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야록 제4권
광무 8년 갑진(1904년) ①
1. 박정양, 김가진 등을 대신에 임명
갑진년(1904) 광무 8년 정월, 박정양을 탁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리용직을 학부대신으로 임명하였으나 다시 민영환을 대직으로 임명하고, 금가진은 농부대신, 리승우를 충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2. 일본인의 전보국, 우체사 점거과 일본군의 입경
일본인들이 전보국과 우체사를 점탈하였다. 그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러시아와 내통하여 군사기밀을 누설할까 싶어 이들 량사를 자신들이 관리하면서 전쟁이 끝나면 반환하겠다고 하였으나 그 후 그들이 결국 점거하였다. 이때부터 우리 조정에서는 해마다 수백 만원의 세금을 잃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인천에서 계속 서울로 들어왔다. 병력은 5만여 명이며 말은 1만여 필이었다. 이때 그들은 창덕궁, 문희묘, 환구단, 저경궁, 광제원, 관리서 등 18개 처를 빌려 군영으로 이용하고, 또 서문 밖에 있는 민가 수백 구역을 매입하여 마구간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5개의 강 연안에는 막사를 지어 밥짓는 연기가 수백 리까지 피어 을랐다.
그리고 남도에서는 동래에서 대구까지 이르고, 남해로부터 남원까지, 군산에서 전주까지 이르렀으며, 서로에서는 평양에서 삼화까지 이르고, 북로에서는 원산에서 성진까지 연결되어 서로의 거리가 110리나 되었다.
그들은 점차 요동을 향해서 진군하였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군기가 매우 엄숙하여 감히 약탈을 하지 않고 방문을 내걸어 백성들을 효유하면서 요동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들 중 행패를 부리며 질서가 잡히지 않는 병대는 모두 우리 간민들이 인도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군량, 병기, 추두 등을 선편으로 운반하여 산처럼 쌓아 두었다. 군량 1포는 5~6두에 불과하였지만, 혹 보리와 황두가 섞여 있어 쌀은 5분의 1 정도만 있었다. 그리고 이 군량은 모두 소금물에 적신 것이므로 고용인을 사서 물로 씻는 곳까지 운반하였는데, 10리 거리를 운반한 값은 우리 화폐로 1냥이었다.
또 그 군량을 우리 관리에게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관리들은 서로 속이어, 일본인이 10전을 주면 고용인이 차지한 것은 5전뿐이었다. 또 볏집, 죽간, 목판, 닭, 달걀 등을 마을에서 거두어들이다가 부호가 있으면 쌀을 내게 하고 일본인이 기준가격을 주면 관리들은 그 쌀값을 착복하여 그것을 평일 봉급처럼 여기었고, 혹은 일본인과 결탁하여 백성들을 위협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한 포대를 100리만 운반하면 그 고가와 미가가 서로 비등하였다. 혹 내지에 쌓아 두었다가 다시 해변 포구로 운반한 것도 있어 그 왕래한 비용이 계산할 수도 없이 많았다. 호남의 경우를 들자면 남원 광한루에 둔 것이 6천포 정도는 되었으니 기타 지역에 쌓아 둔 물량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갑신년(1884)부터 20년 동안 축적하여 한번의 전쟁으로 청국에게 승리를 거두고, 또 러시아와 싸우기 위하여 공사의 재력을 아끼어 병사들에게 전력하였으므로 상비병력이 무릇 40만명, 예비병력 40만명, 유격대도 20만명으로 도합 100만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또 축적한 군량도 10년을 지탱할 만하였으며 우리 나라에서 모은 돈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있는 액수보다 더 많았고, 그 고용인들에게 뿌린 돈이 모두 낡아 대체로 수십 년 전부터 쌓아둔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남원과 구례 지방에 있던 일본병들은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서로 순번을 바꿔 가면서 왕래하여 쌓아 둔 군량을 수호하고 있었고 다른 곳도 그와 같이 하였다. 그들은 대병이 곧 계속해서 올 것이라고 하므로 고종은 연군에 칙령을 내려 길을 정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후 한 달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고, 그곳을 수비하던 일본병사들도 점차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방어할 태세를 취할까 싶어 거짓말로 우리 군중을 현혹시킨 것이다.
3. 정부의 정권회복
부, 부로 정권을 환원하여 매관의 길을 막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도성은 크게 진동하여 피난민이 사방으로 대피하고, 또 유언비어가 사방에서 일어나 일본인들이 곧 우리 나라를 오끼나와와 베트남처럼 차지할 것이라고 하였다. 고종은 크게 두려워하여 비답을 취소하고 대신들을 불러 각각 급무를 아뢰도록 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성문은 닫혔어도 언로는 열렸다고 하였다.
4. 일본병사에게 물품 하사
대내에서 은화 28만원, 삼편주 20병, 왜주 30병, 황우 50마리, 권련 100상, 천구연초 300상, 지권연 3만갑을 일본병사들에게 하사하였다.
5. 이용익을 일본으로 압송
일본인들이 리용익을 체포하여 일본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이용익은 러시아와 일본이 불화하여 시국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유언비어에 말려들까 싶어 10여 일 동안 은신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도주한 것으로 생각하여 공박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났다.
윤웅렬은 두 번이나 상소를 하여 그를 처형하자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이용익을 본래 러시아의 일당으로 생각하여 그가 중간에서 무슨 농락을 부릴 것이 염려되었으므로 그를 잡아 일본으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이때 리근명은 그가 일본에서 살해된 줄 알고 그를 처형하자고 강력히 간청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일본인들에게 위협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후에는 그가 망발한 과실을 들먹이었으므로,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6. 한일의정서 체결
정부에서는 일본 공사림권조와 함께 한일의정서를 작성하였는데, 그 의정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조 조일 량제국은 영구히 불변하는 친교를 유지하기 위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고 지금부터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를 확신하여 정치상 개혁에 관한 충고가 있을 때는 모두 따를 것.
제3조 일본정부는 한국의 독립 및 그 영토의 보전에 있어서 확실히 보장할 것.
제4조 한국이 만일 제3국의 침해를 당하거나 혹 내란을 당하면 일본정부는 임시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행동에 대하여 완전하고 편의하게 행사할 권리를 허용하며, 일본정부는 이 조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모두 임시로 사용할 수 있음.
7. 민병석의 처와 림권조의 밀회
민병석이 그의 처를 림권조에게 보내 통정을 하게 하자 그녀는 종종 밤을 지새고 오므로, 서울 사람들은 가요를 지어 “숲속에서 자고 돌아오지 않네”라고 하였다.
8. 한인의 외국입적 금지
외국 국적 취득을 엄금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역도들은 법망을 이탈하여 해외로 도주한 즉시 그들이 정착한 곳에서 국적을 취득하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와 외국인 행세를 하며 임금을 경멸하고 조정 대신들을 억압하였다.
그중 서재필은 고종에게 신으로 칭하지 않고 누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고자세를 취하였다.
이렇듯 양심이 없는 무뢰배들은 본국에 있으면서 외국 국적을 소지한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며, 그들은 마음에 조금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팔뚝을 걷어붙이고 꾸짖기를, “나는 모나라 사람이며, 조선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리용익도 러시아 국적을 소지하고 있었다.
9. 평남대의 러시아군 격퇴와 러시아군의 행태
평남대의 병사들이 박천에서 러시아병과 대치하여 35명을 살해하였다.
이때 압록강 서쪽 지방에 있던 러시아군은 여러 부대를 교대로 보내어 일본군을 유인하고, 또 기병을 보내어 두만강 이남쪽을 건너왔다. 그들은 청비을 쫓아내기 위한 선봉부대로 서북의 여러 군에 침입해 들어온 곳인데 감히 그들의 예봉을 꺾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평남을 순찰하던 초군이 박천 평야에서 그들과 마주쳐 그들을 회피할 길이 없으므로 사력을 다하여 싸웠다. 이때 피난하던 남녀들은 고함을 지르며 그들을 후원하여 러시아병들은 패주하고 말았다. 관군은 하나도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일병들은 그곳 전투지역을 와서 보고 으쓱거리며 “한국인도 적을 살해한다”고 하면서 그 승전병에게 후한 호궤를 하고 갔다.
러시아 서북부에 코사크란 지역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매우 용맹스럽고 사나워 유럽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이때 우리 나라 사람들 사이에는 “코사크의 병사들은 꼬리가 붙어 있어 아직 미개한 인종으로 사람을 먹고산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무차별로 유린하면서 남쪽 지방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때 어떤 안주 사람은 암말을 묶어 놓고 발굽을 파고 있다가 러시아의 유격대를 만나 말을 풀어 주지도 못하고 도주하였다.
러시아 병사들은 그 암말을 보고 서로 둘러서서 음행을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코사크의 유격대라고 하였다. 그들의 성품은 매우 음란하여 부인들을 만나면 노소를 가리지 않고 즉시 범하였다. 그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의 정사를 가져 숫양과 같이 정력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나간 곳은 부인들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 그들은 의심이 많아 약탈을 할 때도 너댓 명의 사람들만 모여 있어도 침범을 하지 못하였으며, 무슨 음식을 먹을 때는 소나 말처럼 생식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말을 잘 타 휘파람을 한 번 불고 달리면 순식간에 10여 리를 달렸으며, 얼굴은 비록 사납게 생겼지만 사람을 만나면 해치지 않고 도리어 고분고분한 기색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보면 이를 가는 사람들은 오직 일본 사람뿐이었다. 이때 일본인들은 황해도에 많이 있었다. 당시 군량 및 병기를 운반하는 것 이외에는 통행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다른 선박들을 우리 나라 선박처럼 가장하여 서북부를 출입하면서 러시아를 정찰했다.
러시아 병사들도 그 사실을 알고 정탐자를 엄하게 수색하여, 머리를 깎은 사람만 보면 살해하였으므로 사망한 스님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때 기후가 매우 차가워 사람들은 따뜻한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러시아 병사들은 사람만 만나면 즉시 칼로 모자를 베어 단발 여부를 확인하였다.
10. 현영운을 주일공사 임명
현영운을 주일공사로 임명하였다. 조민희의 대직으로 임명한 것이다.
현영운의 가세는 송도에서 통역관을 지냈는데, 그의 조부는 일본 통역관으로 오랫동안 동래에 머물고 있으면서 기생과의 사이에서 그의 아버지를 낳고, 그의 아버지도 혈육을 두지 뭇하여 첩과의 사이에서 현영운을 낳았다.
현영운은 그 후 장성하여 일본으로 들어간 지 10여 년만에 아내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그는 일본사정을 잘 안다고 고종에게 알려져 많은 총애를 받았다. 그는 또 대내에 일본 기생을 불러다 놓고 그의 일본인 아내와 함께 서신을 주고받으며 대궐을 출입하여 그 위세를 일시에 떨쳤다.
11. 일본 대사이등박문의 내한
일본 대사이등박문이 내한하였다
이에 앞서 일본인이 보낸 공한에는, ”우리 일본은 한국의 정치가 더욱 어지러워지고 있음을 민망히 여겨, 지금 대궐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그 방법을 논하고 있는데, 황제는 임금과 대신들을 바꾸려 하고 있고, 어떤 친왕은 대만처럼 자신이 관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이등박문의 생각은 당연히 한국조정에 경고를 하여 그 악폐를 고친 후에 서서히 시도를 할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양국간을 이간시키려고 하루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아니한 처사였으며, 이등박문은 서서히 그 계책을 취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이다. 이등박문의 명성은 서양에까지 알려져 중국의 리홍장과 함께 동아시아의 인걸로 칭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때 나이가 늙어 자못 정중하였고 우리 나라와 불화한 후에는 더욱 우리 나라에 관심이 깊어, 그가 우리 나라에 와서 경륜을 시도하겠다고 자청하므로 고종은 민영환에게 명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그의 의장은 매우 훌륭하였다.
이때 여론에 의하면 이등박문은 반드시 비상한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가 폐하를 알현할 때 매우 정중한 예의를 지키며 의지를 굳게 하기를 권하고 또 정부에 고하기를, 구습을 버리고 새 조류를 따르라고 하였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악의가 없는 것 같으나 고종은 그의 위세에 눌려 10일 사이에 내부로 칙명을 내려, 사람을 택하여 궁중의 극장을 철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가 귀국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나갔을 때, 다시 내비가 내려지므로 서울 사람들은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8일 동안 청명하였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등박문이 8일 동안 공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12. 민영철을 주청공사에 임명
주청공사박제순이 체직되어 귀국하고, 민영철이 그의 대직으로 임명되었다.
13. 이도재를 대신에 임명
리도재를 내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도재는 충남관찰사로 임명되어 수원을 지나가다가 되돌아왔다.
이때 군소들 중에는 러시아당이 많아 외부의 여론이 자자하였다. 그것은 일본이 먼저 정부를 개혁하여 내부의 걱정을 없앤 후에 러시아와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이며, 혹은 당시의 권귀를 모두 처형하여 군중의 분노를 해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석호와 리근택 등은 일본 공사림권조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해직을 요구하였다. 이로부터 내부의 관직이 비어 있었지만 아무도 경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10일 사이에 리헌영, 조병호, 리재극, 민영환 등이 아침에 임명되었다가 저녁에 교체되어 내부의 관사는 나그네가 쉬어 가는 숙소처럼 느껴졌으나, 이도재는 인망이 높아 임명되었다.
14. 영호남 지역의 일본인 거주
일본인들이 량남 연군을 들어가서 거주하였다. 그리고 거제, 지도 제군에는 1천호 혹은 1백호나 되었다.
15. 현영운의 주일공사 사직
주일공사현영운이 강력히 사직을 요청하므로 조민희를 그곳에 머물게 하여 공사의 임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16. 이중하, 이종건 등을 관찰사에 임명
리중하를 평남관찰사, 리종건을 강원관찰사, 홍만식을 황해관찰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홍만식은, 그의 아버지 홍순목이 아직까지 그의 아우 홍영식의 역죄에 연루되어 있어 의리를 빙자하여 강력히 사직을 요청하므로 상소를 세 번 받은 후에 체직을 윤허하였다.
이때 그 비지에는 “그 역안에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그들은 벌써 신설을 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고종이 갑신정변 때의 제적에 대하여 아직도 석연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17. 이지용을 보빙대사에 임명
리지용이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그는 일본으로 부임하였다.
18. 명헌태후를 경릉에 부장
29일, 명헌태후를 경릉으로 부장하였다. 이때 고종은 문밖까지만 나가 전송하였다. 의정리근명이 저지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일병들이 서울에 가득히 있어 경색이 매우 창황하므로 사람들은 속히 장례를 치르기를 갈망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고종이 명헌태후를 박대하여 상례도 한결같이 간소하게 한 것이며 오로지 일본인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후 인산이 끝나고 대궐에 들어온 백관들이 백포 모자와 백포 띠를 착용하고 있자 고종은 손을 저으며 “지금 무슨 중상을 치렀길래 이토록 순전한 흉복을 입고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백관들은 모두 오모와 흑대를 착용하였다.
그리고 이때 전주의 아전 백남신은 대병으로서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쳐 리용익과 사귄 후 고종과 내통하여 매우 많은 뇌물을 진상하였다. 그는 매년 궁중의 부채(선)를 자신이 도맡기도 하여, 이해 여름에 국상을 당하게 되자 하얀 부채 3만개를 진상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것을 물리쳤다. 백남신은 황공하여 무엇을 진상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백색 부채를 진상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백남신은 다시 검은 먹감나무(오시목)로 자루를 바꾸고 그 부챗살에는 락화를 그려 백색을 가린 후에 진상하자 고종은 비로소 그 부채를 받으라는 명을 내렸다.
19. 관리서 폐지
2월, 관리서를 폐지하여 그 사옥을 신문사로 하사하였다.
20. 장호익, 김형섭 등의 처형과 유배
장호익, 조댁현 등을 처형하고 금형섭, 금의선, 금교선, 방영주, 금홍진, 금영소, 금석구, 유성준, 금봉석 등은 차등을 두어 유배하였다.
지난 경자년(1900) 봄에 장호익 등은 일본에서 유학생으로 있으면서 유길준, 리겸제, 리범래 등 여러 범인들과 피를 마시며 동맹을 맺어 <혁명혈약>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황제 폐지.
2. 황태자 폐지.
3. 유길준, 조희연 등의 정부 조직.
그러나 이때 그 사건이 발각되어 유길준 등은 그때까지 도피중에 있었고 다른 사람은 모두 법적 조치를 받았다.
유성준은 유길준의 아우이다.
21. 전북관찰사김명수를 면직
전북관찰사금명수가 리용익의 일당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김명수는 성품이 강직하여 비행을 잘 지적하므로 관할 지역이 숙연하였다. 이때 백성들은 그가 떠나는 것을 매우 아쉬워하였다.
22. 이헌경을 함남관찰사에 임명
함남관찰사서정순을 면직하고 리헌경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서정순은 세 번이나 함남관찰사로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사모하여 노래를 불렀다.
이때 함경남북도 여러 군에는 동학당이 치성하였는데, 서정순은 괴수 3명을 처형하고 그 나머지 무리를 효유하여 해산시켰다. 그런 후 조금 질서가 있었으나 그가 교체된 후에는 다시 소란하기 시작하였다.
23. 이중하의 선정
리항의는 충남관찰사, 리용관은 평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평북지방은 러일 양군에게 유린되어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도주하였다. 그러므로 10개 군에 관리 한 사람도 없었고, 관찰사도 결석이 된 지 이미 반년이 되어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회피하고 있었다.
이에 고종은 정부에서 추천하라는 명을 내린 후 이용관을 명했는데, 그 후 이용관과 리중하가 남북도안무사를 겸직했다.
이때 이중하는 단기로 부내를 순찰하여 풍속을 바로잡고 위무를 하므로, 사람들은 그가 직임을 다한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24. 경운궁의 화재
경운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8~9년 동안 토목공사를 벌였던 건물이 모두 잿더미로 변하였다. 루조 동안 모아 온 보옥과 공사간의 문서가 모두 불에 타고 겨우 보존된 곳은 정부, 궁내부, 원수부뿐이 었다.
이때 고종은 윤용선을 중건제조로 임명하여 불일간 중건을 결심하고 내탕전 2만원을 지출하였으나, 영국 공사와 일본공사는 이해 봄에 흉작이 든 데다가 경비도 궁색하다는 이유를 들어 정역을 선언하였다.
이에 고종은 부득이 중지하라는 명을 내려 즉조당만 중건하고 기타 전각은 가을에 짓기로 하였다.
25. 효혜전 졸곡제를 연기
효혜전의 졸곡제를 연기하였다. 화재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26. 이하영을 외부대신에 임명
리하영을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하영은 일본인을 의지하여 용사한 사람으로 위계를 뛰어넘어 경재가 되었고, 본국과의 이간을 조성하는 데도 그의 음모가 많이 작용하였다.
27. 동맥과 석탄맥 발견
부산에서 시작한 철도공사가 청도군 성현에 이르렀을 때 동맥과 석탄맥이 발견되었다.
28. 일본의 평양점령과 여순전투
일본병이 평양을 침입하여 선화당을 점거하고, 또 풍경궁을 빌리기 위하여 허락을 받아냈으나 다시 사양하였다.
러일 양군이 여순항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여순은 발해 제일의 요충지로서 러시아군이 먼저 점령하여 수비를 엄하게 하므로 일병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결국 정복하지 못하고 상호 사상자만 내었다.
29. 밀양 표충사 화재
밀양 표충사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100여 칸을 모두 소각하였다. 그러나 이 사찰은 사당이 온전히 남아 있어 의병장 휴정을 봉사할 수 있었다.
30. 양지국 설치
3월, 지계아문과 혜민원을 폐지하고, 탁지부에 량지국을 설치하였다.
31. 내부대신이도재를 면직
내부대신리도재를 면직하고 리용태를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이도재는 임금께 상주하여 군수 19명을 임명하게 하고 뇌물과 청탁을 거절하여 인재를 발탁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공심에 감복하였다.
그러나 이때 조병식은 그를 질투하여, 그가 주본을 지을 때 정부에서 짓지 않고 사제에서 작성한 것은 행정의 격식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폭로성 상소를 하므로 이도재는 강력히 사직을 간청하였다.
그리고 이용태는 옆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진출하였으므로 물의를 빚어 사람들은 그를 비루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윤창근, 박항래 등은 이도재가 발탁한 사람으로, 그들은 모두 관리의 재질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32. 군수와 관찰사 부임여비제도 부활
다시 서북도의 군수 부임여비와 각도 관찰사의 여비를 정하였다.
갑오경장이 시작될 때 부군에 모두 여비제가 있어 백성들에게 거두지 말도록 하였으나 수년이 지난 후, 부군의 관리들은 다시 구습을 따라 여비를 염출하고, 또 마부의 일당까지 백성들에게 받았다.
조정에서는 이를 부당하게 생각하여 그 여비를 삭제하였다가, 이때 량계가 잔폐하여 그곳으로 부임할 사람이 없자 다시 그 여비제를 부활하여 자신 있게 부임할 수 있도록 권하였고, 또 도신들도 책임은 중하고 봉록은 박하므로 골고루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때 부군에는 폐정이 심화되어, 백성을 수척하게 하고 관리만 살찌우게 하는 자들은 구습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종종 재산을 증식한 사람이 있었다.
광무 8년 갑진(1904년) ②
1. 이범진의 소환거부
러시아주재공사리범진을 소환하였으나 그는 조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처음에 이범진은 러시아의 후원을 받아 을미정국을 전환하였으나 그는 항시 만일의 경우에 무슨 화가 생길까 두려우므로 외국을 이용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러시아로 갔었다. 이때 그는 가족을 다 데리고 가 10년 동안 귀국하지 않고 있으므로 고종은 그를 매우 원망하고 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그의 아들 리기종이 와서 알현하자, 고종은 도리어 관직을 제수하고 그를 총애하였다. 이범진은 그 저의를 짐작하고 벙어리와 맹인으로 자처하며 하루는 전화로 아뢰기를, 누가 자신의 공사직을 대임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것은 그가 귀국할 뜻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 후 로, 일 양국의 병란이 일어나자 일본은 이범진을 러시아의 일당으로 생각하고 그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전화로 알리기를, “러시아는 600만의 병사를 동원하여 료동을 후원하려고 한다. 그 기한은 6월이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일본의 화를 돋우어 국민의 감정을 흔들어 놓으려고 한 것이다. 이때 이범진은 여전히 외국에서 맴돌고 있었다.
2. 이근교와 주석면 등을 관찰사에 임명
리근교를 경기관찰사, 주석면을 강원관찰사, 성기운을 경남관찰사, 금도수를 황해관찰사, 리윤용을 전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김도수는 관직을 고사하자 외지의 보직으로 특전을 베풀었다.
3. 정예소 설치
서울에 정예소를 설치하여 위원을 두고 관리하도록 하였다. 일본인들은 우리 서울이 하수구마다 오물이 꽉 차 있으므로 훈제를 발라 그 수독을 걸러냈다.
그리고 이때 군란이 일어나 인마가 요란하였는데 그들은 더욱 그 냄새를 싫어하여, 내부로 하여금 마을마다 엄한 칙령을 내려 즉일 소제를 하고 가정마다 대변통(시통)을 묻게 하였으며 또 길에서 대소변을 보지 못하게 하여, 이를 어기는 사람은 벌금을 물게 하였다.
4. 종로거리의 익명서
닉명서가 종가에 걸려 있었다. 그 내용은 「청룡지석 송림유만 호미선(일본작공)장」이라고 하였다.
5. 이재극을 학부대신에 임명
4월에 리재극을 학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6. 러시아와의 단교 선포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끊고 이 사실을 각국에 포고하였다. 고종은 러시아를 좋아하였지만 일본인의 협박을 받아 겉으로만 단절한 것이므로 러시아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일본이 관북지방에서 러시아를 저항하고 있을 때 우리는 평괴대 500명을 선봉으로 내세웠는데 이때 러시아인은 평양대의 대장을 불러 조용히 말하기를, “지금 당신들의 나라가 우리와 우호관계를 끊은 것은 갑오경장 때 청나라와 국교를 끊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모두 일본의 지시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므로 우리는 당신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니 당신들은 속히 해산하여 양국의 우호관계를 상하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리 대병들은 그들의 말과 같이 각자 도주해 돌아왔다.
7. 일본에 황무지 개간권 허용
일본인들에게 진황지를 차여하자 그들은 어차원을 건립하였다. 처음에 일본인들은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였고, 또 그들은 우리의 황무지에 더욱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들판, 산림, 강과 바다, 방죽 등이 어디든지 황무지로 남아 있어 그 이용가치가 매우 아까운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해 봄에 림권조가 휴가를 얻어 귀국하고, 서리추원수일이 상민 장삼등길과 함께 음모를 꾸민 후 고종에게 강력히 간청하여, 만일 그것을 개간하여 납세를 하면 양국이 모두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리하영, 현영운 등도 또 그렇게 하기를 유도하므로 고종은 이하영으로 하여금 외부의 인장으로 조인문서를 작성하여 인가를 내주도록 하였다. 그 기간은 50년이었다.
이에 우리 도성의 여론은 흉흉하여 일본이 장차 우리 나라를 자기 나라의 군현으로 만든다고 하므로 고종도 후회하여 어공원을 지은 후 그 진황지의 세금을 관리하게 하고, 그것을 결국 사탕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빌려 달라는 요청을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 약안은 대충 다음과 같다.
진황지 조차약관
1. 한국의 내부에 소속된 토지 및 관업토지로서 개간되지 않은 것은 모두 장삼등길에게 주어 그가 자본을 마련하여 개간에 종사하게 할 것.
2. 장삼등길은 이상의 토지를 개간하고 또 그 토지를 개량한 이후에 종식, 목축, 어렵 등 유리한 사업을 모두 장삼등길 전권판리에게 주고, 또 완전히 사용할 권리를 줄 것.
3. 개판한 5년까지는 조세를 받지 않으나 5년 이후에 만일 경영한 사업이 이익이 있으면 현재 이미 개간된 토지는 동솔의 세액을 한국정부에 바치되, 단 천재, 시변, 수한 등을 만나 수확이 부족하면 그 조세를 혹 감하거나 혹 면해줄 것.
4. 본약조는 경영한 각 부분을 이미 완성한 이후부터 기산하여 50년을 만기로 하되, 만기가 된 후에는 다시 상의를 속개할 것.
8. 안종덕의 상소
고종이 「렴근공신, 이안사민」이란 8자의 어서를 중외에 반포하고 이 글자를 각하여 각 관청에 게시하게 하였으나 전의관안종덕이 상소하여 그 뜻을 연역하면서 고종의 불렴, 불근, 불공, 불신하는 실정을 공격하였다. 그 상소는 다음과 같다.
“조용히 볼 때 폐하께서는 임오년(1762) 이후 무슨 환난이 있을 때마다 조서를 내렸습니다. 그 애통과 측달(측달)한 뜻이야 어찌 간절하지 않았으며 어찌 그 렴, 근, 공, 신을 기약하지 않았습니까마는 그 후 얼마 안되어 다시 전날과 같았으므로 지금 조신들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수치심을 가지고 있고, 각 군현의 백성들도 포목을 모두 빼앗긴 원한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뇌물을 바친 사람들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고 관직은 지금 남발되고 있으며, 탐욕과 학대는 계학(계학) 같은 욕심대로 채워지고 있고, 도둑들은 사방에 가득 차 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모두 폐하께서 청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탁지부의 정공은 모두 폐하께서 소유하고 있는데 어찌 별도로 내장원을 신설하여 취렴(취렴)하는 신하로 하여금 일국의 재정을 주관하게 하여 탁지부에 속한 재정을 모두 빼앗아 가게 하십니까? 이에 탁지부에서 재정이 고갈되었다고 하면 내탕전으로 충당한다고 하고, 또 따라서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으니 만일 국채를 (중략) 사적으로 행한다면 그만이지만 한결같이 신의를 고수하여 이와 같이 수년이 지나도 정치가 되지 않고, 국가가 부진하고, 재정이 충분하지 못하고, 병력이 강하지 못하고, 이웃 나라가 복종하지 않으면 신의 무망한 죄를 죽음으로 간청하겠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청렴, 근검, 공정, 신의를 안민의 근본으로 삼으면서 군신이 지도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고 계시니 이것은 란을 싫어하여 치세를 그리워하고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반전시키는 계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신의 말을 꺼리지 않으신다면 만분의 일이라도 유신의 치화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신의 화복에 대해서는 생각할 바가 아니오니 폐하께서는 신의 마음을 잘 살피시어 이 말이 추호라도 비방을 한 것이라면 즉시 처형하여 신하로서의 불경한 죄를 다스려 주시고, 만일 충군애국하는 마음에서 나와 몸도 돌아보지 않았다면 신의 말을 받아들여 이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만일 그대로 방치하여 살피지 않거나 치죄하지도 않고, 또 받아들이지 않기를 지난날 신료들이 련명소를 올릴 때와 같이 하신다면 이것은 신의 여한이 될 뿐 아니라 성주로서 신하에게 신의로써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상소가 무릇 1만여자로 되어 있었지만 그 내용은 대충 절록을 따른 것이었다.
9. 황무지 개간권 허용 저지 운동
전의관정기조, 전참봉최동식, 유생 금기우와 정동시 등은 일본인이 강제로 진황지를 빌려 간다고 항의하면서 그 일을 저지하기 위하여 13도에 통문을 보내 일제히 서울로 모이게 하였다.
10. 일본의 어업권 침탈
일본 공사림권조가 자국의 백기, 인번, 단마, 단후, 구주 연해의 어채권을 우리 어민들에게 허락하였다.
일본인들이 우리 해협에서 어로작업을 한 지 이미 10년이 되었다. 동쪽으로 동래, 울산으로부터 서쪽으로 패수, 룡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어선이 바다를 덮고 있으므로 우리 어민들은 실업상태에 이르러 그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때 림권조는 겉으로 민망스러운 체하면서 자기 나라 정부에 청하여 우리 어민들도 일본 해협에서 어로작업을 하게 하였다. 그 기한은 20년이었다. 이것은 상호 교역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우리 조정으로 보고한 것이지만 우리 어민들은 그들을 비웃으며 호응한 사람이 없어, 그 일은 다만 문구에 그치고 말았다.
11. 서북인의 군수 발탁
서북인 중에서 재망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본도의 군수로 임명하였다.
이때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저항하고 있었으나 러시아는 누차 패배하였다. 그러나 패배한 측은 계속 패배하더라도 그들의 병사들은 계속 답지하여 두만강 일대가 큰 피해를 보게 되므로 천리 거리에 밥짓는 연기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현직에 있는 군수는 도주하고, 새로 임명된 사람은 도착하지도 않아 그곳 관리와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도망하기에 급급하였다. 그것은 몽고와 합단이 침략한 이후 일찍 없었던 일이었다.
정부에서는 이 사실을 고종에게 아뢰어 이런 명령이 내려졌으나 도로가 경새하여 서로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이때 조야에서는 모두 “일본인은 사람 같지만 러시아인은 짐승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만일 일본에게 승리할 경우 우리 나라를 석권하여 남하하면 우리 인종은 장차 전멸할 것이라고 하면서, 모두가 일본이 승리하고 러시아가 패하기를 빌어 어디를 가서 일을 하든 그 운반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이 선전포고를 할 때부터 무슨 야심을 갖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12. 경무사신태휴의 윤락녀 통제
경무사신태휴가 유녀들을 모아 별도의 마을에서 주거하게 하였다. 옛날 제도에 「외국 남녀와 간통한 자는 처형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개항 후에 그 금지령이 조금 해이되어, 그 후 동서양 사람들이 마구 들어와 거주하면서 음탕한 행위를 하였지만 어떻게 방지할 수가 없었다. 이때 리윤용의 첩은 서양여자였으며 송병준의 첩은 일본 여자였다. 종종 외국 여자를 데리고 살지 않으면 문명인 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향의 유녀들은 아침에 일본인을 대하고 저녁이면 서양인을 대하여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면서 문을 의지하여 기다리고 있으므로,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낯을 가리고 있었다.
신태휴는 이들을 미워하여 강력히 그 유녀들을 한 마을에 모아 놓고 양민들과 거주를 같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 중 우리 나라 사람들과 왕래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문에다가 「상화가」라고 써 붙이고, 외국인에게 매춘한 사람은 「매음가」라는 글자를 써 붙여 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그 행위를 고치지 않았다.
인천항에 있는 도화동은 온 동네가 모두 매음가이다. 이때 방탕한 외국인들이 돈을 가지고 그들의 문을 두드린 것은 상인들이 물건 사라고 문을 두드린 것과 같았다.
13. 평안남도 지방의 우박
평안남도의 덕천, 숙천, 영유군 지방에 우박이 많이 내렸다.
14. 조병필을 대신에 임명
5월, 조병필을 내부대신, 윤 을 경북관찰사, 함흥군수리교영과 길주군수리익호 등을 함경남북도 선유사, 서흥군수리병훈을 황해도선유사로 임명하였다.
15. 평안, 함경도에 호세 면제
함경도와 평안도에 금년 호세를 면제하였다.
16. 북간도관리관이범윤을 소환
북간도관리관리범윤을 소환하였다. 이때 이범윤은 류민을 소집하여 호구를 재편하고 갑령을 반포한 후 청비를 방어하여 누차 참획을 하고, 또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 간 남녀들을 모두 쇄환하므로 변방이 점차 안정되었다. 그러나 청인들은 그를 불편하게 생각하여 청국 공사허태신이 계속 우리 정부를 힐책하여 화기를 저해하면서 그의 소환을 요청하자 우리 정부는 그의 말을 따랐다.
17. 소릉의 도굴
도둑이 개성 소릉을 도굴하였다.
18. 평안도의 동학 봉기
평안도에 동학도가 봉기하여 대포를 설치해 놓고 군중을 선동하였다. 그들의 수가 많은 곳은 수만 명이었으며 적은 곳은 4~5천명이었으므로 부, 군에서는 그들을 금지하지 못하였다.
19. 김정식과 김필제 등을 석방
종신죄인 금정식과 금필제 두 사람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들은 3월에 유배를 명하여 김정식은 흑산도, 김필제는 추자도로 정해졌으나 이때까지 정식은 인천항에 머물러 있었고, 필제는 처음부터 출발하지도 않아 모두 석방되었다.
20. 주청일본영사의 만주지역 한인 유민 관리
주청일본영사이집원언길을 대한명예영사로 겸임하여 우리 류민들을 관리하게 하였다. 수년 이후 서북 지방인 료동, 심양 등지로 유입한 사람들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들은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여 청국 관리들은 그들을 학대하였다. 그 참상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일본 관리에게 부탁하여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21. 군수민희식, 안영중 등의 서맥 진상
남평군수민희식이 서맥을 진상하였는데, 그 가지가 3개에서 5개까지 있는 것이 209본이나 되었다 그리고 현풍군수안영중은 1경 6수의 서맥을 진상하였다.
22. 서울의 기우제
서울에 한해가 심하여 기우제를 지냈다.
23. 경의선 철도부설
6월, 일본인이 경의철도를 기공하였다. 그 철도는 평양성을 관통하여 민가 수백 채를 헐었으며, 풍경궁과는 200보의 거리였다.
그리고 서북철도국을 철폐하였다. 그것은 경의선을 기공하기 때문이었다.
24. 박제순을 법부대신에 임명
박제순을 법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25. 보안회 창립
서울 시민들이 보안회를 설치하여 윤시병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정기조 등이 통문을 올린 후 재신 리건하, 박기양 등이 앞을 다투어 상소를 하였고, 전의관윤병, 전주사리기 등이 소청과 회의소를 설치하므로 경향에서 모인 사람들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때 그들은 신기선을 회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신기선이 불응하여 리유인을 대신 추대하였지만 그도 사양하여, 최후에 윤시병이 주관하였다. 그것은 윤병 등의 뜻이 아니었다.
윤시병은 윤길병과 함께 갑오년(1894)에 동학으로 들어갔다가 기해년(1899)에 다시 독립회에 들어가 그곳에 있었다. 그러다가 이때 기꺼이 나온 것이다. 이때 일본인들은 보안회의 위원 송수만, 송인섭 등을 수감하였다.
26. 황무지 개간권 허용 문제
일본 공사림권조가 다시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때 모든 국민들은 진황지개간 허가문제를 놓고 많은 여론이 비등하여 기약 없이 모인 사람들이 날로 수만 명을 헤아렸다. 그리고 외부에서 일본공관으로 보낸 조회도 수십 통이나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를 싫어하여 거짓말로 그 개간문제를 취소한다고 하면서 다시 우리 외부로 여론을 정리하라고 요청하였다. 그것은 이미 그들의 조직적인 음모에 들어 있는 것이지만 겉으로는 느슨하게 보여 군중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것이다.
27. 송규헌의 상소
봉상사부제조송규헌이 상소하여 조신 28명의 죄를 논하였다. 이때 그는 50일 동안 비답을 기다렸지만 결국 비답이 내려지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상소는 대충 다음과 같다.
“신이 근일의 상황을 보니, 일본대리공사추원수일이 진황지를 개간하겠다는 조회를 올렸습니다. 이 일이 전국의 리해에 관계된 것이라면 우리 정부에서 반드시 조서로 대응하여 당일 단연 거절해야 할 일인데, 각 신문의 보도와 여러 신사들이 올린 상소 내용을 보면 날마다 보낸 조회가 빈번하지만 엄정히 거절하는 태도를 볼 수 없고, 다만 구차하게 미봉하여 그것을 호도하거나 두려워하여 허가해 주고, 거절한 것도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의혹을 사게 하고 유언비어로 선동하고 있으므로 시국은 시끄럽고 인심은 동요되고 있습니다.
아! 국가간의 외교는 한 외교관이면 족한 것이므로 거절을 하려면 거절을 하고, 허가를 하려면 허가를 해줄 일이지 어찌 분란을 일으켜 신의에 대한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습니까?
지금 일본은 우리를 엿보며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 일도 교섭을 다하지 못하고 농광회사에 인가를 내주고 있으니 그들이 만일 이것을 핑계로 트집을 잡아 시국을 그르친다면 정부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대저 조종의 강토는 한 자 한 치도 남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이 비록 황무하다고 하더라도 허가를 해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이것은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개연히 한심스러운 것은 근래 국세와 방명이 위태로워 종사의 생령이 일발위기에 놓여 있지만 한 신하도 깜짝 놀래어 성상의 뜻을 천양하였다는 소문은 듣지 못하고, 다만 고식적인 아부에 빠져 뜻만 받드는 것을 공경한 것으로 생각하여, 매일 의논한 것이 관제의 변경과 주임의 개체에 불과하니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 해도 안 망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늘 시골의 여론을 들어보면 근일 정부에서 하는 일은 알아보기가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은 정부대신 10여 명이 서로 돌아가면서 똑같은 일을 할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잘 모르는 일이지만 이 10여 명의 사람들이 과연 정부의 책임을 담당하여 그 책임을 완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 사실을 열거하여 아뢰겠습니다.
그중 특진관신윤용선은 외람되게 권점을 받아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낯이 두꺼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관직을 탐하여, 정승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추호도 보필하는 효과도 없이 오직 총애와 봉록만 탐을 내고 있었습니다. (중략)”
송규헌은 우암의 후손으로 이와 같은 상소를 내자 만조대신들은 크게 놀라워하며 서로 전해 가며 이 상소문을 읽었다. 그 상소는 한 달만에 국중에 모두 알려지고, 많은 군소들은 동지를 규합하여 그를 란언률로 적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송규헌은 성문을 나가 죄명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오랜 시일이 지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28. 최익현의 관직 사양
최익현을 찬정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세 번이나 상소하여 강력히 사양하였다.
29. 손병희의 투서
동학당 손병희는 자칭 외국 유학생이라고 하였다. 그는 신문사에 투서를 하여 보조금 100원을 부치고, 그 후 박남수란 사람도 손병희의 문인이라고 하면서 투서를 하였다.
그는 투서와 함께 정부로 보내는 서신을 넣어 두었는데, 그 서신에 기재된 5개조는 설국회, 주종교, 리재정, 개정치, 면유학이었다. 그는 또 최제우의 문하에서 수업한 지 20여 년 후에 옷깃을 떨치고 바다를 건너 10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였으므로 목하 그와 호응한 동지가 800만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수심정기 경천애인」이며, 그의 도는 「효제충신 보국안민」이라고 하고, 서양의 도는 서쪽에서 났기 때문에 서학이라 하며, 이 도는 동양에서 났기 때문에 동학이라 한다고 하였다.
30. 손병희의 행적
이때 신문사의 직원들은 크게 놀라워하며 그의 서신과 돈을 되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박남수는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그리고 손병희는 청주의 아전이었다. 그는 갑오경장 때 동비의 괴수가 되었는데, 일본으로 도주하여 리상헌으로 이름을 바꾸고 10여 년 동안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이때 본국이 더욱 어지러워 윤시병 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뜻을 펼 때라고 생각하여 기꺼이 투서를 하면서 박남수와 서로 호응하였다.
31. 김세기와 심건택을 관찰사에 임명
금세기를 전남관찰사로 임명하고 충주군수침건택을 충남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김세기가 일찍 담양부사로 있을 때 민요로 인하여 파직되어 돌아온 후 개성유수로 있었다. 그러나 그때 또 민요가 발생하여 그는 200만냥을 상납하고 그 관직을 유지하였다.
심건택은 충주에 있을 때 많은 불법을 자행하여 관찰사리승우의 장계로 파직되었는데, 그의 아들 리상익이 그의 대직으로 앉으려다가 너무 급히 서두른 바람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는 결국 충청남도로 좌천되었다.
32. 일본인의 군량운반 인부 모집
일본인들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병참을 설치하여 군량 및 군기를 청국 안동지방까지 운반하면서 내부로 하여금 서울과 량서 및 삼남지방에 훈시하여 고용할 인부들을 모집하게 하고, 그들에게 우리 돈으로 날마다 7냥씩 주었다. 그들은 자원한 것이며 강제로 모집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관리들은 농간을 부려 백성들이 큰 소란을 일으키므로 전시종리유형이 정부에 제의하기를, “국가가 이미 지방대를 두고 있지만 이들은 앉아서 국고만 낭비하고 있으면서 전투에 사용하지 못하고, 지금 일본 사람들의 요청에 의하여 농민들을 모집하고 있으니 이렇게 하려면 차라리 놀면서 먹고 있는 지방대를 파견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여론에 의하면 두 가지가 모두 편리하다고 하였지만 이행되지는 않았다.
33. 경무사신태휴의 무당의 축원행위 엄금
경무사신태휴가 무당들의 축원행위를 엄금하여 민간에서 뫼시고 있는 관제상을 모두 거두어들여 북묘로 옮겨 놓은 수가 3천개나 되었다. 그중에는 향차와 청룡도 등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불에 태운 것도 수백 개나 되었다. 그리고 이때 술객 정환덕과 조세환 등은 고향으로 도주하고, 대내에 출입하던 녀무들도 수감된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5월부터 남산에 대포를 설치하여 많은 적군을 방어하듯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밤 궁인들이 녀무 및 장님들을 이끌고 와서 경문을 외며 산에서 금과 비단을 태우는 것을 보고 서로 웃었다.
34. 서재필의 개광 요구와 이범진의 매림
이에 앞서 서재필은 미국인을 인도하여 운산, 은산, 평양, 금성, 직산 등의 여러 광산을 개광하자고 요청하였고, 리범진은 서북 지방의 삼림을 러시아인에게 매도하였는데 이때 그 사건이 모두 발각되었다.
35. 각지의 기상이변
평안남도의 녕원군에 많은 우박이 내리고, 함경남도의 장진군에는 밤마다 된서리가 내렸다.
36. 서울의 전염병
6월과 7월 사이에 서울에는 3종의 전염병이 있었다. 그것이 처음에는 오한, 두통, 신열, 목구멍통증 등을 일으켜 증세가 상한과 같았다. 그중 대두온은 두부가 모두 통증을 일으켜 심하면 두피가 찢어지며 누런 물을 흘리고 죽는다.
그리고 노자온(로자온)은 좌우의 귀뿌리에 부종이 나며, 하마(하마)는 볼(검) 밑에 부종이 나고 인후가 막히어 물을 삼킬 수 없으며 중병자는 사망하고 경병자만 살 수 있다. 처음에는 형방패독산 두세 첩을 사용하되, 효험이 없으면 이성구고환 두세 개를 복용한다. 그것은 금문, 대황 3냥, 당급각(당급각) 1냥을 물에 타서 알약 10개를 지어 매일 1알씩 냉수로 조복하는 것이다.
광무 8년 갑진(1904년) ③
1. 주일공사조민희의 귀국
7월. 주일공사조민희가 귀국하였다.
조민희는 본래 조신을 잘하지 못하고 도박을 즐겼으며, 더욱이 골패(골패)를 생명처럼 여겼다. 그리고 그가 임지에 있을 때 주야로 대국을 하면서 중단을 만지고 있었으므로 그 중단이 떨어진 저고리로 변하여, 그때 사람들은 그를 「골귀」라고 칭하였다. 그는 이 밖에 아무것도 잘 하는 것이 없었으나 누차 큰 고을을 맡아 잇달아 사명을 띠고 있었으며, 갑오경장 이후에는 하루도 한가한 날이 없었다.
2. 일본의 군용지 탈취
일본인들은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구역을 정하여 군용지라고 하면서 표목을 세워 경계를 정해 놓고 우리 국민들이 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이 땅을 점유하고 싶으면 무조건 군용지로 사용한다고 하며 빼앗아 갔다.
고리고 보안회가 설치된 이후부터 도민들은 날마다 종가에 모여 아무리 효유를 해도 해산하지 않으므로 일본인들은 보안회를 미워한 나머지, 병력을 파견하여 보안회에 들어가서 칼을 휘두르고 시위를 벌여 회원 리범창 등 4, 5명을 수감하였다.
이에 군중들의 분노는 더욱 격렬하여 정부로 서신을 올려 현영운의 처형을 요청하고, 또 리하영이 진황지를 허가해 준 이유를 힐책하였다. 그러나 이하영은 계속 상소를 하여 경위를 설명하면서 자신을 해임해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종이 처음에 현영운과 이하영에게 속임수를 당하여 아리송한 가운데 조차를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그것이 화를 잉태한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때는 이미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다행히 민회가 간혹 힘을 얻을 때는 그들의 힘을 의지하여 성취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으므료 백성들은 그들을 믿고 이런 모임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그들의 병력을 의지하면 무슨 일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우리 백성들의 저항이 강한 것을 싫어하여 서서히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보안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그 괴수를 징계하려고 하였지만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3. 일진회의 강령
윤시병 등이 민회의 이름을 유신회로 고쳤지만 그 후 또 일진회로 바꾸어, 그 주된 주장 4개 항을 다음과 같이 공포하였다
1. 제실 안녕
2. 정부 개혁
3. 인민의 재산보호
4. 군정과 재정 정리
그리고 이것을 통칭 대강령이라 하고, 또 다음과 같은 취지서를 지어 중외에 공포하였다.
“국가는 인민이 이룩한 것이며 인민은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민으로서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국가는 국가로 발전할 수 없고, 사회가 그 단체를 조직하지 못하면 백성을 백성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민의 의무가 병역과 납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치란과 안위에 있어서 그 논평과 권고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열강들은 특히 인민들에게 언론과 저작권을 허락하여, 그들은 혹 집회도 하고 단체도 결성하여 제각기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대저 정부라는 것은 보필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직접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며, 인민은 의무를 돕고 있기 때문에 입법권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군주는 이 행정권과 입법권을 다 장악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무상제일의 높은 분이다.
그러므로 종합하여 말한다면 정부와 인민은 상하가 다 일치하여 황실을 존중하고 주권을 통합하여 모두가 함께 노력하여야 하며, 나누어 말한다면 정부는 행정권과 사법권을 다 동원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한 사람도 불행한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며, 인민은 목숨을 내놓고 납세도 잘 하여 군상을 위하고 또 정치의 득실에 있어서도 감시하고 경고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은 국회와 사회를 설립한 본지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대한은 신식을 도입한 이후 지금 10여 년이 되었지만 그 고질적인 병폐를 철저하게 개혁하지 못하고, 정신개량도 관철하지 못하고 있어 황실의 기초를 방해하고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지 못하여 그 어려운 상황이 달걀을 첩첩이 쌓아 놓은 것 같이 초미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제자리를 맴돌며 구경만 하면서 부귀를 탐하고 있어 법률이 해이되어도 그것은 자신들이 우려할 바가 아니라고 하며, 풍속과 교화가 문란해도 그것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고, 그리고 나라 전체의 백성들이 모두 도탄에 빠져도 구제할 방법을 강구하지 않고 인민의 고혈과 국가의 원기를 낭비하고 있으니 이런 일을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 우리 동포들이여! 그래도 개혁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국비를 낭비하여 3분의 2를 들여 군대를 양성하고 있지만 내환과 외우를 방어하는 데는 추호도 그들의 힘을 보지 못하고, 또 함부로 질이 좋지 않은 화폐를 주조하여 재정이 절도가 없으며, 민생은 궁색하고 국고는 고갈되고 있으니 이런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는 다시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아! 500년 종사와 삼천리 강토의 위기가 호흡지간에 놓여 있다. 이런 시국을 생각해 볼 때 누가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본사에서는 몇 사람의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일진회」로 칭하고 일심으로 진보할 것을 주의로 삼고 있으니 모든 우리 동포들은 이것을 목적으로 삼고 의무로 삼아, 하나는 개개의 혈성으로 용진할 것이며 또 하나는 단단한 단충으로 충군애국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비록 하루애 1보를 걷더라도 점차 개명해 나가서 국가의 면목을 유신으로 일변시켜야만 본회의 명칭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철폐와 내정개혁안 제출
일본인은 황무지 개간권을 철폐하고 내정개혁안을 제출하였다. 진황지계약을 체결한 이후 조야의 상하는 모두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일본의 여론들은 우리 정부의 실책을 지적하였다.
그 하나는 장삼등길은 본래 지명인사가 아님에도 이와 같이 경중을 논할 수 없는 사인에게 한국 전체 국토와 대권을 위임한 것이며, 또 하나는 대한정책의 대강을 세우지도 못하고 한 가지 일도 착수하지 못한 이때 이와 같이 구구한 문제로 한국인의 감정을 상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정부는 누차 생각한 끝에 장삼등길의 제안을 철회하고 이 안으로 바꾼 것이다. 림권조는 고종을 알현하여 승낙을 얻어냈다. 그 안은 대충 다음과 같다.
1. 한국은 재정을 정리하기 위하여 탁지부내에 감독을 두되, 일본인 목하전종태랑을 고용으로 충원할 것.
2. 계정을 정리하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에 차관을 허여하되, 제1기에 300만원을 차관할 것.
3. (중략)
4. 한국은 옛날 전환국을 폐지하고 별도로 백동화를 사용하여 화폐제도를 확립할 것.
5. 일본과 한국은 화폐제의 동맹을 체결하여 일본정부에서 주조한 화폐와 초폐를 한국에서 일률적으로 통용할 것.
6. 특히 중앙은행을 설치하여 조세징수 및 기타 공금, 각 사무 등을 관리할 것.
7. (중략)
8. 지난날 외교사무는 실패하였으므로 특히 외부에 고문을 두되, 영원히 일본정부에서 추천하며, 현재는 스티븐스(Durham Stevens : 전니손, 우리 역문으로는 수지분)을 추천하여 충원할 것.
9. 한국 조정은 일체의 외교사무 및 해외한인 보호사무를 모두 일본정부에 의탁하고, 이 조약을 실시한 후에 전일에 각국으로 파견한 공사 및 영사를 모두 소환할 것.
10. 한국은 각국 공사를 소환할 때 각국에서 파견된 주한공사도 동시에 철회하되, 오직 외국 영사만 경내에 주찰할 것.
11. 재정을 정리하려고 하기 때문에 한국군비를 축소하여 경비를 절약하고, 이에 앞서 전국의 2만명의 병력을 1천명 내외로 감축하되, 경성수비대 이외에 각 지방 병정들은 일제히 철폐할 것.
12. 한일 병기동맹을 체결하여 현재의 군기를 정리할 것.
13. 궁금을 정숙히 하여 군상의 곁에 악인을 제거하고, 무녀의 복축을 금지하여 잡배들은 일체 궁정에 출입하지 못하게 할 것.
14-23. (중략)
24. 현재의 탁지, 외교 두 고문관 이외에 다시 총고문관은 두지 말고 이에 앞서 고빙된 외국의 고문은 모두 파면할 것.
25. (중략)
5. 한일협약 체결
림권조는 초2일 협약안을 올리고, 그 후 누차 협의를 거쳐 비록 약간의 개정은 있었으나 대충 모두 허락하였다. 12일, 먼저 선포한 3개 조는 다음과 같다.
기일. 제1조 재정고문(고문을 감독으로 고침)을 둘 것
기이. 제8조 외교고문을 둘 것.
기삼. 별도로 상세한 문안을 다음과 같이 둘 것.
만일 한국정부에서 외국인과 기타 중요한 외교안건을 체결할 때 외국인에게 특허권을 허락한 데 대해서는 일체 먼저 일본정부와 협의할 것.
같은 날, 또 다음과 같은 조약을 협정하였다.
“이에 앞서 각국 공사는 한국 황제를 알현할 때 의례 외부에서 궁내성으로 간청하면 그곳에서 지정해 준 시일에 소견하였지만, 지금부터는 내정을 개혁하기 때문에 대황제가 일본 공사에게 하문하면 일본 공사는 대황제에게 충고한 일이 많았는데, 특히 이런 예를 폐지하고 국서를 바칠 때 고사를 따른 이외에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임의로 알현할 것.”
6. 목하전종태랑과 스티븐스
진황안은 비록 철회되었으나 이 협약안이 나온 이후 그 리권에 대해 치른 대가는 열 배 내지 백 배뿐만 아니라 거의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목하전종태랑은 그들의 대장성주세국장을 10여 년 동안 지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재정가로 칭하였다. 그리고 스티븐스(즉 전니손)는 워싱턴에 있는 공사관에서 수십 년 동안 있었던 사람이므로, 그는 비록 미국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일본 사람이었다.
7. 신기선을 참정에 임명
참정침상훈을 면직하고 신기선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심상훈은 현영운, 리봉래, 리근택, 조병필 등의 아부한 죄를 아뢰어 그들을 모두 엄한 신문을 하라고 간청하였으나 고종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면직하였다.
8. 전북관찰사이용직의 일본인 토지구입 조사
전북관찰사리용직은, 일본인이 군산과 목포항의 우리 경내에 매입한 장토를 조사하였다.
림피, 만경, 부안 등 10여 군을 집계한 결과 790여 두락이나 되었다.
9. 군수들을 집포관으로 임명
현직 군수로 있던 목천박정빈, 괴산민영은, 청산송희완, 만경정인희, 해남리용우, 돌산마준영, 룡궁리룡환, 의흥조병유, 금해리근홍, 거정리응익 등을 모두집포관으로 임명하여 삼남지방의 도둑을 경비하게 하였다.
이때 이근홍은 선치한다는 명성이 있었고, 마준영은 북인으로 그는 더욱 관리로서의 능력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리고 참정신기선이 아뢰기를, 경북관찰사윤 의 탐장사실을 적발하라고 하였는데 그의 탐장액이 15만여 냥이나 되므로 그는 파직되었다.
10. 재무, 외교고문 고용
일본인 목하전종태랑을 재무고문관, 미국인 스티븐스를 외교고문관으로 고빙하였다.
11. 전남북 및 경남지방의 폭우 피해
8일, 전남북 여러 군에 큰 비바람이 휩쓸었다.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도와 한곡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20일 경남에도 태풍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해일이 일었다. 이때 호우로 인하여 연읍에 표류한 관청은 190간이며 민가는 30,518호, 익사자는 419명, 파선은 959척, 파괴된 한전은 2,256두락, 유실된 염전은 155개 처나 되었는데, 금해명지도와 웅천, 신도의 재해가 더욱 혹심하였다. 이곳은 3천여 호가 수몰되었다.
12. 일본의 여순 점령
일본인은 려순 항구에서 러시아와 싸워 승리한 후 여순항을 점령하였다.
13. 김노규를 함북관찰사에 임명
8월, 금로규를 함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금로규는 북관 사람이다. 그는 유학자로 저명하여 곽종석과 함께 징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고상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관이 러시아에게 점거되자 조정에서는 리윤재가 러시아의 일당이라고 하여 그를 파직시키고 구장 정기택을 임명하였으나 도로의 경비가 삼엄하여 그는 부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사림들의 여론을 따라 김노규를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으나 조정의 명령은 끝까지 통하지 않고 혹자는 김노규가 이미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이때 러시아인들은 이윤재를 떠나지 못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진위대장침굉택 등을 대응하게 하였으나, 그도 그를 방어하지 못하여 러시아인들은 도리어 그에게 이용되고 말았으므로 북관으로 가던 군수들은 러시아인에게 구속되기도 하고 혹은 그들에게 축출을 당하여 일본인에게 체포되면, 그들을 닉직으로 몰아세워 원산관에다가 수감하였다.
14. 김가진, 이용태 등을 대신에 임명
8월, 금가진을 법부대신, 리용태를 내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15. 직산광업소 광부들의 소요
직산광업소의 광부들이 군수류병응을 살해하였다. 이때 유병응이 범법한 광부에게 태형(태형)을 가하다가 그 광부가 사망하자 광부 수천 명이 소요를 일으켜 유병응을 살해하였다.
유병응은 치적이 있었으므로 그를 반장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일산을 쓰고 그 상여를 수행하였다.
16. 시흥 민란
시흥 주민들이 군수박우양을 살해하였다. 이때 박우양은 일본인을 통하여 인부를 모집한 후 그들의 고용대금을 착복하였는데, 이 사실을 안 주민들은 일제히 일어나 고함을 지르며 소란을 피우자 박우양이 일본인을 불러 그들을 해산시키려다가 대포를 맞아 사망한 사람이 있었다. 이에 군중들은 큰 소란을 일으켜 박우양과 그의 외아들을 살해하였다. 이때 일본인도 2명이나 사망하였다.
이 사건이 보고되자 고종은 크게 놀라 “백성이 관장을 살해한 것은 근고에 처음 있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신하들을 질책하고, 안종덕을 안핵사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직산광부사건을 조사하게 하였다
17. 보인사 창설
유생 윤돈구와 려영조 등이 서울에서 보인사를 창설하여 유학종교를 천명한다고 하였다.
18. 일본인의 각도 인부모집 폐지
일본인이 각도의 인부모집을 폐지하였다.
19. 일진회의 친일
일진회 회원들은 모두 단발을 하고 각도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이때 회장 윤시병은 그의 일당 윤갑병, 윤길병, 렴중모, 홍석후, 금명준 등과 밀의하여 일본의 후원을 받지 않으면 세력이 외로워진다고 생각하여 일본인에게 의탁하고, 또 단발을 자원하여 점차 단발할 뜻을 보이자 일본인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자기들이 그들을 이용하기 위해 이 요청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비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운영자금까지 주면서 일진회를 「대한정치개량본부」로 칭하여 그들도 당연히 정치를 참여하여야 한다며 저지하지 않고 병력을 파견하여 그들의 회의장소를 경비하기도 하였다.
이에 윤시병 등은 일본인을 의지하여 일제히 단발하고 또 회의를 개최하여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인원을 파견하여 정부를 질책하면서 관직을 사임하고 떠나라고 하므로 신기선, 리근명 등은 분통하였지만 겸손한 말로 대하였고 또 그들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갑오경장 이후 동학도의 잔당들은 각지에 잠복하고 있었지만 안으로는 백성들의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았고, 밖으로는 지방대에게 탄압되어 아무 횡포도 부리지 못하고 있었으나 남모르게 부서를 정해 놓고 국가의 유사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윤시병이 일진회를 창설하자 그들은 인원을 각처로 보내 제각기 일어나 호응하도록 하므로 10일도 되지 않아 13도의 동학도들은 모두 일어나 혹 진보회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일진회의 지회로 칭하기도 하였으며, 관찰부에서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고, 혹은 군내의 불량민들이 답지하여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그들은 수재들에게 강력히 저항하고 평민들을 위협하여 갑오경장 때와 같은 시국으로 변하자 지방관들은 그들을 먼저 억제하기 위하여 그 수괴를 처형하기도 하고 그의 일당을 수감하기도 하므로 윤시병 등은 정부를 협박하여 종종 전화로 반박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 지회장은 경남박충일, 강원박인흡, 전북류인화, 황해금상현, 평남금광수, 충남정태영, 충북강덕모, 경기리종석, 평북강재린, 함남리용구 등이었다.
20. 일진회와 지방민의 현혹
일진회를 창설할 때 윤시병 등은 서로 속이어 시국이 장차 바뀐다고 하면서 관리를 모두 일진회에서 선출하여, 높은 사람은 정부에 있고 아랫사람은 관찰사와 군수로 있었으므로 비록 향장과 리장 자리라도 일진회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면 감히 넘볼 수 없었다.
이에 우민들은 요동하기 시작하여 서로 전댁을 팔아 일진회에 자금을 희사하고, 멀고 외딴 시골 사람들도 미친 듯이 서로 뒤질세라 하고 매월 서울의 일진회로 바친 회금이 100만냥을 헤아렸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들의 가산이 탕진되었으나 아무 응답도 없고 관직도 내려지지 않자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며 다시 머리를 기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혹은 신문에 기사를 실어 서로 꾸짖기도 하였다.
21. 장승원을 경북관찰사로 임명
장승원을 경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장승원은 판서장석룡의 아들로 그는 대대로 인동에서 살았는데, 그들 부자는 악행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장물을 탐하였으므로 그들의 가산은 수만 냥이나 되었다. 이때 일진회에서는 정부를 질책하여 영남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를 임명하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장승원이 고종에게 많은 뇌물을 바쳐 얻은 것이며 정부에서 임명한 것이 아니므로 장승원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부임하였다.
22. 팽한주와 윤 의 아부
평양민들이, 팽한주가 130만냥을 탐장하였다고 호소하여 그가 곧 면직을 하게 될 형편에 놓였다. 그러나 일본 공사림권조는 일본 군대가 서쪽 지방으로 들어갈 때 팽한주의 공로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를 파직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윤 은 외교를 잘 하였으므로 정부에서 비록 영남관찰사에게 탐장사실을 조사하도록 하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조사하지 못하였다.
군소들은 이와 같이 외국인에게 아부한 것이다.
23. 각도에 순찰사 파견
각도로 순찰사를 파견하였다. 경북은 홍우석, 경남은 금련식, 전북은 박제빈, 전남은 안종덕, 강원은 금성규, 황해도는 정규회, 충남은 리시재, 충북은 정인표, 경기는 리용구이다. 이들은 민간의 질고를 묻고 수령들의 탐장여부 및 권한남용 등을 논하여 전일의 시찰과는 달랐다.
24. 민영기를 탁지부대신에 임명
민영기를 탁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민영기는 수염이 많아 이때 사람들은 그를 「호자(호자 : 수염)대신」이라고 하였다.
25. 중흥사의 화재
북한산성에 있는 중흥사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26. 영유군의 우박 피해
평남영유군에 많은 우박이 내렸다.
27. 송병선, 곽종석, 최익현의 관직 사양
9월, 경연관송병선, 곽종석, 전판서최익현 등을 징소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광무 8년 갑진(1904년) ④
1. 칙임관 및 주임관의 단발과 양복 착용
22일, 외부에 명하여 칙임관 및 주임관에게 단발을 하게 하고 양복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모든 외교관도 이와 같은 예를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때 참서관서상욱은 응하지 않아 그는 면직되었다. 서상욱은 광양군수로 있을 때 탐장으로 인하여 파직되었으며, 이때 또 단발을 하지 않은 죄로 면직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여론에 의하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쉽게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또 리상천이란 사람은 시찰을 떠나는 리재극을 수행하여 일본을 갔다. 그는 단발을 하지 않았으므로 일본 천황은 그의 상투를 풀어 머리를 흩뜨려 내리라고 명하고 서양모자를 쓰게 하였다. 그가 환국한 후 일본인들은 그 사실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2. 태자비 민씨의 사망
28일, 황태자비 민씨가 작고하였다. 이때 나이는 33세였다.
그리고 태자는 고자이므로 남성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나이가 한창인 태자비는 울화증이 생겨 혼자서 화를 내고 매일 경대와 연상을 부수었다.
민영소는 날마다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하나씩 진상하였다. 이렇게 한 지 1년이 지난 후 어혈이 누적되었으나 의관은 그것을 오진하여 태기가 있다고 하면서 잇달아 보약을 진상하였으므로 결국 그 병은 비만증으로 변하여 구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해 봄에 중외에서는 태자의 양도가 돌아와 동침할 징조가 보인다는 소문이 파다하였고 혹은 이것을 혈괴라고 하였는데, 이때 과연 그 말을 징험한 것이다.
3. 심상훈 아버지 묘를 도굴
침상훈 아버지의 분묘가 도굴되었다. 도둑들은 그 두골을 가져갔다.
4. 이근명을 의정에 임명
다시 리근명을 의정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또 태자비원의 총호사로 임명하였다.
5. 태자비의 복제 논의
10월, 황태자비의 초상에 복제를 정하였다. 황제는 기년1년. 편자주 동안 제쇠복5개의 상복 중 하나. 5개월과 3개월 복이 있음. 편자주 을 입고 태자도 황제와 같이 하되, 백포의와 립, 대를 착용하였다가 13개월의 상기를 마친 후에 길복을 입게 하고 종친과 문무백관은 기년 동안 제최복을 입으며, 사서인은 백의, 립, 대를 착용하다가 기년 후에 제복하고 군경들의 복장은 상장정식에 의하여 기년 후에 제복하도록 하였다.
이때 고종은 태자비가 오랫동안 울화증을 앓다가 요절한 것을 가련하게 여겨 특히 비통해 하며, 상장을 후하게 치르기 위해 전일에 없던 복장을 만들어 모후의 상과 같이 치르려고 하였으나 그 일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대신, 유신 및 관각 제신들에게 치상 관계를 의논하게 하자 의정리근명은 말하기를, “우리 조정에서는 소현세자1612~1645. 인조의 장남. 휘는 조(?), 시호는 소현. 인렬왕후 한씨의 소생. 편자주 의 초상 때 대전과 중궁은 기년 동안 제최복을 입고 명나라 의문태자명나라 태조의 장남 주표. 시호는 문. 모는 마황후. 건문 중에 효강황제로 추존하였으며 묘호는 흥종. 편자주 의 상에는 황제명나라의 태조를 말함. 편자주 가 일자를 월수로 바꾸어 12일 동안 제최복을 입다가 제사를 마친 후에 탈복하였으며, 장경태자명나라 주재학의 시호. 편자주 의 상에는 백관이 12일 동안 포모와 질대를 하고 있다가 제복하였으니 이 일을 참작하기 바라며 신은 억대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금병국, 침순택, 추병식, 송병선, 곽종석 등은 외직에 있다는 핑계로 헌의하지 않았으며, 리도재, 금학진, 홍순구, 박영대, 임백영, 정현재 등은 상례를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때 고종은 중외 신민에게 특명을 내려 모두 복기를 같이 하도록 하였는데, 백관들은 이것이 예의가 아닌 줄을 다 알고 있었지만 감히 고종의 비위를 거슬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백립을 벗어 던지고서 야유하기를, “이것이 무슨 복이냐”고 하였다.
6. 박해용의 태자비 복제에 대한 헌의
전비서승박해용이 중추원으로 다음과 같이 헌의하였다.
“례는 절문이 있고 의는 경중이 있으므로 한결같이 선왕의 제도를 준행하여 감히 과하게 할 수 없는 것은 상복이라 하겠습니다. 전에 이르기를, 「기년상은 대부에까지 해당되고 삼년상은 천자에게까지 해당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례는 더없이 엄중한 것이므로, 위로는 만승지존 편자주 으로부터 아래로는 려항의 필서에 이르기까지 추호도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복제는 황제와 태자가 모두 기년 제쇠복으로 마련하였고, 신민들도 복제를 받을 때 기년복으로 정하여 모후가 후비의 상을 임하는 것 같으니 어찌 이와 같이 례관이 모를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들은 례는 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후한 것을 소중하게 여긴 것이라고 핑계를 대고 있지만 어찌 이와 같은 비례를 비궁에게 베풀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비궁의 상복을 모후의 상복으로 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그 모후의 상복은 무슨 상복으로 입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시 천자께 아뢰어 다시 여론을 정하신 후 신인의 정리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7. 우룡택의 태자비 복제에 대한 헌의
전참봉우룡택 등이 정부로 서신을 올려 복제를 논하였으나 황제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대저 구부간에는 대공복조선시대 상례제도의 하나. 상복을 입는 기간은 9개월. 굵은 베로 짜였으며 대공친이 조부일 경우에는 남녀 서손까지, 조모이면 맏손자 및 손자, 부모일 때에는 며느리와 출가한 딸까지 입었다. 편자주 이 되므로 가부에게는 기년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자비의 상에 황제의 복은 기년복이며, 부처간의 복은 본래 장기이지만 아버지가 계시면 장자는 장을 짚지 않기 때문에 태자비의 상에 태자는 장기를 하지 않으며, 신민과 군상 사이는 은의로써 복을 입지만 태자와 비궁 사이는 모후의 은의가 없기 때문에 태자비의 상에 신민은 복이 없고, 태자비는 국가에서 승통하는 모후가 아니기 때문에 태자비의 상을 「붕」이라 하지 않고 「훙」이라 하며 장례 때에도 「릉」이라 하지 않고 「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장례에서 도감을 국장도감이라고 하고 도제조를 총호사라고 한 것은 너무 핍박하는 혐오가 있는 것 같으니 각하들께서는 고례와 선대의 헌장을 참고하시어 국장도감이란 칭호와 총호사의 명칭 및 황제의 포척익선관, 포립, 황태자의 포과익선관, 포립, 신민들의 기년복 등을 속히 개정하시어 국론의 의혹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8. 태자비 민씨의 시호 등
태자비 민씨의 시호를 순명, 혼전호를 의효, 원호를 유강으로 하고 원소는 양주의 마장리로 정하였다.
그리고 홍릉의 역사를 중지하라는 명을 내리고 오로지 유강원에 전력을 다하였다. 시호를 처음에는 순렬이라고 하였다가 그 후 다시 고쳤다.
9. 청국 서태후의 칠순 축하사절 파견
주청공관 서기금균정에게 명하여 국서를 가지고 청나라로 가서 서태후의 칠순경절을 축하하게 하였다.
10. 권중현의 귀국
위문왜군사권중현이 료동에서 귀국하였다.
11. 태천 향장백경전의 동학교도 토벌
태천향장백경전이 동비를 방어하다가 동비 수십 명을 살해하였다. 이때 량서에는 동비가 치성하여 겉으로는 일진회 회원 같았지만 란의 형태는 또 그와 달랐다.
12. 경부선철도 개통
경부선철도가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13. 서울의 뇌우
서울에서는 19일부터 큰 뢰성이 울리고 많은 비가 왔다. 외군에서도 종종 무지개가 보였다.
14. 전환국 폐지
11월, 전환국을 폐지하고 신구화폐교환소를 설치하였다.
15. 경북순찰사홍유철를 파직
경북순찰사홍유철을 파직하였다. 그는 보고할 때 황후의 이름자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16. 일본 육군대장장곡천호도와 일진회의 관계
일본 륙군대장장곡천호도가 서울에 주재하면서 사령부를 설치하고 일진회와 서로 내통도 하고 있으므로 고종은 이를 우려하여 그들에게 보낸 뇌물이 그치지 않았고, 또 그에게 훈장줄 것을 명하여 리화장을 하사하였다.
17. 일본의 한국경찰권 탈취
참정신기선과 내부대신리용태 등을 면직하고, 군사권과 경찰권 등의 조례도 반포하였다. 그리고 24일, 일진회는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므로 정부는 경찰과 관리를 동원하여 그들을 탄압하자 일본인들도 병력을 동원하여 비상사태가 발생할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어떤 일진회 회원이 돌을 던져 일본인 한 사람을 다치게 하자 그들은 우리 경찰의 잘못으로 간주하여 대대장 이하 장교 6명, 사졸 7명을 포박하라는 령을 전하고 그 다음날 림권조, 장곡천호도등은 담판을 하여 신기선 등의 관직을 체직하고, 그 후 수일 만에 그들은 또 우리 정부를 협박하여 우리 나라 경찰력은 치안을 유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방해가 되므로 지금부터 전국의 경찰권은 일본의 군부 및 관리가 장악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 임권조 등은 첩문을 지어 국내 및 각국 공사에게 포고하기를, 지금부터는 한국인과 외국인을 막론하고 일본의 군부 및 경찰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19개 조항을 반포하고 이를 범한 사람에게는 모두 일본 사령관이 직접 형사처분을 한다고 하였다. 그중 그 조규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제4조 당을 결성하여 일본에 반항하거나 혹 일본군에 저항하는 자.
제15조 회사를 결성하거나 혹 신문, 잡지, 광고 및 기타 수단으로 치안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자.
제17조 군사령관의 명령을 어기는 자.
이것만 보아도 그 나머지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18. 태자비 민씨의 인산
29일, 태자비 민씨를 례장하였다. 등롱 등 정수 이외에 1천쌍을 더 준비하였으며 다른 물건도 이와 같이 하였다.
19. 조병식을 내부대신에 임명
12월, 조병식을 내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공관으로 보고하자 그를 추하게 비방하였다.
20. 주청공사민영철의 귀국
주청공사 민영철이 귀국하였다. 이때 관서민들은 그의 집을 포위하여 그가 궁역 때 갈취한 장전을 수색하였으며, 의주신사 금우용은 손에 칼을 들고 직접 그들을 감독하자 민영철은 이 사실을 고종에게 호소하므로 경관에게 칙령을 내려 김우용을 수감하였다.
21. 일본의 재외한국공사 폐지요구
일본인들은 우리 정부를 협박하여 외국으로 파견한 우리 공사들이 유명무실하여 공연히 국비만 낭비한다는 이유로 폐지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병제가 미비하여 공연히 소요만 일으킨다는 핑계로 경향에 도합 8천명만 주둔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감축하라고 하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22. 목하전의 각군 공금 이식제도 폐지요구
재정고문관목하전종태랑이 정부에 권하기를, 각군 공금리식제를 폐지하라고 하였으나 탁지대신민영기는 저항하지 못하고 명년 봄에 시행하겠다고 하였다.
금도진, 리윤종 등이 련명소를 올려 시정에 대한 실책을 논하자 일본인들은 그들을 정우회로 지목하면서 그들을 불러 힐책하였다.
23. 권중현, 박제순 등을 대신에 임명
권중현을 군부대신, 박제순을 법부대신, 리근명을 경운궁 중건도감 도제조로 임명하였다.
24. 일본인 사망자 보상금 지불
내탕금 18만 7,400원을 지불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우리 나라에서 사망한 일본인을 보상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의 뜻에 의한 것이다.
25. 일본인의 병기 약탈
일본인들은 웅천군의 가덕과 천성 량진으로 들어가 군기고를 파괴하고 병기를 약탈해 갔다.
26. 최익현의 상소
최익현을 찬정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하여 강력히 사양하였다.
“신이 작일 성상의 유시를 받들어 편안히 내려와서 신병을 조리하고 있던 중 신이 은명을 받으니 즉시 구학으로 돌아가 죽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단, 지금의 나라의 형세을 볼 때 신이 폐하를 놔두고 어디를 가겠습니까?
폐하의 좌우를 말씀드린다면 아첨 잘하고 말 잘하는 무리들이 앞에 가득히 있으면서 기만과 오만한 마음을 품고 백방으로 임금과 나라를 팔려는 일만 하고 있으며, 폐하의 조정을 말씀드린다면 그 소인배들은 안으로 간세배들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강적들과 내통하여 권력과 봉록을 취하려 하고 있고, 조금 체면이 있는 사람들도 몸을 아끼고 일을 피하여 뒤로 물러나면서 모두 우리 임금님이 무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백성을 말한다면 화난을 일으키기 위해 길에서 횡포를 부리며 감히 예측할 수도 없는 말을 퍼뜨리어 적도들을 끌어들이기를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있으며, 폐하의 린국을 말한다면 그들은 여우 같은 사술로 맹약을 저버리어 오로지 병탄만을 노리면서 정권과 사법권을 장악하여 우리 수족을 묶어 놓고 우리의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있으니 그들은 또 무슨 화변을 빚어낼지 모릅니다.
아! 주상이 이렇게 외롭고 국가가 이렇게 위태로우니 신이 비록 머리를 찧거나 목을 베어 만에 하나라도 폐하의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어찌 차마 폐하를 놓아두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이미 이때 신을 부르셨으니 어찌 이때 다시 신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신은 대궐 밑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은 지 이미 한 달이 되었습니다. 전날에 아뢰었던 제조는 이미 그 효과가 있기를 말한 것으로, 만일 성상의 질책을 받는다면 신은 함구하여 하늘의 조화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니 어찌 감히 다른 말을 지껄이며 거듭 소란스러운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극도로 애통하면 정에 알맞은 슬픔을 택할 여가도 없고, 급하게 호곡을 하면 소리가 절도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신은 극히 애통스럽고 급히 호곡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여가에 정에 맞고 안맞는 것과 소리가 절도 있고 없는 것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
옛날부터 나라를 잃은 것은 참람한 권신에게 잃은 경우가 있고 적국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못하여 잃은 경우는 있어도, 문자로 된 문서나 조약을 작성하여 온 나라를 손으로 받들어 적에게 주면서 병사와 교전 한번 하지 않고 화살 하나 쏘지도 않은 채 잃었다는 소문은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무폐에 대해서는 교정을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다만, 그 교정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외국에서 차관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저당을 잡혀야 할 것입니다. 그 저당을 잡히려면 반드시 토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토지는, 폐하께서 그 토지와 인민을 받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것을 남에게 주려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 차관을 어디에 쓸 것인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쁜 화폐를 모아 교환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의 생각으로는 300만원과 1000만원을 모두 나쁜 화폐와 바꾸려고 하십니까? 처음에 교환을 하였다가 계속해서 교환할 밑천이 없으면 화란이 일어나는 것은 하루도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그 밑천이 남아돈다 하더라도 한 번 교환할 문을 열어 두면 내국인, 외국인을 막론하고 그 교활한 무리들은 남몰래 더 나쁜 화폐를 주조하여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물며 처음부터 교환할 밑천이 없는 데서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소를 막론하고 차관을 하는 날에는 나라가 없어지는 날입니다.
그리고 요즈음 이 조약이 이미 체결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신은 더욱 애통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차관을 하지 않았으니 신은 즉시 그 계권을 취소하고 국고를 절약하여 국력이 조금 신장된 후에 의논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조약을 저버렸다고 질책하면 비록 수개월 동안 식리하였던 이자를 징수하지 못하더라도 어찌 자신의 살을 베어 배를 채운 것보다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화근이 발생한 이유를 생각하면 모두 「의부」 2자가 그 화근이라고 하겠습니다. 갑오경장 이후 군신 중에서 러시아당과 일본당으로 지적을 받은 사람들은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인들은 어찌 상도가 있겠습니까? 혹 아침에는 러시아 사람이 되었다가 저녁에는 일본 사람이 되고, 혹은 아침에 일본 사람이 되었다가 저녁에 러시아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러시아인에게 아부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인에게 아부하여 그들은 틈만 있으면 이익을 취하려고 할뿐입니다. 이것은 외국인들도 그들의 무상함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완급을 잘 조종하여 기술적으로 대처하고 또 그 가운데 취사선택을 잘하면 러시아당과 일본당을 막론하고 모두 그 죄에 빠져든 것도 잘 모르겠지만 그들의 취향이 매국으로 쏠리는 데는 한가지일 것입니다.
근일 일본에게 죄를 지은 러시아의 일당을 보면 지금 그들은 모두 팔뚝을 서로 당기며 의기가 양양하여 아무 기탄이 없습니다. 이것은 왜 그렇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조나라의 곽개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날 곽개는 남에게 뇌물을 받고 나라를 팔았지만 지금 곽개 같은 사람들은 남에게 뇌물을 주면서 나라를 팔아먹고 있으니, 아! 이것을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들을 기용하셨습니까? 알면서도 그들에게 억압을 받아 부득이 기용하셨습니까? 만일 모르셨다면 폐하께서는 어찌 그 일로 보지 않았습니까? 만일 아셨다면 그들이 비록 무슨 세력을 업었다 하더라도 그들도 우리의 신자였을 것인데 무엇을 꺼려하여 그들을 처형하지 않았습니까?
신이 바라는 바는 성상은 마음속으로부터 먼저 다른 나라를 의지하는 마음을 끊고, 성상의 뜻을 확고히 세워 요동하지도 말고 굽히지도 마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차라리 자주적으로 살다가 망할망정 그들에게 아부하여 살기를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군신들 중 러시아당과 일본당들은 모두 형장에서 처형하여 온 나라를 호령한 후에 내수할 방법에 힘을 기울여 속히 자강책을 시도하기를 신이 전일에 올린 상소문(차자)의 내용과 같이 하시어, 생각하신 것마다 안민과 보국에 두신다면 그들도 천하의 공의를 두려워하여 감히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 주야로 성상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 만일 그 일을 잘 하실 수 없다면 번거롭더라도 따뜻한 유시를 내려 신을 물러가게 하실 것이 아니라 일찍 부월로 처형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포로의 귀신이 되지 말게 해주시면 이것은 폐하께서 시종 큰 은전을 내려주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27. 최익현의 독대
최익현이 누차 소명을 받아 8월에 성외에 도착하였다. 이때 그는 상소하여 진정을 하고, 겸하여 시국의 급무를 아뢰자 수옥헌으로 입대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날은 즉 이달 초2일이었다.
최익현은 소매 속에서 차자를 내어 올리고 더욱 강경한 말을 하였으며, 그곳을 물러난 후 다시 상소하므로 고종은 매우 괴롭게 생각하여 처음에는 객관에서 조병을 하라고 하였으나 그 후 물러가라고 하였다. 이에 최익현은 비지를 다시 봉해 보내면서 “폐하께서 무슨 까닭으로 신을 불렀다가 무슨 까닭으로 신을 쫓으십니까? 지금 국가가 장차 망하려고 하니 신은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도성에 머물러 있었다. 이 소문은 제7차소이다. 그의 소매 속에 든 차자 끝에는 다음과 같이 방례의 실책 5개항이 열거되어 있었다.
1. 종묘의 위판 중 명나라 조정에서 하사한 시호는 삭거할 것.
2. 4세를 추존할 때 진종, 헌종, 철종을 제외하여 거론하지 말 것.
3, 경효전과 홍릉의 궤전은 철폐하지 말 것.
4. 순명비의 상에 신민의 복제도 기년으로 할 것.
5. 문묘의 축식은 어휘를 쓰지 말 것.
이상과 같이 그의 말은 더욱 강직하였다.
28. 서울의 첫눈
이해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였으나 이달 중에 서울 이북 지방에는 첫눈이 내렸다.
광무 9년 을사(1905년) ①
1. 최익현의 다섯 역적대신 참수 요구 상소
을사년(1905), 광무 9년 정월, 최익현을 경기관찰사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다음과 같은 사직소를 올렸다.
“신이 비록 보잘 것은 없으나 어찌 일개 관찰사가 되기 위해 왔겠습니까? 신이 죄가 있으면 유배를 시키는 것도 가하고 사사를 하는 것도 가한 일입니다만 리로 유도하여 떠나게 하는 것은 듣지도 못한 일입니다.”
이때 그는 국가가 망하는 징조를 일일이 아뢰고 5대적신의 처형을 요구하였다.
2. 김병국, 이항노 등에게 시호를 더함
고 구성군리준은 충무, 고 재상금병국은 충문, 고 유신 리항로는 문경으로 증시하고, 흥인군리최응의 시호는 문충으로 바꾸었다.
이때 최익현은 가지도 않고 또 국사를 한없이 논하고 있으므로 고종은 그를 매우 싫어하였다. 이항로는 최익현의 스승이므로 이항로를 포상하고 또 그의 아들 최영조를 참봉으로 임명하여 그의 비위를 맞추어 떠나도록 하였으나, 그는 확고히 떠날 뜻을 갖지 않고 살면 할일을 하고 죽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기정진, 임헌회 및 이항로 등의 증시를 논하였으나 이 때 이항로에게만 시호를 하사하였다.
3. 이지용, 박제순의 대신 자리 교환
리지용을 농부대신, 박제순을 법부대신으로 서로 바꾸었다.
4. 함남관찰사이헌경을 파직
일본인들은 함남관찰사리헌경이 군정을 방해하였다고 하면서 그의 파직을 요청하므로 신기선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5. 북관 러시아군의 퇴각
북관에 있던 러시아병들이 일본군에게 계속 패배하자 그들은 두만강 북안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북청 이북은 전주를 모두 철거하였다.
6. 구영조, 이근풍 등을 관찰사에 임명
구영조를 황해관찰사로 임명하고, 강원관찰사주석면을 전라도로 전직하였다가 충남조종필을 주석면의 대직으로, 리건하를 조종필의 대직으로 임명하였으며, 리근풍을 평북관찰사, 리용익을 경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용익이 처음 일본인에게 구속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일본인이 그를 신문할 때 그는 재물을 사장한 사실이 없어 그를 다시 돌려보냈다. 그는 석방된 후 다시 금중과 내통하고 있으므로 윤시병 등은 서신을 보내어 그를 꾸짖으며, 귀향을 권고하고 국정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윤시병은 일진회 회원을 파견하여 그를 그의 집에 감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그를 관찰사로 임명하자 그는 또 그를 위협하여 부임하지 못하게 하므로, 이용익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전차를 타고 갑자기 대구에 도착하므로 그곳 리민들은 그를 거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한편으로 옛날 관찰사장승원을 류임해 주도록 전화로 요청하고, 한편으로는 서울로 올라가 대궐 앞에서 부복하고 있었다. 그것은 장승원이 어떤 혜정을 한 것이 아니었다
7. 의정부 찬정의 축소
경관관제를 개정하여 의정부의 찬정을 감하였다.
8. 일본차관과 「자원민대」
일본에게 각 항구를 저당하고 1000만원을 차관하였다. 이때 정병원, 윤돈구, 리학재 등은 국가재정이 비록 궁하다고 하지만 외국에서 차관을 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중외에 통고하여 민간에게 의연금을 내도록 간청하였다. 이를 자원민대라고 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그들을 체포하여 힐문을 한 후 10일 동안 수감하고 그 통문을 회수하였다. 이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본도 재용이 고갈되어, 쌀빚을 세내어 우리에게 대출하면서 가벼운 이자로 빌려 무거운 이자로 대출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우리 강토를 빼앗으려고 하였으나 아무런 핑계거리가 없으므로 우리 정부를 위협하여 강제로 차관을 내주고 또 속히 상환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공예, 농업, 학습 등의 자금을 주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돈은 서울 및 인천항의 수도비로 사용하였고, 또 민영기 등이 중간에서 수십만 원을 갈취하였다.
9. 유응두의 독대
류응두를 불러 입대하게 한 후 그를 참봉으로 임명하였다. 유응두는 풍천군 사람으로, 그는 경술로 소문이 난 데다가 어떤 사람들은 그가 특이한 능력이 있다고 전하기 때문에 곽종석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6월에 그를 다시 비서승으로 임명하였다.
10. 참형의 폐지
다시 참형을 폐지하였다. 이것은 형법교정관금가진의 말을 따른 것이다.
11. 허위를 비서승에 임명
허위를 비서승으로 임명하였다. 허위는 선산 사람으로, 그는 불우한 생활을 하면서도 뜻이 고상하여 호언장담을 좋아하고 자신의 경륜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서울에 와서 10여 년 동안 지내던 중 권귀가를 찾아보지 않고 한 객관에 쓸쓸히 머물고 있었는데, 이때 영남 사람으로서 서울에서 관리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를 책사로 추대하고 또 어떤 인연으로 대내와 통하여 처음에 그를 참봉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고종의 총애가 날로 높아져서 1년도 안되어 참찬을 임명하고, 또 집을 하사하여 거처하게 하였다.
12. 경운궁의 수통 설치
다시 경운관의 수통을 설치하였다.
13. 강동군의 석유광맥 발견
평남강동군에서 석유광맥이 발견되었다.
초7일, 지진이 발생하였다.
14. 조병세의 진언
2월, 옛날 보국 조병세를 약원도제조로 임명하자 그는 입대하여 다음과 같은 6조를 아뢰었다.
1. 명헌태후와 순명비의 복제가 경중의 질서를 잃었으므로 속히 개정할 것.
2. 궁금이 효잡하므로 당연히 먼저 숙청할 것.
3. 최익현의 상소는 모두 지론, 격언으로 약석 아닌 것이 없으므로 즉시 시행할 것.
4. 군수는 백성과 가까운 관리이므로 매관하지 말 것.
5. 다시 정부를 수립할 것.
6. 군액을 감축하지 말 것.
끝으로 폐하가 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신은 다시 천안을 대하지 않겠음.
15. 고종의 미신 현혹 실상
일본인들이 헌병을 파견하여 경운궁을 수비하였다. 이때 요술을 가지고 고종에게 아첨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혹 구름을 타고 허공을 날아 순식간에 만리길을 가서 러시아병과 일본병의 진영을 살펴본다고 하고, 혹은 비와 돌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만일 적들이 국경을 침범할 때는 돌과 비로 그들을 공격한다고도 하였다.
그들은 요망스럽고 방탄스럽기가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으므로 민영환은 참정으로 임명된 후 누차 그들을 배척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일본인들이 헌병을 파견하여 그들을 금지하였으나 그들은 끝까지 중지하지 않았다.
16. 일본인의 내시 감축 요구
일본인들이 내시감축을 요구하므로 모든 환관들은 한곳에 모여 통곡을 하였다. 이에 금한종은 리근택을 꾸짖어 말하기를, “당신들은 내시들이 나라를 그르쳤다고 하지만 결국 매국을 한 사람들은 당신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일본 사람과 반면도 없는 사이지만 이렇게 어두운 밤에 살려 달라고 애걸하고 있는데 도리어 내시들을 핑계대고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일본 사람들은 김한종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도주하였다.
수십 년 동안 내시들 중 총애를 받아 기세를 부린 사람들은 금규복, 황윤명, 리용선, 라세환, 강석호, 금한종 등으로 그들은 서로 결탁하여 국가의 큰 좀 노릇을 하였으며, 그중 강석호가 가장 심한 비리를 저질렀고, 황윤명은 조금 자중하였는데 그는 시도 지을 줄 알고 서화도 잘 하였으므로 어떤 문회에 참석할 때 매우 돋보였다.
17. 일본의 최익현 방축과 김도진, 허위의 구금
일본인들이 최익현을 포천으로 방축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최익현이 누차 상소를 하여 치안에 방해가 되므로 그를 사령부로 구속하자, 그는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림권조와 장곡천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하염없이 꾸짖었다. 그 후 수일만에 일본 사람들은 그를 떠메어 포천의 옛집으로 돌려보냈다.
김도진과 허위도 최익현과 함께 수감되었다. 이때 허위는 굽히지 않아 수개월 동안 수감되었고, 김도진은 구속될 때 차에 오르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바로 금청음 선조가 심양으로 가시던 날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기억력에 감탄하였다.
최익현이 서울에 있을 때, 하루는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창문 밖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요란하더니 잠시 후 일본인 십여 명이 문을 열고 말하기를, “우리 사령부에서 공을 부르니 공은 우리와 함께 가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익현이 “너희 사령부의 부장은 누구냐?”라고 하자, 그들은 “장곡천대장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최익현은 화를 버럭 내며 “나는 우리 대한의 대관이므로 너희 대장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와서 할 일이지 왜 부르느냐?”라고 하자, 일본 사람들은 웃으면서 “사령부에서 부르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습니까?”라고 하면서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꽁꽁 묶으려는 기세를 지으므로, 최익현은 탄식하면서 “국가가 무력해진 것이 이렇게 되었는가? 내가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러나 공연히 흉측한 욕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가서 그자를 통쾌히 꾸짖어 주어야겠다”하고 이어 말하기를, “나를 묶을 필요가 없다. 내가 가겠다”고 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이 인력차를 부르자 최익현은, “나는 내가 타는 교자가 있는데 왜 너희들의 수레를 타겠느냐?”라고 하고 세수를 한 후 건을 쓰고 술 두어 잔을 마신 다음 교자를 타고 떠났다. 이때 그의 아들 최영조가 수행하였다. 그들은 명동사령부에 도착하여 다른 사람들을 문밖에 있게 하고 최익현 혼자만 들어갔다.
구례에 거주하는 강모라는 사람은 일찍 최익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 사실은 그가 이때 도성으로 들어온 후 나의 집을 방문하여 최익현이 구속된 광경을 목격했다고 말해 주었다.
18. 참정조병호를 면직
참정조병호가 면직되었다. 이에 앞서 경주군수박병익의 탐장 수십만 냥이나 되어 백성들의 호소로 그는 오랫동안 평리원에 계류되어 있었는데, 조병식이 내부에 있을 때 후한 뇌물을 받고 그를 관직에 복직시켰다.
그 후 조병호가 정부로 들어가 먼저 그 사실을 고발하여 조병식을 면직시키자 조병식은 그 사실을 림권조에게 호소하므로 임권조는 조병호를 공박하며 그가 자신의 혐오를 앙갚음한 것이라고 하고, 정부를 협박하여 조병식을 기용하도록 하였다. 이에 조병호는 병을 칭하여 면직되고 조병식은 옛날처럼 관직에 있게 되었다.
19. 화적의 신계군수 살해
신계군수금두환이 화적에게 살해되고 공전 2만6천여 냥도 그들에게 약탈당하였다.
20. 청년회와 헌정연구회 및 공진회
서울에는 청년회와 헌정연구회가 있었고 삼남 지방에는 공진회가 있었다.
청년회는 야소의 구세주의를 종교로 삼고, 헌정회는 구미의 입헌정치를 본받은 것으로 이것은 모두 서양학을 답습한 것이다. 그리고 공진회는 한결같이 전진하여 일어나자는 것이다.
21. 전주부민의 창의소 설치
전주부민들은 일진회의 횡포에 분개하여, 부리금한수 등이 창의소를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일진회를 공격하다가 전투에 패배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그들은 은진의 강경포로 퇴주하였다.
그 후 본부에서는 계엄령을 발표하고 렬읍으로 통문을 보내어 의병에 응모하라고 독려하므로 전북 지방은 크게 소란하였다.
22. 이승우를 전북관찰사 겸 선무사로 임명
충북관찰사리승우를 전북관찰사 겸 선무사로 임명하였다. 이승우는 아량이 있으므로 그 민요를 진압하려고 한 것이다. 이때 이승우는 전북에 도착하여 훈련하는 것이 방도가 있었으나 의민들은 그 민요를 갑자기 제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서로 해산할 것을 론하였다.
23. 미국공사모르간의 부임
미국공사알렌이 교체되어 귀국하고 신임 모르간(Edwin V. Morgan)이 그의 대직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우리 나라에 10여 년 동안 머무르다가 귀국할 때 사람들에게 탄식하기를, “한국 국민이 가련합니다. 내가 9만리를 돌아다녀 보고 상하 4천년의 역사를 보았지만 한국 황제와 같은 사람은 처음 난 인종이라고 할까요?”라고 하였다.
24. 일본의 여순전투 승리를 축하하는 국서 내용
의양군리재각을 대사로 임명하자 그는 일본으로 들어가서 일본인의 려순승첩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겨울 날씨가 따뜻하였다. 이것은 수십 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므로 일병들은 료동에서 싸울 때 추위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봉천지방 전투에서 러시아인들은 운하를 믿고 설비를 하나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물이 꽁꽁 얼어붙으므로 일병들은 비호처럼 건너가 불의에 진격하자 러시아는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때 모든 사람들은 하늘이 러시아를 망하게 했다고 하였다. 이재각은 떠날 때 다음과 같은 국서를 가져갔다.
“짐이 생각할 때 이번에 귀국이 병력을 출동하여 무력을 떨친 것은 오직 우리 동양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것은 옛날에도 드문 쾌거라고 하겠습니다. 그 출병은 명분이 있기 때문에 의기가 지향하는 곳마다 파죽지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료양을 점령하는 것과 려순을 함락하는 기세가 아직도 늠름한데 봉천지역을 승리하고부터 군성을 더욱 떨치어 곧 폐하의 척신이 멀리 떨치고 그 공리가 널리 미치었으니 짐이 동맹국의 군주로서 어찌 축하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황족인 의양군리재각을 대사로 임명하여 친서를 가지고 가서 축하를 드리고, 또 토의 수품으로 짐의 우의를 표하는 바이오니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25. 일본의 최익현 강제 퇴거
최익현이 포천에서 간도로 걸어 입경한 후 그는 또 상소를 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그 사실을 알고 그가 머물고 있는 집을 찾으므로 신문에서 서강 사이에 있는 려관은 모두 소란하였다. 그리고 그를 발견한 즉시 화차에 실어 강제로 정산리로 돌려보냈다. 그것은 그가 포천에서 정산으로 이거한 지 이미 몇 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최익현이 비록 두 번이나 일본인들에게 추방되었으나 일인들은 그를 매우 공경하였다. 그리고 그가 묵고 있던 여관에는 최익현을 논평한 글이 있었는데, 그것은 「충당우직, 충직감언,경불외사」 등이었다. 이것을 신문에 게재하고 또 그의 가세, 사우연원, 평생 언행, 출처, 대절 등을 발췌한 후 책 한 권을 만들어 이것을 <최익현략사>라고 하고 서로 전해 가면서 읽었다.
26. 일본 정토종의 침투
일본 스님들이 서울명동에 정토종교회를 창설하였다. 일본인들은 본래 부처를 존경하여 왕공 이하가 모두 예의를 갖추었고, 그 떠돌이 스님들도 우리 나라 서울로 와서 단상에 올라 불경을 강하였으며, 장교와 병사들도 청강한 사람은 모두 숙연하여 감히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우리 백성들도 일본인의 횡포를 우려하여 그 스님을 보고 한 번 정토종교회에 자신을 의지하면 일본인과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 뒤질세라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그 교도들은 나라 안에 가득하여 어느 곳이든 교회를 설치하였고, 교활한 백성들은 그들에게 의지하여 정토종교패를 호신용으로 팔아 재물을 모은 사람이 있었다.
27. 의친왕이강의 미국유학
의친왕리강이 귀근하려고 미국에서 일본으로 왔으나 고종은 전화를 하여 못오게 하고, 다시 학자금 5만원을 보내면서 미국으로 돌아가 유학을 마치게 하였다. 이것은 엄비의 뜻이었다.
28. 주청공사 철수
주청공사관에 명하여 다만 서기관, 서기 각 1명만 남게 하고 기타는 모두 철수하게 하였다.
29. 전신, 우편, 철도사업을 일본에 위탁
전국의 전화, 우체사업을 일본정부에 의존하고 서북철도 부설사업도 모두 일본 철도감부에 의존하였다. 이때 외부대신리하영이 림권조와 협약을 조인하였다.
30. 하와이 이민 금지
각 항구에 칙령을 내려 유민들이 서양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근래 우리 국민들 중에 하와이로 유입한 사람들은 1만여 명이나 되므로 누차 외부로 전화를 하여 본국 영사가 그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그것은 각국의 례와 같이 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재정이 궁색하여 영사를 파견하지 못하고 일본의 하와이영사제등간에게 부탁하여 그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자, 우리 유민들은 그를 거절하여 우리 주미공사를 파견해 주기를 바랐다.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자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슬퍼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대정관일은 생활이 궁색한 우리 유민을 꾀어 남녀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멕시코로 들어가 노비로 팔았다. 멕시코 사람들은 그들을 농부로 만들어 소나 말처럼 학대하므로 그들은 다시 다른 곳으로 도주하거나 사망하여 거의 인원이 헤어지고 없었다.
이것은 유학생 신태규, 황용성, 가정수, 박화중 등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 정부로 서신을 보내 그들을 일찍 귀국시키라고 하자 정부에서는 그들을 민망히 여기고 있었으나 아무런 대책이 없으므로 이런 명을 내렸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일본에 있는 윤치호에게 그곳으로 가서 그들의 상태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는 6월경 하와이로 갔으나 그도 활동비가 없어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어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멕시코에서 고용된 청국인들은, 부지런하고 영리한 우리 유민으로 인하여 소외되자 그들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우리 유민들이 도착하는 것을 계속 저지했다고 한다.
31. 지리산의 지진
20일, 지이산이 1주일 동안 울었다. 그리고 23일에도 지진이 발생하였다.
32. 이근호, 민영선 등을 관찰사로 임명
3월, 리근호를 경기관찰사, 민영선을 경남관찰사, 경남관찰사성기운을 충북관찰사, 한창교를 함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함경북도는 리윤재가 사임한 이후 약 1년여 동안 관찰사가 없었다.
광무 9년 을사(1905년) ②
1. 군대병력을 감축
3월, 경향의 군대병력을 감축하였다. 서울에는 시위 3대대를 두었는데 매대에 800명이었으며, 외도에는 지방 8대대를 설치하여 매대에 600명을 두었다. 그리고 제1연대는 수원, 강화, 개성, 북한, 안성 등지에 주둔하고 제2연대는 청주, 공주, 황간, 제천, 충주 등지에 주둔하고 제3연대는 광주, 전주, 남원, 강진 등지에 주둔하고 제4연대는 대구, 진남, 진주, 울산, 경주, 안동, 상주 등지에 주둔하고 제5연대는 황주, 해주 등지에 주둔하고 제6연대는 평양, 의주, 강계 등지에 주둔하고 제7연대는 원주, 고성, 려주, 춘천 등지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함경도 지방은 아직도 소란하여 련대를 설치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각 도의 여병 2천여 명을 선발하여 헌병, 기병, 공병 등 3대대를 편성하였는데, 매대에 각 600명이었다.
2. 이지용의 징포신률
법부리지용이 징포신률을 아뢰었다. 그 신율은 100원에서 1천원까지 징수하였으며, 징역은 1년에서 15년까지로 2천원 이상은 교형에 처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문구에 그쳤을 뿐이다.
그리고 순천군 학교생 리희경은 유학차 일본 동경으로 가서 우리 신문사에 서신을 보내어 천하대세를 열거하면서 본국의 실정을 힐난하게 비판하였다. 그 말은 수천 마디였다. 그의 문사는 위려하였고 론의도 강개하였다. 그의 나이는 겨우 15세였다.
3. 인도의 지진피해
인도에 지진이 발생하여 1만3천명이 압사하였다.
4. 일본군의 정주 어비 훼손
4월, 정주군수리교영이 내부에 보고하기를, 본군에 있는 어비에 태조가 원나라를 방어할 때 머무른 시말과 선조가 임진왜란 때 몽진한 사실을 기록하고, 그 중간에는 일본이 침략했다는 구절이 있었으나 그것은 이곳을 지나가던 일본군들이 「왜적」이라고 쓴 글자는 쪼아냈다고 하였다.
5. 일본인의 서울 동이름 개칭
그리고 일본인들은 서울에 와 살면서 동명을 정으로 바꾸어, 니현은 본정, 남산동, 회동, 주동은 남산정 또는 수정이라고 하였으며, 명동은 명치정, 죽동은 영악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또 각 도로 하여금 민간의 말(마)을 조사하여 기록부에 적어 보고하도록 하고 토산마의 통계표를 만들었다.
6. 일본인의 내지하천 자유항행권 요구
4월, 일본인들이 우리 내지의 하천을 자유롭게 항행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그들은 진황지 철회 이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들 중 이민해 온 사람들은 도처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간척사업을 벌이다가 이해 봄에 그들은 또 하천안을 제출하였다. 참정민영환은 그 청을 강력히 거절하므로 우리 대신과 백성들은 그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영환은 끝까지 그들을 저항하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누차 사직을 간청하다가 겨우 면직되었는데, 그 후 침상훈이 그의 대직으로 임명된 후 결국 허락을 해주고 말았다.
7. 경기, 강원도의 의병 봉기
4월, 경기, 강원, 충청도 및 경북 일대에 의병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왜적을 토벌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8. <성적도>의 각도 봉안 소동
문선왕의 <성적도>를 각도에 간포하였다.
이때 수원민 공재헌은 신묘년(1891)에 청국을 갔다가 녕해부의 공소겸의 집으로 가서 려성부가 그린 <선니성적도> 108폭을 구입하여 그가 돌아온 후 그것을 모각하였는데, 이때 그 일이 완료되자 전국장리명륜 등과 경향의 간민들은 그것을 기화로 여겨 학부대신리재극과 전참정조병식에게 뇌물을 주어 이 사실을 고종에게 알렸다.
그리고 조병식은 통문에 서명을 하여 이 사실을 각 도에 알리고 파견원을 정하여 <성적도>를 13도로 분송하자 각 군에서는 그것을 성묘에 봉안하였다. 각 군에서 바친 돈은 500냥 내지 4백 냥으로 동일하지 않았다. 이때 사람들은 그 파견원을 공자파원으로 칭하였고, 지식인들은 이를 통탄하여 그 후 관찰사와 수령들이 음으로 저지하였으나 그것은 결국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9. 이용익을 군부대신에 임명
경북관찰사리용익이 군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정주영의 대직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리고 내부대신리도재가 강력히 사직을 요청하여 면직되자 법부대신리지용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10. 운현궁의 수리
운현궁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리준용이 귀국하지 않은 후로 리재면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여 장원과 가옥이 훼손되었다.
이때 내탕금 270만냥과 백미 370석을 운현궁으로 하사하여 채무를 갚게 하고, 또 영선사에 명하여 그 훼손된 부분을 수리하게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공사가 도착하므로 미관상 구애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때 이재면은 매우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원군의 장례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아직도 일이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1. 일본회답사박공왕의 방한
일본 회답사박공왕 모가 내 한하였다.
리재각이 귀국할 때 조정에서는 답사가 곧 온다는 말을 듣고 그의 숙소를 종정부로 정하였다. 그러나 박공왕은 도착하여 종정부의 예의가 융숭하지 않다고 하면서 시어소로 바꾸어 줄 것을 요청하므로 고종은 부득이 경운궁의 돈덕전을 내주었다.
그러나 그 전내에는 빈대가 많아 박공왕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여 이른 아침부터 매우 화를 낸 기색이 있더니 7일만에 다시 떠나고 말았다. 그가 처음 올 때 고종은 친히 그곳을 가서 보고 그 주위를 돌아본 후 사례를 하였다.
12. 정주영 등 관찰사 임명
정주영을 경기관찰사, 리도재를 평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3. 금윤식, 정만조 등 석방취소
금윤식, 정만조 등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조서를 반포하려다가 다시 취소하였다. 그것은 잠시 박공왕의 간청으로 곧 석방할 뜻을 보였으나 고종은 결국 석방하지 않았던 것이다.
14. 대마도의 아일해전
러시아인들은 일본을 습격하기 위하여 대마도 해협을 진격하였으나 일본인들은 그들을 요격하여 대파하였다.
러시아는 려순을 잃은 이후 황해로 진출할 길이 끊기므로 제2함대를 출동하여 파라적(발트 : Baltic)해로 진출한 후 인도양을 돌아서 대남양을 지나 10만리 길을 가느라 무려 8~9개월을 소비하였다. 그들이 갑자기 대마도에 도착하자 일본인들은 미리 정탐하여 준비하고 있다가 그들을 요격하였다.
이때 주객의 형세가 달라 편안히 있던 군사들이 피로한 군대와 격전을 벌이므로 러시아는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그 병함은 일병의 화기에 맞아 침몰하고, 체포된 선박은 23척이었으며, 장교 이하의 사망자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때 거제, 동래로부터 동쪽으로 울릉도 앞바다에 이르기까지 뇌성 같은 소리가 연일 끊이지 않았고, 일본은 우리 나라에 조서를 보내 상선을 바다로 내보내지 말도록 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 해군대장동향평팔랑의 전공이 가장 많았으므로 일본인들은 충도지방에 기념등대를 세워 이를 동향등대라고 하였다.
15. 주영참서관리한응의 자살
주영공관 참서관리한응이 자살하였다.
일본은 지난해부터 우리 나라를 보호한다고 하면서 그 기사를 신문에 보도하여 구미 각국에 전파시키므로 구미인들은 아직까지 그 말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때 이한응은 워싱턴에 있었는데, 간혹 사람들이 그를 망국인이라고 조롱하였다. 그는 본국의 사정으로 보아 영원히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간혹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면 그는 당연히 그런 질책을 들을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 분통함을 참지 못하고, 본가로 보낼 서신에다가 자신의 심정을 써보내고 음독자결하였다.
이에 영국인들은 그를 의롭게 여겨 그 영구(령구)가 돌아올 때 그의 유물도 본국으로 보냈다.
16. 일본의 서북지방 삼조신례 제출
일본인들은 서북지방의 사무를 관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3조신례를 제정하였다.
1. 지방관을 면직할 때 반드시 사령부로 통지할 것.
2. 각 군수가 부임할 때는 반드시 사령부의 증빙서류를 소지할 것.
3 서북 지방의 광산, 삼림은 사령부의 인준 없이는 채굴을 허락하지 말 것.
17. 청국 서태후의 수연
5월, 고종은 청국 서태후의 수연에 홍삼 20근, 수대련 4폭, 은화병 2개, 금지환 1쌍을 봉송하여 축하하였다.
18. 권중현, 리용선 등 관찰사 임명
권중현을 충남관찰사, 광주군수리용선을 충북관찰사, 종2품 윤충구를 함북관찰사, 리근호를 경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9. 박제순, 리근택 등 입각
박제순을 법부대신, 리근택을 농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20. 공진회 회장 리준의 처 개전
공진회 회장 리준이 자기 첩에게 북서 안현에 녀상점을 개설하게 하였다.
21. 방흥주, 금교선 등의 범죄탕척
이에 앞서 방흥주, 금교선, 금관현, 금홍남, 장인근, 리기각 등이 죄를 지어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이때 일본인의 협박을 받아 모두 그 죄를 탕척(탕척)하여 소환하였다.
22. 각부의 일본 고문관 배치
일본인은 각부에 고문관과 13부에 경찰관을 두고, 목하전종태랑이 탁지부의 재정을 관리하였다.
그는 고종이 지출을 요구해도 응하지 않으므로 고종은 가슴만 치고 있을 뿐이었으며, 날마다 돌아가면서 비서승과 참봉 등의 관함을 팔아 궁색함을 면하였다.
23. 제주어채권
일본인 망월룡태랑에게 제주어채권을 허락하였다.
24. 송규헌을 양근군수 임명
송규헌을 양근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는 지난해에 소문을 한 번 올려 온 나라가 진동하였는데, 이때 군수로 제수된 것이다. 그는 예를 따라 사양하다가 다시 부임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으나 그는 치적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25. 리문호, 구만선 등의 창의
지평리문호, 광주구만선, 원주원용팔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원용팔은 8월에 일병에게 체포되었다.
26. 관봉 개정
관리의 봉급을 개정하여 칙임관은 6급, 주임관은 8급, 판임관은 10급으로 하였다.
27. 일본인의 각도 지금고 설치
일본인이 각 도에 지금고를 설치하였다.
이때 기호, 관동, 량서 지방은 동전을 사용하고 관북 및 영호남 지방은 엽전을 사용하였는데, 엽전을 동전으로 바꿀 때 엽전을 더 얹어 주었다. 그것은 엽전 한 닢이 동전 두 닢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리들이 장사를 하여, 앉아서 금리를 배나 챙겨 그 병폐는 국민과 국가에 돌아갔다.
그리고 동전도주도 날마다 늘어나 동전 태반이 열악하였으므로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병폐로 생각하여 동전과 엽전을 막론하고 일체 폐지하여 새 화폐로 바꾸게 하였다.
또 서울과 각 항구에 교환소를 설치하여 자국에서 신화를 가져온다고 하며 신전 1원에 구전 2원으로 교환하고 그 기한은 7월 초순으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화폐가 고갈되어 많은 돈을 인출할 수 없으므로, 다만 공권으로 우리 구화를 모아 그것을 융해한 후 본보기로 만들었다. 근량은 아무 차이가 없었으나 그 반듯한 모양과 테두리는 새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그 돈은 한 닢으로 두 닢을 챙기어 한 번 주전작업을 하면 수만 냥의 이익을 남겼으며, 구전과 교환할 때도 별도로 도주전을 가려내어 교환할 수 없는 것은 폐기처분하였다. 이에 신전을 배포하지도 않아서 구전이 모두 고갈되므로 민심이 소란하여 어떤 적도에게 침략을 받은 것과 같았다.
그리고 량남지방에서는 호전을 받을 때 엽전으로 받은 후 지금고로 넣어 소각하였으므로 엽전이 한번 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 연말이 될 무렵에 서남지방이 크게 궁색하였다.
28. 민영철, 박제순 등의 입각
민영철을 탁지대신, 박제순을 학부대신, 민영기를 법부대신, 리재극을 궁내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29. 리명화의 도관 신축
리명화란 사람이 청, 일 양국은 모두 도관이 있으나 우리는 없다고 하면서, 그는 일본인과 함께 북서 원동에다가 도관을 신축하여 국가의 기초소로 하였다.
30. 일본 포목의 수입
일본에서 생산된 포목이 하복을 만들만 하므로 작년 여름에 수입하여 성수기에 많은 이익을 보았다.
그리고 이때 서울 상인들이 5만여 필을 수입하여 표백한 결과, 그것은 면이었으며 포목이 아니었고, 수입할 때는 5원이었으나 팔 때는 2원도 받지 못하여 큰 손해를 보았다. 일본인의 사기는 모두 이와 같았다.
31. 개성부의 호접무
개성부에 많은 비가 내렸다. 그리고 나비 수백만 마리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성안에 가득히 날아다녔다.
32. 일본시찰단 파견
6월, 민영기, 민병석, 민상호, 조동윤, 윤치호 등을 파견하여 일본의 관제를 시찰하게 하였다.
33. 적십자병원 설립
6적십자병원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서양법을 따른 것이다.
34. 구완선을 경무사 임명
의주군수구완선을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일본의 응견(응견) 노릇을 하여 그들과 매우 친숙하였으므로 림권조가 강력히 말하여 내직으로 불러들였다.
35. 허위 석방
허위가 일본 사령부에서 석방되었다.
36. 임원호, 신태희 등 관찰사 임명
임원호를 함북관찰사, 신태희를 평남관찰사, 리도재를 충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37. 평양 함구문 훼철
일본인들이 평양의 함구문을 훼철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10년 사이에 평양은 조금 안정되었는데 러일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그곳을 요충지로 생각하여 무참히 짓밟았으므로 그곳 관리와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관사와 성첩도 훼손된 채로 있어 보이는 곳마다 쓸쓸하기 그지없었으며 옛날 경관이라곤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38. 장선규의 기선 발명
장선규가 기선을 발명하여 진수식을 가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39. 평북 지방의 호우
평안북도 각군에 호우가 내렸다.
40. 정토회의 황제 진용 각군봉행
7월, 정토회에서 황제와 황태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13도 여러 군으로 내려갔다.
41. 공금태비법 제정
공금태비법을 제정하였다. 육지의 운반비는 매 10리마다 엽전 125냥(옛날 백동화로 500원)으로 하되 금화 10전을 지급하고, 기차와 기선은 이 예에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금고가 있는 항구를 50리 이내로 하되 민간인이 운반하였으며, 50리 이외에는 관청의 요령에 따라 납금하게 하였다.
42. 일본인 연상정조의 여지승람 간포
7월, 일본인 연상정조가 우리나라 <여지승람>을 간행하여 판매하였다.
43. 한성소윤박승조의 면직
한성소윤박승조가 면직되었다.
이때 일본인들이 오강의 민가를 헐어 버려 호소가 답지하고 있었으나, 정부의 많은 관리들은 감히 이렇다저렇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박승조는 탄식하기를, “명색 백성들의 관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죽어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앉아서 어떤 대책 하나도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강력히 사직을 간청하여 면직되었다.
44. 한강치안 12동민의 소요
한강연안 12동민들이 정부로 들어와 창벽을 마구 파괴하므로 일본 병사들이 와서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들은 서로 격투전을 벌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45. 일본인의 하천자유항행권 승인
일본 공사림권조가 한국내지의 하천자유항행권을 얻기 위하여 오랫동안 우리 정부와 협의하였다. 이에 리하영 등이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허락해 주었다. 그것은 우리도 겉으로 그들과 같이 동등권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사례를 하려고 한 것이므로 이에 림권조와 약속하기를, 우리 국민들도 일본의 하천을 마음대로 항행한다고 하자 림권조는 이를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약하여 일본인들이 비록 그렇게 하기를 강력히 요청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서로 어로작업을 약속할 때처럼 명분에 그칠 뿐이었다.
이하영은 리지용과 함께 고종과 회의를 거쳐 조인하기로 결정하였다.
46. 침상훈의 입각
침상훈을 군부대신, 리용익을 강원관찰사, 조종필을 평남관찰사, 신태희를 충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47. 상업회의소 유통자금 하사
상업회의소에 30만원을 하사하였다. 이는 자금류통을 원활히 하고 귀해진 화폐량을 늘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일본인이 관리하던 삼정물사와 제일은행은 목하전종태랑의 지시가 없었으므로 지급하지 않았다. 이때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고 있었다. 태아의 도산도 이와 같은 것이었다.
48. 박용대의 입각
조병호를 참정, 박용대를 법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강원관찰사리용익을 감금하여 조정에서 서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49. 경리원 구화의 신주
경리원에 저축해 둔 구은화 93만7천여 원을 신화로 주조하였다.
50. 의친왕리강의 일본 체류
의친왕리강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와 곧 귀근을 하려고 하였으나, 엄비는 리근상을 일본으로 보내 은전 300만원을 그에게 주고 그곳에서 체류하게 하였다.
광무 9년 을사(1905년) ③
1. 우룡택의 쾌거
하천안이 조인될 때 우룡택은 리하영을 방문하여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네가 매국을 하다못해 내천항행까지 허락을 하였으니 이제 하천은 그만이다. 그리고 또 무엇을 팔아먹을래?”하고 크게 고함을 지르며 “저… 역적을 죽여라” 하고 그의 옆구리를 차고 볼을 잡아당겨 형세가 매우 험해지자 이하영은 가족을 불렀다.
급히 가족들이 달려나와 우용택을 구타하여 그를 쓰러뜨렸으며, 그는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에 앞서 우용택은 온양에 있는 리성렬을 방문하였다. 그가 상소를 하여 시사를 통렬히 비판하면 혹 주상을 만분의 일이라도 뉘우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리성렬은 부질없이 대답만 하고 있으므로 우용택은 크게 화를 내며, 주먹으로 그를 쳐 넘어뜨려 쥐 같은 놈이라고 꾸짖고 밖으로 나오면서 “너는 죽일 가치도 없다”고 하였다.
2. 일진회의 선언서 게시
일진회의 윤시병, 송병준 등이 선언서를 게시하였다.
그 대의는 「우리나라는 멸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으므로 공사간의 대소인이 모두 일본의 명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10월 륵약 때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그 전문이 빠져 모두 기록하지 못하였다.
3. 일병의 성진성묘 점거
일본인들이 성진군으로 들어간 후 성묘를 빼앗아 처소로 삼았다.
4. 창원동광 개설
창원군에 동광을 개설하였다.
5. 춘천의 빙박 피해
22일, 춘천군에 많은 우박이 내렸다.
6. 리완용의 입각
8월, 리완용을 학부대신, 리하영을 법부대신, 박제순을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7. 로일강화조약 체결
로, 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 신문에 의하면, 양국의 개전 이후 러시아의 병사 사망자는 40만명, 비용은 18억불이며 일본 사망자는 17만명, 비용은 15억불이라고 한다.
이때 일본은 나라가 작아 더욱 피곤하였으므로 미국인에게 뇌물을 바치고 화의를 주장하였고, 러시아도 병란을 싫어하여 억지 승낙을 하고 미국 뉴욕에서 강화회담을 개최하기 위해 서로 위원을 파견하였다. 러시아는 우익덕(세르게이 율리비치 위태 : Sergei Yulyevich Witte)을 파견하고 일본은 소촌수태랑을 파견하였다.
이 회담에서는 러시아가 굴복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배상문제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동삼성의 철도를 양보하여 료동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사할린 반도를 일본에게 이속하기로 하였다.
이에 일본 사람들은 우리 정부로 모여 소란을 피우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겨우 진정하였다. 이때 서재필은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을 저버린 일본에 대한 한을 품고 여러 방면으로 운동을 전개하여 그들을 제지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파견원 위태는 주장하기를, 일본은 갑오년(1894)부터 한국의 독립을 거론하였으나 지금은 한국을 배신하여 병탄하려는 징조가 보이고 있으니 공법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 러시아는 모든 렬방들과 이 문제를 논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촌수태랑은 아무 대답도 못하였고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도 아무 말도 못하고 초라하게 마무리를 짓고 말았다.
8. 합군론의 저지
이때 합군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각군 리민들은 구제를 보존하기 위하여 분주히 돌아다니며 호소하므로 그 여론은 한 달 남짓 되어 중지되었다.
9. 리용익의 상해행
강원관찰사리용익이 금 수백만 냥을 가지고 청국 상해로 잠입하였다. 그것은 중궁의 교시를 받아 러시아 및 프랑스와 내통을 하기 위한 것이다.
민영돈을 이용익의 대직으로 관찰사를 임명하였다.
10. 각도 유생의 왕후결혼기념 행사 간청
각도 유생들은 만인소를 올려 왕후의 결혼기념 행사를 치르라고 간청하였다.
11. 원주 의병장 원용팔 체포
원주 의병장 원용팔이 일병에게 체포되었다.
12. 서봉장 하사
서봉장을 만들어 공훈이 있는 명부에게 하사하였다.
13. 부인회의 추문
리지용, 리재극, 민영환, 민영철, 민상호, 리하영 등 수십 명은 그들의 처가 부인회를 결성하도록 방관하고 있었다. 일본 부인 적원수일 및 국분상태랑 등의 아내도 참여하였다.
그중 이지용의 처 홍씨와 민영철의 처 류씨가 가장 영리하고 어여뻤는데, 그들은 장곡천과 악수도 하고 입도 맞추었으며 수시로 출입을 하여 국중에 추한 소문이 자자하였다.
14. 권중현, 리근택 등 입각
권중현을 농부대신, 리근택을 군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15. 일황에게 보낸 리기 등의 상서
전주사리기, 오기호, 라인영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황에게 서신을 보내, 일본은 지난날의 강화조약을 지켜 한국의 독립을 보존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세웠다.
“이제 교전국과의 화약도 이미 체결하였고, 개선군의 축하행사도 거행하여 소원한 인민들도 모두 칭송을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외신들은 우방에서 태어나 진치와 보차처럼 서로 돕고 있는 입장에서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한일 양국은 모두 동양에 속하여, 그 거주를 말하면 이웃 마을과 같고 그 인민을 말한다면 형제와 같습니다.
그리고 근세에는 백인들이 동아세아에 대하여 침을 흘리고 있으나 그 형세를 막을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 한국이 약소국가이긴 하지만 믿는 곳이 있어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은 귀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갑오년(1894)에 우리 대한독립을 주창한 나라는 귀국이었으며, 갑진년(1904)에도 우리 대한독립을 논한 나라는 귀국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주전투가 전개되었을 때 천하가 모두 의전으로 칭하여 첫번째 려순에서의 승리를 거두고, 두번째는 봉천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기고가 향하는 곳마다 용기를 백 배나 내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전승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년 8월 강화가 시작되었을 때 외신들의 생각에는, 전쟁에 승리하면 나태하기 쉽고 공훈을 이루면 교만하기 쉬운 것이라 그것은 우리 한국과 매우 큰 관계가 되는 일이므로 도의상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다를 건너와서 정부제인에게 서신을 보내고 이곳에서 무슨 명령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은 지 이미 수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포된 약서를 보면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의 이익을 끊는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독립의 의의와 위배된 점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혹 적들의 야욕을 끊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면 스스로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근일 보호국에 대한 말들을 신문에 보도하여 우리 한국인으로 하여금 울분을 터뜨리게 하여, 덕을 원망으로 만들고 은혜를 원수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외신들이 생각할 때 이것은 폐하의 뜻이 아니면 무슨 까닭으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갑오년 8월 1일에 작성된 칙서를 보면, 「조선은 본래 우리가 계유하여 구아의 열국으로 참여하였으므로 자주국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청국은 속방으로 보면서 음으로 달래고 양으로 협박하여 내정을 간섭하고 있으므로 이에 짐은 명치 15년에 체결한 조약에 의거하여 병력을 출동하여 만일의 변란에 대비하고, 또 조선으로 하여금 영원히 화란을 멀리하고 장래에 치안을 보존하여 동양전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갑진년 2월 10일 내린 칙서에는 「우리 제국이 한국에게 있어서 그 위치를 보존하는 것은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의 존망이 제국의 안위에 달려 있기 때문이지만 러시아는 맹약을 불구하고 만주를 점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만주가 만일 러시아와 한국에게 돌아가면 보전을 유지할 수 없고, 극동의 평화에 있어서도 희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짐은 이 기회를 노려 시국을 타개하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두 칙서는 동일한 뜻을 담고 있어 일성처럼 명백하고 금석처럼 변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미 천하에 공포된 것입니다. 옛날 사람의 말에 “필부도 식언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만승천자야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외신들은 근일의 일이 폐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금을 헤아려 보더라도 덕과 힘은 서로 소장하고 있는 것이므로 덕이 힘을 이기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힘이 덕을 이기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천지의 상리입니다.
그리고 한편, 생각하면 폐하는 성신한 문무로 38년 동안 림어하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동방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다른 술이 있어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천하에 실신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전쟁에서 이기었지만 공훈을 이룬 것을 경계하여 반드시 동아세아의 황인종을 생각하고 우리 한국을 독립시켜 서로 공존한다면 우리 한국만 행복할 뿐 아니라 귀국도 다행할 것이며, 귀국만 다행할 뿐 아니라 천하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16. 이등박문에게 보낸 리기 등의 상서
처음에 리기 등이 로, 일 양국이 강화조약을 체결한다는 소문을 듣고 미국 워싱턴으로 가서 조인한 맹약을 방청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결국 일본에 머물고 있으면서 일본정부에 서신을 보내 양국의 형세를 알리고 또 일황에게 서신을 보내었으나 모두 모른 척하였다.
그 후 이등박문이 곧 우리 나라에 대사로 부임한다고 하자 이때 여론이 흉흉하였다. 이등박문이 큰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기 등은 또 이등박문에게 서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책망하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각하는 대사로 임명되어 명령을 띠고 서쪽으로 현해탄을 건너간다고 합니다. 아! 우리 한국은 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한국은 불행히도 귀국과 근접해 있고, 또 불행하게도 각하를 만났습니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어찌 우리 한국에 복을 주시지 않으시고 이 지경으로 만드셨습니까? 각하께서는 우리 한국에 있어서 밖으로는 유지하게 한다는 명분만 내걸고 안으로는 흡수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자멸하게 하여 서서히 삼키려고 하는 것이 평생 장기입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꾀를 내는 것도 이런 술책에 불과합니다. 그 말은 좋지만 음모를 꾸미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소인배들은 궁중을 출입하며 주상을 속이는 자가 적지 않은데, 지금 또 각하가 그들 사이에서 무슨 술책을 꾸미려 하고 있고, 그 직위로 말하면 우방의 후작이며 그 명칭을 말하자면 근세의 정치가이며, 그 음성과 웃는 모습도 많은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으니 우리는 각하의 계획이 반드시 시행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기를, “처음에 허수아비를 만드는 사람은 후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 죽은 사람과 함께 묻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이 비록 작지만 그 인구는 200만에 못미치지 않으며, 그들은 모두 혈육과 리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허수아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각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추위에 얼고 배를 굶주리고 있을 것이니 그 통곡하는 소리를 들을 때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응보의 속도는 그림자와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므로 우리는 각하에게 인화가 없으면 반드시 천재가 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무고한 한 사람을 죽여 천하를 얻는 것은 고인들도 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각하가 그 뜻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2000만명을 죽이어 탄환만한 땅 하나를 얻으려고 한다면 그 리해는 자명한 일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사람마다 제각기 자기 주상을 위해 생각하면 좋겠는데 자네는 너무도 책임을 질 줄 모르네”라고 하였습니다. 아…슬픈 일입니다! 어찌 그런 어리석은 말이 있겠습니까?
지금 한일 양국은 순치(순치)처럼 형세상 서로 도울 처지에 있으므로 한국이 망하면 일본은 그 다음에 망하고 말 것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열강들도 6대주에 가득히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은 형제와 같으며 영국과 미국은 친구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형제가 서로 해를 끼치면서 친구보다 나에게 잘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천하에 이런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 미의 동맹을 과연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말은 우리 한국을 위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 귀국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귀국만 위해서가 아니라 동양전국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각하께서는 시골 농부의 말이라고 저버리지 마시고 이제라도 받아 들이신다면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때 이등박문은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안되어 리기는 가친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고, 라인영 등도 그를 수행하여 귀국하였다. 리기가 이등박문에게 보낸 서신은 그 내용이 준절하여 사람들은 모두 위태롭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리기는 태연히 불고하고 있었다.
17. 전국의 폭우 피해
초2일, 서울에는 많은 비바람이 스치었다. 13도도 모두 동일하여 혹은 사나흘 동안 뻗치었다. 나무들이 뽑히고 가옥이 무너졌으며 강과 바다가 넘쳤다. 외국의 보도에 의하면 청국과 일본 동남지방도 모두 이와 같았다고 한다.
18. 일진회의 서간도 순시
9월, 일진회에서 회민 리광수를 서간도로 파견하여 순시하였다.
서간도는 압록강 서쪽이자 녕고탑 동쪽에 있는 공허한 지역으로 그곳에 흘러 들어온 우리 백성들이 수만 호나 되었는데, 청국인들은 강제로 관할하여 그 학대를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이 본국의 관리가 와주기를 바란 지 이미 몇 년이 되었으나 우리 조정에서는 그럴 여가가 없었다.
19. 제천의병의 침상훈 습격
침상훈이 제천의 향제에 있을 때 의병들의 습격을 받아 충주 목계까지 끌려갔으나, 그는 도주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20. 한규설의 기부
한규설을 기부하여 참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한규설은 복색을 개정하자고 아뢰어, 관민공사복 상하의는 바지를 청, 흑, 감, 자색으로 입도록 하였다. 이 청은 광무 10년 1월 1일부터 시작하여 담색과 백색은 일체 금하였으나 아직까지 이행되지 않고 있었다.
근년 이후 서울에서는 잡패들이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기 위하여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으므로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때는 순명비의 상복을 마친 때였다
이에 사람들은 새로 물들인 청, 황, 자, 흑의 복색을 입고 다녔으므로 그 현란한 빛이 눈빛을 빼앗아 염색소를 들어간 듯 하였다.
21. 금택영의 청국행
전참서금택영이 청국으로 갔다. 김택영의 자는 우림, 호는 창강으로 진주 사람이다.
그의 가세는 고려 때부터 대대로 송도에서 살았으며, 그는 일찍부터 문사로 명성을 떨쳐 신묘년(1891)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갑오년(1894)에는 정부에서 주사로 부르므로 억지로 나가 벼슬은 하였지만 그가 좋아한 것은 아니었고 이때 여론도 그를 소홀히 대접하여 높은 직책을 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후 학부에서 보좌원으로 임명되어 편찬역을 맡고 있었으나 박봉으로 조석을 살아야만 했고, 또 그는 늙은 나이에도 사자를 두지 못하여 서울에서 살면서 항시 즐겁지 못한 마음으로 지내었다.
그리고 이해 봄에 그는 친구인 황현에게 서신을 보내어, 「시사를 가히 알 수 있겠네. 그러므로 이렇게 늙어서 도아들의 종이 되는 것이 차라리 소주나 석강성으로 가서 만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자네도 나를 따라가서 놀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때 과연 그의 말과 같이 이행하였으며 그 후 얼마 안되어 국변이 일어나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높이 생각하여 하늘까지 치솟은 교송처럼 여기었다.
이에 앞서 상해 사람 장건(장건)이 오장경을 따라 우리 나라로 와 김택영과 알게 되었으므로 서로 소식을 통하고 지냈는데, 그 후 장건이 과거에 급제하여 주현의 관장으로 있으므로 김택영은 장건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이때 장건은 남통주 권관의 관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김택영을 데리고 자기 관서로 가 김택영을 한림묵관에 있게 하였다.
김택영이 떠날 때 자기 처와 딸 등 두 식구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가 통주에 토착하였을 때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광호이며, 아명은 희랑이었다. 김택영은 정미년(1907) 여름에다시 황현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렸다.
22. 일인의 평양사령부설치
일본인들이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때 또 병사 1만명과 말 1,500필이 인천에서 서울로 들어왔다.
23. 관서의 랑환
관서에 랑환이 대치하였다.
24. 관리들의 단발
10월 6일, 칙임, 주임, 판임관 등에게 명하여 모두 단발을 하도록 하였다.
광무 9년 을사(1905년) ④
1. 이등박문의 내한
13일, 일본 대사이등박문이 왔다. 로일동맹을 체결한 후 러시아는 동삼성 철도를 일본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원세개는 선언하기를, “마관조약 때 일본은 먼저 조선독립을 입증하기 위하여 지금 보호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이것은 맹약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조선은 우리 번국에 속한 지 거의 300년이 되고 있지만 하루아침에 일본에 속해 있으니 당연히 옛날처럼 대청국에 속해야 한다. 그리고 동삼성은 우리의 발상지인데 어찌 러시아에게 함부로 허용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일본은 우리 나라로 이등박문을 보내어 정권을 빼앗은 후 영원히 청국인과의 인연을 끊으려 하고, 한편으로는 청국으로 소촌수태랑을 보내어 원세개와 담판을 지으려고 동시에 출발하였다.
2. 하와이의 신조신문
미국 하와이에 있는 우리 국민들이 돈을 모아 신문사를 설립하고 국문으로 된 신조신문을 간행하였다.
3. 봉산탄광 발견
봉산군에서 탄광이 발견되었다.
4. 보호조약 조인광경
21일, 한밤중에 일본인들은 대궐을 침범하여 참정한규설을 면직시킨 후 유배하였다.
그리고 이때 이등박문이 도착하자 도성은 흉흉하여 무슨 변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였다. 그리고 내부대신리지용, 외부대신박제순, 군부대신리근택, 학부대신리완용, 농부대신권중현 등은 혹 음침한 곳에서 관망을 하기도 하고, 혹은 남모르게 내통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도성 사람들은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이날 밤 구완선, 박용화 등이 일본인을 인도하여 대궐 담장을 포위한 후 대포를 설치하고 이등박문은 림권조, 장곡천 등과 함께 고종 앞으로 가서 5조신약을 내놓으며 고종에게 서명하기를 요구하였으나 고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구완선은 겁을 주면서 “이렇게 벽력이 내려져야 항복을 하겠습니까?”라고 하므로 고종은 벌벌 떨면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지용 등이 입시하자 참정한규설은 분통을 터뜨리며 “나라가 망하더라도 이 조약은 윤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므로 이등박문은 온갖 위협과 유혹을 하였다.
고종은 “이것은 외부의 일이므로 대신들에게 물어 보시오”라고 하자 박제순은 주사를 불러 외부의 인장을 가져오게 하여 날인하였다. 이때 고종도 서명하지 않았고 한규설도 날인하지 않았으며 날인한 사람은 오직 외부대신 이하 각부 대신이었다.
한규설은 이 륵안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한결같이 반대하자 이등박문은 위조를 내려 3년 동안 그를 유배하였다.
이로부터 도성 사람들은 사기가 저하되어 마을마다 수천 명 수백 명이 떼를 지어 큰 소리로 “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우리들은 어떻게 살란 말이냐?”하고 외쳤다. 그들은 미친 듯이 슬퍼하며 꾸짖고 발길을 서성거리며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듯이 보였다. 그리고 밥짓는 연기도 나지 않아 그 경색은 매우 참담하기가 무슨 병란을 치른 것처럼 느껴졌다. 이에 일본인들은 병사를 파견하여 순찰을 돌게 하여 비상사태를 대비하였으나 우연히 그들을 헐뜯는 말을 해도 결국 금지하지 못하였다. 이런 광경은 한 달간이나 지속되었다.
이때 이지용은 밖에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오늘 최지천1586~1647, 최오길 호는 지천. 인조 때의 문신. 병자호란 때 주화론을 펴 결국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였음. 편자주 이 될 뻔했습니다. 국가 일은 우리들이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라고 하였다.
5. 이등박문의 5적 보호
이등박문은 병력을 파견하여 5적들의 집을 순찰하게 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리지용 등을 가리켜 5부이라고 하였다.
6. 리근택 녀비의 질타
리근택의 아들은 한규설의 사위이다.
한규설의 딸이 출가할 때 한 여비를 데리고 갔다. 이것은 세속에서 말하는 교전비(교전비)라는 것이다.
이때 이근택이 대궐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가족들에게 륵약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나는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고 하였다.
그 여비는 부엌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난도(란도)를 들고 나와 꾸짖기를, “이근택아, 너는 대신이 되어 나라의 은혜를 얼마나 입었는데 나라가 위태로워도 죽지 않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만도 못한 놈이다. 내가 비록 천한 사람이지만 어찌 개의 종이야 될 수 있겠느냐? 내 칼이 약하여 너를 만 동강이로 베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나는 다시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고 한 후 다시 한규설의 집으로 도주하였다. 그 여비의 이름은 알 수가 없었다.
7. 보호조약
5개 조약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지금부터 한국의 외교사무는 일본 동경의 외무성으로부터 그 감리지시를 받으며, 또 한국 신민이 외국에서 얻은 이익은 일본의 외교대표 및 영사가 일체 보호할 것.
제2조 한국과 타국간에 현존한 조약을 실행할 경우는 그 완전한 책임을 모두 일본이 담당하고, 또 한국정부는 지금부터 일본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으면 국제적 성질상 어떠한 조약도 약속을 허하지 않을 것.
제3조 일본정부는 그 대표로 하여금 한국 황제의 대궐에 통감 1명을 두어 외교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게 하고, 아울러 한국 황제를 알현할 권리를 갖게 하며, 또 일본정부는 한국의 개항장 및 기타 일본정부에서 인정한 필요한 땅에 대해서는 이사관을 두어 그의 권리가 있는 곳에는 통감부의 지휘를 받아 전일 영사의 임무를 맡아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협약조관을 실행하기 위하여 일체의 필요한 사무를 장악할 것.
제4조 일, 한 양국은 현존한 조약에 있어서 본협약조관을 저촉한 이외에는 모두 그 효력을 계속할 것.
제5조 일본정부는 한국황실에 대한 유지, 안녕, 존엄 등의 방법을 보증할 것.
8. 황성신문사 폐지
황성신문사를 폐지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이후 수시 패전할 때마다 신문사에서는 바로 그 기사를 기재하여 군중을 요동케 하므로 그들은 사장 장지연을 위협하여, 간행할 때마다 반드시 그들 공관의 허가를 받은 후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때 장지연은 분통을 터뜨려 그 륵약시말을 기재해 보도하므로 이등박문은 크게 화를 내어 장지연을 구속하고, 또 신문사도 폐지하였다.
지금 그 원고는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10월 14일 7시. 이등박문이 입성하여 손택(안토이네트 손탁 : Antoinette Sontag) 녀사의 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15일. 고종을 알현하여 다음과 같은 일황의 친서를 바쳤다. 그 내용을 대충 소개하면, 「짐은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였으니 한결같이 대사의 지휘를 따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고, 또 「국제의 방어는 짐이 반드시 공고히 하여 황실을 편안히 할 것을 짐은 보증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18일. 이등박문이 인천항으로 갔다.
19일. 이등박문은 귀경하여 하오 3시에 서기관국분상태랑, 제실심사국장박용화 등과 함께 고종을 알현하여, 다음과 같은 5대조약을 상주하였다.
1. 외부를 폐지하고 일본 동경에 외교국을 설치하여 내외의 외교권을 모두 일본에 위탁할 것.
2. 경성에 주재한 일본 공사는 통감으로 개칭할 것
3. 서울 및 각 항장의 영사관은 리사로 개칭할 것.
위의 3건을 기어이 인허해 주도록 간청하자 고종은 말하기를, “짐이 들은 말에 의하면 근일 보호조약 등의 설로 각 신문이 요란하게 선전하고 있으나 짐은 작년에 귀국 황제의 선전조에서 한국의 독립을 부식한다는 구절과 한일의정서에 독립을 보증한다는 설을 적확히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이런 뜬소문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후작이 친히 사명을 띠고 왔으므로 대단히 그를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요구를 해 오니 이것은 참으로 뜻밖의 일입니다. 어찌 평일에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등박문은 기어이 간청하면서 “이것은 외신의 뜻이 아니라 우리 정부의 명령을 받고 온 것입니다. 만일 이 일을 인준하면 양국의 행복이 될 뿐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할 것이니 속히 인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 고종은 “우리 조종 이후 립국규모에 있어서 무슨 대사가 있으면 정부의 대소관리와 시원임대신 및 재야유현, 신사, 인민들과 함께 여러 의견을 수렴하여 결정하였으며 짐 혼자 단정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자 이등박문은 또 아뢰기를, “인민들의 빗나간 여론은 당연히 병력으로 진정하여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양국의 교의를 생각하시어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고종은 “만일 이 조약을 인준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니 짐이 차라리 순국을 할망정 결코 허락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서로 힐난하다가 4, 5시경에 헤어졌다.
20일 하오 3시. 이등박문은 참정 이하 각 대신 및 경리원경침상훈 등을 대사관으로 불러 또 5조약을 꺼내어 놓고 일일이 간청하였으나 각 대신들은 강력히 그 불가함을 말하여 오랫동안 힐난을 하였다. 그러다가 밤이 깊어서 파회를 하자 그들은 즉시 대궐로 찾아가 그 사실을 상주하였다. 그리고 이등박문도 또 박제순을 공관으로 불러 위에서 말한 조약을 의논하였다
21일 하오 2시. 공사림권조를 시켜 각 대신들을 공관으로 불러 간절히 요구하자 각 대신들도 반대를 하였다. 이에 임권조는 어전에서 회의를 개최하자고 간청하였으나 각 대신들은 사절하고 모두 대궐로 들어갔다. 임권조가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대신들은 회의를 개최하여 모두 「부」자를 써 보였다. 임권조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후 일병들은 대궐로 들어와 수옥헌을 철통처럼 포위하여 총검이 삼렬하였다. 이때 장곡천과 이등박문이 들어와 다시 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참정한규설은 완고히 고집하며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이등박문은 한규설의 손을 잡고 간청하고, 또 궁내부대신리지용으로 하여금 폐하의 알현을 청하게 하였다. 이때 고종은 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하자 이등박문은 강력히 요청하였다.
고종은 “알현할 필요가 없으니 정부로 가서 대신들과 협의하라”고 하였다. 이등박문은 할 수 없이 물러나와 “폐하가 이미 협의를 허락하셨다”고 하면서 즉시 회의를 개최하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정부의 주사를 불러 그 안건을 초안하도록 하였다.
한규설은 한결같이 반대를 하였다. 법부대신리하영과 탁지부대신민영기는 「부」자를 쓰고 외부대신박제순도 「부」자를 썼다. 그리고 「부」자 밑에 다시 주를 달아 우건의 자구를 만일 변개하면 당연히 인준이 된다고 하였다. 이등박문은 그것이 어찌 어렵겠느냐고 하며 붓으로 치우고 2, 3군데를 고쳐 놓았다. 그리고 다시 회의를 개최하게 하였다. 이때 참정한규설과 법부, 탁지부, 량대신은 또 「부」자를 쓰고 기타 다른 사람들은 「가」자를 썼다. 한규설은 몸을 일으켜 고종을 알현하려고 하였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협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적원수일이 일본순병을 거느리고 와서 한규설을 수옥헌 협방에다가 구치하여 그 좌우에서 파수를 하게 하고 또 이등박문이 들어와 한규설을 보고 온갖 협박과 유혹을 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한규설은 정색을 하며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 몸으로 순국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다시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라고 하자 이등박문은 화를 내면서 “칙령이 내려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하자, 한규설은 “사직이 중하고 임금이 경한 것이므로 비록 칙령이 내려졌다 하더라도 단연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이등박문은 크게 화를 내면서 “그렇다면 불충한 신하입니다”라고 하며 그곳을 물러나와 궁내부대신리재극을 시켜 아뢰기를, “한규설이 칙령을 받지 않으니 이것은 불충한 행위이므로 그를 면직시켜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박제순으로 하여금 외부의 인장을 가지고 들어가서 “참정이 비록 날인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아무 관계가 없으며 기타 모든 대신들이 날인을 하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다른 대신들이 일제히 날인한 후 장곡천, 이등박문 등은 그곳을 물러갔다. 그런 사이에 벌써 하룻밤이 지나 22일 상오 2시가 되었다.
한규설은 이등박문 등이 물러간 것을 보고 혼자 정부로 갔다. 잠시 후 각 대신들이 일제히 모였다. 이들은 이미 날인된 줄 알고 일장통곡을 하였다. 박제순도 따라서 통곡을 하였다. 한규설은 박제순에게 책망하기를, “오늘 아침 만났을 때 공은 반대하다가 그들이 강제로 날인을 시킬까 봐 그 인장을 연못에 던져 버렸다고 하더니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라고 하고, 그 즉시 정부의 관리를 불러 차자를 지은 다음 이를 상주하게 하여 법부, 탁지부 이외에 여러 대신 및 약장을 초안한 주사 3명의 관직을 면직시키려고 하였으나 모두 보류중에 있었다. (신문에 여기까지 게재되었음.)
9. 민영철을 참정 임명
전북관찰사민영철을 참정대신으로 임명하였다. 한규설의 대직이었다. 이때 내린 조서는 다음과 같다.
“한규설이 궁금의 지척에서 거조를 잃었으므로 우선 그를 면직하고 3년 동안 유배하라.”
광무 9년 을사(1905년) ⑤
1. 홍만식의 순절
전참판홍만식이 변을 듣고 자결하였다. 이때 홍만식은 려주의 본제에서 손님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늑약(륵약)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그는 얼굴빛 한번 변하지 않고 바둑을 다 마친 후, 바둑알을 모두 통에 집어넣고 손님에게 물러가라고 하면서 “내가 무슨 일이 있으니 자네는 속히 가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즉시 의관을 차려 입고 집 뒤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사별인사를 하고 다시 돌아와 사당에 인사를 드린 후 독약을 타서 올리라는 명을 내려 그것을 마시려고 하였다.
이때 그의 아들 홍표가 호곡을 하며 약그릇을 엎어 버리자 홍만식은 그를 물러가라고 꾸짖으면서 “정리상 당연한 일이나 국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갑오년(1894)에 우리 집안에서 신원을 한 것은 나라가 망할 징조인 것이다. 법강이 이러하였으니 어찌 오늘과 같은 변이 없겠느냐? 내가 죽은 후에 백관에 넣어 「처사」라고 쓰고 선산에 장례를 치르지 말아라. 그리고 너도 평생 동안 죄인 노릇을 하여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아라”고 하였다. 홍표는 또 청하기를, “한번 상소를 하시어 혹 개오하기를 기다렸다가 만일 아무 윤허가 없으면 그때 자결하셔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홍만식은 탄식하며 “시사를 알 만하니 충언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라고 한 후 그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홍만식은 홍순목의 아들로, 그의 백부인 홍순경의 양자가 되어 아들 홍영식과는 종부형제간이 된다. 그러나 그는 홍영식이 역적으로 처형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전후 수십 년 동안 마의를 걸치고 짚자리에 앉아 죄인으로 자처하다가, 이때 이와 같이 자결하므로 사람들은 그를 더욱 훌륭하게 여기며 슬퍼하였다.
2. 각국 공관으로 보낸 조병세의 서신
특진관조병세는 양근에서 도성으로 들어온 후 다음과 같은 서신을 각국 공관으로 보내어 이등박문의 륵약사실을 비판하였다.
“폐국이 세계에서 자주독립을 하고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폐국에게 마관조약을 체결한 이후 일로전쟁이 시작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전조칙과 한일의정서에는 우리의 독립과 영토를 보호한다는 말을 각국에 성명하지 않은 때가 없었으므로 천하가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공사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 대사와 공사는 한 조약원고를 가지고 폐국의 궁중으로 들어가서 그 조약에 날인하기를 강요하였습니다. 그 약장의 내용은, 일본통감을 폐국에 두어 폐국의 외교권을 일본으로 이관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독립은 속지로 변하고 속지는 결국 망하고야 말게 될 것이므로 폐국의 황상은 인준을 하지 않았고 참정대신들도 완고히 고집을 부려 그들의 청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일본대사는 위엄을 가하여 협박하혀 병사들을 인솔하고 와서 대궐을 포위하고 또 군소들을 요동시켜 그 가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법식을 갖추지 않고 강제로 외부의 인장으로 날인해 갔습니다. 이것을 정약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천하대국으로 볼 때 약소국이 열강 사이에서 온전히 지낼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믿는 것은 린국의 우의이며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공법입니다. 그 공법회통을 보면 제405장에 「립약은 반드시 국왕의 윤허를 기다려서 준행한다.」고 하였고, 제409장에는 「조약을 논할 때 혹 협박을 받으면 그 조약은 폐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약을 논한 법은, 위로는 윤허를 받고 아래로는 그 계책을 물어 쌍방의 합의를 통하여 타결해야만 조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협박과 억제를 하면 비록 조약을 체결하였다고 해도 그것은 무효가 되는 것이니 어찌 그들의 억제를 참아 가면서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일본은 폐국에게 있어서 자국의 부강한 것을 믿고 약소국이라고 경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법의 한계를 벗어난 것입니다. 하물며 폐국은 귀공사와 우호조약을 체결한 지 이미 1년이 되었습니다만 지금 그들은 외교권을 빼앗아 가려 하고 있으니, 이것은 자국의 부강한 것을 믿고 폐국을 능멸하는 것이 아니라 귀공사를 능멸하는 행위입니다. 귀공사는 지금 폐국에 주재하고 있으므로 의리상 동일한 동포라고 생각되는데, 남의 강요에 의하여 정직하지 못한 우의를 지속한다면 이것은 비단 폐국이 협박을 당하여 통탄스러운 것이 아니라 실로 귀공사의 체면과 권한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군소들은 억압을 당하고 있지만 그 억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원로대신인 나로선 폐국의 전례를 헤아려 볼 때 국정에 참여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지금 이 서신을 올리오니, 귀공사는 이 사실을 각 공관에 알리어 린국의 우의와 공법에 입각하여 의리상 좌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즉각 회동하여 담판을 벌여서 그 륵약을 부인해 주시고, 또 폐국으로 하여금 옛 권리를 잃지 않게 하여 망하지 않게 해주시면 폐국으로서는 큰 은혜를 입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며 천하도 모두 그것을 의롭게 칭송할 것입니다. 그럼 뜻대로 말이 다 표현되지 않았사오니 굽어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3. 일본공사림권조에게 보낸 서신
그는 또 일본 공사림권조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그들의 정부에 아뢰어 그 조약을 취소하도록 간청하였다.
“폐국은 귀국과 일찍부터 우의를 돈독히 하여 교호가 날로 밀접해 왔습니다만 마관조약을 체결할 때부터 소촌외상이 열국으로 변명서를 보낼 때까지 우리의 독립을 보호한다고 말하지 않는 때가 없었고, 지금은 귀대사와 공사가 병력을 인솔하고 대궐을 포위하여 참정을 구속하고 외상을 협박하는가 하면 법식도 갖추지 않고 강제로 조인을 하여 억지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으려 하고 있으니 이것은 공법을 어기어 식언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귀공사께서는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어찌 이 정의와 공리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천하가 장차 귀국에 대한 여론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귀공사는 다시 뉘우치어 귀정부에 아뢴 후 그 조약을 취소하고 동서대국을 보전하시기를 지극히 요망하옵니다.”
4. 박제순 등의 오적론죄소
그는 또 백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박제순 등 5적의 죄를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들은 말에 의하면 정부제신들은 날마다 그 5개사안을 강요하면서 서로 가부를 논하다가 조인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폐하의 성지가 확고하여 누차 협박을 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며, 더욱이 다행스러운 것은 참정신 한규설이 완강히 거절하여 인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만 두려운 것은 그들의 사술로 이 적신들과 내통하여 함부로 조인을 구실로 삼는다면 노예(노례)처럼 유린하는 날이 곧 눈앞에 다가와 종사가 장차 구허로 변할 것이며, 생민들은 곧 어육이 될 것입니다.
아! 애통합니다. 박제순의 죄를 어찌 처형해야 되겠습니까? 그는 주무대신이 되어 비록 폐하께서 윤허하신 후 그로 하여금 조인을 한 것이지만, 그로서는 당연히 죽을 때까지 다투어 국은을 갚고 신하로서의 직분을 다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상의 뜻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함부로 조약을 체결하였으니, 매국적이 어느 시대나 없을 수야 있겠습니까만 어찌 이와 같이 심한 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일은 명분을 바로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니 폐하께서 이 적을 처형하지 않으면, 안으로는 만인의 한결같은 분통을 해소할 수 없을 것이며, 밖으로는 천하만국의 공론에 대책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속히 박제순의 머리를 베어 거리에 달아매고, 여러 신하들 중 「가」자를 쓴 사람들도 그 왕법상 반드시 처형해야 한다는 취지에 입각하여 주동자와 추종자의 구별을 두지 말고 모두 구속하시어 속히 국법을 바로하시기 바라며, 다시 정직하고 절조가 있는 신하를 택하여 외부장관으로 임명하신 후 그로 하여금 각 공관에 성명을 내시고 또 그들과 회동하여 담판을 한 후에 그 륵약을 취소하여 국권을 회복하시고 백성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신 등이 그 윤허를 받지 못하면 차라리 천폐에다가 머리를 찧어 죽을지언정 도의상 살아서 대궐문을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5. 비답
“대소신료들의 장독이 날로 이곳에 온 걸 보면 이것이 어찌 군중들의 공분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잘 상량하여 무슨 조처를 내릴 것이니 경 등은 양해하시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6. 조병세 등의 재소
조병세 등은 다음과 같이 다시 상소하였다.
“신 등은 함부로 위태로운 말을 아뢰었으므로 머리를 맞대어 하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상량하여 무슨 조처를 취하겠다는 비답을 받았지만 더욱 유쾌한 윤허를 기다리고 있자니 더욱 민울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조용히 생각해 보니 종사의 존망이 여기에 있고, 폐하의 안위도 여기에 있고, 신민의 사생도 여기에 있으므로 마땅히 분발하여 먼저 매국제신들을 처형하여 천하에 사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각 공관에 성명을 한 후 모두 회동하여 담판을 한다면 겁약(겁약)을 폐지할 수 있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대로 눈치만 보며 시일만 지연시킨다면 폐하의 일은 그만일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의 일이 바라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 종사와 신민은 장차 어느 곳에 둘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을 바로 신 등이 가슴을 치고 피를 뿌리며 머리를 우러러 가슴속에 있는 말을 그칠 줄 모르고 있습니다.”
7. 비답
“어제의 비답에 양해를 구하였으니 이렇게 확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잘 상량하여 처분할 것이니 경 등은 양해하시고 모두 물러가기 바랍니다.”
이때 제신들도 전후로 민영규, 조병식, 리한영, 정명섭, 홍우석, 안용화, 리용태, 박기양, 금완수, 박제황, 리재극, 윤병□, 홍순형, 리근수, 리위래, 강윤희, 최재학, 리명익, 리종태, 윤두병, 정홍석, 고정주, 신성균, 강원형, 안병황 등이 서로 상소를 하였지만 고종은 조병세와 같은 의견이 있는 사람에게만 비답을 내려 주었다.
이때 각국 공사들은 우리 나라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판단된 데다가 그들은 또 일본의 부탁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후한 뇌물을 주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중립을 지키어 가부를 결정하지 않았고, 또 그들이 비록 그 조약을 취소시키려고 하더라도 이미 형세는 미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적들에 대해서도 처형을 하려면 처형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일본이 두려워 감히 요동하지 못하였으며, 상소문이 비록 공차관공서의 차. 혹은 병차이기도 하며, 한대의 관서명이기도 하다. 편자주 에 가득하더라도 아무 이익이 없었다.
8. 이등박문의 뇌물 공세
이때 이등박문은 300만원을 가지고 와서 정부에 고루 뇌물을 주어 조약이 성립되기를 꾀하였다. 이에 제적들 중 탐욕이 있는 사람들은 그 돈으로 많은 전장을 마련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한 생활을 하였다. 권중현 같은 사람이 이에 해당하며 리근택, 리제순 등도 이런 기회로 인하여 졸부가 되었다.
9. 이등박문의 회거
이등박문이 떠나갔다. 그것은 대사의 임무를 이미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공사관에는 전보가 폭주하여 조약이 체결된 것을 서로 축하하였으며, 일진회는 주연을 마련하여 서로 축하하며 더욱 기세가 양양하였다.
10. 일본인의 조병세 수감
11월 1일, 일본인들이 조병세를 수감하였다. 조병세는 두 번째 상소를 한 후 대안문 밖에서 석고대죄(석고대죄)를 하며 맹세코 윤허를 받지 않으면 물러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병력을 파견하여 그를 체포해 간 후 정동 헌병소에다가 수감하였다.
11. 민영환의 솔관상소
대종무관장민영환이 조병세를 대신하여 소수가 된 후, 그는 백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였으나 고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12. 민영환의 순절
4일, 민영환이 자결하였다. 민영환은 소수가 되어 궁내부로 들어가자 리지용, 리근택 등이 아뢰기를, “저…소수를 불문에 에 부치고 있으면 일병이 다시 들어올 것입니다”라고 하고, 큰 고함을 질러 그를 꾸짖으면서 “너희들이 칙령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것은 역신이다”라고 하며 순검을 불러 그를 결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순검들은 서로 돌아보며 “아무리 법이 없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저 사람은 충신인데 무슨 구실로 그를 결박하겠는가?”라고 하므로 이지용 등은 법으로 심판하라는 거짓 명령을 내렸다.
민영환과 제재들은 평리원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 후 구분되어 풀려났다. 이날은 초2일이었다. 제재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민영환은 탄식하기를, “어찌 집으로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옛 하인인 리완식의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그곳을 나와 그의 어머니 서씨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서씨의 볼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어린애와 같은 모습을 하였다. 그러자 서씨는 기뻐하면서 “우리 아이가 마음이 약해졌느냐?”라고 하며, 나가서 잠이나 조금 자라고 하였다.
민영환은 아내가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의 아내 박씨는 임신중이었다. 그는 등불을 켜 놓고 앉아 있었고, 세 아이들은 이불 속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민영환은 웃으면서 “관상가가 나보고 아들이 다섯이라고 하더니 부인이 지금 임신을 하였구려!”라고 하였다. 박씨는 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빙긋이 웃고 말았다.
잠시 후 민영환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며 다시 리완식의 집으로 가서 그날 밤 시자를 물러가게 하고, 그는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이완식을 부르며 “내가 설사를 하였으니 끓인 물을 조금 갖다 주게… 내 손을 조금 씻겠네”라고 하자 이완식은 물을 갖다 주며 손을 씻으라고 청하였다. 그는 손을 다 씻은 후 문앞에 이르렀을 때 매우 통증을 느낀 듯한 말로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죽지 않고 이럴까?”라고 하였다. 이완식은 크게 놀라며 화급히 그를 끌어안고 문을 부수듯이 방으로 들어갔다. 선혈은 그의 다리까지 묻어 있었다.
리완식은 민영환이 벽을 의지하여 절반쯤 수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부축하여 자리에 눕혔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벽에는 피묻은 흔적이 있어 촛불을 밝히고 보니 손가락으로 문지른 자국이 완연하였다. 그것은 차고 있던 칼이 짧아 첫 번째 찌를 때 즉시 죽지 않고, 피가 칼자루에 묻어 칼자루가 미끄럽기 때문에 손을 벽에다가 닦은 후 다시 정신을 차려 찌른 것이다. 그의 후관이 다 베어진 채 죽어 있었다. 이완식은 큰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고, 온 가족들도 그를 따라 울었다. 그 곡성은 서로 전달되어 삽시간에 성안으로 퍼져 산이 꺼질 듯이 요란하였다.
이때 하늘에서 큰 별이 서쪽으로 떨어지고, 까치 수백 마리가 그의 집을 에워싸고 울면서 날아가지 않았다. 각국 공관에서는 목이 쉬도록 슬피 울었고, 일본 사람들도 크게 놀라 한곳에 모여서 슬피 울었다. 그리고 동서양의 공사들과 상민을 막론하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뒤질세라 조문을 왔다. 또 그들은 비단으로 벽에 묻은 피를 닦아 옷 속에 감추면서 “이것은 충신의 피다”라고 하였다.
그의 부음이 고종에게 알려지자 고종은 대성통곡을 하고 비서승조남승에게 명하여 그의 집으로 가서 조문을 하게 하였다. 이때 서씨는 말하기를, “신첩이 별 볼품없는 자식을 두어 국가를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한 번 죽었는데 어찌 속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중흥을 꾀하시어 위로 종사를 편안히 하시고, 아래로 민영환의 한을 풀게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남승이 궁문에 도착할 무렵 고종은 명을 내려 그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것은 영친왕리은이 병을 앓고 있어 마침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상가에서 오는 사람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민영환의 자는 문약이며, 하사받은 호는 계정이다. 그리고 그는 민겸호의 아들로, 그의 백부 민태호에게 출계되었다. 그를 처음 잉태하였을 때 서씨는 구슬 세 개를 갖는 꿈을 꾸었고 또 어떤 노인들이 공복을 입고 밖에 있는 사랑채를 방문하자 민겸호가 넙죽 절을 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는 철종 신유년(1861)에 태어났다. 이해까지의 나이는 45세이다.
그는 키가 크고 수척하였으며 얼굴은 하얗고 수염이 없었다. 오직 턱 위에 있는 점 사이에 두세 개의 수염이 나부낄 뿐이었으며 두 눈은 맑게 보였다. 그는 고종의 외척 출신으로 반평생 동안 좋은 벼슬만 하였고, 그의 언론과 풍채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학문을 닦아 다른 민씨와 같지 않았다. 그는 구미에서 돌아온 후 천하대세를 연구하여 국사가 날로 그릇되어 가는 것을 통탄히 여기고 고종 앞에만 가면 눈물을 흘리며 극간하고, 물러나면 단정히 앉아 깊은 상념에 쌓여 있었으며 세리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특이하게 여겨 전일의 민영환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는 이때 과연 큰 절개를 세워 늠름한 옛날 렬사들의 기풍이 있었다.
그가 자결한 후 그의 서실을 살펴보니 그의 주머니 속에는 두 개의 유서가 있었다. 그 하나는 국민에게 고한 것이며, 하나는 각국 공사에게 고한 것이었다.
13. 민영환의 고국민유서
“아! 나라와 국민이 이와 같은 치욕을 당하고 있으니 우리 인민들은 곧 생존경쟁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살게 되는 것이니 제공들이 어찌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이 영환은 한 번의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또 우리 2천만 동포형제들에게 사죄를 하고자 합니다 이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기어이 구천지하에서 제군들을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 동포들이 천만 배나 더 분발하여 지기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을 쓰고, 서로 죽을 힘을 다하기로 결심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이렇게 죽는 사람도 당연히 지하에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조금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것으로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고별인사를 올립니다.”
14. 민영환의 고각국공사유서
“영환은 나라를 잘 돕지 못하여 이런 지경이 되었으므로 죽음으로써 황은에 보답하고 또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옵니다. 죽은 사람은 그만입니다만 지금 우리 2천만 인민들도 곧 생존경쟁 속에서 멸하고야 말 것입니다. 귀공사들이 어찌 일본의 행위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귀공사 각하는 다행히 천하의 공의를 중하게 여기시고, 이 사실을 귀정부와 인민들에게 보고하여 우리 인민의 자유와 독립을 도와주신다면 이렇게 죽는 사람도 마땅히 지하에서 웃음을 지으며 축하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 각하는 우리 대한을 경시하거나 우리 인민의 혈심을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또 유서가 있었으나 유실되어 수록하지 못하였다.)
15. 민영환의 화원
민영환은 화원 하나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격은 10만냥 정도 되었다. 그가 비록 치장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히 아름답고 유정한 모습으로 변하여 북리에서 제일이었으니 일시 부귀의 극치를 볼 수 있었다.
광무 9년 을사(1905년) ⑥
1. 조병세의 순절
특진관조병세가 음독자결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조병세를 구속하였다가 하룻밤을 지낸 후 그를 석방하였다. 조병세는 민영환이 사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탄식하기를, “나도 죽어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손님들이 그를 만류하면서 “공연히 죽기만 하면 아무 이익이 없으니 어찌 조금 더 기다리지 않으시렵니까?”라고 하므로 조병세는, “내가 죽지 않으면 죽는 날 어찌 문약민영환의 자. 편자주 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소맷자락 속에서 아편(아편)을 꺼내어 삼켰다.
그리고 리용직은 그의 사위이다. 이때 그는 옆에 있다가 즉시 조병세를 수레에 싣고 그의 집으로 갔는데, 한 시간 가량 있다가 그는 절명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의사를 데리고 가서 검시를 하려고 하자 이용직은 그들을 크게 꾸짖으며 “우리는 대한의 대신으로서 나라를 위해 죽는데, 너희들 일에 무엇을 간섭해서 또 이 어른의 신후까지 모욕을 하려고 하느냐?”라고 하므로 많은 일본인들은 매우 놀라며 물러갔다.
조병세는 자결하기 전에 유소를 남기고 또 각 공관에도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2. 조병세의 고각공관서
“이 병세는 지난날 일본 공사의 겁약에 대한 사실을 각 공관의 첨각하에게 알렸으나 한 번도 회담을 갖지 못했으므로 가슴속에 울화가 쌓여 죽음으로써 국은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첨존들께서는 이웃 나라의 우의를 생각하시고 약소국임을 측은히 여기어 공동으로 협의한 후에 우리 독립권을 회복해 주신다면, 이 병세는 죽어서라도 그 은혜를 보답하겠습니다. 정신이 현란하고 기운이 촉박하여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3. 조병세의 결고국내인 민서
“이 병세는 사경에 임박하여 국내 인민에게 경고합니다. 아! 강린이 투맹(투맹)하고 적신이 매국하여 500년 종사가 엮어 놓은 구슬이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습니다. 우리 2천만 생령은 곧 노예가 될 것이니 차라리 나라를 위해 죽을망정 차마 이와 같은 수치를 어찌 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지사들이 피를 뿌리고 충신들이 눈물을 삼키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병세는 충분이 격하여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상소문을 가지고 대궐 앞에서 외치다가 대궐 밖에서 석고대죄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미 다른 나라로 옮겨 갔던 국권을 만회하고 위태로운 곳에서 생민들을 구제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습니다. 오직 죽는 것으로써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사람에게 사죄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도 여한이 되는 것은 국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주상의 근심을 풀어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전국 동포들은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시고 각자가 분발하여 더욱 충의에 힘써 주시고, 국가를 여러 가지로 도우시어 우리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국가의 수치를 씻어 주신다면 이 병세는 비록 저승에 있더라도 춤을 추며 기뻐하겠습니다. 그럼 제각기 노력하고 또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앞서 조병세가 대신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경연에 올랐을 때 고종은 그에게 눈길을 주면서 좌우를 돌아보고 “이 사람은 정직해서 마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후 무슨 일이 있으면 과감히 말하였으므로 「수교대신」이란 칭호가 일시 전파하여, 이때 사람들은 더욱 그가 주상의 지우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백년 이후로 모든 경재들은 그들이 서민의 관리로 있을 때는 비록 쟁쟁한 명성을 떨쳤더라도, 한번 상부로 들어오면 그들은 갑자기 당돌해져서 옛날에 바랐던 기대가 사라졌다. 이때 조병세는 상공이 되면서부터 명성을 떨쳤으나, 그는 고종에게 운현의 령연에 행차하지 못하도록 저지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의 비방을 받았었다.
4. 금봉학의 순사
평양에서 징소된 상대 상등병 금봉학이 칼로 자결하였다. 초6일이다. 김봉학은 보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울분을 못이겨, 죽으려 하였는데, 이때 민영환과 조병세 제공이 자결했다는 말을 듣고 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다니며 미치광이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는 이날도 영내로 들어가 통곡을 하면서 장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말로는 병사라고 하지만 나라가 망해도 한 사람도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지는 않고, 공연히 국록만 축을 내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어찌 왜놈 하나라도 주먹으로 죽이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여러 병사들은 모두 웃었다. 이때 금봉학은 그들을 꾸짖기를, “너희들은 참으로 개와 돼지 같은 놈들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한 번 죽는 것인데 어찌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만일 죽는 것이 두려우면 나를 지켜보라”하고 그는 영문으로 달려가서 입에 칼을 물고 한 번 높이 뛰어내려 엎어지자 그 칼은 등을 관통하였다. 그는 이렇게 죽은 것이다.
이에 장병들은 크게 놀라고 국내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민영환의 죽음은 죽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일본인들이 겁약하기 하루 전에 각대에서는 양총을 모두 거두어 그 방아쇠의 못을 빼어 갔으므로 자결을 하려 하였으나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참령홍창길과 정위전면조 등은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 통곡하였다.
“아아…애통하다! 군의 나이는 35세이며 그의 성품은 굳세고 곧았다. 그는 입영한 지 6년이 되었으며 나라에 징소된 후 서울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부곡에서 거주하며 우리와 함께 즐거움과 괴로움을 같이하였다. 그는 착실한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 힘을 다하여 공사에 봉직하였다. 국가가 다난하여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였다. 그리고 뜻을 지키어 국은을 갚으려고 의를 취하여 생명을 희생하였다. 이 사실이 천자에게 알려지면 당연히 무슨 포상이 있으리라.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고 온 영병이 한을 품고 있다. 령하고 장한 신이시여, 박한 이 술잔을 드시옵소서.”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고종은 그를 민망히 여겨 정3품, 법부참서관, 훈4등을 주어 그의 가문에 정표를 명하고, 궁내부로 하여금 목포 각 30필, 전 200원, 백미 5석을 제급하게 하여 장수를 돕도록 하였다. 또 제관을 보내 다음과 같은 제문을 올리게 하였다.
“광무 9년 세차 을사년(1905) 11월 경오삭 9일 무인에 황제는 신 례식원장례리창선을 보내어 증법부참서관금봉학의 묘소에 제를 올립니다.
「국사가 위박하여 충분이 격렬하옵니다. 다른 일을 돌아보지 않고 생명을 가벼이 하여 충절을 세웠습니다. 나라를 위한 그 대의는 일월과 빛을 다툽니다. 몸이 군영에 있으면서도 당신의 일념은 크기만 하였습니다. 가슴속에 가득한 그 일편단심은 일찍 옛날에도 없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 일이 가상할 뿐입니다. 무슨 말로 그 미행을 칭송하겠습니까? 전례에 의하여 정표를 하였습니다. 강신주를 따라 예의를 갖추오니 신이시여, 강림하옵소서.」”
5. 리상철의 순사
학부주사리상철이 자결하여,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리상철이 충분에 감격하여 강개하게 생명을 버렸습니다. 그의 뜻은 민망하지만 그의 절개는 가상합니다. 그러므로 관판 1부를 제급하고 특별히 학부협판직을 추서합니다. 그리고 정문의 은전을 베풀고 또 례관을 보내 치제를 하였으며, 장수는 궁내부로 하여금 융성하게 획급하도록 하였습니다. ”
이상철이 순절한 전말에 대해서는 고찰할 길이 없으나 이때 서울의 북서 관리들이 검시를 칭하고 그의 의형. 한재경을 구속하였다. 이때 이상철의 나이는 30세였으며 그의 노모가 생존해 있었다.
6. 인력거 인부의 순사
계동에서 인력거를 끄는 인부가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는 옛날에 민영환의 사랑채에서 살다가 계동으로 이거하여 인력거를 끌며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때 민영환이 순절하였다는 말을 듣고 통곡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종일 울고 있다가 인력거를 차주인 금참령의 집에 가져다주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가족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가 간 종적을 추적하였는데, 이미 그는 경우궁 뒷산의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의 시신은 이미 얼어 있었다.
7. 리근명의 구금
침순택, 리근명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적도 토벌과 륵약 폐지 등을 정청하였다. 심순택은 1차에 그쳤지만 이근명은 두 번이나 면주를 하다가 일본 사령부에 구금되었다.
8. 박기양의 수감
일병들은 특진관박기양을 수감하였다. 이때 박기양은 리근명에게 강력히 정청을 권하였으므로 일본인들은 박기양을 협박하며 “정청을 하려면 너나 할 일이지 어찌 리의정을 꾀었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박기양은 분통을 터뜨리며 “우리 나라 법에 상신이 아니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을 할 수 없으므로 이의정을 충동한 것은 나다” 하고 입을 막고 묵비권을 행사하여 7, 8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일병들은 그가 죽는 것을 싫어하여 의사를 데려와서 그를 치료하고 오랜 시일이 경과한 후 그를 석방하였다. 그 후 박기양은 수원의 향리로 돌아갔다.
9. 리상설의 순절미수
전첨사리상설이 고민과 울분에 못이겨 자결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종가로 가서 군중을 향해 통곡한 후 국가에 란이 일어난 이유와, 인신으로서 당연히 죽어야 하는 필연성을 일일이 역설하고 땅에 있는 돌에다가 머리를 찧고는 쓰러졌다. 그는 머리가 깨어지고 유혈이 낭자하였다. 그리고 기절하여 아무 감각도 없었다. 이때 군중들은 그를 낭가에 떠메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한 달 만에 다시 건강을 회복하였다.
10. 민영철의 청국도주
민영철이 청국 상해로 도주하자 정부에서는 그 사실을 보고하여 그를 면직시키고, 박제순을 참정으로 임명하였다.
11. 최익현의 5적성토소
전참정최익현이 다음과 같이 현도봉소시골에 있는 재신이 현이나 도를 통하여 상소하는 것. 편자주 를 하였다. 그 상소는 초3일 고종에게 전해졌다.
란신과 적자가 어느 시대나 없을 수야 있겠습니까만 어찌 지금 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여 함부로 날인을 한 박제순, 리지용, 리근택, 리완용, 권중현 같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초에 저… 일본 대사가 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왔다면 우리 정부에서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며, 이미 알고 있었다면 온 나라에 유시를 내려 백성들에게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뜻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한밤중에 회의를 개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때 그들의 행동을 보면 매국음모가 이미 7분 내지 8분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회의석상에서 폐하가 비록 그들의 협박을 받고 있더라도 한 번 위엄을 내어 손토로장군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 편자주 처럼 책상을 치고, 또 참정대신 및 여러 대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들을 통렬히 배척하여 선정신금상용1561~1637. 조선 선조. 광해군 때의 문신. 자는 경택, 호는 선원. 편자주 처럼 문서를 찢어, 그들로 하여금 머리를 베어 갔으면 갔지 보호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게 하였다면 그들이 비록 협박을 하더라도 우리에게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각국 공관의 이목이 있을 뿐더러 우리 나라 인사들이 궐기를 하면 그들이 어떻게 모두 살육을 감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설사 그들이 흉학을 부리지 않고 대포로 위협하더라도 그들에게 머리를 굽히고 마음을 주저 앉혀 온갖 치욕을 받고 사는 것이 어찌 한 번 용기를 내어 북지의 왕심남제의 담인(담인). 자는 중화. 송의 명제 때 사도참군을 지냈음. 편자주 의 말처럼 군신과 부자가 성을 등지고 격렬한 전투를 벌여 다 같이 사직을 위해 죽는 것만 같겠습니까? 그러나 먼저 계획을 세우지 않고 두려워하고만 있으면 비록 폐하가 윤허를 하지 않더라도 결국 나약한 태도를 면할 수 없을 것이며, 비록 참정이 완강히 거절하더라도 겨우 「가」자를 쓰지 않는 정도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적들이 감히 협박을 한 것이며, 박제순 등 제적들이 함부로 허락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제순 이하 제적들은 본래부터 왜적들의 창귀(창귀) 노릇을 하여 매국을 장기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그들은 아무 기탄이 없었으며 편안히 앉아 이상히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만번 죽여도 그 죄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규설에 대해서는, 그가 정부의 장관으로서 그 일을 처음부터 생각해 보지도 않고 또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을 바르게 지도하지도 않았으니 어찌 그 직무유기에 대한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 왜적들은 그들의 강한 힘을 믿고 교만을 부려 린국에게 원망을 사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으며, 맹약을 위배한 것을 장기로 삼아 동문(맹약)의 대의를 생각하지 않고 각국의 공론을 불고하여, 오로지 병탄을 하기 위해 불법을 자행하면서 아무 거리낌도 없으니 이것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계획을 짜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형세는 이런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관조약을 체결한 때부터 로일선전서를 발표한 이후 우리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한다고 말한 지가 몇 차례 있었고, 그들이 우리 나라의 이익을 독점하고서도 걸핏하면 한일 양국의 교의가 밀접하다고 말한 지가 또 몇 차례나 되었습니다. 그들의 사기와 농간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이 말한 황실을 보존한다고 하는 말을 폐하께서는 믿고 계시는지요? 지금 주상의 제위가 바뀌지 않고, 인민이 망하지 않고, 각국 공사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때, 그 계약서가 다행히 폐하께서 인준하고 참정들이 허락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는 것은 제적들이 강제로 조인한 허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먼저 5적의 머리를 베어 그들의 매국한 죄를 바루시고, 외부의 관리를 선발하여 일본공관으로 조서를 보내 그들이 요구한 맹약은 맹약이 아닌 그 허위문서를 취소하게 하고, 또 각국 공관에도 급히 조서를 보내어 그들과 회동한 후 일본이 강한 힘을 믿고 약소국을 경멸한 죄를 설명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폐하의 마음과 인민의 소원을 천하가 다 알게 될 것이며, 만국의 인민들도 우리 군신의 본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분발하여 공을 떨치면 망한 나라를 보존할 수 있고 죽을 환경에 처한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결같이 위축되어 있으면 두려운 것은 망하는 것인데, 지금은 이미 망했으니 다시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설령 이로 인하여 그들의 화를 돋운다 하더라도 폐하께서는 명나라 의종이 순사하는 뜻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는 박제순 등 제적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들은 비록 외세를 의지하여 군부를 위협하였지만 그들도 우리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만일 호령을 한번 내리면 만민들은 그들을 모두 원수로 여기고 있으므로 사법부의 처벌을 기다리지 않아도 그 역적들의 시신은 이미 네거리에 매달려 있을 것입니다.
신은 이와 같이 망극한 소식을 듣고도 병으로 인하여 곧 죽게 될 몸이라 낭가에 떠메여 대궐로 가서 의리를 다하려는 소원을 펴지 못하고, 억지로 정신을 수습하여 대신 혈성으로 간청하옵니다. 그리고 머리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니 빗방울 같은 눈물이 떨어질 뿐입니다.”
12. 비답
“경이 나라를 걱정하여 울분을 터뜨린 정성으로 이런 말이 있을 줄 알았으며, 또한 상량한 바도 있습니다. 대신들의 련명소에 대한 비답을 보시고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13. 최익현의 재소
14일, 최익현은 또 다음과 같은 상소를 하였다.
“신은 비답을 받아 보고 매우 당혹하였습니다. 그중 「상량」이라고 말한 것은 의심스러워 결정하지 못한 말로서 그 사람에게 치죄를 할 만하기도 하고, 치죄하지 않을 만하기도 하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5적 같은 자들은 위로는 차라리 사직을 위해 순절하라는 성상의 교지도 없고, 아래로는 참정을 강력히 저항하는 관료들의 여론도 없이 조종으로부터 전해 온 강토와 인민을 한밤중에 한 장의 종이로 함부로 적에게 내주었습니다. 이것은 곽개미상. 편자주 와 진회송의 강녕인, 자는 회지, 호는 충헌. 소흥년간에 화의를 주장하여 충신 악비를 살해하고 장준, 조정 등을 유배하였음. 편자주 도 하지 않을 일을 박제순 등이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죄는 다섯 수레로 그들의 사지를 찢고 그들의 10족을 멸할지라도 신인의 울분을 다 씻을 수 없을 것인데, 무엇이 그리 의심스러워 성상의 교지를 이렇게 더디게 내렸습니까? 그 후 들은 말에 의하면 대소신서들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혀를 놀려 곽적의 머리를 베자고 간청하면서 연명소를 올릴 뿐 아니라 누차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신, 재신 및 미관하품, 병졸, 차부들도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 서로 줄을 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상천의 지극한 뜻을 만회하지 못한 것도 걱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도 목을 내밀어 그들을 주목하면서 폐하께서 한번 위엄을 내시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오랜 시일이 지나도 그런 소문은 들리지 않으므로, 신은 다시 폐하께서 제적들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신 것이 아니라 공론이 준발하기를 기다려 국민들과 함께 그들을 죽이려 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역적들을 애호하여 차마 죽이지 못한 것도 아닐 것이며, 그들이 연결하고 있는 세력을 두려워하여 죽이지 못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지, 조종, 귀신, 초목, 내외 국민이 모두 이 역적들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폐하만 그들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언 세월이 흘러 벌써 수십여 일이 지난 지금, 그 역적들을 죽였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승진시켜 정부의 장관으로 임명하고 또 제신들에게 그들과 화해하기를 권하고 있으므로 신은 이에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하늘을 향해 외치다가 목이 다 쉬도록 슬퍼하고 있는 것조차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 폐하께서는 참으로 이 역적들을 처형해야 할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 역적들을 애호하여 그들을 관장으로 임명하고 그들과 화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폐하에게 큰 원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어 천지, 조종, 귀신, 초목 및 내외 국민의 여망도 모두 돌아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역적과 원수라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들의 세력이 두려워 감히 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설령 그들이 갖고 있는 세력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지금 폐하께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폐하께서는 지금 국가가 있습니까? 토지가 있습니까? 인민이 있습니까? 국가도 없고 토지도 없고 인민도 없다면 폐하께서 두려워하신 것은, 즉 서진의 회제, 진의 민제(민제), 송의 휘종(휘종), 흠종(흠종)처럼 나라를 망할까 두려워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니, 저 역신들이 그 이익을 더 가지려는 마음이 있다면 폐하께서 비록 주어서는 안될 높은 관직과 후한 봉록을 주더라도 그들은 어찌 일본에서 주는 큰 훈신의 자리를 놓아두고 폐하를 이롭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 역적들을 죽여도 죽음을 면치 못하고, 죽이지 않아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 역적들을 죽이지 않고 죽음을 면치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그 역적들을 죽이어 천지, 조종, 귀신, 초목 및 내외 국민들의 여망을 통쾌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폐하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그들이 말한 통감이라고 하는 것은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아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행인들의 말에 의하면 장차 경복궁을 그들에게 내어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비단 폐하께서 국가가 없고 토지가 없고 인민이 없을 뿐 아니라, 따라서 집까지 없어지는 결과가 됩니다. 아! 너무도 가슴이 아픕니다. 폐하가 40년 동안 임금 노릇을 하였는데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집도 없는 사람이 되셨습니까?
그리고 또 폐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알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저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은 혹 원로대신으로, 혹은 폐부 같은 중신으로서, 혹은 시골에 있는 한가한 사람으로서 생명을 홍모처럼 버렸고 또 리상철, 금봉학 등도 혹 미관말직으로서 혹은 병졸의 신분으로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생명을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충의가 일월처럼 빛나므로 폐하께서도 그들을 포상하는 것은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죽는 것을 충성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이 그렇게 죽은 까닭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역적을 토벌하지도 못하고 임금님을 간하지도 못하여 이 삼천리 강토와 수천만의 백성이 망하게 된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5적들이 역적질을 한 것을 폐하께서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곽공제의 환공이 들에 나가 망국고성인 곽씨허를 보고 야인에게 묻자 그 야인은, “선을 선으로 여기면서 행하지 못하고, 악을 미워하면서 저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했다. 편자주 이 말한 선을 선으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기면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을 어찌 다시 폐하에게서 볼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아! 오늘은 우리 군신과 백성들이 함께 망하는 날입니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장차 죽을 사람이 백약을 받지 않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오직 시험해 볼 것은 독삼탕이라도 사용해 보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 반드시 죽고야 말 것을 명백히 알면서도 이 여한을 후일에 남기고 떠난다면 어찌 거듭 슬퍼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역적을 토벌하고 그 보호조약을 취소하는 것이 오늘 당연히 시험해 볼 만한 독삼탕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폐하께서 두려워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습니다만 그 실상은 천지의 법칙으로서 중단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리고 한, 당이 중립하여 쉽게 행하였던 일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무엇을 의심하고 계십니까?
또 떠도는 말에 의하면 폐하께서 제신들에게 권하여 그 역적들과 화해를 하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것은 폐하의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주선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역적들은 박제순과 리지용 등보다 더 심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이 역적들을 먼저 처형하여, 그 간사한 음모를 꺾으시고 또 이런 일을 함께 시행하지 못하신다면 이것은 폐하께서 조정의 신하들에게 역적질을 가르친 것으로서 앞으로 금할 수도 없을 것이니 신은 폐하를 위해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