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건달바 전투 1
- 몸에 들어온 것은 분신이 아니라
우리가 진저리를 치며 흡혈귀 소굴을 떠나려 할 때였다. 뒤에서 끽끽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십여
마리의 작은 원숭이들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흙투성이, 피투성이가 된 처참한 몰골이었다.
나는 아뿔싸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삼매신풍을 맞아 눈이 멀어버리는 바람에 미처 회수하지 못한 나의 분신(分身)들이었다. 대부분 삼매신풍에
휘말려 죽고 소수만이 살아남아서 나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가엾은 것들, 어서 돌아와.”
나는 애처로움에 짓눌리면서 얼른 주문을 외워 이들을 다시 몸으로 집어넣었다. 어떤 요기(妖氣)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깊이 따져보지 않았다.
이들이 오랫동안 흡혈귀 소굴에 머물렀기에 풍기는 냄새라고 생각했다.
우리 일행은 흡혈귀 소굴에서 풀려난 사람들을 따라 이웃 마을에 도착했다. 저승사자들에게 외아들을 잃었던 부유한 상인이 우리를 환대했다.
우리는 대리석 욕실에서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요리의 가짓수가 얼마나 되는지 셀 수가 없는 성찬(盛饌)을 대접 받았다. 신성불가침의 공포로
군림하던 야마 신전이 부서지고 상당수의 저승사자들이 몰살되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로 퍼져갔다.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우리
곁으로 몰려왔다. 사람들은 우리를 ‘야마 신전의 파괴자들’이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25인분의 스프와 빵과 과일, 스테이크와 닭고기를 먹어 치우는
팔계의 식사는 굉장한 구경거리였다. 육식을 엄격하게 금하는 삼장법사도 본인만 계율을 지킬 뿐 우리를 못 본 척했다.
하룻밤을 푹 자고 난 뒤 우리는 지프로 돌아가 다시 길을 떠났다. 이상하게 몸이 찌뿌둥했지만 어제의 격전을 생각하면 그럴 법한 일이었다.
삼장법사가 자꾸 나를 곁눈질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그러려니 했다. 우리는 야마 행성의 가장 큰 대륙을 지프로 종주해 예정된 초공간의
구멍으로 나아갔다. 다음 경유지를 예고하면서 사오정은 기쁨과 설레임을 느끼는 듯했다.
“다음에 갈 곳은 오계국(烏鷄國), 검은 닭 행성이에요. 기억나시죠? 옛날 우리가 가짜 왕을 내쫓고 우물에 빠져 죽은 진짜 왕의 혼백을
건져줬잖아요. 그 뒤 그 행성의 시간으로 800년이 흘렀는데 이제는 아주 멋진 별이 되었어요.”
그제서야 선연히 옛 일이 생각났다. 보림사라는 절에서 유숙하던 삼장법사의 꿈에 귀신이 나타났는데 그는 3년 전 친구였던 마법사의 배신으로
우물에 빠져 죽은 왕이었다. 마법사는 왕으로 변장하고 나라와 왕비를 차지한 뒤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우리는 사냥을 나온 태자에게 이런
비밀을 알리고 옥좌에 앉은 마법사를 축출해서 나라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 별은 대기권 바깥에서 보면 검은 닭 모양을 하고 있는 비옥한 흑토(黑土)의 고원분지가 있어서 농사가 잘 되고 기후가 온화한 곳이었다.
행성의 중심부에 있는 오계국은 큰 바다를 끼고 세 개의 긴 강이 흘러가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상업이 발달하고 경치가 빼어난 나라였다. 나와
팔계와 오정은 옛 기억을 더듬으며 지프 안에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오계국은 요즘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사회 간접 자본이 잘 갖춰졌어요. 해안에는 금향(錦香) 특별시라는 거대한 위락도시가 있는데 정말
대단한가 봐요. 은하계에서 논다고 하는 젊은이들은 다 한 번씩 들러본답니다.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고 술 잘 마시는 건달바(乾 婆)들의
천국이죠.”
“우와, 피가 끓는다. 카지노도 있겠지? 예쁜 여자와 맛있는 것도 많겠어.”
자기도 모르게 말을 뱉고 팔계는 웁 하고 제 입을 막았다. 그리고 스승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침묵을 지키던 삼장법사가 조용히 한 마디
타이를 뿐이었다.
“출가자(出家者)는 바람을 먹고 물에서 자고 달을 마시고 서리 위를 걷는다. 세속의 구경거리를 말하지 마라.”
스승이 좀 조용하다 싶었지만 우리는 기분에 들떠 다시 잡담에 빠져들었다. 설마 그런 곳에서 일생일대의 격전을 벌이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지프는 언제나 눈에 뒤덮여 있는 험준한 산의 입구에서 밤을 맞았다. 검은 닭 행성으로 통하는 초공간의 구멍은 저 산악 지대 중심부의
얼어붙은 절벽 꼭대기, 무지개가 솜털처럼 부드럽게 걸려 있는 곳이라고 했다. 우리는 마지막 마을의 비교적 큰 집에다 숙소를 청해서 들어갔다.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종일 몸이 무거웠던 나는 눈을 감기가 무섭게 잠에 떨어졌다.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는데 곧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주변에는 주황색 불꽃의
흡혈귀들이 반짝거리며 따라붙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나 자신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이건 꿈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꿈이 아니었다.
“너의 육체는 우리가 장악했다. 손오공.”
내가 최초에 조우했던, 작살을 든 업금강이 말을 했다.
“잘도 우리 동족을 죽이고 우리 보금자리를 어지럽혔지. 그러나 우리는 너의 분신으로 가장해서 네 속으로 들어왔다. 너의 신경계를 마비시켰을
뿐만 아니라 너의 전신에 침투해서 속속들이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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