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도주 4
- 소총·로켓탄으로 무장한 미군 보병들은…
부서진 집에 부서진 부엌이 있었고 부엌의 흙바닥에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래의 세계로 통하는
구멍이었다. 보이지 않는 실이 나의 혼(魂)을 아래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그 구멍에 몸을 던졌다. 나는 빙글빙글 돌면서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주위의 모든 빛이 사라지고 감각이 사라져갔다. 알 수 없는 시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장소. 끝없는 낙하(落下)만이 있었다. 나는
반듯하게 설 수도 없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 때 내 눈 앞의 공중에서 어떤 환신(幻身)이 나타났다. 푸른 불길이 타오르는 차가운 눈. 흰색 철가면 같은 얼굴. 파도처럼
굼실거리는 장발의 곱슬머리. 그것은 이랑진군이었고 동시에 격렬한 증오를 불러 일으키는, 정체 모를 괴물이었다. 나는 그 환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환신이 말했다.
나는 너를 잘 알아. 손오공. 너는 원숭이 요괴야. 고통도 고독도 두려워하지 않는 요괴. 네가 견디지 못하는 유일한 것은 경멸이지. 어때?
이렇게 하겠다면 우리에게 복종하겠나?
환신은 웃으면서 양 손의 엄지 손가락을 맞대고 이를 잡는 시늉을 했다.
너는 소중한 벌레들을 가지고 있지? 그걸 이렇게 터뜨려서 저승의 강으로 던지겠다면 어떻게 하겠나? 너의 아들과 너의 마누라를 말이지.
나는 땀에 흠뻑 젖어서 깨어났다. 창 밖으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고 팔계와 오정은 아직 정신 없이 자고
있었다.
몇 시간의 숙면은 이랑진군의 뇌신편에 맞아 갈갈이 찢어졌던 피부를 아물게 했다. 온 몸이 쑤셨고 약간의 구토감도 느꼈지만 내 몸은 힘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피로가 회복되고 원기가 돌아오는 느긋한 기분과는 대조적으로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꿈에서 본 푸른 눈동자가 계속 환기되면서 어떤 끔찍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마음 속의 평화를 깨어버렸다. 나는 자고 있는 동생들을
깨웠다.
“혹시 우주를 여행하다가 내 소문을 들은 게 없었어? 너희들을 만나기 전까지 내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말야.”
나는 내가 기억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고 솔직히 내가 누구인지조차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내 잠재의식의 교활함과 전투 본능에 의지해서
매번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나의 능력은 사실 과거의 손오공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까지 고백했다. 오정은 별로 동요하지 않았지만 팔계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형이 클론이라고? 형이 약골이라면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떨지 마. 설사 그렇다고 해도 큰형은 손오공의 클론이야. 보통 클론의 수명은 매우 짧은데 아직까지 멀쩡한 걸 보면 복제가 잘된 것 같아.
원칙적으로 우리는 무한히 복제될 수 있고, 우리의 복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똑같아.”
팔계를 다독거린 오정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몇 해 전에 형의 근황을 들은 적이 있어. 형은 지구에 살면서 지구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하나 낳았대. 나는 깜짝 놀랐지. 여자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형이 결혼을 했다니.”
오정의 말을 듣자 식은 땀이 흘렀다. 지구 여자? 언젠가 우마왕이 내게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은 것이 생각났다. 나의 가족?
우마왕의 질문에 나의 과거를 여는 열쇠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여기가 한국이라고 했지? 내 친구 우마왕이 여기 살고 있어. 그리로 가자. 천상의 추격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 친구 집에 숨어 있는 것이
좋겠어.”
동생들은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선 밥부터 좀 먹자. 눈이 핑핑 돈다.”
우리는 오정이 가지고 다니는 컴퓨터 모니터로 한국 지도를 검색한 뒤 지구인으로 변신했다. 변신을 해도 팔계는 여전히 뚱뚱했고 오정은 삐쩍
말랐으며 나는 여전히 팔다리와 얼굴에 털이 많았다. 우리는 서로의 나체를 보며 깔깔 웃었다. 한국인들의 옷을 찾아 갈아 입고 부서진 집을 나서니
무지갯빛 햇살이 바닷가에 걸쳐지는 이른 아침이었다. 어디 가야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우리는 네거리에 서서 두리번거렸다. 그 때 아침밥이 두
발로 걸어왔다.
“돈 무브(꼼짝 마라)!”
건물의 어두운 그늘에서 총부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우리는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다른 방향에서 누군가가 총을 겨누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얼룩덜룩한 위장복에 귀 근처가 덮이는 프리츠 헬멧을 쓰고 방탄조끼를 걸친 병사였다.
그 자리에 두 팔을 펴고 엎드리라는 명령이 들렸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했다. 사방에서 소총과 견착식 로켓탄 발사기, 유탄발사기를 든
10명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1개 분대의 미군 보병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몸을 더듬으며 무기가 없는지 검사했다. 팔계의 쇠스랑을 보고 이 근처에도 농부가 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군인들은
우리에게 일어서서 두 손을 머리에 올리라고 했다.
우리는 주먹과 손바닥, 팔꿈치와 무릎을 휘둘러 보병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기절한 병사들을 문짝이 부서진 빈 술집의 땅바닥에 낡은 책가방
던지듯 던져 넣고 우리는 후다닥 식탁에 둘러 앉아 보병들이 휴대하고 온 레이션 박스를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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