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신행마동

第 十一 章 건방진(?) 九派一幇

오늘의 쉼터 2016. 6. 2. 11:40

第 十一 章 건방진(?) 九派一幇


주소아는 소일초의 침실로 들어섰다.
소일초는 침상의 휘장을 걷어젖힌 채 술병을 들이키고 있었다.
{술맛 괜찮아?}
{녹림맹의 술은 기가 막히는 데가 있어.

차라리 도둑질 집어치우고 주루를 하면은 더 편히 살것 같은데...}
{나도 조금만 줘볼래?}
주소아가 침상에 걸터 앉으면서 말했다.
소일초가 두 말 않고 술병을 건네주었다.
꿀꺽꿀꺽!
{커! 혀가 착 감기는 것이 술도 괜찬은 물건이네.}
{정말 그렇지? 야! 우리 더 잘 통할 수 있겠는데...}
소일초가 반색을 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새 술을 더 갖고 올테니까}
{어디 가서?}
주소아가 사과처럼 발개진 얼굴로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디긴 어디야. 술창고에 가서 슬쩍 해오면 되는 거지.배운 도둑질 이때 써먹어야지.}
주소아는 피식 웃었다.

과연 신행마동이란 이름에 어울리게

소일초는 나가자마자 몸통 만큼이나 굵은 단지를 들고 들어왔다.

막고있던 소가죽을 벗기고 나자 향긋한 술냄새가 방안에 가득 퍼졌다.
침상 한가운데다 술독을 놓고 두 꼬마는 찻잔으로 떠마셨다.
{기가막히다.이렇게 신나게 술마신 적은 없었는데...}
{나도 술이 이렇게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벌개진 얼굴로 연신 술을 떠마시며 주소아가 말했다.
{확실히 술은 여자를 곁에 두고 마셔야 한다더니... 어른들 말이 그른 게 없군.}
{그 뜻을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이야?}
{뭔데?}
{원래부터 주색(酒色)이라고 했잖아. 당연히 술 다음에는 여자를 찾는 거라구...}
주소아는 이미 취기가 돌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말을 잘 아는 척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난, 주색투도(酒色偸賭)에 모두 통달했어. 사마귀로부터 직접 배웠거든.}
{까불지마. 주투도라면 몰라도... 아직 꼬마가...

난 이래도 이미 이 년 전에 초조(初潮)를 치른 여자란 말이야!}
{내가 재미나는 것을 한 가지 보여주지.}
그말을 마치자 마자 소일초의 입에서 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풀린 눈동자로 주소아가 말했다.
{별 것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소일초의 입에서 나오는 연기는 전혀 흩어지지 않고

공중에서 공처럼 빙빙돌며 뭉쳐졌다.

그기에서 강렬한 주향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주정(酒酊)이구나!}
주소아가 손뼉을 쳤다.
소일초는 입을 다물고 공중에 떠있는 주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구름같은 주정은 점점 작아지면서 조그마한 구슬로 변해버렸다.
다시 소일초가 공중으로 던지자 구슬이 퍽 흩어지며 구름같은 주정이 용(龍)의 모습을 만들어 냈고

스르르 바뀌며 호랑이가 되기도 하고 사람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주소아는 연신 재미있어하며 박수를 쳐댔다.
이 기술은 소일초가 주귀(酒鬼)에게 배운 주전신공(酒箭神功)을 응용한 것이었다.
소일초가 입을 벌리자 여인의 형상을 이루고 있던 주정은 후루룩 빨려들어가 버렸다.
소일초의 얼굴이 더욱 벌개졌다.

주정을 한꺼번에 흡입한 때문이었다.
한 동안 횡설수설하면서 술을 퍼마신 소일초와 주소아는

술독을 내려 놓은 후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어땠어?}
소일초의 말이다.
{예상대로였어. 사진성의 제자래. 같은 성씨라서 딸인줄 알았는데...}
주소아는 완전히 취해서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이 순간 소일초는 곁에 퍼질러진 주소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주소아의 빨간 얼굴이 희미한 황촉불에 비쳐 소일초를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녀가 몸을 돌려 소일초의 몸에 다리를 걸쳤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여 그녀의 뺨 위를 타고 흘러내릴 것 같다.

{왜...나는 삼 년 전에 일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을까?}
{...}
{몇 달 만, 몇 달 만 지나면 고모부 상처가 완쾌되겠지.

그럼 고모부는 내 기억을 돌려 주실 수 있을 지도 몰라! }
{내 말만 잘들으면 내가 기억을 치료해 줄께.}
{사기치지마. 네가 무슨 수로... 괜히 수작이나 걸어보려는 거지.}
{어떻게 알아?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엉뚱한 소리 그만하고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나 말해.}
{말했잖아. 내 목탁이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목탁으로 펼치는 무공도 있어?

잘못되면 녹림맹이 폭삭 망하는 수도 있어. 일부러 이곳의 위치까지 그쪽에 몰래 알렸는데...}
주소아의 혀 꼬부라진 소리에는 염려가 들어있었다.
{목탁 속에 축융화탄(祝融火彈)이 가득들었어.}
{뭐?}
호호호!
히히히!
두 가지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웃음이 잦아지자 소일초의 음성이 다시 흘렀다.
{삼성무림청! 그들이 언제쯤 이 녹림맹을 공격할까?}
{아마 다가오는 새벽이 아니면 내일 밤이겠지. 물론 새벽일 가능성이 더 많지만...}

{뭐? 그럼 얼마 남지 않았을텐데...}
놀라면서 벌떡 일어서려는 소일초의 목을 주소아가 천연덕스럽게 휘감았다.
{괜찮아. 비성성들이 교대로 하늘에서 지키고 있어. 때가 되면 와서 깨울거야!}
주소아는 그대로 스르르 잠이들고 말았다.

* * *

콰아아아!
달빛과 별빛과, 그리고 불어닥치는 거센 늦가을 바람을 맞이하며

깊은 계곡 속의 거대한 푸른 성(城)은 우뚝 그 견고함을 자랑하며 서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호리병 같은 그 계곡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천상에서 내려온 옥동옥녀(玉童玉女)인양 어깨를 맞대고 서있는 소일초와 주소아...
그 들의 주변에는 비성성들이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 초조한 눈빛으로 서있는 똑 같은 생김새의

아름다운 두 미녀 사은상과 사옥상,
맞부딪치는 쌀쌀한 가을바람에 그녀들은 표연한 자세로 서 있다.
지금 그녀들의 앞에서 소일초와 주소아는

비성성들에게서 끊임없이 끽꽥 되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휘황한 달 빛에 멀리 장강이 은하수처럼 보이는데...
사은상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우리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은 백인장이나 청옥검궁과도 비견될 정도로 막강하다고 사부가 말했다..)

문득 사은상의 수려한 검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사부의 말에 의하면 백인장의 주력은 백인도객(百刃刀客)이고

최고수들은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 원로십팔도객들 이라고 했다.)
그녀는 멀리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사옥상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은 전면적으로 무림에 활동한 적이 없는데도

은연중에 최강의 문파로 공인되어 있다고도 했다.)
이 순간 생각을 헤아리고 있던 사은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한데 오늘 우리측에서는 최정예인 삼혈단(三血團)이 나섰다.

그만큼 우리 삼성무림청도 백인장을 두려워하고 있다!)
사실,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은 지금껏 무림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혈향단(血香團),
-혈살단(血殺團),
-혈혼단(血魂團),

물씬 피냄새를 느끼게 하는 이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은

그 존재만 알려져 왔을 뿐 완전한 비밀과 신비 속에서 따로 행동해 왔던 것이다.
사은상 그녀의 파리한 입술이 단호하게 깨물어졌다.
(한데 저 귀신같은 꼬마들은 어떻게 삼혈단을 상대하려는 것일까?

어떤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는 고수들도 저 괴물들 외에는 볼 수가 없었는데...

아무튼 이번 격전에 승리만 할 수 있다면 녹림맹 마저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겠지.

참 그리고 보니 녹림맹에서 돕기는 하겠구나.

자신들의 사활이 걸렸으니....)

사은상의 내심이 이번 결전에서는 삼성무림청의 승리가 확고하다고 굳혀지고 있을 때,
돌연,
{승리할 확신이 있소?}
맑고 청아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위엄을 느끼게 하는 음성이 울려왔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 음성은 육합전성으로 울려진 모호한 음성이었다는 것과

때문에 이 음성의 주인은 황녹천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어느 새 소일초와 주소아 옆에 소리없이 솟아난 한 사람...

청의면사인이었다.

모습도 헤아릴 수 없고 사내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청의 면사인이었다.
한데 이 청의면사인이 지닌 수려한 몸매는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휘영청 꺽일 것처럼 심약해 보였다.
거기에다 청의면사 사이로 드러난 푸른 벽옥색의 동공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신비감을 조성하고 있으니...
바로 이 청의면사인의 뒤로 금의(錦衣)를 걸친

기도가 비범한 네 명의 노인이 정중히 시립하고 있었다.
금빛 수염에 금빛 안광을 폭출시키며 사해를 떨어울리는 듯 한 이 네 노인,

이들은 다름 아닌 황녹천의 수족과 같은 녹림사존자(綠林四尊者)였다.
소일초와 주소아는 이미 청의면사인 황녹천이 나타남을 알고 있었는지 별 변화가 없었다.
이때, 소일초의 입에서는 어느 새 또다시

그 답지 않게 무량한 무게를 실은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마귀(四魔鬼)에게 연락은 되었소?}
{그들은 천산(天山)으로 갔다고 하오. 그래서 연락이 불가하외다.}
{천산? 연락불가?

그럼 당신은 벌써 내 조건 중에서 한 가지를 어겠군.}

소일초의 말은 단호했다.

그의 조건 그것은 사마귀에게의 연락과 녹림맹의 임차가 아니었던가?
청의면사인은 벽옥색 동공을 살짝 빛내며 말했다
{우리도 최선을 다했소. 천산까지 가자면 그 기간만도 몇 달이 걸릴 것이오.}
{첫번째 조건에 기한은 없었어.

무조건 가장 빠른 시간내에 사마귀를 이곳으로 불러.}
소일초의 얼굴이 치켜들리면서 무서운 안광을 발하며 황녹천을 바라보았다.
{녹림을 지켜주는 댓가로는 비싸지 않은 조건이야.

만약... 우리가 여기서 그만두고 물러나버린다면 녹림맹의 전멸은 불을 보듯이 빤한 일이지.}
황녹천과 녹림사존자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신행마동! 맹세코...

당신들이 삼성무림청의 주력인 삼혈단을 멸망시킬수 있소?}
{물론 당신이 한 가지 협조는 해야겠지.}
청의면사인의 섬연한 몸이 가는 진동을 일으켰다.
{대체 그 한 가지 협조하는 게 무엇이오?}
소일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황맹주(黃盟主) 이곳 녹림맹의 총인원은 얼마나 되오?}
{이곳에만 삼천(三千)!}
{음...삼천이라! }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소일초의 음성은 한동안 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소일초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오늘밤 자시를 기하여 그 인원들 모두에게 싸울 준비를 시키시오.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을 쳐부셔야 하니까 }
{우리 녹림인들 만으로...!}
비명처럼 내뱉는 음성과 함께 황녹천의 섬연한 몸이 부르를 진동을 일으켰다.

그만큼 그의 벽옥색 아름다운 동공이 크게 흔들렸음은 말할 것도 없고...
황녹천은 곧 다소 싸늘하게 ?은 음성을 흘려냈다.
{신행마동, 당신은 본좌더러 이 녹림맹을 포기하고 도망치라는 것 같소.}
{반쯤은 맞았어.}
순간, 그림처럼 서 있기만 하던 녹림사존자의 몸에서 칼날 같은 분노가 터져 올랐다.
{무슨 소릴!}
{얼토당토하지 않는 말을!}
이때 황녹천의 전신에서도 분노가 물보라처럼 피어올랐다.
{신행마동, 당신은 우리 녹림의 안위 따위는 아예 관심도 없었군.

본맹으로 적의 주력을 끌어들여 놓은 후에 우리끼리 싸우라고...?}
{나는 당신 말이 반쯤 맞았다고 했어!

도망칠 필요는 없어. 단지 이 푸른 성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 말도 마찬가지요. 이곳은 우리 모든 형제들의 수 백 년 삶의 터전이오.

귀하가 바라는 것은 곧 우리더러 삶은 터전을 버리고 죽으라는 말이 아니오?}
준렬한 황녹천의 말에 어느 새 소일초의 낯빛은 푸른 청동빛으로 일그러졌고

그의 이마엔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분노가 극에 달했는지 그의 전신에서 폭풍과 같은 기도가 일어나고 있었다.
옆에서 주소아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황녹천! 그대야 말로 우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약속대로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을 멸망시킬 충분한 대비가 되어있다.}
{...}
{그런데, 그대들 녹림에서 그 정도,

만약에 일어날 수도 있는 사태를 가지고 그렇게 짜게 나오는가?

우리가 어리다고 토닥거리기만해서

그야말로 녹림을 너무 쉽게 지키려 하는 속셈이 아니냐?}
신랄한 어조였다.
삼혈단이 오기도 전에 녹림맹과 일전이라도 불사할 듯이 보이는 소일초,

그리고 황녹천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는 듯한 주소아의 말,
사실 황녹천은 설마 소일초등이 혼자서 움직이랴 싶었다.

어디선가 백인장의 고수들이 암암리에 보호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힘을 이용해서 삼성무림청과 싸울 생각이 없지 않았기에 선뜻 안방까지 제공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 감도는 씁쓸한 미소,
주소아의 몸에서 나는 낮은 휘파람소리를 뒤로 하고

폭풍같은 기도를 뿜어내는 조그마한 체구의 소일초에 압도당한 듯,

그는 꿋꿋이 서있기도 힘이드는 듯 천천히 녹림사존자에게로 몸을 기댄다.
연하여 흘려내는 음성,
{신행마동! 이 점을 생각해 주기를 바라겠소.

당신들은 떠나면 그만이겠지만... 이 녹림맹은 수십만 녹림도의 터전이라는 것을...}
{...!}
{만일 당신들이 그점을 생각해 준다면 우리도 기꺼이 당신의 요구를 수락해 주겠소...}
{너는 더이상 나에게 어떤 결정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여전히 딱딱하게 무서운 눈빛을 발하는 소일초였다.

{이곳이 아니라도 삼성무림청을 쳐부술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

다시 한번 내 성미를 건드린다면 그대로 철수해버리겠다.

물론, 그전에 네 몸에 먼저 땅에 영원히 눕게 되겠지만...!}
살기(殺氣)!

인간이 이처럼 무서운 살기를 발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모든 사람은 물론 소일초의 충천하는 살기에

주변을 날고있던 비성성마저 두려움에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직접 그 살기를 마주대하고 있는 황녹천과 녹림사존자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소일초의 살기는 서서히 걷혀졌다.
(무서운... 너무나 무서운 살기였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심맥이 파열되었을 것이다.)
황녹천과 녹림사존자는 그에 대한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이때 돌연,
{황녹천! 아직도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주소아의 싸늘하고 냉오한 음성이었다.
{이 밤이 새기전에 당신은 믿지 않으려 해도 우리의 말을 믿게 될 것다.}
{이 밤이 새기전에...?}
{그래. 분명히...!}
약간 말끝을 흐리던 주소아가 더불어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마당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의 목숨은 하나이지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라.}
순간 황녹천의 섬약한 몸이 기이로운 떨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몸만큼이나 파문을 이르키고 있는 눈빛!

황녹천은 자신의 내면에서 치미는 어떤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는 것 같았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공은 더욱 큰 벽옥빛의 파장을 일으킨다.
(나는 지금 저들의 말을 모두 따라야 하지 않는가?)
황녹천은 자신의 생각이 생각만 해도 무서운 듯,
쉴 새 없이 떨림의 전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즉시 부하들에게 자시(子時)까지 싸울 준비를 갖추게 하라.}
주소아의 음성이 소일초의 분노한 목소리 보다

부드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냉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녹천은 그 두사람을 주시하며 참열한 선택의 고통에 젖었다.
한데 돌연,
{아미타불!}
소리,

한 가닥 장중하고 청아하여 세상의 모든 번뇌를 말끔히 씻어주는 듯한 불호성이

사위를 때리며 들려오지 않는가?
그런데 그 불호성은 소일초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에서 동시에 울려왔고,

그리고 녹림사존자의 바로 뒤에서 울려왔던 것이니...
오오 보라!
스스스스!
부서지는 달빛인가?

아니면 내리는 별빛인가?
사방 백 여덟 방위에서 소리없이 솟아난 고월창송(孤月蒼松)한 풍모의 노승들을...
그들은 하나같이 황색가사(黃色袈裟)를 걸쳤고

위엄이 충만하여 흐르는 고매함을 지닌 노승들이었다.

그리고 교자의 바로 앞에 소리없이 솟아난 한 명의 젊은 승려가 있었다.
십 팔구 세가 되었을까?
수려한 눈빛은 하늘을 닮았고

그의 전체적인 얼굴은 온화함과 따사로움이 불존처럼 성스럽게 빛나기조차 하다.

거기에다 귀족인양 고귀롭게 피어오르는 저 기질...
한데 보라!
연화(蓮花)!

활짝 만개한 연화가 허공에 떠있고

이 청년승은 바로 이 연화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바로 소림의 최상승 경공절기인 연대구품(蓮臺九品)이다.

칠십이종 절기의 하나인...
그런 청년승은 나타나서 지금껏 그 하늘 같은 시선을 소일초와 주소아에게 던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을 향하고만 있던 청년승의 입이 열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조금전 까지 분노를 터뜨렸던 소일초가 합장을 하면서 똑같이 청년승의 불호를 흉내냈다.
청년승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신행마동! 소승은 소림의 도봉(渡峰)이외다.}
{소동(小童)은 백인장의 소일초외다.}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의 할 말 만 하는 청년승 도봉이었다.
{소승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녹림맹주의 청을 받아서 이외다.

녹림마저 삼성무림맹에 흡수된다면 무림의 전체 균형이 깨어지는 것이기에...}
시종 침묵,

청년승이 나타난 이후로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주소아의 눈빛이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늘한 기운을 뿌려냈다.

녹림맹주인 황녹천은 어떤 수단으로 소림을 끓어들였단 말인가?

자신들과 황녹천등이 아웅다웅 다투느라고

그들이 다가선다는 비성성들의 보고 마저 받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끄윽! 취한 세상... 취한 눈으로 바라보니... 크윽...끅...오락가락 할 수 밖에...}
확!
술트림의 역겨운 냄새를 싣고 어둠의 일편에서 취한 음성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비틀비틀 한 명의 거지소년이 갈지자로 걸어왔다.
봉두난발(蓬頭難髮)에 헤어질대로 헤어진 악취 풍기는 의복(衣服)은 기우지 않은 곳이 드물었고

얼마나 세수를 하지 않았음인가?

얼굴에 낀 때는 아예 새까만 빛이어서 소년의 얼굴을 헤아려 볼 수 조차 없다.
거기에다 볼품사납게 산발한 머리에 아무렇게나 둘러진 붉은 머리띠,

그리고, 오른손에 치켜든 항아리 만한 호로병...
이쯤되면 과히 이 소년거지의 형상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비틀비틀...
{커억...끅! 이놈의 술버러지.

천하의 개방의 홍건(紅巾)개를 울리누나! 울리누나! 에이... 오늘의 술버러지.}
벌컥벌컥!
혀 꼬부라진 소리와 함께 거대한 호로병을 거꾸로 처박는 소년거지,
아니 스스로 홍건개라 했던가?
한데 개방의 신분(身分)을 나타내는 허리에 늘어진 여덟 개의 매듭이라니...?

그렇다면 이 거지소년은 아홉매듭의 개방 방주(幇主)보다

겨우 한 배분 낮은 신분을 지니고 있다는 애기인데...

{꺼억! 우라질 삼성무림청인지 뭔지.한 번 싸워보지.

그러면 내가 죽던지 지가 죽던지 결단이 나겠지. 꺼억...끅...뒤집힌 세상...}
혀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히죽 웃기까지 하는 홍건개,

한데 그의 두 눈만은 그 어떤 것보다 맑고 빛나며 지혜로움이 넘실거리지 않는가?
어쨌거나 지금 이 자리에 무림천년 뿌리인 전설의 구파일방 중

소림과 개방의 인물들이 나타난 것이니...
지금 백팔 방위에서 빈틈없는 포위의 원진을 이루고 있는

황색가사의 노승들은 바로 소림의 백팔나한(百八羅漢)들이다.
한 번도 무림에 거취를 드러낸 적은 없으나

어언 일백 오십 년 동안이나 소림의 신화를 창출하고 있는 소림 백팔나한...
이 미증유의 힘을 지닌 소림의 거력 뒤로 홍건개로 미루어 보아

개방의 고수들도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듯 하니...
이때, 청년승 도봉과 홍건개가 번갈아 가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신행마동께선 큰 실수를 하셨소이다.}
{꺼억! 큭...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보였기로서니...

삼성무림청의 주력을 아무 대책없이 녹림맹으로 유인해내다니...

우라질 꼬마야 너는 구파일방 보다 오히려 더 강하다는 것이냐?

아무리 세상이 미쳤기로... 커억 끅!}
소일초의 입이 열려지기도 전에 주소아의 말이 먼저 떨어졌다.
{술병을 들었기에 괜찮은 놈인가 싶었더니, 입으로는 개소리만 하는군,}
{뭐...? 빌어먹을...끄윽...계집애가...뭐라고?}
벌컥벌컥!

호로병을 거꾸로 처박으며 술을 들이키는 홍건개,
이때, 청년승 도봉이 심해처럼 맑은 눈빛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신행마동! 빈승은 구파일방과 천하정파인의 이름으로

녹림맹을 도와 삼성무림청과 싸우고자 하오...}
이때, 지금까지 그들의 떠드는 말을 들으며 이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기만 하던 소일초,

문득 그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더할 나위없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낮빛,
{그러니까 당신들은 내가 너무 녹림맹을 핍박하지 말아라고 이야기 하는 듯 한데...

건방지기 짝이없는 자식들이군.}
소일초의 그 말에 득도한 고승같은 청년승 도봉의 얼굴마저 무참히 구겨졌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당금 무림의 십이대고수 중의 한 사람이고,

사문(師門)으로 따지자면 무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은 눈이 둥그레 졌다.
{너희들 중에 누가 내 사문과 스승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소일초의 목소리는 또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데...
{우라질! 네 사문이야 백인장이라는 걸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끅...}
{젊은 거지! 백인장은 내 집이다. 모르면 아예 입닥쳐라.}
소일초는 허리에 걸려있는 시꺼먼 철검을 손에 잡았다.
{백 육십년 전, 이 철검을 사용하신 분께서 바로 나의 스승이시다.

그 분은 소림사의 기재라 불렸던 우광(宇廣)대사 보다도 배분이 높았으며

천하제일인이라는 혈기자보다도 배분이 앞선다.}

{...}
{누가 나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이 있는가?

무림의 밥을 먹는 사람으로서 사승과 배분이 나이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땡초와 거지는 도무지 모른단 말이냐?}
그의 말은 준엄했다.

그른 말 한 마디 없었다.
짝짝짝!
{정말 훌륭한 일장연설(一場演說)이었어. 저 중 얼굴표정 좀 봐!}
주소아가 손뼉을 치면서 칭찬한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중인들의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인데...
도봉이 입을 열었다.
{대체 그 스승이라는 분이 누구시오? 우리 소림사와도 관련이 있소?}
{관련? 물론 있지. 자 여기 와서 공손히 받아가라구.

안그래도 언젠가 소림사에 들릴려고 생각했는데 잘됐군.}
소일초는 품에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내 생각이지만, 이건 던져서 주고받는 물건이 아니야. 공손히 절하고 받으라구.}
도봉이 반신반의 하면서 두 발을 땅에 딛고

소일초의 앞에가서 합장을 하면서 주머니를 건내 받았다.
물러서서 주머니를 열어본 도봉은 깜짝 놀랐다.

고승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선종의 본산 소림사에서 자란 그도

주머니 속에 있는 것 처럼 굵고 큰 사리(舍利)를 본 적이 없었다.
주머니 안에는 여러개의 크고 작은 사리들이 은은한 서기를 발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이 것은 어느 분의 사리입니까?}
도봉의 말투가 바뀌었다.

소일초는 빙그레 웃었다.
{우광대사, 전 소림사의 장경각주였던 분.

그분은 큰 깨닳음을 얻으신 후 남황에서 입적하셨지.내가 그분을 화장시켰고.

한데 그분이 깨닫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 바로 내 스승님이셨지.}
{그분도 불가에 몸을 담으신 분입니까?}
{장장 일백오십 년을 참선과 고행으로 지내신 분이지.}
사부의 처참했던 모습을 떠올리자 소일초의 눈에서 주루루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황녹천이 어떤 재주가 있기에

소림사와 개방을 이처럼 떡주무르듯 하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황녹천, 청년승 도봉,

그리고 홍건개의 안색이 확 변했다.
{당신들은 지난 삼 년동안 삼성무림청을 방관만 해 왔는데

어째서 내가 나서자 마자 녹림맹을 도와 그들과 싸우겠다고 일제히 나섰을까?}
{그...그건...}
도봉이 말을 더듬으며 황녹천을 바라보았다.
{뻔한 걸 뭘 물어봐.}
주소아가 얼굴을 돌려 황녹천을 쳐다보았다.
{중원제일의 신비인 황녹천은 아무렇게 몸이나 굴리는 계집이야!}
꽝-!
이 무슨 엄청난 말인가?

중원제일의 신비인 녹림맹주 황녹천이 아무렇게나 몸을 굴리는 계집이라니...?
중인들은 가슴이 뻥뚫린 듯 놀랐고 황녹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분이 높은 젊은 중놈이나 거지가 아쉬운게 뭐가 있겠어? 오직 하나 밖에...}
도무지 어린계집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같지가 않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사씨 자매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주소아의 신분을 모른다.

단지 소일초와 동행하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신분일 거라는 정도로 짐작할 뿐이었다.
{설마 그럴리야 있겠어?

구파일방이 어떤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오직 자기들만 잘났다고 콧대세우는 그들인데 여자때문에 움직이겠어?}
소일초의 반문이었다.
{가장 나쁜 자들은 원래부터 선한 자들의 탈을 쓰고 있지.

진정 정의로운 사람은 입으로 떠들지 않고 묵묵히 행동하는 고모부같은 사람이야!}
주소아는 말을 빙돌렸다.
{내 말이 완전히 옳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구파일방과 황녹천 사이에 남에게 밝히지 못하는 은밀한 거래가 있겠지.}
{다른 말은 몰라도 이번에는 네 말을 못 믿겠어.

너는 어제밤에 마신 술이 아직 덜 깬거야.}
소일초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도봉 등을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어린애 말에 너무 신경쓰지 마.

하지만, 오늘 당신들도 더이상 나를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해.

어쩌면 다음 공격목표로 구파일방이 될 수 도 있어.}
소일초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자들의 귀에는 더욱 우뢰와 같은 힘을 담고 들려오는 충격을 느낀다.
그런 소일초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나는 적지 않은 수고를 해서 일을 이만큼 꾸몄어.

한데 지금에 와서 당신들이 본인이 하는 일에 관여하려 든다면...

또한 그것을 용납한다면, 그것은 곧 내 신념을 깨고 믿음을 깨는 일이 아니겠어?}

순간,
벌컥벌컥...
홍건개가 호로병의 술을 한꺼번에 쏟아넣듯 거칠게 들이켰다.
{제기랄! 지금 이 자리에 화산(華山)의 그 놈 주둥아리가 왔어야 말 상대가 되는 것인데...}
벌컥벌컥...
{우라질! 이 소화자 술만 먹지 않았어도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낼 것인데...

빌어먹을...에이 빌어먹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홍건개의 호로병을 감싸며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별빛은 더욱 영글고 있었다.

쿠르르르!
계곡으로 불어오는 싸늘한 가을 바람은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 치는데

청년승 도봉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그 신념과 믿음은 신행마동께서만 지닌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그대들은 그대들의 믿음대로 해보겠다는 말인가?

그것이 본인의 산통을 다깨뜨리던지 말든지.?}
{흥, 황녹천도 무엇으로 구파일방을 구워삼았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구파일방이 녹림맹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 같군.}
주소아가 쏘듯이 하는 말이다.
{아미타불! 좀더 신중한 판단을 바라오.}
{에이... 끄윽...제기랄! }
이 순간 소일초의 묵직한 음성이 달빛을 뚫고 다시 흘러나왔다.
{우스운 일이야!}

{...}
{근본적으로는 황녹천이 삼성무림청을 멸망시키겠다는 내 능력을 불신하고 있는 것이 문제겠지.

그래서 그들의 주력이 몰려오자 부랴부랴 최후의 수단으로 당신들을 불렀을 테고...}
정확한 추리였다.
{그것이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겠어?}
{아미타불! }
{끄윽...빌어먹을...}
소일초의 뼈가 맺힌 말에 청년승 도봉과 홍건개의 안면에 가는 분노가 서려났다.
하나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쏟아져 나오는 소일초의 음성,
{너희들은 우선 나의 일에 훼방을 놓았다.

나이 살 몇 더 있다고 감히 나 신행마동을 우습게 대했다.

기회다 싶어서 나를 핍박하려 했다.}
문득 청년승 도봉의 깊은 동공에 파릇한 분노의 광망이 일었다.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소.}
{억지라! 언제나 곤란할 때는 모든 것을 억지라고 돌려버리는 것이 소림사의 신공인가?}
그리고 한 순간 청년승 도봉이 단정짓듯이 음성을 흘려냈다.
{아미타불! 분명히 말하겠소만

마동! 아무 대책 없이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을 끌어들인 처사는 명백한 잘못이었소.}
{...}
{그리고 빈승과 홍시주는 오늘밤 구파일방의 힘으로

그들을 녹림맹에서 조용히 물러가도록 할 것이오.}
홍건개가 혀꼬부라진 소리로 탄식하듯,
{꺼억! 끅... 더군다나 오늘밤의 격전은 절대...없소.}

{...!}
{우라질! 이 승산도 없는 싸움에 꼭 피를 흘리겠다는 것이오?

우라질! 구파일방의 이름때문에 적들은 물러나게 될 것인데...}
순간, 소일초의 눈에서 파르르 불꽃이 분노로 일었다.
{구파일방의 온 건 바로 그 때문이었군.}
소일초는 격분하는 내심에 또 한 바탕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또한, 그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분노를 토하는 듯한 음성...
{그대들이 나에게 이토록 친절히 충고하는 것도

백인장주인 아버지의 체면을 보아서 인듯하군.}
소일초는 피가 맺혀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발출 될 듯이 쥐어진 철검,
{좋아. 더이상 본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터질 듯 긴장해 가던 분위기가 소일초의 양보로 다소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하나!}
{아미타불! 무엇이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들은 꼼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시가 지난 다음에는 구파일방의 이름으로 협상을 하든 위엄을 보이든 마음대로 해라.}
음성은 낮고 들릴락말락 했으나

소일초의 그 음성엔 그 누구도 거역치 못할 굳강한 기세가 어려 있었다.
홍건개와 청년승 도봉은 어쩔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우라질! 어쩔 수 없군. 좋소 좋아. 제기랄! 그때가지 기다려 주지.}

× × ×

어둠이 꺼꾸로 부침하는 심야,
드디어 자시(子時)였다.
휘이이잉!
밤바람이 미친듯이 푸른 숲의 계곡 사방 질타하고,
솨아아아아! 휘르르르릉!
숲은 성난 파도처럼 미친 듯이 울렁대기 시작했다.
바로 이 미친 듯한 자시의 야공(夜空)을 찢어발기며...
똑똑똑!
마치 뇌성벽력과 같은 목탁소리가 천지를 질타했다.
동시에 이 목탁음이 신호라도 되는 것인가?
번쩍! 번쩍!
막막한 어둠 뿐이던 푸른 계곡의 호로병같은 골짜기 여기저기서 현란한 불꽃이 일어나더니...
꽝--! 꽈꽝!
오오 엄청난 폭발음이 하늘을 무너뜨릴 정도로 터져나오고,

그 현란하던 불꽃은 조만간 엄청난 불길로 화해

푸른 계곡을 통째로 태워버릴 것처럼 엄청나게 치솟지 않는가?
그리고 그 속에 드러난 장엄한 광경을 보라!
혈의인(血衣人),
녹림맹 푸른 계곡을 까마득히 메우며 바람처럼 날아들어 오든 수백 수천 척의 혈의인들,

불의 방벽, 충천하여 터지는 화기(火氣),
일시에 이 거대한 녹림맹은 이 엄청난 화광에 타고 메말라

한줌의 잿가루만 남아날 것 같았다.
한데 일순간,
슛슛슛!
혈의인들이 일제히 장력을 격출하여 화염의 완전포위를 뚫고서

마치 화살이 꽂혀 오듯 녹림맹을 향해 질풍처럼 쇄도해 오는 것이었으니...
만일, 이대로 이 어마어마한 혈의인의 무리가

녹림맹의 본체인 푸른 성에 접근한다면

녹림맹은 그대로 시산혈해로 가득차고 말리라.
그러나 이런, 염려는 즉시에 사라졌다.
슈_____슛! 꽈꽈꽝!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녹림맹의 입구인 호리병 같은 계곡은 무너지기 시작했으니...
으아아악!
으아악!
화르르륵! 화아아확!
이 푸른 숲의 입구는 참혹한 비명과 무너져 내리는 바위절벽,

그리고 마른 장작에 기름을 부어놓은 것처럼 엄청난 화광을 내뿜고 타기 시작했다.
녹림맹을 향해 화살처럼 달려오던 혈의인들,

그리고 번지는 화광, 새까맣게 타서 재가 되어 흩어지는 시체들...

일시에 녹림맹은 염부의 불꽃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불길과...솟아오르는 검은 연기와 화약냄새와 시신이 타는 노린내,
이 모든 것에 녹림맹의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안 쪽의 절벽위에서 이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소일초와 주소아의 아리따운 얼굴에 씨익 검은 빛 미소가 감돌았다.

{됐어. 본인은 이제 당신들 모두가 이곳에서 무얼하든지 상관하지 않겠어.}
순간 그를 향한 수백 쌍의 눈빛이 가는 떨림을 일으켰다.
그러나 황녹천을 비롯한 그 밖의 인물들은

이미 삼혈단의 몰락을 보고 있는지라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음을 느꼈다.
슈슈슛!
동시에 그들은 벼락같이 몸을 날려

미리 준비해 둔 연(鳶)들을 이용하여 푸른 성으로 날아내렸다.
바로 이 순간,
쿠쿠쿵!
계곡이 통째로 뒤집히는 엄청난 진동을 겪는가 싶더니...
도저히 그 크기를 한눈에 담아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불꽃이

계곡의 입구에서 부터 계곡 절반을 장악하며 치솟지 않은가?
우르르릉! 꽈꽝! 쿵쿵쿵!
동시에 계곡의 입구는 완전히 무너져 막히고 수 백 수 천의 혈의인들이 생매장을 당했다.
그들은 다름아닌 삼성무림청의 삼혈단들이었으니...
혈향단,
붉디붉은 혈의에 흰색 복면을 하고 있는 자들이었으며

복면에 그려진 한 송이 붉은 매화(梅花)는 섬뜩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더불어 향기, 매화의 향기가 가득히 피워오는 듯한 착각이 들고

그 속에 소름이 끼치는 살기를 피워내는 인물들이었다.
혈살단,
그들은 혈의에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검은 복면에 그려진 아수라상(阿修羅像)처럼

피와 검은 지옥의 음기와 냉혹비정한 기운을 광휘처럼 피워올리는 자들이었다.

혈혼단,
이들은 혈의에 얼굴 또한 혈의복면을 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혼(魂)! 혼을 부르는 저주의 악령들인가?
피리리! 피리리리!
그들은 피리가 아닌 기이한 악기를 쉴 새 없이 불어대고 있었는데

그 악기 소리를 듣는 순간 영혼이 한꺼번에 달아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을 느낄 정도였다.

그들은 혈의복면에 소름이 끼치는 전율을 느끼게 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마(魔)!
바로 이 한 자였다.
수수수수! 스스스!
소리없이 밀려들던 이 악령의 피그림자들...

그들은 하나같이 절정고수(絶頂高手)인 듯 몸놀림이 흐르는 바람처럼 날렵했다.
그러나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화약으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당한 후에

연이어 떨어져 내린 축융화탄으로 말미암아

계곡의 앞부분이 무너지면서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
폭발과, 화염!
그 와중에서도 삼혈단의 일부고수들은 살아서 악령처럼 녹림맹으로 돌진했으니...
파츠츠츠! 츳츳츳츳!
쌔애애액!
충천하는 화광 속에 난무하기 시작하는 검장도권(劍掌刀拳)의 소용돌이!
{크아아악!}
{크_____악!}
비명이 천지(天地)를 진동하기 시작했다.
후리리리_____릭!
시퍼런 살광(殺光)과...

검은 살기(殺氣)와...
핏빛 잔광(殘光)이 엄청나게 소용돌이 치는 속에,
간혹 천지번복의 굉음이 잇달아 터지고

달빛아래 희미한 어둠은 부르르르 전율을 일으켰다.
거기에다 하늘로 치솟아 난비(亂飛)하는 무수한 나무들과 불타는 숲...
콰아아아아...쾅!
바람도 불을 만나 더욱 미친듯이 불어대는 이곳은 녹림맹이 아닌 아수라 귀역이었다!
번쩍! 콰콰콰쾅!
천지가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파공성을 타고,
{으아악!}
{크아악!}
참담한 비명은 끝없는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마침내 폭음이 잦아들고

대신 허공에서 연을 타고 까마득히 몰려 내리는 구파일방과 녹림맹의 고수들...!
조용하고 은밀한 계곡에 위치해 있던 아름다운 푸른 숲의 푸른 성(城)!

이제 이것은 충천하는 화광과 난비하는 검장도권의 소용돌이와

그 속에 사비팔산(四飛八散)되어 나가 떨어지는 시신(屍身)들 만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아수라 귀역으로 변했을 뿐이다.
한편 이미 장강의 강변으로 피신한 황녹천과 그 수천 수하(수河),
그리고 청년승 도봉과 홍건개가 이끄는 대소림의 인물들과 개방의 일천인물들은

하나같이 경악에 찬 시선으로 이 처참한 혈전(血戰)에 동참하고 있었다.
문득 덮쳐드는 혈의인을 향해 일 장을 퍼부으며

하늘처럼 맑은 시선에 침울한 기운을 피워올리던 청년승 도봉이 중얼거리듯 말을 흘려냈다.
{아미타불! 어찌...이런 처참한 살겁을...}

{끄억! 일찍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할 손가. 우라질! !}
이 순간 황녹천의 눈빛은 남다르다.
하기야 그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 왔던,

그의 손에 의해 더욱 키워지고 다듬어진 푸른 성인가?

그것이 황폐하게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는 이 마당에 어찌 만감(萬感)이 교차하지 않으랴?
(아아! 나의 푸른 숲과 푸른 성이 이렇게...!)
그러나 황녹천의 참담한 기분이

어찌 죽어가는 수하들을 지켜보는 사은상의 심정에 비길손가?
사은상!
절벽위에서 소일초 등과 함께

이 참혹한 혈전을 지켜보는 그의 두 눈에는 쉬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느새 깨물었던가?

그녀의 파리한 입술에 선혈이 가득하다.
{크아아악!}
무모할 정도로 장렬히(?) 아니면 흉악히(?) 몸을 던진 혈의인 하나가

형체도 없이 녹림인들의 손에 찢겨 날아간다.
{으아악!}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사은상의 몸이 부르르르 떠는가 싶더니,
{쿨룩...쿨룩!}
그녀는 한덩어리의 피를 쏟아냈다.
그리고, 입술에 저미는 선혈과, 안타까워서,

너무도 안타까워서 흘리는 저 눈물...
문득, 그런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후휘휘!

희디흰 백의를 바람에 표표히 날리고 있는 천상의 옥동옥녀 같은 두 사람,
소일초와 주소아,
오늘의 참극을 계획한 치가 떨릴 정도로 무서운 꼬마들이다.
이때 돌연 참담함과 눈물로 젖어 있던 사은상의 동공에 뽀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회상(回想),
며칠 전,

사옥상과 함께 주소아의 손에 어처구니 없이 잡히고,

다시 고찰에서 도망쳤다가 소일초의 저녁값으로 잡혀온 일들이

이 참혹한 순간에 회상의 수증기로 피어오른 것이다.
(그때 옥상이가 저 꼬마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어도 우리가 이 꼴이 되었을까?

아니 우리가 아니었더라도 저 꼬마들은 다른 수단으로 똑 같은 결론을 만들어 냈을 거야!)
지금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서

소일초도 사부 구멍뚫린 시신을 화장하던 때를 회상하고 있었다.
소일초,
그의 남만 오지에서의 삼 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비록 다시 돌아갈지 안돌아갈지 기약 할 수는 없지만

때때로 그의 마음은 거목의 숲에 있는 검마의 동굴에 머물곤 할 것이다.
삼 년...!
사부와 함께 보냈던 힘겨웠던 세월,

의미도 모르는 참선을 강요당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던 것이 몇 날이며

해도 해도 깨우쳐 지지 않는 검마의 독문 무공 일초검공을 반복하며

얼마나 많은 꾸지람과 구박을 맞았던가?
그리고 그곳에서의 지리한 생활동안에 친구가 되어주었던 비성성들,

그들이 오늘 삼혈단을 초토화 시킨 주역들이다.
소일초의 두 눈에 굳은 기개가 구름처럼 피어났다.

그리고 막 돌아와 그의 곁으로 내려서있는 그 비성성들을 주시했다.
한데 문득, 소일초가 나직한 음성을 흘려냈다.
{모두 수고 많았다. 술과 고기를 실컷 먹게 해주마.}
순간 십 수 마리의 비성성들이 끽끽 거리며 환성을 질렀다.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엄청난 불꽃, 폭음,

그리고 인간들의 잔인하기 짝이 없는 모습들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가늘게 떨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주소아가 소일초에게 술병을 건네 주었다.
{두려우면 멀리가서 놀다가 나중에 우릴 찾아와.}
동시에 회색동공의 비성성들이 소리를 지르며 허공으로 날개를 펴고 올라갔다.
{이제 대충 끝난거지? 정말 무시무시한 싸움이야.

아마도 다시는 이런 처참한 장면을 볼 일이 없겠지.}
{어쩌면 지금이 시작일지도 모르지..

삼성무림청이 삼수가 만든 집단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뿌리를 뽑아버리겠어.}
소일초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약속이나 지켜야겠어.}
주소아가 눈물과 자신이 흘린 피로 범벅이 되어있는 사은상과 사옥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언니들은 가도 좋아요.

하지만, 오늘 보셨듯이 삼성무림청은 우리 손에 멸망하고 말거예요.

아마도 죽은 것 처럼 위장하고 깊이 숨어서 사는 것이 좋을 거예요.

이건 그 동안의 정리로 하는 말이니까 잘 생각해 보셔요.}
{...}
{다음에 다시 우리가 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내가 먼저 언니들을 살려두지 않을 거예요.}

주소아는 손가락을 튕겨서 사은상과 사백상의 막힌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녀들은 잠시 앉아서 운기행공을 한 다음

원망의 눈초리를 소일초와 주소아에게 보낸 후 몸을 날려 떠나갔다.
{흥, 이제 심심해서 어떡할까? 천하의 색마께서...}
{낄낄낄. 네가 밤새 내옆에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 히히...!}
소일초는 술을 들이키면서 요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쳇, 오늘 밤에는 쥐덫을 설치하던가 해야지 나원...}