤박기인, 충주부주사홍유정 등이다.

<관보>에 보도된 피살자는 이상에 그치지만 그 사망 일자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해 겨울과 올 봄에 있었던 일로 <관보>에 누락된 사망자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조인승은 소론의 명가로, 그의 서법은 당대에 유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발을 하고 부임하였으므로 가장 먼저 살해되었다.

금석중은 울산의 포민으로서 말 잘하는 무뢰배로 지내다가 갑오년(1894)에는 동비로 활동하였으며, 동비란이 평정된 후에는 서울에서 숨어 지내다가 박영효와 결탁하여 백의로 안동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그 후 또 안동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 지방 유림과 주민들을 욕보이고 또 먼저 단발을 단행하여, 단기로 도주하다가 문경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안종수는 글을 잘하여 서광범, 박영효 등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그는 라주로 부임한 후 부호를 수탈하였으므로 우도의 연변이 소란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에 모아 놓은 장물을 적발해보니 8만여 냥이나 되었다.

 

10. 영남지역 지방관과 의병

 

리남규를 안동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영남은 모두 남인이며 이남규도 남인이었다. 조정에서는 영남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에게 관찰사의 깃발을 들고 부임하여 의병을 해산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의병을 두려워하여 안동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장계를 올려, 임시로 상주군에서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이때 영남 전역의 수재들은 거의 살해되어 주군이 텅텅 비어 있었으므로 서울에서는 그곳을 사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영남 사람 중 간사한 자들은, 처음에는 의병들에게 붙었다가 자기에게 무슨 화가 돌아올까 싶어 다시 관직을 넘어다보고 종종 서울로 와서는 “만일 지방관으로 임명되면 한 번의 호령으로 민란을 그치게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정부에서는 그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였으나 일단 그들의 말에 따랐다.

그러므로 그해 봄과 여름 사이에 영남 출신으로서 영남 읍재가 된 사람은 모두 4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임지에 도착하면, 의병과 내통하여 세월만 보내고 봉록만 축을 내었다.

 

11. 이병훈, 이항의를 관찰사로 임명

 

장성군수리병훈을 전주관찰사, 리항의를 진주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2. 이종건과 민영기를 선유사로 임명

 

리종건을 북로선유사, 충주관찰사민영기를 그 도의 선유사로 겸직하여 임명하였다.

 

13.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대관식에 파견

 

민영환을 전권공사로 임명하여,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축하사절로 파견하였다. 이때 윤치호는 영어를 잘하여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

 

14. 경군대장이겸제의 약탈

 

경군대장리겸제가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자 로응규 등이 서둘러 도주하였다. 이때 이겸제는 연도에서 많은 약탈을 자행하였다.

 

15. 석전 거행

 

2월 초2일, 예의상 당연히 선성의 묘에 제사(석전)를 지내야 하지만, 이때 대행왕후의 인산을 치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오랫동안 제향을 거행하지 않고 있었다. 호남은 간혹 지내기도 하고 안 지내기도 하였으나, 영남은 평일처럼 거행하였다.

 

16. 러시아 공사스페르의 방일

 

러시아 공사스페르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17. 이하영을 주일공사에 임명

 

윤길구를 해주관찰사, 리건하를 공주관찰사, 리하영을 주일공사로 임명하였다.

이하영은 부산 사람으로, 일어를 잘하여 총애를 받았으므로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발탁되었다. 그는 이때 처자를 데리고 떠났는데, 공사가 부임할 때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8. 홍주의병장 김복한 등을 석방

 

홍주의병장 금복한, 리설, 홍건 등을 석방하였다.

홍건 등이 수감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옥사를 아뢰자 고종은 특지를 내려, “김복한 등 여러 사람이 관리를 위협하고 민중을 선동하여 부군을 소란하게 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뜻을 살펴보면 복수를 하고 역적을 토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물며 그 사건은 지난해 12월 28일, 조서를 내리기 전에 발생하였으므로 이 사건은 최근 의병을 가장하여 난리를 꾀한 자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일체 그 사건을 취소하고, 그들을 특별히 석방하여 관대한 뜻을 밝히노라”라고 하였다.

 

19. 의병장 기우만의 도주

 

이겸제가 나주로 들어가 해남군수정석진을 살해하자 기우만은 도주하고 담양군수민종렬은 체포되었다.

정석진은 나주의 관리로, 동비가 치성할 때 민종열을 도와 성을 수비한 공로로 해남군수가 되었다. 그가 부임할 때 많은 관리들이 그를 전송하였으나 그가 해남으로 들어간 후 안종수를 살해하므로, 사람들은 정석진이 밀서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후 안종수의 아우 안정수는 이겸제를 따라 자기 형의 원수를 갚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정석진에게 배를 타고 바다로 도주하라고 하자 그는 웃으면서 “죽는 것은 천명인데 어찌 도피를 하겠습니까”라고 하며 그대로 앉아서 결박되었다. 이겸제는 그에게 후한 뇌물을 주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면서 “뇌물을 주어도 죽을 것이니 공연히 노배에게 매도될 뿐이다”하고 살해되었다.

정석진은 힘이 세고 지혜도 있는 데다가 대의를 알고 있었으므로 호남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기우만은 정석진이 살해된 것을 보고 광주에서 의병을 해산한 후 도주하였다.

이때 신기선은 호남에 있으면서 기우만을 강력히 옹호하고 있어 그를 체포하지 못하였다.

민종열은 기우만과 내통하고 있었으므로 그 소문이 일시에 알려져 이겸제는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우 민종묵이 높은 관직에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이겸제에게 민종열은 주모자가 아니라고 달래므로 그를 서울로 올려보내고 말았는데, 서울에 도착한 후 민종열 등을 석방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고종은 개화 이후 누차 변란을 치러 시속배들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주도권을 빼앗긴 후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 역적을 토벌한다는 구호를 외치자 고종은 매우 기뻐하며, 출정병에게 수령을 체포하더라도 살해하지 말라는 특지를 내렸다.

이로부터 서울 감옥까지 송치된 죄수라도 모두 죄가 감면되어 어떤 사람들은 기우만이 비록 자수를 한다 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정석진의 죽음은 안종수의 복수라고 하였다.

 

20. 이경직, 홍계훈 등에 시호 하사

 

3월에, 대광보국 이경직의 시호는 충숙, 군부대신홍계훈의 시호는 충의, 내부협판림최수의 시호는 충민, 군부협판리도철의 시호는 충민이라고 하였다.

임최수는 리범진, 리윤용 등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먼저 출발하여 패배했고, 이범진은 뒤늦게 출동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21. 세무시찰관의 폐지

 

세무시찰관을 폐지하고, 관찰사와 군수로 하여금 지방의 결세 및 호세를 관리하게 하였다.

 

22. 고종의 정권회복과 이희화의 처형

 

한규설을 법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조금 위축되고 러시아인들의 세력도 부진하였으므로 정무의 대부분을 고종이 결정하였다. 박정양 등은 금홍집이 잘못한 것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모든 일을 고종에게 아뢴 다음 시행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옛날 대신과 사인들이 점차 진출하였다.

리희화를 처형하였다. 이희화는 전시독으로, 곤녕각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인과 함께 대궐로 들어가 조칙을 강제로 작성하였는데, 그 사실이 탄로나 천입어좌죄와 모반지정죄로 교형에 처해졌다.

 

23. 민비시해 관련인사의 유배

 

서주보, 정병조, 금경하, 리태황, 정만조, 우락선, 전준기, 리범주, 홍우덕 등을 각 도서로 유배하였다.

금홍집이 집권하고 있을 때 소론을 많이 기용하였고, 서주보와 정만조도 대원군의 문객이었는데 이들은 득세한 시기를 이용하여 방자한 행동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미워하였다. 시후의 변이 일어났을 때 서주보와 정만조 등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여 지금 그들이 차례로 잡혀들게 것이다.

그들이 수감된 것은 70여 일이었다. 이때 어떤 이가 정만조가 잘못이 없다고 해명하자 고종은, “당일 밤, 짐이 정만조를 분명 보았다. 그는 양복을 입고 전상으로 올라왔는데, 오랫동안 시종으로 있던 그를 어찌 오인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 모든 여론은 정만조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출옥한 후에 고종이 인자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연좌된 모든 자들이 대체로 같았지만 공초 기록이 많이 없어졌다.

정병조는 정만조의 아우로 지난해 8월 19일, 세마로 대궐에 들어가 숙직을 하고 있다가 가족이 부른다는 말을 듣고 옷을 입은 채 밖으로 나갔는데, 이날 밤에 난이 일어나 그의 행적이 매우 수상하였다. 이것은 춘방관리시재가 입증한 것이다.

 

24. 심상훈을 탁지부대신에 임명

 

침상훈을 탁지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심상훈은 충주에 있을 때 의병들과 내통하고 있었으나 그들이 성공할 수 없음을 알고 서울로 도망쳐 돌아왔다.

 

25. 독립대대와 독립공원의 신설

 

친위대 제4대와 제5대를 독립대대로 합쳐서 설치하고, 연조문 옛터에 독립공원을 설립하였다.

 

26. 이용익을 금광 감리에 임명

 

리용익에게 서북도금광 감리을 맡겼다.

 

27. 윤석우, 박선 등의 누명 벗음

 

윤석우, 박선 등의 누명을 벗겨주었다. 그들의 역모사건 단서들이 점차 밝혀지면서 그들은 죄가 없이 얽혀든 것이었고 다만 리주회만 죄안이 있었다.

 

28. 창릉의 화재

 

창릉예종의 릉호. 편자주 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29. 프랑스총영사플랑시의 내한

 

프랑스판리대신 겸 총영사플랑시(Collin de Plancy)이 내한하였다.

 

30. 서울의 바퀴벌레 창궐

 

을미년(1895) 9월에 서울에 바퀴벌레(비)가 극심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물명을 정확히 몰라 「냄새나는 이(취슬)」을 좀벌레(갈)라고 한다. 이 말이 오랫동안 굳어져서 고칠 수가 없다.

서울에는, 옛날부터 바퀴벌레가 없고 점포에만 간혹 있었으므로 어느 곳은 있고 어느 곳은 없어 번식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하룻밤 사이에 바퀴벌레가 땅에 가득 널려 있으므로 이를 「비퀴벌레비(비우)」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집집마다 바퀴벌레가 생겨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제거할 수 없었고, 대내에서는 더욱 그 수효가 많아 고종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

이때 식자들은 이런 현상을 성궐이 공허할 징조라고 하였다.

 

31. 일본의 척식부 설치

 

일본이 대만 및 북해도에 척식부를 설치하였다.

 

32. 일본주한공사서리가등증웅의 내한

 

4월, 일본 공사소촌수태랑이 국서를 올린 후 귀국하고 서기관가등증웅이 주한공사서리로 임명되었다.

 

33. 자핵소 중지 조서

 

“어느 시대나 탄핵소가 없었겠습니까만 이런 시대에 이곳에서 서로 탄핵하는 전례만 따르고 있으니 그 분수와 도리를 돌이켜볼 때 너무도 한심스럽도다. 비록 지난날의 과오를 고치는 것이 소중한 일이긴 하지만 지난날 내린 조서에 하나도 빠짐없이 다 고유하여 중외의 신서가 모두 숨김없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부터 자핵하는 행위와 처신하는 의리에 대하여는 감히 짐을 번거롭게 하지 말고 조정의 체통을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군신들이 자핵소를 올려 서로 사직을 하는 데다가, 또 시국의 전환으로 인하여 서로 공격하는 일이 빈번하므로 이 조서를 내렸다.

 

34. 윤헌 등을 관찰사에 임명

 

윤헌은 나주관찰사, 윤창섭은 홍주관찰사로 임명하였다.

 

35. 지방대의 편성

 

각 지방의 구병을 지방대로 편성하여 그 지방의 관찰사와 군수가 그들의 장수를 겸하고, 각군에서 포수를 선발하여 1등군 50명에서 5등군 30명까지 5명씩 차이를 두었다.

이때 의병으로 활약했던 사람들이 토비로 둔갑하여 경보가 그치지 않기 때문에 지방병을 설치해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었으나 그것은 명분뿐이었고, 강력히 이행하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소란만 가중시켰다.

 

36. 이범진을 러시아 공사로 임명

 

리범진을 종1품으로 승진하여 주러공사서광범의 대리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처자를 데리고 떠났다. 그는 시국이 다시 변하면 제일 먼저 살해될까 싶으므로 강력히 외국 공사를 자청하여 출국하였다.

 

37. 김상덕과 이건창의 유배

 

전참판금상덕과 전참판리건창을 고군산도로 유배하였다.

고종은 금년 봄에 김상덕을 홍주관찰사, 이건창을 해주관찰사로 임명하였으나 김상덕은 소장을 올려 의리로 자처하였고 이건창도 그와 같이 하여 세 번이나 상소를 하며 강력히 사직할 뜻을 보이므로, 고종은 둘을 함께 2년 동안 같은 섬에 유배보내려 하였으나,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특별히 교지를 내려 석방하였다.

 

38. 독립협회 창립

 

5월, 안경수가 독립협회를 주창하고 윤치호, 고영근 등이 협조하였다.

 

39. 일본공사원경의 내한

 

일본 공사원경이 내한하였다.

 

40. 이채연을 경인철도 감독으로 임명

 

민영철을 해주관찰사로 임명하고, 리채연에게 경인철도를 감독하게 하였다.

 

41. 제향을 복구

 

6월에 묘사, 전궁, 릉원 등의 제향을 모두 복구하고 날짜도 음력을 사용하게 하였다. 금홍집 등이 제전을 줄였을 때 신, 구력의 날짜가 서로 차이가 있으므로 경건함이 없었다.

 

42. 전보국 설치

 

서울에 전보국을 설치하여 의주까지 연결하였다. 육지의 전신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후의 것은 갖추어 기록하지 않았다.

 

43. 박규희를 충주관찰사로 임명

 

박규희를 충주관찰사로 임명하였다.

 

44. 관립소학교 설립

 

서울에 관립소학교를 증설하여 8세에서 15세의 아동들을 모집하였다.

 

45. 13도제 시행

 

23부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실시하였다. 각도에는 관찰사를 두어 경기도는 수원, 충북은 충주, 충남은 공주, 전북은 전주, 전남은 광주, 경북은 대구, 경남은 진주, 황해도는 해주, 평남은 평양, 평북은 정주, 강원도는 춘천, 함남은 함흥, 함북은 경성에 행정기관을 설치하고(경기는 38군, 충남은 37군, 전북은 26군, 전남은 33군, 경북은 41군, 경남은 30군, 황해도는 23군, 평남은 21군, 강원도는 26군, 함남은 14군, 함북은 10군이었다), 각 군은 5등으로 나누었다.

 

46. 한성부 설치

 

서울의 5부서 중에 별도로 한성부를 설치하여 판윤과 소윤을 두었다. 광주, 개성, 강화, 인천, 동래, 덕원, 경흥 등지에는 부를 두어 부윤을 두고 제주에는 목사를 두었다.

 

47. 관찰부 참서 폐지와 각군의 향장제 시행

 

관찰부의 참서와 경무관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각군의 세무주사와 좌수를 폐지하고 향장을 두었다.

 

48. 지방관의 연봉과 임기 및 휴가

 

관찰사의 연봉은 2,000원, 판윤 2,000원, 소윤 600원, 부윤 1,200원, 목사는 1,500원이며, 군수는 을미년(1895)의 격식에 의하여 지급하였다.

그리고 각도의 주사와 총순 이하 및 각군의 향장, 서기이하 순검, 순교, 통인, 사령, 고용원, 청사, 사직 등도 모두 일정한 봉급이 있었다.

13도의 관리 연봉과 각 지방의 경비는 합계가 95만666원이었다.

지방관의 임기는 1년으로 하여 그 기한 전에는 다른 지역으로 전임을 허락하지 않았고, 관리의 급유관리에게 휴가를 줌. 편자주 는 두 번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관직을 비울 때는 봉급의 3분의 1을 깎아 서리관을 주었다. 만일 부득이한 일로 세 번을 급유할 때는 봉급의 3분의 2를 국고로 바치게 했다. 그리고 봉급은 임지에 도착한 날부터 계산해 주고 경비는 각도의 세전에서 공제하였다.

 

49. 인천 등 4개 항구의 감리관 설치

 

인천, 동래, 덕원, 경흥 등 4개 항구에 다시 감리관을 두었다.

 

50. 지방대의 병력 정원

 

지방대의 병력수를 정하여 고성 400명, 대구 300명, 강화 300명, 청주 200명, 공주와 해주 각 200명, 북청 400명, 춘천 200명, 강계 100명을 두었다. 이들은 도합 2,300명이다.

이미 지방대를 창설하였으나 장수들은 완고하고 병사들은 교만하여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만 일로 삼았다. 토비를 토벌할 일이 생겨도 약한 고양이가 강한 쥐를 피하듯 하여 아무 런 힘이 없었다.

 

건양 원년 병신(1896년) ②

 

1. 오익영, 윤창섭 등을 관찰사로 임명

 

오익영을 경기관찰사, 윤창섭을 전북관찰사, 윤웅렬을 전남관찰사, 조병필을 강원관찰사, 리용익을 평북관찰사,리근명을 평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2. 일식

 

7월 초9일, 일식이 있었다.

 

3. 유생 정성우를 고군도에 유배

 

유생 정성우를 고군도로 유배하였다. 정성우는 소장을 올려 실정을 지적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강경한 말을 구사하여 그 소장을 보는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때 리건창이 사면되어 길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정성우가 도착하자 이건창은 탄식하기를, “정성우를 보니 내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다”라고 하였다.

 

4. 전패 개칭과 지방대 증설

 

각군의 전패를 궐패로 개칭하였다.

충주, 홍주, 상주, 원주 등지에 지방대를 증설하였다. 도합 600명이었다.

 

5. 윤리병의 무고

 

윤리병은 최춘희, 류세남 등이 음모하여 리준용을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하였으나, 그들을 신문한 결과 아무 근거가 없자 그에게 도리어 무고죄(반좌률)를 적용하였다.

 

6. 유인석의 요동행

 

동로와 남로의 출정 장졸들이 모두 돌아왔다. 이때 여러 도의 의병들이 모두 해산하고 류린석도 관서와 해서 지방을 떠돌다가,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들어갔다. 그는 지나가는 곳마다 자금과 식량을 요구하여, 일시 소란하다는 비방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서 유사들의 연원은 모두 리항로로부터 시작된 데다가 그들은 또 유인석의 충의에 감명을 받아 그를 따르는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요동의 어느 산중으로 들어가 큰 촌락을 이룬 곳이 두어 곳이나 되었다. 그곳에서 유인석은 공자의 사당을 지어놓고 제사에 정성을 들이고 농사에도 열중하였므로 그곳 풍속에 감화를 주었다. 이에 청나라 사람들도 짐을 싸가지고 그곳으로 옮겨 왔다. 그 소문이 우리 나라까지 전해졌다.

 

7. 엄세영 등을 관찰사에 임명

 

엄세영을 경북관찰사,서정순을 함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서정순은 두 번째 임명되었다.

 

8. 공립소학교 설립

 

공립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울에서부터 각 도 및 각 항구에 설립하였다.

 

9. 경운궁으로 빈전 이전

 

8월, 대행왕후의 빈전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기어 초기의 임시 제사(별전)을 올렸다. 고종은 민후를 위해 길지를 택하여 봉표를 하였지만 이것도 누차 바꾸어 산릉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련기가 다가왔으므로 대신과 유신들에게 그 대책을 상의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신 송병선은 례를 잘 모른다는 핑계로 대하지 않고, 대신 송근수, 조병세, 정범조 등은 주자의 예론을 끌어들여 대하므로 고종은 친히 별전을 드렸다. 이때 례경민종묵이 대신과 유현에게 의례를 묻도록 간청하자 고종은 그의 말을 따라 각 대신들에게 헌의를 명하였다.

봉조하금병국과 령중추신응조는 병을 앓고 있어 헌의하지 못하였다. 봉조하송근수는, “신이 본래 예학에 어두워 시골의 하찮은 예절도 말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왕조에서도 드물게 보는 변례에 있어서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욱 례조에서 아뢴 수조가 분명한 근거가 있으니 다시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특진관금병시는, “모든 상사에 있어서 장례와 우제를 치른 후에 제례가 갖추어집니다. 신이 <상례비요>신의경이 지은 상례에 관한 책이름. 편자주 의 대상조를 보니 개원당나라 현종의 연호. 편자주 의 예를 인용하여 1년 후에 장례를 치를 경우는 장례를 치른 다음달에 소상을 지낸다고 하였고, 또 주자가 증무의송나라 회삼이의 자, 호는 운량. 경학에 조예가 깊어 주희와 많은 론변을 하였음. 편자주 에게 보낸 답서에는 련상의 예는 당연히 성복한 날짜의 실수를 계산하여 그 사이에 있는 기일에 별도 제전을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유사의 상례로서 장례와 련상을 미리 거행하는 절차이므로 왕조의 전례에 있어서는 지극히 신중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어 감히 대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특진관조병세는, “례경이 상고한 <상복소기>례기 편명. 편자주 에 증자가 물은 <례의류집>은, 모두 적절히 인거하여 지금 다시 번거롭게 거론할 필요가 없으며, 주자가 증무의에게 답한 그 사이 기일이 있을 때는 별도로 제전을 드린다고 한 것은 인정에 부합된 것이므로 지금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인산을 못하고 있고 우제도 지내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 삼헌의 예를 다 갖출 수 없으므로 오직 별전만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선유의 정론을 상고하면 모두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왕조의 전례는 사서인과 다른 점이 있으니 널리 물어 보신 후 선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특진관정범조는, “11개월 만에 상복을 벗고, 13개월 만에 소상을 치르고, 제례는 우제부터 시작하는 것은 고금의 통례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행왕후의 인산을 치르지 못하고 있고 련상의 절차도 거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 기일을 당하였으니 거애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독례통고>청나라 서건학이 찬한 례서. 편자주 를 살펴보니 그 장불이시조에 개원의 례에 1년 후 장례를 치를 경우에는 장례를 치른 다음달에 소상을 치른다고 하였습니다. 또 주자가 증무의에게 보낸 답서에는 연상의 예는 당연히 성복한 일자를 계산하는 것이 예절이며, 그 사이 기일이 있으면 별도로 제전을 드리는 것이 인정을 다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상견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조의 전례는 지극히 신중히 처리해야 하는 것이므로 감히 대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제주송병선은, “례학에 어둡다”고 하면서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교지를 받은 대신들의 여론이 이와 같으므로 친히 별전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10. 고종의 애통

 

고종은 민후의 죽음을 매우 애통해 하여 민후의 이야기만 하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민후가 사용한 술잔과 경대만 보아도 탄식을 하면서 손으로 어루만지며 차마 손을 떼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느 환관이 자기의 이름과 비슷한 어떤 사람의 성명을 써서 민후의 경대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그 후 고종이 그것을 꺼내 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이것을 어떤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적어 이곳에 넣어 두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환관은 낯을 가리고 말하기를, “마마가 살아 계실 때 이 늙은 하인을 찾아오셔서 수령의 재목이라고 하시므로 이 하인이 감히 이것을 써서 올렸는데, 마마께서 이렇게 간직하고 계셨으나 이런 변고로 인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은 그 말을 듣고 “이런 일이 있었나? 슬픈 일이다!”라고 하면서 즉시 그 사람을 군수로 제수해 주었다.

이렇듯 민후를 그리워하는 고종의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삭망이 되면 친히 제문을 찬하여 제사를 지냈으므로, 사람들은 공민왕이 원공주를 애통해 한 것과 비하였다.

 

11. 의정부를 다시 설치

 

내각을 폐지하고 다시 의정부로 일컬어의정 1명, 참정 1명, 찬정 5명, 참찬1명을 두었다.

그리고 금병시를 의정, 금영수, 민영환, 윤용구, 남정철, 윤용선을 찬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김병시는 사양하였으나 그의 사양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민영환은 러시아로 가서 귀환하지 않고 있었다.

 

12. 민종묵의 학부대신 임명 등

 

학부대신신기선을 면직하고 민종묵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민영준을 중추원의장, 원우상을 함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3. 가등증웅이 주한일본공사로 부임

 

일본 공사원경이 귀국하고가등증웅이 다시 공사대리로 임명되었다.

 

14. 공주, 충주 등의 지방대 폐지

 

9월에 공주, 충주, 홍주, 춘천, 원주, 강계, 상주 등 7개 군의 지방대를 폐지하였다. 일정하지 못한 정령이 모두 이와 같았다.

 

15. 탁지부 도난

 

도둑이 탁지부에 들어와 은화 7,790원을 가져갔다.

 

16. 민영환의 귀국

 

주러공사민영환이 귀국하였다.

 

17. 영국 주한공사조르단의 내한

 

영국 총영사릴러(W. C. Rillir)이 교체되고 신임영사조르단(J. N. Jordan)이 내한하였다.

 

18. 일본의인친왕의 입경

 

일본의 의인친왕이 유람하기 위하여 입경하였다.

 

19. 이윤용 등의 대신 임명

 

리윤용을 농상공부대신, 민영환을 군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20. 서민들의 명성왕후 탈상을 불허

 

10월, 중외의 신서들에게 대행왕후의 상복을 벗지 못하게 하여 우제와 졸곡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소상이 다가와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련복도 못하고 있으므로, 지금 상기를 당해도 상복을 벗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신과 유신들의 여론을 수합하게 하자 례경금규홍이 상소하여 의심이 나는 상례를 물어 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종의 교지를 따른 것이다.

이때 고종은 다시 대신과 유신들에게 헌의할 것을 명하자 봉조하금병국, 령중추신응조, 특진관침순택 등은 병으로 헌의하지 못하고, 의정금병시는 황공하여 헌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봉조하송근수는, “<상복소기>의 대불장조를 살펴보니 오직 주상은 제복하지 않는다는 주에, 주상은 부모에게 있어서는 자식이나, 임금에게 있어서는 신하를 지칭한 것이므로 이들은 이미 제쇠나 참쇠의 구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정신들의 기복제(기복제)는 다른 기복 및 대공의 기복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확실한 여론을 거쳐 처리하기 바랍니다. 신의 의견을 숨김없이 말씀드리고자 감히 분별없는 의견을 아뢰오니 매우 송구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특진관조병세는, “<춘추>에 장례를 기록하지 않기도 하고, 기록하기도 한 것은 제각기 의의가 있는 일입니다만 호씨남송의 거유 호원. 편자주 는 송나라 유사이므로 <자집>과 <춘추전>에 상복을 벗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느 때나 종상을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그는 과연 이런 일이 당시에도 있을 줄 알고 이러한 주설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상복소기>로의사기명. 은공 원년부터 애공 14년까지 편년체로 기록하였음. 편자주 에, 오랫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경우에는 오직 주상자만 상복을 벗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시마복(시마복)으로 달수만 채워 상기를 마치면 그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나라 <석거례의>한유들이 석거각에서 례를 외논하여 만든 례서명. 대성이 찬함. 편자주 에는, 상복을 입는 가간이 끝났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경우에는 모두 장례를 치를 때까지 상복을 입으며, 서인들도 이와 같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기재된 예설이 비록 이러하지만 이 일은 왕조에서 드물게 보는 변례이므로 신처럼 예에 어두운 사람은 감히 억대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특진관정범조는, “<상복소기>에, 오랫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경우는 오직 주상자만 상복을 벗지 않고 기타는 시마복으로 월수만 채워 상기만 마치면 그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상만 제복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례신의 상소에 확실한 인거를 하였으므로 관료와 백성들의 제복에 대해서만 지금 물어 보겠습니다.

<춘추호씨전>에, 장례의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으면 상복을 벗지 않아도 어느 때나 상기를 마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장례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 의의를 밝힌 것이지만 이미 이에 대하여 자세하게 논한 례문이 없고, 오직 <례기>례설에 관한 책 이름. 로의 대덕과 대성, 경보 등이 찬하고, 한나라의 정현과 당나라의 공영달이 주소를 붙였음. 편자주 의 마종월수주에 따르면 기년복 이하의 시마복은 월수가 차면 제복을 하여 주인이 장례를 치를 때까지 기다려 제복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 상복은 수장해 놓았다가 장례를 치를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한의 <석거례의>에는, 시마복으로 달수를 마친 사람은 이미 상복을 마쳤으나 장례를 치를 때는 다시 상복을 입으며 서민들도 나라를 위해 그와 같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장례를 치르기 전에 먼저 제복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상례는 왕조에서 드물게 있는 변례이므로 신이 어찌 함부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제주송병선은, 자신은 예에 어둡다며 사양하고 헌의하지 않았다.

이에 고종은 다시 김병시에게 묻자 김병시는, “<춘추>에 장례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로사에서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호씨전>에서의 「상복을 벗지 않아도 어느 때나 상기를 마칠 수 있다」고 하는 대목을 혹 근거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 예절에 관한 지적은 없고 <례경>에도 나타난 곳이 없습니다. 오직 <상복소기>에, 오랫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경우는 주상이 상복을 벗지 않는다고 나와 있고, 그 주에 기복 이하 시마복의 경우는 월수가 차면 제복을 하되 그 벗은 상복을 반드시 수장하여 장례를 치를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또 <개원례>에는, 오랫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경우에는 오직 주상만 상복을 벗지 않고 기타는 모두 월수를 마치면 상복을 벗었다가 장례를 치를 때 다시 상복을 입으며, 우제(우제) 때 상복을 벗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일은 변례이기 때문에 예에 어둡고 고루한 신으로서는 감히 대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번 상사에 모든 여론을 참작하였으나 모두 적절한 논리는 없고 봉조하송근수의 의견이 다른 기, 공복과 이론이 있지만 <례경>의 취지와 의례에 있어서 그 근거가 없지 않으므로 관료와 백성들의 복제는 우제와 졸곡을 마치고 탈복하라」는 교지를 받았다.

그리고 고종은 민후의 상사에 있어서 한없이 그 예를 융숭하게 해야 조금이라도 비통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 성경도 무시하고 여론을 거역하면서까지 3년상을 강행하였으니 이것은 천고에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따라 모든 대신들도 유약한 태도를 취하여 자기의 뜻을 조금 드러낸 것에 불과하고 누구 한 사람도 제대로 정론을 내세워 고종의 마음을 꺾는 사람이 없었다. 송병선 같은 사람은 소위 한 시대의 유가이면서도 입을 꼭 다물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그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고종은 황제가 된 후에 민후를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 장례 시기를 지연시켰다.

 

21. 철도부설 중지

 

철도의 부설사업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업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재정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22. 금홍륙을 학부협판에 임명

 

비서원승금홍륙을 학부협판으로 임명하였다. 김홍육은 단천의 민가 출신으로, 그는 로어통역관이 되어 고종의 총애가 날로 높았다. 이때 고종은 러시아 공사만 의지하여 그의 말이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어는 통역하기가 매우 어려워 통역관은 김홍육 한 사람뿐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방자하였으며, 러시아 공사가 아무개를 관리로 기용하고자 한다고 말하면 고종은 즉시 윤허하였으므로 경재와 수령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23. 민가의 폄장 금지령

 

인산 전에는 민가의 장례와 소, 대상 및 복제 등을 금하게 하였다. 고종은 예의에 맞지 않는 상복을 입은 데다가 민후의 상을 서민에게도 강요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비난할까 싶어 이와 같이 구차한 명을 내렸다.

 

24. 조병식을 법부대신에 임명

 

조병식을 법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11월, 산릉총호사조병세가 다시 인산할 곳을 일곱 군데나 보았지만 모두 흡족하지 않았으므로 세 번째로 인산할 곳을 보아 양주의 청량리에다가 임시 봉표를 하고, 탁지부로 하여금 장례비 10만원을 지불하게 하였다.

 

25. 민후의 시호와 릉호

 

순경왕후의 시호를 명성으로 바꾸고 능호는 홍릉, 전호는 경효라고 하였다. 처음에 시호를 지을 때 문성이라고 하려다가 고종도 그 시호가 알맞지 않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 다음에 올린 망첩대로 하였다.

 

26. 고종의 일본 황태후 구일복

 

일본 황태후가 사망하자 고종은 궁중에서 구일복을 입었다. 이것은 각국이 조의를 표하는 례이다.

 

27. 민후의 시책, 애책 등 찬술

 

금영수는 명성왕후의 시책, 금병시는 애책, 정범조는 행상, 윤용선은 릉지를 찬하라고 명하였다.

 

28. 남정철을 내부대신에 임명

 

남정철은 내부대신, 박정양은 찬정을 임명하였다.

 

29. 안면도의 홍주군 이속

 

안면도를홍주군으로 이속하였다.

 

30. 한선회, 장윤선 등의 정부 전복음모

 

한선회, 장윤선, 금은찬, 리용호, 리근용 등이 정부전복을 기도하다가 그 음모가 발각되어, 심문을 받은 후 제주로 유배되었다.

 

31. 흥경절

 

12월 13일은 흥경절이다. 이날은 고종의 등극일인 데다가 1월 14일은 또 태묘(태묘)에 서고한 날이라 두 경축일을 합하여 흥경절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리재순의 청을 따른 것이다.

 

32. 민영환의 런던 방문

 

민영환을 영국, 러시아, 미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주재공사 겸 영국 여왕 즉위 60년 경축사로 임명하여 런던으로 보냈다.

 

33. 금홍집, 정병하 등에 반역죄 추가

 

금홍집, 정병하 등에게 다시 반역죄를 적용하였다. 이때 법부조병식이 아뢰기를, “역괴 금홍집은 교목세신으로서 관직이 정승에까지 이르렀으나 갑오경장 이후 외교를 빙자하여 군주의 권한을 빼앗는가 하면 일당을 규합하여 음모를 꾸몄습니다. 작년 8월 20일 변란이 일어났을 때도 김홍집은 군흉의 우두머리가 되고 유길준, 조병하, 조희연 등은 그와 호응하여 대소사무를 총리대신에게 결재하도록 조서를 받아내기 위해 온갖 공갈과 협박을 하며 속히 조서를 써내라고 하여 그 조서를 반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마음대로 위복을 누려 무슨 일이든 못하는 일이 없더니 급기야 22일에는 란병을 꾀어 칼과 대포를 가지고 합문을 포위하고, 정병하로 하여금 협박을 하게 하여 속히 폐후조서를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길준조희연 등과 위조를 만든 후 건청궁에 머무는 행합에게 함부로 서명을 받아내어 반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토록 경황이 없을 때 간택을 고집하며 궁내부에까지 와서 강제로 윤허를 청하였고, 11월 15일에는 가까운 곳에다가 병대를 풀어 국문에서 흉기를 휘두르면서 백방으로 협박을 한 후 대내로 들어가 강제로 성상의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8월 20일 이후에는 지척 사이에서 병사들이 포위하여 물샐틈없이 포진하고 있다가 충신과 량신을 살해하여 주상의 세력을 더욱 약하게 하였으니 그 죄가 왕망(왕망)한의 동평릉인. 평제 때 안한공이 되어 직위가 더욱 높아졌으나 평제를 시해하고 영(영)을 영입하여 섬기다가 결국 제위를 찬탈하였음. 편자주 과 조조(조조)후한 패국의 초인(초인). 자는 맹덕. 위의 무제. 편자주 보다 더하고, 그 악행은 이각(리각)후한의 북지인. 동부의 부장으로 있다가 동탁이 사망한 후 차기장군이 됨. 편자주 과 범사후한 금향인. 자는 거경. 형주자사와 로강태수를 지내면서 위명을 떨쳤음. 편자주 보다 더합니다.

그리고 같은 날 반역을 저지를 정병하는 미천한 몸으로 후한 국은을 입어 분수에 지나친 경반에까지 오르고, 또 그는 외국인과 내통하여 반역자와 결탁한 후 해괴한 음모를 하였고, 8월 20일 대행황후가 화를 피하려고 할 때 그는 길을 막고 피하지 말라고 아뢰어 외국 병대가 들어온 것을 보고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고서도 그들이 우리 란군을 진압한 것이라고 하며 처음부터 악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듯 교묘한 말을 꾸며대어 오직 그들의 흉계가 달성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외국 병대들이 와서 호위를 한다고 위조를 만들어 금준기가 그 위조를 전하였습니다. 그들이 호응하여 흉계를 부린 사실은 너무도 소명하여 은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허위조서를 만들어 반포한 후 단발령을 화급히 서두른 것은 그 극악한 음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탄로되었으니 그들의 죄악은 칼을 품은 종무(종무)종은 지명이며, 무는 녀무. 로의 은공 4년 11월에 은공이 종무에 제를 드리고 노의 대부인 위(위)의 집에서 머무르고 있다가 우보(우부)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되었음. 편자주 보다 더 심하고, 그 흉계는 나라를 팔아먹은 진회(진회)송나라 강녕인. 자는 회지. 소흥년간에 승상으로 있으면서 화의를 주장하여 충신 악비를 죽이고 장준, 조정 등을 유배하였음. 편자주 보다 더 간교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두 역적들이 사망하던 날 너무도 경황이 없어 성토를 결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형평을 크게 잃은 결과가 되었으므로 신의 법부에서 그 죄를 바로 다스려 다시 그들을 극형으로 처리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34. 비답

 

전후에 걸쳐 이 죄인을 성토한 소장 중에서 진실한 근거를 발견하여 단안을 내린 사람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짐이 늘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 사건을 생각하면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8월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저지른 많은 흉모는 짐이 그들에게 보고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으니 만고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소장은 그들이 반역한 사실을 명백히 분석하여 그 흉적들의 음모를 간파하고 있으므로 공론을 잘 파악할 수 있으니 짐이 어찌 거듭 말할 필요간 있겠습니까? 그 주달한 내용은 윤허대로 시행하기 바랍니다.”

 

35. 고종의 경운궁 이어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으로 이어하여 백관의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내렸다. 경운궁은 서부의 정릉방에 있으며 선조가 계사년(1593)에 환어한 후 이곳에서 기거를 하였고, 인목대비가 폐위된 후 거처하던 서궁이다.

이때 구미 각국의 공관이 정동에 있었으며 러시아공관이 그중 가장 가까이 있었으므로 고종은 항시 위급한 일이 있으면 러시아공관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경운궁을 단장하여 수시 이어소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소장을 올릴 때마다 그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궁으로 환어하기를 간청하였으나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리고 날마다 토목공사를 벌여 그 화려한 경관이 량궐보다 더 나았다.

 

36. 금병시의 영의정 사양

 

금병시를 영의정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누차 사양하여 면직되었다. 그는 삼남의 어사를 소환하여 피폐한 백성에게 활력을 주자고 하고, 백사의 차함을 폐지하여 관직에 나갈 길을 맑게 하자고 하였으며, 지방대에게 엄한 칙령을 내려 토비를 진정하자고 하였으나 고종은 그렇게 하라고만 하였다.

 

광무 원년 정유(1897년) ①

 

1. 평북관찰부 이전

 

정유년(1897) 건양 2년(청국 광서 23년. 일본 명치 30년) 1월, 평북관찰부를 정주에서녕변군으로 이치하고, 완도군 비금(비금)과 도초 량도를지도군으로 이속하였다.

초5일부터 해와 달과 별이 연 5일 동안 나타났다.

 

2. 우체국설치

 

우체규칙 51조를 반포하였다. 우체국의 설치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3. 교전소 설치

 

교전소를 설치하여 대신을 총재로 임명하였다. 그것은 신구 전적을 절충하여 분류한 서적 1책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는 남정철의 주언에 의한 것이다

 

4. 영국공사맥도날드의 방한

 

영국 공사두납악(맥도날드 : Clause M. Macdonald)이 입경하였으나 다시 떠났다.

 

5. 박제억충북관찰사 임명

 

박제억을 충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6. 홍문관등 직제개편

 

홍문관의 시독을 학사, 부시독을 부학사로 하고, 규장각의 교서를 직각과 대제라고 하였다.

 

7. 리용익의 철도유배

 

리용익을 10년간 철도로 유배하였다.

이용익이 박인환, 조종순등과 함께 금홍륙, 금중환, 한규설, 리윤용 등을 사형에 처하도록 모함하였으나 그들을 대질시킨 결과 아무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용익을 반무률에 적용하였다.

 

8. 일본공사가등증웅의 친서 전달

 

3월, 일본 공사가등증웅이 친서와 훈장을 고종에게 올렸다.

 

9. 서상우, 금가진 등 관찰사 임명

 

서상우는 평북관찰사, 금가진은 황해관찰사,권응선은 강원관찰사, 고령군수조시영은 경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서상우는 폐후조서를 초안하지 않았으므로 고종은 그를 가상하게 생각하여 상으로 이 직을 제수하고, 조시영은 집안이 부호하여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김홍육을 도왔으므로 이 직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김가진은 개명을 구실로 구습을 비난하였지만 그가 해주에 부임하여 교자를 타고 다니면서 출입을 할 때마다 심한 호령을 하여 그 사치스러운 생활이 옛날 감사와 같았고, 본영의 주공을 징색하는 것도 옛날의 예를 따랐다.

 

10. 려수군 신설

 

4월, 전에 전라좌수영인 순천을 분할하여 려수군을 신설하였다.

 

11. 선희궁과 만화당 이건

 

선희궁을 이건하고, 또 경복궁의 만화당을 경운궁으로 이건하여 어진을 봉안하였다.

 

12. 휘릉의 정자각 중건비

 

휘릉의 정자각에 화재가 발생하여 중건비 2만원을 지불하였다.

 

13. 사례소 개설

 

5월, 남정철의 의견을 들어 중추원에 사례소를 개설하고 교전소에서 <서품통편>을 진상하였다.

 

14. 영남, 관동지방의 우박피해

 

영남의 북안, 웅천 및 호서의 옥천과 관동의 양구 등지에 많은 우박(우박)이 내렸다. 거제도가 더욱 심한 피해를 입었다.

 

15. 영제 시행과 홍삼 제조를 폐지

 

이달부터 가물기 시작하여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은 장마가 계속되어 날씨가 개지 않으므로 영제(영제)를 지냈다.

홍삼의 제조를 폐지하였다.

 

16. 홍종철등의 교수형

 

전시독홍종철과 총순송진용등이 각국 공관과 내통하여 정부 전복을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교형을 당하였다.

 

17. 민영준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

 

민영준을 궁내부특진관으로 임명하였다.

 

18. 주영공사민영환의 귀국

 

주영공사민영환이 귀국하였다. 고종은 그가 공사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므로 일찍 귀국하도록 하여 그를 면직하였다. 그는 런던에 가서 각국의 축하사절들이 모두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것을 보고 자기만 남들과 다른 것을 혐오스럽게 생각하여 자신도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다.

하루는 영국 여왕이 조선에서는 머리를 깎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조선 공사의 위의를 보기 위해 접견을 요청하였으나, 그가 알현하였을 때 영국 여왕은 실망하여 그를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 후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가 조국의 체통을 잃은 데 대해 책망하였으며, 자신도 매우 후회를 하였으나 그는 귀국한 후에도 머리를 깎고 양복 입은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19. 증남포와 목포 개항

 

6월, 삼화의 증남포와 무안의 목포에 새로 개항하고 군수를 부윤으로 승격하여 감리사무를 겸직하게 하였다.

 

20. 수원, 원주 등지의 지방대 증설

 

수원, 원주, 공주, 안동, 광주, 황주, 안주, 종성 등지에 지방대 600명을 증원하여 장관 대신 참령을 두었다.

참령의 품질은 병사와 같아, 관찰사와 갈은 예우를 받았으므로 이때부터 그들은 안하무인으로 탄압하여 지방에 끼친 폐단이 옛날 관찰사보다 더하였다.

병졸들도 수령과 품질이 같다는 것을 자랑하여 수령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소요가 발생하여 출정할 경우 적도만 보아도 먼저 도주하였으며, 오직 평민들만 착취하고 사족을 경멸하였으므로 온 나라가 소란하였지만 고종은 그들을 비호하였고, 간혹 군관이 그들 중 더욱 행패가 심한 자들만 골라 법으로 다스렸지만 그때마다 조서를 내려 그들을 용서하였으므로 군의 기강이 더욱 문란하였다.

 

22. 린제군의 서리 피해

 

27일, 관동의 린제군에 서리가 내려 연 4일 밤을 계속하였다.

 

23. 삼남지방의 모충 피해

 

며루가 영남에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여 한 달 사이에 전국으로 전파되었는데, 그중 삼남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24. 침순택을 의정 재임

 

7월, 침순택을 다시 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심순택은 청양의 향제에 있었는데 징소사신이 잇달아 왔다. 그것은 장차 황제로 칭하고 연호를 바꿀 때 심순택이 아니면 그 일을 추진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25. 칭제개원

 

16일, 금년 7월은 광무 원년 8월(양력임)이라는 조서를 내려 이 사실을 천지와 묘사에 고하고, 또 진하를 하라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이때 침순택은 연호의 개정을 의논한 후 「광무」와 「경덕」이라고 쓴 망첩을 올려 주묵이 찍힌 광무를 연호로 정하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리도록 하였다.

“대군주가 말하기를, 우리 국가는 하늘의 총명을 받아 성왕과 신손이 대대로 계승하므로 렬조의 공적과 종실의 덕망이 다시 빛나고 가슴 깊이 젖어들어 그 왕통과 기업이 짐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짐은 덕망이 적고 사리에 어두워, 무궁한 세월을 보내면서 이른 밤까지 왕업에 몰두하였습니다. 그것은 연못 위의 얼음을 건너듯이 조심스러워 조금 쉴 수 있는 여가와 몸이 편안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짐이 림어한 이후 하늘이 복을 내리고 종사가 령을 내려 우리 강토에는 아무 걱정이 없었고, 아름다운 징조는 여러 차례 나타나 밝은 시대를 영원히 누릴 것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승평시대가 오래되어 문예는 시들고 무예만이 판을 쳐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고 모든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어려운 일이 거듭 발생하여 재화와 변란이 극도에 달하였으니 그 일을 어찌 차마 말로 다 하겠습니까?

그때 적신들은 정권을 남용하여 국법이 무너지고 묘사도 폐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짐은 옛 제도를 시행하여 선조를 받들고 국헌을 준행하였으며, 내수외양의 정치를 지향하여 우방들과 강화를 하기 위해 자주권을 체결하였습니다. 그것은 현시대를 참작하고 옛날을 기준으로 삼아 그 장정에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었습니다.

대체로 생각할 때 주왕이 명성을 떨친 것은, 성왕주나라의 제2대 왕. 성왕은 나이 어렸을 때 제위에 올랐으므로 주공이 섭정하여 례악과 제도를 부흥시켰음. 편자주 과 강왕주나라 성왕의 자. 편자주 이 례악의 전성기를 이룰 때부터이며, 한제가 창업한 것은 문제한나라 제4대 제왕. 정치를 잘 하여 천하가 태평하고 백성이 순후하였음. 편자주 와 경제한나라 문제의 자. 편자주 가 원년의 연호를 칭할 때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금년 8꿜 16일에 천지, 종묘, 사직에게 고하여 광무로 건원하였습니다.

하늘이 내리신 융숭한 복과 렬성조가 물려준 중임을 생각할 때 몸을 어루만지며 혼자 걱정도 하였습니다만 전대의 미적을 본받아 윤음을 선포하고 자혜도 베풀어, 아무리 먼곳이라 하더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모든 백성들과 함께 이행해야 할 사항을 좌측에 열거하였습니다. 아! 정권을 장악하여 시대에 알맞는 제도를 만들고 인정을 펴는 것은 모든 백성들과 동화되기를 기대한 것이니 조정에 있는 문무대신들은 짐을 잘 보필하여 하늘에 보답하고, 또 영원히 사해를 맑게 해줄 것을 원근에 있는 여러 백성에게 고하오니 모두 이 사정을 잘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6. 전좌의정정범조의 사망

 

전좌의정정범조가 사망하였다. 정범조는 관록을 가지고 헛된 모습을 취했으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좋고 나쁘다는 말은 듣지 않았지만, 그는 본래 성품이 근신하여 죄악을 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갑오경장 이후 천장을 바라보고 한탄하며 속히 죽기를 바라다가 결국 그의 뜻대로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27. 조존우를 관찰사로 임명

 

조존우를 함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28. 리하영의 일본 부임

 

전권공사리하영이 일본으로 갔다.

 

29. 민영익을 유럽 전권공사에 임명

 

민영익을 전권공사로 임명하여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편의대로 주재하도록 하였다. 그는 민영환의 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향항에 10년 동안 체류하고 있었으나 우리 조정에서는 멀리서 임명할 뿐이었다.

 

30. 서광범의 사망

 

서광범이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사망할 때 화장을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미국인들은 그의 유산을 팔아 그의 아내 금씨에게 주었다. 김씨는 금석규의 여동생이다.

 

31. 러시아 주한공사스페르의 내한

 

8월, 러시아 공사스페르가 다시 공관으로 오고 전공사웨베르가 귀국하였다.

 

32. 알렌의 공사 승진

 

미국인들은 그들의 공사관참찬알렌을 공사로 승진시켜 총령사를 겸직하게 하였다. 그는 고종을 알현하고 국서를 전달하였다.

 

32. 환구단 신축

 

환구단을 신축하여 천지, 일월, 성진, 풍운, 뢰우, 악진, 해독의 신들에게 합제를 하였다.

환구단은 남부 회현방 소공동에 있으며, 그 방위는 해좌사향이다. 이것은 례경금규홍이 아뢰어 의정심순택이 정한 것이다.

 

33. 조민희를 관찰사로 임명

 

조민희를 평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34. 민영규, 박정양 등 각료 임명

 

민영규는 궁내부대신, 박정양은 탁지부대신, 조병직은 학부대신, 정락용은 농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부장리종건은 군부대신을 겸직하게 하고, 리윤용과 침상훈은 찬정을 임명하였다.

 

35. 대한제국의 탄생

 

9월 17일,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이라고 하였다.

을미년(1895) 이후 정부에서는 고종의 마음을 헤아려 황제로 즉위하기를 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미국 등 여러 나라 공사들은 그것이 불가하다고 하였고, 일본 공사삼포오루도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 후 삼포오루가 죄를 지어 떠나자 우리 조정에서는 다시 그 여론이 일어나 점차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각국에서는 강력히 우리측의 의견을 저지하고 러시아 공사도 “귀국이 제호를 쓰면 우리 러시아는 반드시 절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고종은 조금 두려움을 느꼈으나 거의 완성단계에 와서 저지를 받는 것도 별로 보기 좋은 일은 아니므로 몇몇 신료들에게 밀지를 내려 계속 진정을 하게 하였다. 흡사 고종이 뜻을 굽혀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따른 듯한 느낌이었다.

이에 기로신금재현 등은 련명류를 올리고 의정침순택과 특진관조병세도 그들의 뒤를 이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을 하였다. 그들의 주문은 다음과 같다.

“<사기>에, 덕이 천지와 짝할 만한 사람을 황제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삼황중국 고대의 황제. 즉 복희, 신농, 황제. 편자주 , 오제중국 고대의 소호금천씨, 전욱고양씨, 제곡고신씨, 당요, 우순. 편자주 의 공덕이 황천과 합하기 때문에 높이어 일컬은 것입니다. 덕이 더없이 높으면 위호도 높아지고 공이 더없이 크면 존경도 커지기 마련이므로 그 지대한 존경으로 무상의 존호를 천명하는 것은 성제명황들이 다 같이 하는 일이며, 천리와 인사에 있어서도 거슬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전일 어전에서 성의를 다하여 아뢰었습니다만 성상께서는 그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밀지를 내리시니 참으로 발길이 서성거리고 마음이 울적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 우리 나라가 개국한 지 500년이 지나는 동안 성왕신손이 대대로 계승되어 누차 공적이 빛나고 덕망이 백성들의 가슴속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례악의 체제와 의복의 제도에 있어서도 한, 당, 송을 참작하여 한결같이 명나라의 제도를 준행하였으므로 그 문화와 예의가 동일하게 전수되는 것은 오직 우리 나라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상께서는 그 총명과 용기와 예지가 다른 왕보다 탁월하시어, 그 천연스러운 모습은 일월과 같고 그 높은 덕망은 신명과 통하였습니다. 그리고 삼황의 도를 기술하시고, 오제의 심법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어하신 지 30년이 지나는 동안 쌓았던 공적은 삼대하, 상, 주. 편자주 융성기처럼 드높고, 치적은 요전우모서경 우서의 편명. 편자주 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어려움 속에서도 국가를 튼튼히 하시고, 온갖 고민 속에서도 신성하고 광명한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력을 발휘하여 모든 제도가 바르게 되었습니다. 종사가 편안하게 된 것은 위기를 극복하여 태산반석처럼 안전하게 하신 덕분이며 사방이 평정된 것은 요기를 소멸하고 화기를 조성한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대업을 완수하고 교화가 고양되었습니다.

그리고 독립할 기반도 마련하고 자주권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권유한 것으로서 대명을 맞이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만국공법>서경 하서의 편명. 편자주 에도 각국은 자주권이 있으므로 마음대로 존호를 사용하려면 자국민의 추대를 받아야 하되, 단 타국이 승인할 권리는 없다고 하였고, 또 그 하문에 「모국이 왕으로 칭하고 황제로 칭할 경우 모국은 먼저 승인하고 모국은 뒤에 승인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존호를 사용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자주라고 하였고, 승인하는 권리는 남에게 있기 때문에 권리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해서 우리가 자립할 권리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왕을 칭하고 황제를 칭한 나라는 타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존호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국이 먼저 인준하고 모국이 뒤에 인준하는 예입니다. 그리고 먼저 인준한다고 하는 것은 존호를 사용하기 전을 말한 것이 아니라 타국보다 먼저 인준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존호를 사용하지도 않고 타국의 인준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폐하의 높고 큰 덕망은 하늘과 같이 위대하고, 통달하신 도술은 하늘과 같이 모든 것을 다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같이 위대하면 「황」이라고 말할 수 있고, 하늘과 같이 모든 것을 살필 수 있으면 그것은 「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복희, 신농, 요, 순 같은 성인으로부터 한, 당, 송, 명의 대통을 이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황제」의 위호로 높이는 것은 옛날의 것을 법으로 삼아 오늘의 감각을 맞추는 것으로서 그 시기를 고려해 보아도 타당하고, 예의를 근거로 생각해도 타당하옵니다. 그러니 하늘과 백성의 뜻을 순응한 의의에 있어서 그 권고와 유신의 명을 보답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온 나라가 대동단결한 여론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조화의 자취를 거두어 없는 듯 여기시고 충화한 마음을 성상께서 자부하지 않으시니 그것은 비록 말할 수 없이 흠앙할 일이옵니다. 그러나 옛날 제왕의 법도 있는 정치와 사양하는 기풍에 있어서는, 「마음에 거슬린다고 받지 않고, 사양한다고 차지하지 않았다」는 글은 있지 않으므로 감히 많은 동료들과 함께 이구동성으로 호소하오니 윤음을 내리시어 대사를 거행하게 해주시기를 천만번 비옵니다. 그럼 황공한 마음으로 이만 아뢰옵니다.”

이때 그 다음날 다시 다섯 차례나 소장을 올리고, 또 그 다음날에도 두 차례나 소장을 올렸다. 그리고 교지는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짐이 덕이 없어 임어한 지 34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결국 만고에도 없는 변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치도 짐의 뜻대로 되지 않아 눈에 근심이 가득하였고, 늘 혼자 생각할 때는 등에서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막대한 의식으로 걸맞지도 않는 제위에 올리기 위해 진신(진신)들이 소장을 올려 간청하고 대신들도 장계를 올려 간청하고 있으며, 6군과 모든 백성들도 합문 밖에 엎드려 간청하고 있으니 상하가 서로 고집만 피우고 있으면 그칠 날이 없으므로 그 대동단결한 여론을 끝까지 외롭게 할 수 없어 오랜 시일 동안 상의한 끝에 부득이 여론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사는 예의를 참작하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날, 례경금영수가 이 사실을 환구단에 고하기 위하여 환구단 옆에다가 의자를 마련하였다. 고종은 대위에 오른 후 태묘와 사직에 고사를 하고, 정전으로 환어하여 백관의 축하표전을 받았다. (고종이 태묘에 고축할 때 헌종신실에서는 효제라고 하고 철종신실에서는 효종자라고 하였다.)

 

광무 원년 정유(1897년) ②

 

1. 대비 홍씨의 존호와 황후, 황태자의 행례

 

왕대비 홍씨를 명헌태후로 높여 금보책을 올리고 황후, 황태자, 황태자비는 침순택을 정사, 금영수를 부사로 임명하여 행례하였다.

 

2. 대사령 반포

 

-대사반조-봉천승운황제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짐이 생각할 때 단군과 기자 이후 강토가 분할되어 제각기 한쪽씩만 점거하고 있으면서 서로 분쟁만 하다가 고려 때 이르러서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을 통합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태조께서 등극하실 때 본토 이외에 국토를 더욱 넓혀 북으로 말갈(말갈)과의 국경을 접하여 상치, 피혁, 염상(염상), 잠사 등이 생산되고, 남으로는 탐라국을 취하여 귤유(귤유)와 해산물을 조공하게 하므로 국토가 사천리나 넓혀짐에 따라 통일의 위업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례악을 법도화하여 당우의 제도를 숭상하고 산하를 공고히 하여 우리 자손만세의 반석 같은 위업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짐이 부덕한 탓으로, 어려운 때를 만났지만 상제께서 권고하시어 위태로운 시기를 다시 안전하게 하였으므로 우리는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고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신하와 백성, 군인, 시정배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대궐에 와서 외치며 소장을 수십 장이나 올려 기어이 존호를 사용하도록 하므로 짐이 누차 사양한 끝에 끝까지 사양할 수 없어, 금년 9훨 17일 백악의 남쪽에서 천지신명에게 고사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천하의 호를 「대한」으로 정하였으며, 이해를 「광무원년」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직을 태사와 태직으로 고치고, 왕후 민씨를 황후,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습니다.

이에 대명을 이어받아 대호를 칭하고, 또 역대의 고사를 참고하여 대사령을 선포합니다. 아! 지금 보록(보록)을 사용하게 된 것은 하늘에서 복을 내려 준 덕분이며 찬란한 이 대호를 갖게 된 것은 전국 국민의 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천하에 포고하오니 모두 그런 사실을 알아두기 바랍니다.”

 

3. 왕후 민씨의 황후 책봉

 

왕후 민씨를 명성황후로 책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봉천승운황제가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옛날부터 어진 황후는 천명을 이어받고 정도에 순응하여 대내의 존위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풍속과 교화로부터 비롯되어야 나라에 교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덕망이 드러나 그것이 소명하게 전해져야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칭송할 만한 자취가 나타나고 표시할 만한 공로를 행하며 한결같이 혜택을 베풀어 백세를 징계하는 것은 윤리의 떳떳한 규칙이며 역대의 커다란 모범입니다.

우리 황후 민씨는 영예, 숙철하고 온인, 단장하옵니다. 그는 성녀로 태어나 대궐의 빈으로 들어온 후, 신정왕후의 뒤를 이어 지극히 효성을 다하였으며, 종묘를 받드는 데도 엄숙하고 공경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후궁의 빈비들은 현부의 내조를 이행하였고, 황태자궁에서는 아들을 낳는 경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경서와 사기에 밝고 제도와 문물에도 깊은 조예가 있어 짐을 내조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거듭 어려운 때를 당하여 온갖 고생을 다 하였지만 어려운 변란에 처하여도 경륜과 권모를 적절히 행사하였고, 곤전으로서 아무 하자가 없었으므로 위태로운 기회를 편안하게 바꾸어 놓아 큰 왕업의 기틀을 안전하게 하였으니 그가 걸어온 길은 바르고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짐이 즉위한 지 32년 만인 을미년(1895) 8월 20일 붕서(붕서)의 변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만고에도 없는 일입니다. 원수를 갚지 못하고 상기가 지났으므로 짐의 통한은 하늘과 땅처럼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다시 대업을 확대하여 자주권을 누린 것도 실로 곤전이 도운 것이며, 하늘이 은밀한 총애를 내리고 조종이 도우신 덕택입니다. 그리하여 짐이 대호를 받고 곤전도 존호를 받아 새로운 대명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렬조에게 빛나는 일이며 후손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에 그의 융성한 미적을 돌아보니 대명을 고양하기에 알맞으므로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떳떳한 법을 자세히 상고하게 한 후 천지, 종묘, 태사, 태직에 이 사실을 고하고, 본년 음력 10월 11일 「명성황후」로 책봉하니 그 정상과 책문이 알맞고 우악한 은혜도 후하다고 할 것입니다.

아! 은색으로 새긴 그 책문에는 방명이 드러나 멀리 만국까지 미치고 사가들이 붓으로 적은 가사는 빛이 나 영원한 천추만대에 전해질 것입니다. 지금 이 사실을 천하에 공포하오니 모두 알아두기 바랍니다.”

 

4. 중화전과 계천기원절

 

즉조한 당명을 태극전이라고 하였으나 그 후 다시 중화전으로 개칭하고, 달력은 명시력, 국기는 태극기, 즉위일은 계천기원절이라고 하였다.

경축일에 든 비용은 5만원이었으며, 어보제조에 소요된 금은 1천냥으로 그 가격은 4만5천원이었다.

 

5, 각국공사의 축하

 

각국 공사들이 고종을 알현하여 축하하였다.

일본측에서는 공사가등증웅, 서기일치익, 1등영사추일좌도부, 역관국분상태랑, 보병소좌, 상파전경요, 보병대위, 야진진무등이 오고 미국측에서는 공사알렌, 위관급손(미상), 화과도(미상),덕돈(미상), 기관제립시(미상), 군의관불악걸리(미상), 고문관인시덕(닌스테드 : F.J.H. Nienstead)이 왔으며, 러시아측에서는 공사스페르, 참찬관극배(케르베르그 : P. de Kerberg), 영사얼로시보보(우로스포포프 : N Urospopov ff), 탁지부관원알륵세포(알렉세이에프 : K. Alexeiev ff), 갈필도(미상), 참령돌벽비치가(미상), 해군사관희말로포(시밀로프 : Smirnov), 학교 교사주우고포(미상), 군의관처리변기(체르빈스키 : Chervinsky), 육군사관아파락시(아파나시예프 : Afanasiev), 구시민(쿠시민 : Kusmin), 구루진기(미상), 석시(미상), 라달옥(미상), 프랑스측에서는 판사대신갈림덕(플랑시 : C. de Plancy), 부영사로비부(르페브르 : Le Fevres) , 영국측에서는 총영사주이전(조르단 : J.N. Jordan), 서기관오례사(미상), 함장아달우(미상), 고문관백탁안(브라운 : J.M. Brown), 설필림(스트리플링 : A.B. Stripling), 독일측에서는 영사구린(크리엔 : F Krien) 등이 왔다.

 

6. 황태자 은의 출생

 

26일 오후 해시(9시-l1시)에 황제의 셋째아들 은이 태어나, 상궁 엄씨를 귀인으로 봉하였다. 은은 엄씨가 낳았기 때문이다. 그는 은을 분만할 때 아무 산기를 느낄 수 없었으나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아이가 태어난 줄 알았다.

그리고 고종은 그를 매우 사랑하여 늘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대소변을 닦으며 기뻐하였다.

 

7. 리봉의를 경무사로 임명

 

리봉의를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8. 민영규의 명성황후 행장 찬술

 

민영규에게 명하여 명성황후의 행상을 찬하게 하였다. 정범조가 착수하지 못하고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9. 홍릉 조성비용과 고종의 애통

 

10월 27일 오후 7시경에 큰 뇌성이 울렸다. 그리고 28일에는 명성황후를 홍릉에 예장하고 아흡 번째 우제를 지냈다.

처음에 고종은 민황후의 릉제를 장엄하게 하기 위하여 청나라 남경으로 사람을 보내어 명나라 고황후의 효릉을 그려 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 계척(계墄)과 난간을 모두 옥으로 각하여 문채를 만들었음을 보고, 그 경비는 우리 국고의 1년 경비에 해당하여 10분의 1도 미치지 못하므로 그 일을 포기하고 부득이 생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전후로 든 비용은 거액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조의 산릉 중에서 가장 훌륭하였다. 제육가만 해도 6만냥이 들고 호여전(호여전)은 6만2천여 냥, 여군은 7천명, 등롱은 준비한 이외에도 1,100쌍을 더 진열하였으며, 수릉부호전은 105결이나 되었다. 다른 비용도 이와 상당하여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고종은 황후의 신당에 들어가 땅을 치며 통곡하여 눈물이 방울방울 얼어붙어 있어, 군신들은 한기로 인하여 옥체가 감손될까 싶다고 간하였으나 끝까지 듣지 않았다.

 

10. 일황의 조의사절 파견

 

일황이 특파공사가등증웅을 시켜 다음과 같은 신임장을 봉정하였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만세일계의 황제위에 오른 대일본국 대황제는 위덕이 높은 좋은 친구 대한국 대황제폐하께 삼가 아뢰옵니다.

짐은 폐하께서 대황후폐하의 인산을 봉행하시므로 귀국에 주재하는판리공사 정오위훈오등 가등증웅을 특파공사로 임명하여 장지로 보냅니다. 짐이 가등증웅을 특파공사로 임명하는 것은 짐의 애도를 표하기 위한 것이므로 폐하께서는 이 뜻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폐하께서도 강녕하시기를 비옵니다.”

신무천황즉위기원이천오백오십칠년명치삼십

년십일월초팔일 어동경 친서명 령새어명(국새)

외무대신 남작 서덕이랑 개인.

발인할 때 각국 공사들이 조문하였다.

 

11. 명성황후의 련제와, 상제 및 혼전설치

 

명성황후의 련제는 12월 12일에 치르고, 소상은 무술년(1898) 정월 21일 치러 관료와 백성들은 즉일 상복을 벗었다. 그리고 경효전의 조석전은 상식을 하고 낮에는 다례만 행하여 8월 기진까지에 한하여 혼전에는 상생례를 마련하기로 하였으나, 오랫동안 철거하지 않고 영궤(령궤)에 제물을 풍성하게 차려 놓고 차(다)를 올릴 때도 록용탕을 사용하였으므로 제사를 지낸 관원들은 모두 졸부가 되었다.

 

12. 명성황후의 석복 거론

 

인산을 마치고 장례원경금영목이 석복 절차를 대신들에게 묻자 의정침순택이 다음과 같이 상언하였다.

“<대명회전>을 살펴보면 홍무명나라 태조의 연호. 편자주 15년에고황후의 상복은, 송나라 제도를 인용하여 문무관은 자의로 상복을 벗되 관원들은 참최복(참쇠복)을 입어 27일이 지나면 상복을 벗고, 군민남녀는 3일간 소복을 입게 하며, 황비, 황태자비, 공주, 종실 이하는 3년 동안 제최복(제쇠복)을 입었습니다.

또한 영악명나라성조의 연호. 편자주 5년에 문황후의 상복은, 고황후 때 례제를 준행하고 또 제왕 및 공주 등의 복제를 정하여 세자, 군주는 모두 제쇠복을 입되 불장기지팡이를 짚지 않고 기년상을 치름. 편자주 로 하여 성복일로부터 27일 만에 상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가정(가정)명나라 세종의 연호. 편자주 7년 효결황후의 상에는, 문무백관은 성복일로부터 27일 만에 상복을 벗었고, 가정 26년 효렬황후의 상에는 백관들이 참최복을 입되 27일 만에 상복을 벗었고, 군민은 소복을 입되 문상일로부터 27일 만에 상복을 벗게 하였습니다. 친군왕, 세자, 왕비 이하는 참최복을 입되, 27일 만에 상복을 벗고, 군민남녀는 소복을 13일 동안 입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최복과 제최복을 막론하고 일자를 달(월)로 바꾸는 제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황후의 복제는 27일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명나라의 예제에 맞을 뿐더러 이것은 국조에서 이미 시행하였던 법입니다. 그러나 미천한 신으로서는 억단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교지를 받은 후 의정의 의견이 이와 같이 전개되므로 홍무년간에 고황후의 상례에 의한 개정을 하여 신민의 복제는 소상을 치르고 상복을 벗도록 하였다.

 

13. 홍릉석물의 도괴

 

홍릉의 석물이 아무 까닭 없이 도괴되자 고종은 크게 노하여 제조 이하를 치죄하고, 금병시를 제조로 임명하여 중건비 3만원을 내렸다.

그러나 김병시는 강력히 사양하므로 침순택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14. 금윤식과 리승오 등의 유배

 

11월 초2일, 오랫동안 지진이 발생하여 금윤식, 리승오 등을 유배하였다. 이때 여론을 들면 김윤식은 위조에 서명하였으나 일본인에게 아첨하여 그것을 은폐하고, 이승오는 역적에게 아부하여 폐후조문을 지어 종묘에 고하였으므로 그들을 유사에게 인계하여 처형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아직 군권이 부진하고 외간의 여론이 경새하니 아직 은연자중하여 최저한의 감형을 하라고 하였다.

이때 이승오가 유배생활을 한 지 수 년 만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리충식은 조정에서 귀장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감히 분상을 하지 못하였고, 김윤식은 첩을 얻어 아들 두 명을 낳고 자봉도 매우 여유롭게 하여 그의 나이 70세가 되도록 정력이 소년처럼 강하므로 사람들은 그가 장차 부권할 징조라고 하였다.

 

15. 고종의 러시아 경축절 축전

 

12월, 고종은 러시아의 국명을 명명한 날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폐하의 경절에 짐은 축하를 보내어 돈독한 마음을 표하며, 아울러 폐하의 정치가 영원히 융성하기를 비옵니다.”

광무 원년 12훨 18일 경운궁 어성함.

아황답전

“대한경대황제폐하!

짐이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귀폐하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며, 아한간의 친의가 더욱 돈독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어 명.

 

16. 부부인 민씨의 사망

 

16일, 부부인 민씨가 사망하자 고종은 운현궁으로 행차하여 성복을 하려고 하였으나 조병세가 간하여 중지하였다. 이것은 고종의 교시에 의한 것이므로 결국 대궐에서 거애하였다.

이때 례관이 올린 복제를 보면, 황제는 제쇠복을 입되 지팡이를 짚지 않고 기년상을 치르며, 대원군은 제쇠복을 입되 지팡이를 짚고 기년상을 치르도록 하였다.

조병세는 대신으로 기용된 후 일시 명망이 높았으나, 그는 이때 고종을 죄악에 빠지도록 유도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매우 박덕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17. 리유인을 법부대신 임명

 

리유인을 법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18. 기호지방의 흉년

 

이해 가을에 기호지방에는 흉년이 들었다.

 

광무 2년 무술(1898년) ①

 

1. 명시력의 사용

 

무술년(1898) 광무 2년 정월(청국 광서 24년. 일본 명치 31년), 처음으로 명시력을 사용하였다

 

2. 흥선대원군 사망

 

2월 2일, 대원군하응이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는 79세였다.

고종은 대유재에서 거애하고 신기선을 대신 보내어 제를 올렸다. 복제는 제쇠복을 입되 지팡이를 짚지 않고 기년상을 치렀으며, 호상절차는 부대부인의 례장청에 맞추어 시행하였다.

리하응은 병이 위급할 때 리재면을 불러, “내가 주상을 알현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 이렇게 세 번을 말하자 이재면은 죄를 지을까 봐 그 말을 감히 알리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어가가 오지 않느냐고 물은 다음 긴 탄식을 하고 운명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목이 메도록 통곡하였다. 이하응은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공과가 상반하였다.

그는 갑술년(1874) 이후 명성황후와의 사이가 날로 악화되어 수차례 위태로운 일이 있었으나 10여 년을 두문불출하고 있는 동안, 국가에 무슨 변이 있으면 군중들의 추대를 받아 누차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좌절되어 거의 자멸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은원의 일념이 사망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협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들수록 경륜이 쌓이고 그 명성도 외국에까지 들리므로 조야에서는 그를 대로로 의지하여 그가 사망할 때는 원근이 모두 슬퍼하였다.

 

3. 제주민란

 

제주에서 민란이 발생하여 목사리병휘를 축출하였다. 이때 육지에서 살던 방성칠이라는 사람은 갑오경장 때 제주로 들어가 참서와 성력 등의 술로 군중을 현혹하여 제주도의 왕이 되려고 하였다. 이때 이병휘는 탐욕과 학정을 자행하였으므로 방성칠은 군중을 선동하여 그를 쫓아내고, 유배된 사람들의 관직에 서명을 받아내어 작은 조정을 꾸미고자 하였다.

이때 금윤식, 리승오, 서주보, 정병조 등이 유배중에 있다가 크게 놀라 명월도로 도주한 후 방문을 내걸어 역적이든 평민이든 모두 효유를 하였고, 또 백성들을 모집하여 적도를 토벌하므로 아전과 교졸들은 안에서 호응하여 방성칠을 처형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6월 중에 김윤식 등을 내군의 군도로 이배하였다.

 

4. 월병호와 민종묵 등의 대신 임명

 

조병호를 탁지대신, 민종묵을 외부대신, 리완용을 전북관찰사, 민영기를 황해관찰사, 안경수를 경기관찰사, 황기연을 함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5. 탁지부고문관브라운의 해임

 

탁지부 고문관브라운을 해임하였다. 브라운은 3년 동안 국가의 예산을 맡으면서 경비를 절약하여 남은 예산으로 절반이 넘는 일본 국채를 갚았다. 그러나 고종은 자금을 요구할 때마다 그가 강력히 견제하여 요구대로 이행하지 않으므로 늘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민영준이 상소하여 전곡과 갑병은 외국인에게 맡겨서는 안된다고 하자 브라운은 불안해하며 해임을 요구하였다.

 

6. 내부대신남정철의 면직

 

내부대신남정철이 면직되었다. 남정철은 그 직위에 오래 있으려고 하였으나 그는 금홍륙과는 모르는 사이였다. 이때 백관들의 출척은 절반이 김홍육의 마음에서 좌우되었으므로 남정철은 그의 첩에게 김홍육의 첩과 자매결연을 맺도록 하여 자신을 의탁하기 위해 그와 왕래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첩은 김홍육과 눈이 맞아 김홍육의 첩에게 질투를 사고 있었다.

하루는 남정철이 연회를 베풀어 손님이 자리에 가득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 한 기생이 마루로 올라와 “남정철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김협판의 첩입니다. 당신이 그 관직에 오래 있으려면 당신 나름대로 방법이 있을 텐데 어찌 첩으로 하여금 남의 남편과 정을 통하게 하여 우리의 정을 떼려고 하십니까? 당신도 대신입니까?”라고 하자 자리에 있던 손님들은 귀를 가리고 일어났다.

그 후 남정철은 다른 일을 핑계로 체직을 바라다가 세 번째 상소하여 면직되었다.

 

7. 황성신문의 창간

 

<황성신문>을 간행하였다. 국한문을 혼용하여 시정을 공격하고 인물을 평가하는 등 아무 기탄없이 지적하므로 사방에서 앞을 다투어 구독하였다.

 

8. 침상훈과 민영기 등을 각료에 임명

 

3월, 조서를 내려 흉년에 식생활이 어려우므로 각 항구는 5개월을 기한으로 미상들의 선세를 감면하여 백성들이 식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경기, 충청, 강원, 함경 4도에 진청을 설치하였으나 관청에 저축한 양곡이 없으므로 가족을 계산하여 돈으로 지급하였다.

 

9. 박정양, 리도재 등 대신 임명

 

박정양을 내부대신, 리도재를 농부대신, 조병직을 외부대신, 조병호를 학부대신, 침상훈을 탁지대신, 민영기를 군부대신, 리근명을 찬정으로 임명하였다.

 

10. 안경수, 금영덕등 관찰사 임명

 

안경수를 황해관찰사, 금영덕을 경기관찰사, 정주영을 충남관찰사, 민영철을 전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1. 러시아 주한공사마튜닌의 내한

 

러시아 공사스페르가 해임되고 신임공사 겸 총영사마투녕(마튜닌 : N. Matuhine)이 내한하였다.

 

12. 대원군의 장례

 

윤달 26일, 대원군의 장례를 치르면서 부대부인 민씨도 부장하여 다섯 번의 우제를 지냈다. 장례비로 내린 내하전은 6만5천원이었으며, 장지는 공덕리의 수광생전에 지표를 해둔 가묘 편자주 이었다.

그리고 리순익이 묘지명, 리용원은 신도비명을 찬하였으며, 발인할 때 내외 방민들이 상여 메기를 지원하므로 경무청으로 하여금 금지하도록 하였다.

고종은 처음에 령연에 나가 결별곡을 하기 위해 호위병을 배치하였으나 갑자기 중지하였다. 상여가 서문으로 나갈 때 고종은 마루에서 바라보며 오랫동안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통곡소리가 밖에까지 들려 사람들은 천륜에 감격한 것이라고 하였다.

영국영사주이전(조르단 : J.N. Jordan)이 주한공사로 임명되어 알현하였다.

 

13. 성기운을 유럽각국 전권공사에 임명

 

성기운을 전권공사로 임명하여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로 가서 공사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프랑스인 도울도(드롤르 드 글레옹 : Delort de Gleon)가 프랑스의 서울파리에서 개최한 만국박물회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대한 박물국 총무대원민병석을 서울박물국 총재대원으로 임명하고, 민영찬은 부원으로 임명하였다.

 

14. 조병직을법부대신에 임명

 

4월, 조병직을 법부대신, 서정순과 리종건을 찬정, 박봉빈을 평북관찰사, 리근용을 황해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5. 광업업무의 궁내부 이속

 

모든 광업을 궁내부로 이속하였다.

 

16. 리젠드르를 궁내부 고문관에 임명

 

미국인 리선득(리젠드르 : C. W. Legendre)를 궁내부 고문관으로 임명하였다.

 

17. 대원수부설치

 

대원수부를 설치하여 관리를 두었다. 고종이 친히 륙, 해군을 통솔하고, 황태자는 원수로서 모든 업무를 총괄하였다.

그리고 모든 군사업무는 원수부에서 공문으로 작성하여 내외 군부로 보냈다. 이것은 구미 각국의 예에 의한 것이다.

 

18. 금재풍 등의 유배와 안경수의 망명

 

금재풍, 리충구, 리룡한, 리종림, 금기황, 리조현 등을 호남의 여러 섬으로 유배하였으나 안경수는 망명하였다.

안경수 등은 고종에게 선위를 하라고 협박하면서 허위조서를 반포하려다가 리남희의 밀고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이때 여론이 자자하여 박영효가 일본에서 의화군리강을 추대하려고 하였지만 본국에 손을 쓸 기회가 없으므로 안경수 등을 시켜 선위를 음모하게 한 후에, 왕자의 복귀를 구실로 이강을 데리고 나와 시국을 바꾸려고 하고 안경수가 그의 부탁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박영효를 두려워하여 그를 이 옥사에 연루하지 못하고 대충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이때 안경수는 일본공관으로 도주하였고, 이 사건에 박정양과 민영준도 관련이 있다는 말이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불문에 부쳤다.

 

19. 환구단 목창 화재

 

환구단의 목창(목창)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20. 삼척군의 서리 피해

 

5월 15일, 강원도삼척군에 밤마다 서리가 내려 콩잎이 모두 말라 버렸다.

 

21. 량지아문 설치

 

량지아문을 설치하여 박정양, 침상훈, 리도재 등을 총재로 임명하고 리채연, 고영희 등을 부총재로 임명하였다.

 

22. 철도사 설치

 

철도사를 설치하여 리용익을 감독으로 임명하고, 브라운을 파견하여 지형을 답사하게 하였다.

그 선로는 서울에서 목포까지 연결하고 북쪽으로는 원산을 거쳐 경흥까지 이어졌다. 또 원산에서는 평양을 거쳐 증남포까지 이르고, 경흥에서는 의주까지 이어졌다.

 

23. 조종필, 리종관등을 관찰사에 임명

 

조종필을 강원도관찰사, 리종관을 함북관찰사, 조한국을 경북관찰사, 조병호를 학부대신 그리고 금영수를 참정으로 임명하였다.

 

24. 금병시의 의정 사양

 

금병시를 의정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강력히 사양하였다.

그는 누차 강요를 받다가 때로는 의정이 되기도 하였지만 월급을 받지 않았다.

 

25. 최시형의 처형

 

동비적괴 최시형이 처형되었다. 그는 갑오년(1894)에 리천과 원주 산중에 숨어 있다가 그의 일당 황만기, 박윤대,송일회 등의 밀고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2세로, 그의 모습을 그려 나라 안에 배포하였는데 그 형상이 매유 흉하고 이상스럽게 보였다. 그를 밀고한 세 사람도 징역을 살았다.

그리고 전현감황기인(황기인)이 상소한 내용에 「내외 신료들이 최시형과 내통한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봉서(봉서)중국 후한인. 편자주 가 장각후한 거록입. 황로의 도를 신봉하여 대현량사로 칭하고 제자를 수십만 명 두었으며, 령제 때에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가 황보숭에게 망하였음. 편자주 과 내통하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그 뿌리를 조사한다」고 하였다. 이에 법사에서는 황기인이 모함을 한다고 하여 그도 답형을 당하였다.

 

26. 무술년의 대홍수

 

국내에 홍수가 창일하였다. 호남은 평지의 수심이 1척 남짓 되었다.

 

27. 함북 성진군의 신설

 

함북의 길주에 성진군을 신설하였다.

 

28. 조병직을 외부대신에 임명

 

6월, 윤용선을 참정, 조병직을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29. 금홍륙의 유배

 

금홍륙을 흑산도로 유배하였다. 그 조서는 다음과 같다.

“교섭을 하는 이때, 말 한마디라도 착오가 생기면 그 영향이 적지 않은데 김홍육은 교사한 자로서 국은을 생각지 않고 동을 가리켜 서라 하고, 옳은 것을 부정하여 양국의 사이를 규리(규리)시키고, 또 사사를 핑계로 못하는 일이 없으니 그 죄를 생각하면 어느 형벌이 적합하겠습니까?

전한성판윤김홍육을 법부에 명하여 적합한 법률을 적용한 후 유배하도록 하였습니다.”

 

30. 리근명을 내부대신에 임명

 

리근명은 내부대신, 리윤용과 민병석은 찬정으로 임명하였다.

 

31. 블라디보스토크 이주민들의 정부 보호요청

 

해삼위에 류입한 서북민의 수는 6만여 호나 되므로, 정부로 공문을 보내 관청을 설치하여 유민을 보호하도록 요청하였다.

 

32. 리건창의 사망

 

전참판리건창이 사망하였다. 그의 성품은 청백하여 악행을 미워하고 시대와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아 벼슬을 하지 않고 있다가 진사시에 급제한 지 40년 만에 겨우 가선이 되었으며, 갑오년(1894) 6월에는 통곡을 하고 귀향한 후 다시는 서울에 가지 않았다. 이때 그는 풍병을 앓고 있다가 강화의 전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조문을 하였다. 그의 문장은 전아하여 홍석주1774~1842. 조선조 중기의 문인. 자는 성백, 호는 연천. 편자주 와 쌍벽을 이룬다고 하였다.

 

33. 경남 각군의 모충 창궐

 

경남 각군에 큰 장마가 계속되어 며루(모충)가 일기 시작하였다.

 

34. 아프리카에 대운석

 

아비리가(아프리카)주의 희망봉 밑에 큰 별(성)이 떨어졌는데, 길이는 48m이며 넓이는 40m, 무게는 50톤으로 그 별이 떨어진 곳은 50척이나 파였다.

 

35. 리유인과리대준등 유배

 

7월, 리유인은 고금도, 리대준은 임자도로 유배하였다.

갑오년(1894) 이후 이대준은 해삼위로 들어가 러시아의 관리 마튜닌을 만나 우리 나라에서 변이 일어날 때 일본에게 위협당한 상황을 호소하였다. 이때 마튜닌은 분통해 하며 그의 정부에 보고하여 호위병을 파견하고 그는 이해 봄에 공사로 왔다.

이때 이대준은 이유인에게 말하기를, 고종에게 밀칙을 지어 러시아에 아부하는 말을 많이 하게 하자고 하였다. 그 후 이대준은 그 밀칙을 가지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를 만나 함께 배를 타고 왔는데, 일본인들은 그들의 행적을 염탐하여 힐책하므로 고종은 그 두 사람에게 책임을 돌려 이 명을 내렸다.

 

36. 금병시의 사망

 

26일, 특진관금병시가 사망하자 고종은 친히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시호를 청하는 장계도 받지 않고 문충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그의 사망에 대한 은전이 매우 후하였지만 그의 집에서는 유언이라고 하면서 례장을 사양하였다.

김병시는 부유한 가정에서 생장하였으나 본래 성품이 청검하여 전원에서 수입한 것으로는 의식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는 세력과 직위도 강력히 회피하여, 시속배들과 같이 비루해질까 두려워하였지만 고종은 그를 사랑하여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대궐에 나가 고종을 대할 때 강직한 말을 하여 실책을 바로 공격하였고, 심지어는 모 자를 벗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눈물을 흘린 적이 누차 있었지만 고종은 비위에 거슬리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 김병시의 종형 금병덕은 의제를 간하다가 한 번 배척당한 후로는 다시 아뢰지 않고 전원으로 돌아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김병시는 서울에서 맴돌며 관직이 몸에서 떠나지 않으므로 간혹 어떤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여 김병덕의 용기를 따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의 서자 금댁규는 장흥군수로 기부되어 부임하다가 선박이 파괴되어 사망했다. 큰아들 금용규는 절름발이였으나 고종이 그를 대과로 발탁하자, 김병시는 폐질이 있는 사람에게 너무 분수에 넘는 일은 맞지 않다고 하면서 소장을 을려 강력히 사양하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그가 명예를 바란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은 결국 과거에 급제하였다.

 

37. 침순택을 의정에 재임명

 

다시 침순택을 의정으로 임명하였다.

 

38. 녀학당의 남녀동등권

 

북촌 녀학당의 부녀자들은 여자들을 모집하여, 입학한다는 광고문을 돌려 남녀의 동등권을 누리자고 하였다.

 

39. 민영돈의 전권공사임명

 

8월, 민영돈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전권공사로 임명하자 그는 길을 떠났다.

 

40. 민영환, 박제순 등을 대신에 임명

 

민영환은 군부대신, 조병호는 탁지대신, 박제순은 외부대신, 리도재는 학부대신, 민병석은 농부대신, 박정양은 찬정으로 임명하였다.

 

41. 금홍륙의 처형

 

금홍륙이 처형되었다. 그가 유배지로 갈 때 아연(아연) 한 봉지를 어선주사공홍식에게 주며 어선에 타서 올리도록 부탁하자, 공홍식은 금종화를 시켜 그 일을 완수하면 은전 1천원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김종화는 양식료리를 만들어 어소에 올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만수절을 기회로 아연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침 가배차(가배다)가 부글부글 끓고 있어 그는 아연을 끓는 물 속에 넣었다.

그 후 고종은 그것을 겨우 한 번 마시고 토하고, 태자도 맛을 보다가 현훈중(현훈증)을 일으켜 쓰러졌으며, 환관과 희빈들도 그 차를 맛본 사람들은 구토를 하거나 복통을 일으켜 대궐 안은 온통 소란이 일어났다.

급기야 국문이 시작되었으나 김종화와 공홍식은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었다. 이때 김홍육을 호송한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공홍식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칼로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김홍육은 도착한 후 큰 소리로 승복하였지만 그가 하는 말은 불쾌한 말이 많았다.

그는 공홍식, 김종화 등과 함께 교형으로 처형되었고, 김홍육의 아내는 임신한 지 5개월째여서 가벼운 형을 주어 3년을 유배하였다.

그리고 도성 사람들은 김홍육의 시체를 끌어내어 살을 오려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민영소가 대궐 안에서 숙직을 하면서 어선을 맛보며 불의의 사고를 방지하였다.

 

42. 윤용선을 의정에 임명

 

의정침순택이 소장을 올린 후 귀향하자 윤용선에게 특별히 대광계품을 주어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광무 2년 무술(1898년) ②

 

1. 독립협회장 윤치호의 정부탄핵

 

금홍륙의 옥사가 발생하자 독립협회장 윤치호 등이 상소하였다. 그 내용은 법부대신신기선과 재판장리인우는 감금을 잘 하지 못하고, 침순택과 윤용선 등은 엄한 성토를 하지 못하였으며, 리재순, 침상훈, 민영기 등은 차(다)맛을 보지 않았으므로 이들을 모두 엄한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중에서도 심순택이 그들의 우두머리라고 하자, 심순택은 분통을 참지 못하여 관직을 버리고 성안을 나갔다.

그러나 김홍육이 처형된 후 중추원의장신기선은 옛날 법에 의하여 그를 처형하라고 간청하자 윤치호 등은 다시 새로 반포한 홍범률 중에 「죄인을 체포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계속 소장을 올려 공박하고 아울러 칠신의 죄상까지 지적하면서 대궐문 앞에 부복한 채 물러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또 찬정조병식을 대면하여 꾸짖기를, “50년 동안 관리로 있으면서 나라를 좀먹게 하고 백성들을 병들게 한 사람이 늙어서도 죽지 않고 있으니 이제는 모든 일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소인들이 일당을 조직하여 또 정사에 참여하고 있으니 종사가 폐허로 된 것을 목격해야만 마음이 통쾌하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조병식은 수치를 느끼고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이때 도하의 군민들은 정부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으나 공격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가, 독립협회에서 공의를 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뒤질세라 달려왔다. 신사와 관리로부터 시골 서민에 이르기까지 강개한 뜻을 품고 있다가 그 뜻을 펴보지 못한 사람들도 흔연히 달려와 그토록 막강한 세력이 형성되므로 윤치호는 칠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고영근도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리기동, 금정근 등을 5흉으로 지칭하면서 여섯 차례나 소장을 올려 그들의 처형을 간청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은 대궐을 지키고 있으면서 땅이 꺼지도록 고함을 지르고, 종가에는 큰 목책을 설치하여 그곳에도 군중이 진을 치고 있으면서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고종은 엄한 비답을 내려 누차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그들은 끝까지 명을 듣지 않고 있어 난리가 일어날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2. 정범조와 한장석의 시호

 

정범조의 시호는 문헌, 한장석의 시호는 효문이라고 하였다.

 

3. 민병석, 김명규 등을 대신에 임명

 

민병석을 궁내부대신, 금명규를 농부대신, 조병직을 탁지부대신, 박정양을 참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최익현은 찬정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여 임명이 반려되고, 신태휴는 경무사로 임명되었다.

 

4. 가등증웅의 귀국

 

9월, 일본 공사가등증웅이 귀국하였다.

 

5. 중추원의 관제개정

 

중추원의 관제를 개정하여 의장과 부의장 각 1명, 의관 50명을 두었는데, 절반은 정부가 추천하고 또 절반은 독립협회에서 추천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대간을 오랫동안 폐지하여 언로가 막힌다고 생각하고 중추원에 대간직을 두게 하여 의관의 서열을 두었으나 그것은 명분뿐이었으며, 언제나 의관이 궐석하면 은전 1천민을 바치게 하여 의관직에 있게 하였다. 매관매직하는 관습이 이때부터 그 범위가 넓어졌다.

 

6. 윤치호와 신기선의 왕복서신 내용

 

윤치호가 신기선에게 보낸 서신 내용에, 금홍륙을 처형하라는 간청에 대해 질책하고 또 그에게 관직에서 물러나라고 권하였다. 이때 신기선은 다음과 같이 답서를 보냈다.

“이번에 주방(주방)에서 일어난 사건은 개국 이후 일찍 없었던 일로서 우리 조정에서 북면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이 역적을 참하여 그 살을 뜯어먹고 그 껄질을 벗기지 않으려 하겠습니까?

경장 이후 극형이 교형에 그치고 있으니 이것이 비록 각국의 통례라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의 기풍으로 헤아려 본다면 대역의 형벌이 하찮은 교형으로만 처리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신인의 분통을 터뜨리거나 란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법을 고친 지 1주년도 되지 않아서 을미년(1895) 8월, 천고에도 없는 역적의 변이 있었고, 계속해서 변란을 음모한 옥사사건이 매년 발생하다가 금년의 변란으로 인하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옥사를 엄하게 다스리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의관들이 격분을 참지 못하여 회의를 개최하고 련명소를 올려 명백한 법률을 적용하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이것은 충분이 격하여 말이 혹 과격해지면 약간은 시대에 어긋난 경우도 있게 마련이니 그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는 다만 법률을 타국과 동일하게 하고 새로 만든 헌장을 조금도 변경하지 않으려고만 생각하여 준절(준절)한 말로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이 될 뿐 아니라, 여러분들은 많은 구안자들이 옆에서 국가의 역적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는 것은 우려하지 않고 법률이 과하다는 것만 우려하고 있다고 말한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까?

저는 본래 마음속으로 계산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능지처참과 사형 등의 가혹한 형벌은 오늘날 시행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단 대역죄로 참형을 할 경우에는 끝까지 회의를 거쳐 품주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만일 이렇게 해도 승인을 받아내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사직을 시켜 물러나게 해야 하며, 여러분의 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비록 아무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명색 대신의 직위에 있는데 관리의 인사권을 어찌 민회에서 함부로 장악하려고 하십니까? 이것도 외국의 법이라고 하겠습니까? 윗사람을 경멸하고 아랫사람을 마음대로 갈아치워 아무 한계도 없이 대신의 진퇴를 자신들의 직권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이것은 술에 취한 행위와 같고 광인들의 행위와도 같은 일입니다. 아무리 그 말을 생각해도 나의 주장은 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 성상은 훈시를 내려 “윗사람이 그 도를 잃어 민심이 흩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서인이 여론을 일으키지 않을 것인데 이것은 윗사람의 과실로 그렇게 된 것이니 여러분을 위해 매우 우려되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7. 한규설, 심상훈 등을 대신에 임명

 

한규설을 법부대신, 침상훈을 내부대신, 민병한을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조병세를 의정, 리⯶영을 참정, 유기환과 박기양을 찬정으로 임명하였다.

 

8. 독립협회원 이상재, 방한덕등의 태형

 

독립협회의 두목 리상재, 방한덕,류맹, 정항모, 현제창, 홍정후, 리건호, 변하진, 조한우, 렴중모, 한치유, 남궁억, 정교, 금두현, 금구현, 유학주, 윤하영 등을 법부에 수감한 후 법률에 의하여 답 40대로 징계하였다.

렴중모는 전좌의정정범조의 하인으로 갑오년(1894) 이후 조반에 올랐다. 하루는 그가 중추원에 가서 여러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제공들은 옛날 먼지가 뱃속에 가득 차 있으니 어느 때 개화를 하겠습니까? 개화를 하려고 하면 이 중모의 집에서 황실과 혼인하는 날이 와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분통해 하였다.

이것은 시속배들과의 인품이 이미 혼동되어 조금만큼의 명분의 한계도 없어진 것이다. 사대부가 옛날 하인들과 의자에 마주앉아 동등한 예우를 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오히려 침해를 당하여 종종 생각지도 않은 모독을 당하기도 하였다.

 

9. 함남 정평군에 우박 피해

 

관북의 정평군에 우박이 많이 내렸다.

 

10. 광산세, 어염세 등을 내장사로 이관

 

국내의 광산, 어염선, 곽세 및 각 둔토를 탁지부로 이속하였다가 다시 내장사로 이관하라는 명을 내렸다.

 

11. 민영규, 민영환 등을 대신에 임명

 

10월, 민영규를 궁내부대신, 민영환을 내부대신, 권재형을 농부대신, 박정양을 참정, 금명규를 찬정, 리근호를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12. 의정조병세의 면직과 각료 개편

 

의정조병세를 면직하고 박정양을 농부대신, 침상훈을 군부대신, 한규설을 법부대신, 민영기를 탁지대신, 김명규를 학부대신, 리근명을 내부대신, 박제순을 외부대신, 민영환을 참정, 서정순과 권재형을 찬정으로 임명하였다.

 

13. 함남 사름들의민영주 교체 요청

 

황기연을 평남관찰사, 민영주를 함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함남 사람들은 민영주가 관찰사로 임명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대궐로 달려가 그의 체직을 간청하고, 그가 현지에 부임하기만 하면 밟아 죽일 것이라고 하자 민영주는 두려움을 느껴 의원면직하였다.

 

14. 각료개편

 

박정양을 탁지부대신, 서정순을 참정, 민영환, 조병호, 리도재, 금명규, 윤용구, 한기동 등을 찬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윤용구는 강력히 사양하였고 한기동은 그때 재직중이었으므로 그도 강력히 사양하였으며, 금영준은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15. 조종필, 금영준 등을 관찰사에 임명

 

민영기를 평남관찰사, 조종필을 함남관찰사, 금영준을 강원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6. 홍종우, 길영수 등의 만민공동회 습격

 

11월, 홍종우와 길영수 등이 민회를 습격하고 도주하였다. 이때 리석렬이란 사람이 상소하여 박영효의 사면을 간청하고, 그를 이어 윤시병이 정부에 둘 만한 사람 10여 명을 추천한 가운데 박영효를 끼어 넣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협회에 적을 두고 있었다.

고종은 잇달아 엄한 교지를 내리기도 하고 협회의 문 앞에까지 가서 선유를 하였지만 많은 협회원들은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홍종우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관동과 경기 지방에서 행상을 하는 상민 수천 명을 동원하여 정릉에서 신문까지의 사이에 수미협공을 개시하여 목각을 마구 휘둘렀다. 이로 인하여 사망자를 10여 명이나 내고 그 남은 무리들이 사방으로 도주하였다.

이때 시민들은 모두 점포를 닫고 군부에서는 병력을 파견하여 정동을 수비하면서 행인의 로표를 일일이 조사하므로 도하에는 큰 소란이 일기 시작하여 고영근은 일본공관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민회는 다시 회의를 개최하여 홍종우, 길영수, 조병식, 리기동, 민종묵, 민영기 등의 가댁을 모두 헐어 버렸으나 이때부터 민회는 부진하기 시작하였다.

 

17. 가등증웅의 귀환


일본 공사가등증웅이 귀환하였다.

 

18. 리근 을 경무사에 임명

 

리근 을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리근호의 아우이다.

 

19. 독립협회장 고영근의 상소 저지

 

11월, 시원임과 칙임관 이외는 상소를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독립협회장 고영근이 자주 상소하여 시정을 논하였으나 고영근의 관품은 주임에 불과하기 때문에 참정서정순에게 이런 제의를 하게 하여 주임관 이하 사서인이 국정을 논하고자 할 때는 그 의견을 중추원으로 제시하도록 하였다.

 

20. 러시아 공사파블로프의 내한

 

러시아 공사마튜닌이 떠나고 신임공사파우로후(파블로프 : A. Pavlov)가 와서 고종을 알현하고 국서를 올렸다.

 

21. 빈번한 관직 이동

 

리도재를 법부대신, 침상훈, 윤웅렬을 찬정으로 임명하였다가 또 유기환을 이도재의 대직으로 임명하고, 이도재는 찬정으로 이직하였다. 이때 정부는 려사와 같아 수일 만에 체임되므로 랑리들은 편지가 누구에게 갈지를 몰랐다.

 

22. 진위대와 지방대의 군제개편

 

진위, 지방대 등 군제를 개편하여 매대마다 360명을 정원으로 하였다.

 

23. 신기선의 신구학통용책

 

민영기를 탁지대신, 신기선을 학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신기선은 경의와 시무를 유사들에게 전하여 신구학을 통용하려고 하였으나 그 일은 결국 유명무실하였다.

 

24. 충남과 전북지방의 해일

 

충남, 전북 등 수십 군의 해일로 인하여 익사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100년 이후 처음 있는 수재였다. 구제금 1만원을 하사하였다.

 

25. 한청통상조약 체결

 

12월 청국공사서수붕이 내한하자 박제순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통상약장을 체결하였다. 서수붕은 다음과 같은 국서를 올렸다.

“대청국태황제는 삼가 대한국대황제에게 묻습니다.

우호가 지속된 우리 양국은 다 같이 아주에 있으므로 수륙이 서로 연하여 수백 년 동안 휴척이 관련되기 때문에 피아를 가리지 않고 서로 도울 일이 있으면 심력을 다하여 안정을 기대하였습니다. 이것은 귀국에도 그 서류가 보존되어 있으므로 더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광서청나라 덕종의 년호. 편자주 1년(1875)에 귀국은 묵서아멕시코. 편자주 , 구미 제국과 약장을 체결하고 또 성명서를 발표하여 귀국과 오랫동안 잊지 말기를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즈음 세계 각국이 모두 자주, 자보를 공의로 내걸고 있기 때문에 광서 21년(1895)에 체결한 중일마관조약 제1관에 「중국은 귀국의 독립과 자주를 인정한다」고 하였습니 다.

그리고 멀리 구호를 생각하고 가까이 시대의 어려움을 살펴보면 이웃 나라와의 유대를 더욱 강구해야 할 때이므로, 이에 이품함 후보인 삼품경당서수명을 출사대신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친서를 가지고 서울로 가서 짐의 뜻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대신은 박실(박실)하고 충직한 사람으로 판리사무에 밝으니 대황제께서 우악한 접대를 하시어 귀국 정부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영원히 지속하고, 이로부터 양국은 영원한 화호를 지속하여 우리가 다 같이 승평한 시대를 누리기를 짐은 바라고 있습니다.”

 

26. 민형식, 박봉빈 등을 관찰사에 임명

 

민형식을 평남관찰사, 박봉빈을 함남관찰사, 조민희를 평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27. 금직현의 매관

 

라주군수금직현이 경북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결세전 8만원을 군리금용규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서울로 가 뇌물로 바치게 하여 관찰사로 임명되고, 그의 문객 침상호도 령암군수로 임명되었으며김용규도 해남군수로 임명되었다. 이때 내외의 인사가 이와 같았다.

 

28. 국재봉과 국재준형제의 사면

 

담양의 국재봉, 국재준등이 사면되었다.

갑오년(1894) 가을, 국재봉의 아버지 국홍묵이 동비 정인악에게 살해되자 국재봉 형제는 이해 정월에 그를 체포하여 살해하였다. 이때 법관들은 그를 징역으로 처리하려고 하였으나 국씨 집안에서 조정으로 그 원정을 호소하여 모두 사면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29. 내장사에 수륜과설치

 

내장사에 수륜과를 설치하였다.

고종은 늘 사재가 없음을 우려하여 궁내부에 내장사를 두고 리용익을 사장으로 임명하여 나라에서 필요한 정공 이외의 모든 잡세를 관리하게 하므로 재산이 탁지부와 대등하였으나, 이때 또 수륜과를 설치하여 한해가 발생할 때 관개세를 받았다.

 

30. 남관왕묘의 화재

 

남관왕묘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그 화재는 관왕묘에서 발생하여 서묘와 어필각까지 번져 모두 소실되고, 소상(소상)은 갑자기 옮기다가 두상만 떨어져 나갔다.

 

31. 천고

 

전북에서 서울까지 20여 일 동안 뢰성이 그치지 않았고, 4일에는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다.

 

32. 남정순, 금명규 등의 사망

 

이달에 남정순과 금명규가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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